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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기지국가'에서 '정상국가'로

[김근태 2주기 세미나] 남기정 교수 <'정상국가론'의 배경과 실상>

박인규 프레시안 편집인(=정리) 필자의 다른 기사

기사입력 2013-12-26 오전 9:23:37

 

김근태재단(이사장 인재근 민주당 의원)과 우석대학교 김근태민주주의연구소(소장 최상명 우석대 교수) 등은 지난 19일 김근태 2주기를 맞아 동아시아의 평화('한반도 정세와 일본의 우경화, 그리고 동아시아 평화')를 모색하는 학술세미나를 열었다. 3명의 발제자와 5명의 토론자가 참석한 가운데 열린 이 날 세미나 내용 중 25일 소개한 이삼성 한림대 교수의 발제에 이어 남기정 서울대 교수 발제의 주요 내용을 간추려 소개한다. 이후에는 백준기 코리아컨센서스 소장과 이해영 한신대 교수의 토론문을 실을 예정이다.

남기정 교수는 <일본 '정상국가론'의 배경과 실상: '전후체제로부터의 탈각'이 의미하는 것>이라는 제하의 발제에서 우리가 흔히 '평화국가'로 알고 있는 일본의 실상이 '기지국가'였다고 지적한다. 즉 1950년 6.25전쟁을 계기로 미군의 한국전쟁을 위한 출격기지, 수리조달기지, 훈련휴양기지, 생산기지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후 일본은 베트남전쟁(1965년), 걸프전쟁(1991년)을 거치면서 기지국가로서의 역할이 변화하며 한계에 부딪혔고, 아프간전쟁(2001년)을 계기로 기지국가로서의 역할을 다하게 됐다는 것이다. 이와 함께 중국이 부상하면서 일본 국민들 사이에서도 정상국가화에 관심이 고조되면서 '전후 체제' '청산, 기지국가'로부터의 탈피에 대한 논의가 본격화되고 있다는 것이다.

남 교수는 이어 정상국가화에 대한 일본 국민들의 여론 추이를 면밀히 추적하면서 2000년 이후 개헌 여론이 호헌 여론을 앞서고 있지만, 이것이 곧 일본의 자주국방 또는 군사대국화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고 지적한다. 예컨대 2000년대 이후 일본 국민들 사이에서는 '자위대와 방위문제'에 대한 관심이 증가하고 있으나, 일본이 '외국으로부터 침략을 당했을 때' 선택하는 방법으로는 '자주방위'보다는 '미일안보와 자위대'에 의지하는 것을 최선의 수단으로 생각하는 국민의 수가 더 증가하고 있다는 것이다. '자주방위'를 선택한 국민이 10% 내외에서 평행하고 있는 데 비해, '미일안보와 자위대'의 현상유지를 선택한 국민은 2000년대 들어 70%를 넘어서고 있는 것이다. 즉, 방위정책에 관한 한 현행 헌법 하의 현상유지에 대한 선호가 더욱 커지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NHK 여론조사의 추이를 보면, 1992년부터 10년 만인 2002년에 실시된 조사에서 헌법개정 찬성론자가 반대론자를 앞선 결과를 보였다. 그런데 그 내용을 들여다보면 제9조의 개정이 '필요하다'는 응답은 30%, '필요 없다'는 응답이 52%로, 방위문제와 관련해서는 여전히 평화헌법의 유용성을 지지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한다. 또한 '자위대를 국방군으로 변경하자는 의견'에 대해서는 반대가 45%, 찬성이 20%로, 헌법개정이 곧바로 본격적 군대 보유에 대한 적극적 지지는 아니라는 것이다. 나아가 2013년 8월에 실시된 <아사히신문>여론조사에 따르면, 집단적 자위권 행사에 찬성하는 국민이 27%인 반면, 59%의 국민이 반대하고 있었다. 아베 내각 지지층 가운데에서도 찬성은 37%, 반대가 49%여서, 일본이 현행헌법 해석의 틀에서 벗어나려는 데 대해 비판적인 의견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베 정부는 지난 연말 중의원 선거에서 개헌 발의에 필요한 3분의 2 의석을(자민당과 일본유신회, 다함께당을 합칠 경우) 확보했으나, 올여름 참의원 선거에서는 연립여당을 합쳐 과반수 의석을 확보했을 뿐 3분의 2 의석 확보에는 실패했다. 따라서 아베 정부는 앞으로 헌법 개정이 필요없는 집단적 자위권의 보유 및 행사를 위해 움직일 것이며, 다음으로는 개헌을 위한 국민투표법 개정에 나설 것으로 남 교수는 전망했다. 현 의회의 임기가 만료되는 오는 2016년까지는 헌법 개정 및 정상국가화를 둘러싼 일본 국내의 논란이 뜨겁게 이어질 것이라는 예측이다. 따라서 한국을 비롯한 이웃 나라에서는 일본의 군사대국화를 때 이르게 기정사실화 할 것이 아니라 일본의 평화적인 정상국가화를 도모할 수 있도록 일본 내 평화세력들과의 연대를 도모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다음은 남기정 교수의 발제 중 주요 내용이다. <편집자>

