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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과할 수 없는 8.15 건국절 논란

묵과할 수 없는 8.15 건국절 논란
 
곽동기  | 등록:2014-09-04 09:33:36 | 최종:2014-09-04 10:17:18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1945년 8월 15일 낮 12시. 
히로히토의 라디오 방송이 전국에 있었다. 바로 “대동아전쟁 종전의 서”였다.

“짐(일왕)은 깊이 세계의 대세와 제국의 현상에 감하여 비상조치로써 시국을 수습코자 여기 충량한 그대들 신민에게 고하노라. 짐은 제국정부로 하여금 미, 영, 소, 중 4국에 대하여 그 공동선언을 수락할 뜻을 통고케 하였다. (이후 생략)”

히로히토가 언급한 미, 영, 소, 중 4국에 대한 공동선언은 포츠담 선언을 말한다. 1945년 7월 26일, 미, 소, 영, 중의 4국은 독일의 포츠담에서 일본의 즉각적이고 완전한 파멸을 경고하며 무조건 항복을 요구하였다.


40년 독립투쟁으로 쟁취한 해방

포츠담 선언의 제8항에는 일본영토의 한정 조항에서 “카이로 선언의 모든 조항은 이행되어야하며, 일본의 주권은 혼슈, 홋카이도, 큐슈, 시코쿠와 연합국이 결정하는 작은 섬들에 국한될 것이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카이로 선언에서 한반도에 자유독립국가를 인정하였으므로 포츠담선언 8항에 의해 조선독립은 이어지고 있었다. 1945년 8월 15일, 히로히토가 포츠담 선언을 수락하고 항복하였으므로 조선은 바로 독립하였다. 

해방이 되자 한반도 전역은 그야말로 난리가 났다. 먼저 서대문형무소, 마포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던 독립투사들이 석방되었다. 서울시민들은 해방을 눈으로 확인하였으며 해방의 기쁨에 목이 터져라 환호하였다. 나라를 팔아먹던 친일파들은 도망치기 급급하였다. 일본의 항복으로 나라가 완전히 뒤집어졌다.

5천 년 역사를 자랑하며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이어오던 우리 민족은 일제 식민지배 36년간 나라와 국토를 완전히 잃고 일본제국주의의 노예로 극한 고통을 강요받았다. 일제는 동양척식회사로 우리민족의 땅을 뺏고, 산미증산계획으로 쌀을 가져가고, 삼천리 금수강산의 온갖 자원을 마구 수탈하였다. 1940년대가 되니 민족말살을 노린 황국신민화정책 속에 우리말과 글을 뺏고, 이름마저 일본식으로 바꿀 것을 강요했다. 수백만의 조선청년이 일제의 강제징용에 끌려갔으며 대략 20만명의 조선여성들이 일본군의 성노예로 끌려갔다.

한반도에 인간의 껍데기를 갖춘 이는 극소수 민족반역자, 친일파들뿐이었다. 3천만 동포가 노예, 거지와 다름없는 비참한 삶을 강요당하고 있었다.

우리민족은 분연히 떨쳐 일어섰다. 전국적으로 의병이 일어났고 홍범도, 김좌진 장군이 이끌었던 독립군은 봉오동, 청산리 전투에서 일본군을 크게 무찔렀다. 3.1 독립만세 소리가 아시아 대륙을 뒤흔들었고 김구 선생을 비롯한 민족주의 인사들은 중국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구성하였다. 1930년대에 만주사변이 발발하자 조선의 공산주의자들은 중국공산당과 함께 동북항일연군을 구성해 일본군과 싸웠다. 1937년, 김일성 주석은 백두산 항일유격대와 함께 함경남도 보천보를 공격하였는데 <동아일보>는 2002년, 당시 신문기사를 황금판으로 만들어 북한에 선물하기도 하였다. 상해임정은 중국 충칭으로 옮기면서 끝까지 저항하였으며 미국과 함께 광복군을 조직하기도 하였다. “김일성부대”로 알려진 사회주의 계열 항일유격대는 소련군과 함께 대일전쟁에 참전하여 8.15 항복 전까지 함경도 여러 지역을 해방하였다.