 

▲ 아베 신조 일본 총리(오른쪽)가 지난 1월 13일 메이지신궁을 참배하러 가면서 한 아이와 악수하고 있다. 메이지신궁은 일본 근대화를 이끈 메이지 일왕 부부를 기리는 신사로 현직 총리가 신궁을 참배한 것은 아베 본인이 지난 재임기인 2007년 1월 이후 6년만이다. ⓒAP=연합뉴스


평화국가의 성립

전후 헌법에서 특히 주목할 내용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1장 1조에서 8조까지의 상징천황제 조항이었고, 다른 하나는 2장 9조의 전쟁포기조항이었다. 상징천황제 조항에서 메이지천황의 권위는 부정되었다. 천황은 실체적 권력을 갖지 못하고 '일본국의 상징이고 일본국민통합의 상징'의 존재로 내려왔다. 그리고 '그 지위는 주권을 지니는 일본 국민의 총의에 기초한다'고 하여 주권재민의 원칙이 확인되었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는 천황의 전쟁책임을 엄격히 물을 것을 요구하는 아시아 국가들의 반발이 예상되었다. 천황의 존재가 군국주의의 부활을 야기할 수 있다는 비판이었다. 이를 설득하기 위해 삽입된 것이 전쟁포기조항이었던 것이다. 일본국헌법 제9조는 2개 항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1항에서는 일본은 전쟁과 무력에 의한 위협 또는 무력의 행사를 '영구히' 포기한다고 하였으며, 제2항에서는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육해공군 기타 군사력'을 보유하거나 유지하지 않는다고 선언했다. 이 두 개 항이 이른바 '평화헌법'의 핵심 조항이 되고 있는 것이며, '평화국가' 일본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

한국전쟁과 일본: '기지국가'의 탄생

그런데 한국전쟁의 현실을 목전에 두고, '평화국가' 일본의 존립이 위기를 맞이했다. 일본 내외에서 재군비 논의가 일었던 것이다. 이미 한국전쟁 이전인 1948년 3월 무렵부터 냉전이 가시화하는 가운데 일본의 안보를 둘러싸고는 여러 논의가 있었다. 주일 미 극동군 사령부는 점령의 일상 업무에 더해 재해에 대처하고 민간비상사태와 전면적 비상사태에 대처하기 위한 행동계획을 수립하고 있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일본정부는 7월 4일, '한국에서의 미군의 군사행동에 대한 협력방침을 승인'했으며, 8월 19일에는 <조선의 동란과 우리의 입장>이라는 제목의 외무성 성명을 통해 유엔군에 대한 협력방침을 최종 확인했다. 8월 29일 요시다 시게루(吉田茂) 당시 일본 수상은 맥아더에게 '일본 정부는 어떠한 시설이나 노무도 제공할 용의가 있다'고 밝힘으로써 전쟁을 수행하는 미국에 대한 전면 협력을 약속했다.

이후 일본은 한국전쟁을 위한 출격기지, 수리조달기지, 훈련휴양기지, 생산기지가 되었다. 일본에서 한반도의 전선으로 수송되는 미군 병사와 군수물자들을 실어 나르는데 일본의 선박과 선원, 부두 노동자들이 동원되었다. 또한 한반도 연해에 설치된 기뢰를 제거하기 위해 일본의 소해정이 한국수역에 파견되었다. 이 '작전'에는 원산 상륙을 앞둔 1950년 10월 초부터 그해 말까지 연 1200명이 넘는 인원이 동원되었다. 소해대원들은 해상보안청 소속 직원들로 대부분 구 해군 간부 출신들이었다. 또 일본의 미군기지 주변에는 미군 병사들을 위한 위락시설들이 들어섰고, 이러한 시설에 흘러들어 온 기지촌의 여성들은 미국에 의해 '기지국가'화하는 일본의 모습을 상징하는 존재들로 인식되었다.

일본의 기지들을 이용해 전쟁을 치르는 미국은 일본에 대한 강화를 모색하기 시작했다. 미 군부의 입장에서 보면 일본의 기지를 자유롭게 사용하는 것이 중요했지만, 장기적인 점령의 지속은 일본 국민 사이에서 반미감정을 불러올 수 있었기 때문에 미국에 부담이 되었다. 오히려 강화 이후의 일본이 미국의 우호국으로서 자발적 협조를 약속하게 하는 것이 유리해 보였다.

자유로운 기지의 사용과 조기 강화라는 미국의 두 가지 목표는 같은 날에 조인된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과 미일안보조약에서 구현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두 가지 조약은 불가분의 짝을 이루고 있었다. 이렇듯 패전으로 고도국방국가를 해체하고 평화국가로서의 재생을 모색하던 일본은 한국전쟁 하에서 '기지국가'가 되어 '독립'하여 국제사회에 복귀했다. '기지국가'란 '스스로의 국방군을 보유하지 않은 채, 동맹국의 안보상 요충에서 기지를 제공하고 그 대가로 안전을 확보하는 국가'라 개념화할 수 있다.

베트남전쟁과 일본: '기지국가'의 변용

1965년 2월 미국이 통킹만 사건을 구실로 북베트남에 대해 전면적 폭격을 개시하자 사토(佐藤) 내각은 이를 '불가피한 조치'라 하여 이해하는 입장을 표명하고, '안보조약의 형식에 따라 가능하다'는 입장에서 본토의 미군기지를 베트남전쟁의 후방기지로서 미국에 제공했다. 4월 14일에는 시나(椎名) 외상이 안보조약 상의 '극동'의 범위에 대해 재해석함으로써 사토 내각의 행동을 정당화했다. 60년에 개정된 안보조약의 '극동조항'이 베트남전쟁에서 현실화한 것이다. '북폭' 이후 오키나와는 물론 요코스카(横須賀)와 이와쿠니(岩国) 등의 미군기지가 베트남전쟁으로 향하는 항모와 폭격기의 출격기지로 변모했으며, 사가미(相模) 보급창은 수리조달기지가 되었다. 오지(王子)와 네리마(練馬)의 미군병원은 야전병원이 되었으며, 베트남전쟁 특별수요가 창출되기도 했다. 이 모든 것이 한국전쟁 시기의 일본을 방불케 했다.

그 사이에 오키나와는 일본에 '반환'되었고, 본토에서 미군기지가 축소되는 만큼 오키나와에서는 미군기지가 확충되었다. 이에 따라 '기지국가'의 속성이 '기지의 섬'에 집중적으로 표현되기 시작했다.

걸프전쟁과 일본: '기지국가'의 한계

냉전이 붕괴되고 미일안보조약이 재조정의 운명에 처해질 즈음인 1990년, 동아시아로부터 멀리 떨어진 중동 지역에서 발발한 걸프전쟁은 일본의 미군기지가 여전히 전쟁의 후방기지로서 유용함을 보여주었다. 걸프전쟁이 발발하자 일본 본토와 오키나와의 미군기지는 중동을 향한 출격, 중계, 보급기지가 되었다. 오키나와의 가데나(嘉手納), 후텐마(普天間), 그리고 본토의 이와쿠니(岩国) 등에서는 항공부대가 출격했으며, 요코스카와 사세보(佐世保) 등의 해군기지로부터는 제7함대 소속 함정들이 추격해 나갔다. <오키나와 타임스>에 따르면 1990년 8월 7일 밤부터 8일에 걸쳐, 완전무장한 미군 병사가 C130 수송기로 출격했고, 8일에는 E3 공중조기경계관제기(AWACS)가 2기 중동을 향해 발진해 나갔다. 그리고 14일에는 오키나와주둔 미군 소식통이 확인한 바에 따르면, 제1해병 항공단 소속 공격기 등 항공부대의 일부가 야마구치현 이와쿠니 기지와 오키나와 후텐마 기지에서 필리핀을 경유해서 걸프지역으로 향했다.