조선독립의 길에 수십만의 청년들이 목숨을 잃었으며, 수백만의 청년들이 청춘을 바쳤다. 역사가 이러하니 일제의 압제에서 해방된 1945년 8월 15일은 그야말로 우리민족의 경사일 수밖에 없다. 우리는 8월 15일을 광복절로, 국경일로 기념하고 있으며 북한도 8월 15일을 “조국해방의 날”로 기념하고 있다.


친일냄새가 흥건한 815 건국절 논란

그런데, 일부 보수진영에서 8월 15일을 8.15 건국절로 제정하자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2006년 7월, 이영훈 서울대 교수는 <동아일보>에 '우리도 건국절을 만들자'라는 글을 기고하였다. 2008년 8월 15일, 이명박 정권은 건국절 기념행사를 가졌다. 2007년 9월 한나라당 정갑윤 의원은 광복절을 건국절로 개칭하는 내용을 담은 국경일에 관한 법률 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했다가 논란이 격화되자 철회하였다. 

건국절을 처음 제기한 서울대 이영훈 교수는 2008년 뉴라이트 대안교과서 집필에 참여한 자다. 대표적 친일교과서로 사회적 물의를 일으켰던 뉴라이트 교과서는 일제식민통치가 근대 문명을 학습하고 실천하게 해 근대 국민국가를 세울 계기를 제공했다고 평가하는 한편, 토지 수탈을 노린 일제의 토지조사사업으로 인해 토지거래가 활성화되고 이를 담보로 한 금융이 발전했다는 정신나간 논리에 심취해 있다. 이런 책을 집필하였다니, 한마디로 말해 이영훈은 일본제국주의를 조선의 친구로 보는 현대판 친일파라 할 수 있다.

일본 오사카에서 태어난 이명박 전 대통령도 친일에서만큼은 둘째가라면 서러울 법하다. 폭로전문 매체 위키리크스에 따르면, 이명박 전 대통령의 친형인 이상득 전 의원은 이명박 대통령을 두고 “뼛속까지 친미, 친일”이라 언급하였다고 한다.

친일의 냄새가 짙게 배인 이들이 건국절 논란을 주도하고 있다. 이들은 해방에서 대한민국의 뿌리를 보지 않는다. 이들에게는 1945년의 8.15보다 이승만 전 대통령이 취임한 1948년의 8.15가 더 소중하다. 이들은 이구동성으로 대한민국은 상해임시정부의 정통성을 이어받았으며 유엔의 인정을 받았기에 대한민국이 우리민족을 대표하는 정부라고 주장한다.

우리 전후세대들은 누구나 대한민국의 주인으로 그 권리와 책임을 다하고자 노력한다. 그러나 70년이 경과한 대한민국의 오늘을 인정한다고 해서 대한민국의 뿌리, 출발점의 모순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임시정부를 계승하였나?

대한민국은 임시정부를 실질적으로 계승하지 않았다.

임시정부란 무엇인가? 임정은 3·1독립선언에 기초하여 일제의 조선 식민통치를 부인하고 한반도 내외의 항일 독립운동을 주도하기 위한 목적으로 1919년 4월 13일 중화민국 상하이에서 설립된 망명 정부 형태의 독립운동 단체였다. 같은 해 9월 11일에는 각지에 설립된 임시정부들을 흡수·통합하여 통합임시정부로 발전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이승만 전 대통령은 임시정부와 같은 길을 걸었다고 보기 어렵다.

“민족문제연구소”는 이승만 전 대통령의 독립운동 방략에 대해 한국이 독립할 준비, 즉 일본과 전면적인 전쟁을 통해 승리할 물리력과 실력을 갖지 못했기 때문에 전면전쟁이 불가능하고 당장 자력 독립이 불가능하니 실력을 갖출 때까지 준비해야 한다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고 하였다.