미 태평양군 준 기관지인 성조지(Stars and Stripes)는 1990년 8월 22일 자 기사에서 후텐마 기지의 제36해병 항공군이 필리핀에서의 훈련을 끝내고 중동으로 출동했다는 사실을 보도하고 있다. 요코스카 기지로부터는 제7함대 기함 블루리지가 출항했고, 사세보 기지에서는 19일, 전차 양륙함 샌버나디노(San Bernardino)호가, 20일에는 전차 양륙함 세넥타디, 해난구조함 브라운즈윅 등이 출항했다. 21일에도 해난구조함 뷰포트, 군용 트럭과 물자 등을 적재한 독크형 양륙함 데뷔크 등 2척이 출항했는데, 이들 함정들은 20일에서 23일 사이에 오키나와의 화이트비치, 레드비치 등에 기항, 전차와 트럭과 지프차, 대포, 탄약, 의약품 등의 군수물자와 해병대원 등을 적재하고 다시 출항했다. 걸프전쟁 시기 미국은 54만 명 이상의 미군이 투입되었다고 발표했는데, 이 가운데 약 1만 5000명이 주일 미군기지에서 직접 걸프 지역으로 파견되었던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이러한 미군의 출격은 지역적으로 주일미군의 동원을 극동의 안전보장에 한정한 '극동조항'에 위배되는 내용이었지만, 일본 국회에서는 외무성 조약국장이 '주일 함대가 출동하는 것은 전투작전행동을 위한 것이 아니라 단순한 이동에 불과하다'는 궤변으로 이를 용인했다. 걸프전쟁을 계기로 주일미군은 일본의 기지로부터 어디로든지 출격이 가능한 태세가 만들어졌다. 나아가 가이후(海部) 수상은 담화를 발표하여 다국적군의 투입에 대해 '확고한 지지를 표명'하고, 다국적군에 대한 후방지원을 위해 자위대 파견을 고려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를 위해 '유엔평화협력법안'을 마련하기도 했지만, 헌법에 위배될 소지가 있다는 반대에 부딪혀 폐기되었다. 그 대신 일본은 다국적군에 대해 130억 달러의 재정을 지원했다.

이에 대해 미국은 긍정적으로 평가했지만, 국제사회에서는 매정한 평가가 내려졌다. '피를 흘리지 않는 이기적인 국가', '평화에 대한 무임승차 국가'라는 부정적인 이미지가 일본에 각인되었다. 한편 90년대 초는 한국에 의한 흡수통일 가능성이 회자되는 반면, 다른 한편으로는 북한 당국의 '불바다' 발언으로 전쟁의 위기가 고조되던 시점이었다. 한반도에서 '통일도 없고 전쟁도 없다'는 '기지국가' 외교의 전제가 무너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보통국가론의 등장 배경이 되었다. 이후 일련의 법안정비를 거쳐 1999년에는 주변사태법이 성립되기에 이르렀다.

아프간전쟁과 일본: '기지국가'의 종언

2001년 9월 11일에 일어난 동시다발 테러와 이에 이은 미국의 아프간전쟁은 일본의 보통국가화가 '자위대의 해외파견'이라는 형태로 일선을 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9월 11일 심야, 일본 정부는 국제 긴급 원조대를 편성하고 국내 미군시설에 대한 경비 강화를 지시했다. 아프간전쟁이 개시된 뒤에는 아미티지 국무부 부장관이 일본의 적극적 공헌을 요구하고 나섰고, 이에 대해 일본 정부는 미군의 지원협력활동을 전개하기 위한 법제를 마련하고 자위대를 파견했다.
 

▲ 발언하고 있는 서울대학교 남기정 교수 ⓒ김근태재단

10월 5일 테러대책 특별조치법이 국회에 제출되었고, 18일에 중의원, 29일에 참의원을 통과해서 가결되었다. 이어서 11월 9일에는 이지스함을 포함한 자위대 함정이 인도양을 향해 사세보를 출항했다. 이 모든 과정이 일본으로서는 이례적인 속도로 진행되었다. 11월 25일에는 추가로 자위대 함정 3척이 사세보를 출항했으며, 전체적으로 1200명 규모의 지원이 이루어졌다. 이는 '기지국가' 이후 미일안보조약 하에서 진행되어 온 현실이 기정사실화되는 과정이었다. 특히 걸프전쟁 이후 유사법제가 마련되어 있었던 것이 신속한 대응을 가능하게 했다.

때마침 북한의 핵개발과 중국의 급격한 부상이 맞물리면서 일본에서는 안보불안이 고조되기 시작했다. 그런 가운데 고이즈미 내각의 자위대 파견 결정을 '어쩔 수 없는 선택'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러나 9.11 직후부터 11월 중순 사이에 일본 여론에 변화가 나타났다. TV 아사히의 <뉴스 스테이션>이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시간이 지나면서 미국 주도의 아프간 보복 공격에 대한 반감이 커지고, 일본의 자위대 파견에 대해서도 지지하지 않는 여론이 지지하는 여론을 웃돌기 시작했다. 9월 22~23일에 실시된 최초의 조사에서는, 미국의 보복공격에 대해 '지지'가 48%, '지지하지 않음'이 38%였으며, 고이즈미 내각의 자위대 파견에 대해서도 찬성이 52%, 반대가 37%였다. 그러나 이에 반대하는 사람들 가운데에는 대테러 공격에 가담함으로써 감수해야 할 위험, 즉 일본 국내에서 테러가 일어나거나 외국에서 일본인이 테러의 표적이 될 수 있다는 데 대해 불안을 호소하는 의견이 90%에 이르렀다. 또한 찬성 의견에도 다음과 같은 유보가 붙어 있었다. '미국이 보복공격의 근거가 될 수 있는 증거를 제시해야 한다'(85%), '미국의 보복공격을 인정하는 유엔결의가 필요하다'(73%)는 것이었으며, '일본이 자위대를 파견할 경우, 미군의 작전에 대해 주문할 수 있는 권리를 가져야 한다'는 의견도 65%였다. 이라크 등에 대한 확전에 대해서는 반대한다는 의견도 58%였다.

또한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보복공격 직후인 10월 13~14일에 실시된 TV 아사히의 조사에서는 공격에 대한 '지지'가 51%, '지지하지 않음'이 37%, 자위대 파견에 대한 '지지'가 55%, '지지하지 않음'이 35%로 현실을 받아들이는 의견이 우세했다. 그런데 그로부터 한 달 후인 11월 17/18일의 여론조사에서는 '영미의 군사공격'에 대해 '지지'가 40%, '지지하지 않음'이 47%로 역전되었으며, '일본 해상자위대 함정의 인도양 파견'에 대해서도 '지지하지 않음'이 53%인데 반해 '지지'가 38%로 역전되는 모습을 보였다. 일본 국민은 '기지국가'의 효용한계를 실감하는 한편, 자위대가 '기지'의 방위를 넘어선 활동에 참가해서 군사적 '정상국가'로 탈바꿈하려 하는 데 대해서는 여전히 저항감을 표현하고 있었던 것이다.

'기지국가'에서 '정상국가'로: '헌법개정'의 향방

대테러전쟁이라는 이름의 새로운 전쟁을 '세계내전'이라 명명한 국제정치학자들이 있었다. '세계내전'의 시대에 '기지국가'는 유효기간이 종료된 것으로 감지되었다. '세계내전'의 시대에는 '극동'의 지정학적 구분도, 전선과 후방의 군사 작전상의 구분도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기지국가'로부터의 탈각이 '전후체제로부터의 탈각'이라는 구호로 표현되기 시작한 것이 이즈음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표출된 일본 국민의 여론은 양가적이다. 우선 일본 국민들 사이에서는 2000년대에 들어와 '자위대와 방위문제'에 대한 관심이 증가하고 있다. 2000년까지 이러한 문제에 관심을 나타내는 국민은 걸프전쟁 시기를 예외로 하면 50~60% 사이에서 점증하고 있었는데, 2000년 이후부터 오름세가 뚜렷해 졌으며 2003년 이후 60%를 너머 70%에 육박하고 있다. 그러한 관심의 고조에도 불구하고, 일본이 '외국으로부터 침략을 당했을 때' 선택하는 방법으로는 '자주방위'보다는 '미일안보와 자위대'에 의지하는 것을 최선의 수단으로 생각하는 국민의 수가 더 증가하고 있다는 것이다. '자주방위'를 선택한 국민이 10% 내외에서 평행하고 있는 데 비해, '미일안보와 자위대'의 현상유지를 선택한 국민은 2000년대 들어 70%를 넘어서고 있다. 즉, 방위정책에 관한 한 현행 헌법 하의 현상유지에 대한 선호가 더욱 커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일본 국민 사이에서 헌법개정론이 호헌 여론을 앞서기 시작했다는 조사에서도 확인되고 있다. 일례로 NHK조사를 들 수 있는데, 1992년부터 10년 만인 2002년에 실시된 조사에서 헌법개정 찬성론자가 반대론자를 앞선 결과를 보였다. 그런데 그 내용을 들여다보면 제9조의 개정이 '필요하다'는 응답이 30%, '필요 없다'는 응답이 52%로, 방위문제와 관련해서는 여전히 평화헌법의 유용성을 지지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2013년의 조사는 보다 복잡하다. 개정 찬성론자(약40%)가 반대론자(약20%)보다 두 배 많은 결과를 보였으며, 제9조의 개정에 대해서도 개정 필요성을 주장하는 의견이 33%, 개정 반대 의견이 30%로 나타났다. 이렇게 보면 이제 일본 국민은 헌법개정을 통한 군대 보유에 긍정적인 의견이 많아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보다 구체적으로 의견을 묻는 항목에서는 미묘하게 상반된 결과를 보였다. '자위대를 국방군으로 변경하자는 의견'에 대한 찬반은 반대가 45%, 찬성이 20%로 나타나, 헌법개정이 곧바로 본격적 군대 보유에 대한 적극적 지지는 아님을 알 수 있다.

최근 논란이 된 집단적 자위권에 대한 찬반 여론은 보다 이러한 경향을 농후히 보여준다. 2013년 8월에 실시된 <아사히신문>의 여론조사에 따르면, 집단적 자위권 행사에 찬성하는 국민이 27%인 반면, 59%의 국민이 반대하고 있었다. 아베 내각 지지층 가운데에서도 찬성은 37%, 반대가 49%여서, 일본이 현행헌법 해석의 틀에서 벗어나려는 데 대해 비판적인 의견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동아시아적 문제로서의 일본의 '정상국가화'

이와 같이 전후 동아시아에는 미소 간에 전개되는 지구적 냉전 체제 하에 한국전쟁 휴전체제라고 하는 지역 수준의 준전시체제가 형성되어 있었고, 일본은 '기지국가'가 되어 동아시아 휴전체제에 편입되었던 것이다.

아시아태평양전쟁을 거치면서 총력전 체제를 갖추고 '고도국방국가'가 되어 있던 일본은 전후 평화 헌법 하에서 '평화국가'로 재기를 다짐했지만,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기지국가'가 되어 국제사회에 복귀했다. 일본인들의 의식 속에 계승되어야 할 자산이거나 부정되어야 할 유산으로 자리 잡은 평화국가의 실상은 기지국가였던 것이다. 일본에서 '정상국가'화 논의가 대두된 1990년대는 지구적 수준에서 냉전체제가 붕괴되는 이면에서 동아시아의 휴전체제가 전면에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시점이었다. 일본의 개헌 논의는 이러한 '불편한 진실'과의 마주 대하기로서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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