실제로 이승만 전 대통령은 독립이 아니라 국제연맹에 조선을 통치해달라는 위임통치를 청원하다가 임시정부에서 쫓겨나기도 하였다. 

1921년, 이승만 전 대통령은 당시 국제연맹에 조선위임통치를 청원했다. 이승만은 일본이 조선을 통치하고 있어 조선백성이 너무 고통스러우니 국제연맹이 조선을 대신 통치해달라는 정신나간 논리를 펼쳐 국제적 망신을 샀다. 결국 1925년 3월, 이승만 전 대통령은 대한민국 임시의정원의 탄핵 의결로 대통령직에서 면직되고 말았다. 이를 두고 단재 신채호 선생은 "없는 나라를 팔아먹으려는 것은 있는 나라를 팔아먹은 이완용보다 더한 역적이다"고 비판했다.

이후 1933년, 이승만 전 대통령은 내부 자리싸움이 치열했던 임시정부의 틈바구니 속에서 “미국박사”라는 간판을 내세워 국무위원, 외교위원 등에 선임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임시정부의 지구반대편인 미국에서 머물렀던 이승만 전 대통령은 임시정부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초기정부에는 상해임정요인들이 배제되었다.

임시정부의 가장 대표적 인물인 김구 선생은 1947년에 단독정부 절대반대를 주장하였다. 김구선생은 1948년 1월 UN 한국위원단에 통일정부 수립을 요구하는 의견서를 발송하였다고 한다. 김구 선생은 1948년 4월에는 또한 임정의 주요인물인 김규식 선생과 함께 평양을 방문해 김일성 주석이 발기하였던 남북제정당사회단체연석회의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남북 통일정부 수립을 강력히 주장하였던 김구선생은 38선 이남의 선거만으로 구성된 대한민국 정부에서 배제되었고 1949년 6월에 암살당하였다. 그러나 이승만 정권은 김구선생의 암살범 안두희를 한국전쟁의 틈바구니에서 포병장교로 복귀시켰으며 1953년 2월에는 완전사면해주었다.

상해임정에 참여하였던 여운형 선생은 대한민국이 만들어지기도 전인 1947년 7월에 우익테러에 의해 암살당하였다. 이렇듯 정치적 뜻을 반대하는 수준을 넘어 임정의 핵심요인들이 차례로 암살당한 터에, 이승만 정권을 두고 임시정부의 정통을 계승한다고는 볼 수 없는 것이다.


친일을 청산했나?

이승만 정권은 친일청산도 덮어버렸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이 구성되자 이승만 정권은 온 국민의 강력한 요구였던 친일파 처단을 외면할 수 없었다. 결국 1948년 9월 7일, 제헌국회는 “반민족행위특별법”을 통과시키고 이에 따라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를 구성해 친일분자들을 색출하고 악질 민족반역자들을 처단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승만 정권은 반민특위의 친일청산 시도를 극구 방해하였다. 반민특위가 반민족행위자 7천여 명을 파악하고 1949년 1월 8일부터 검거활동에 나선 취급한 조사건수는 682건(여자 60명 포함)이었다고 한다. 이 중에 체포 305건, 미체포 193건, 자수 61건, 영장취소 30건, 검찰송치 559건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러나 이승만 정권은 상당수 친일인사들과 손을 잡고 정권을 구성하였는 관계로 반민특위의 활동을 수수방관할 수 없었다. 이승만 정권은 반민특위가 지목한 친일파들을 “반공주의자”라며 두둔하였다. 급기야 반민특위에서 활동하던 김약수 등 13명의 의원이 남로당 등 공산당과 연계되어 있다며 이를 빌미로 반민특위를 해체시켜 버렸다.

이승만 정권이 반민특위를 유야무야시켰던 가장 큰 이유는 이승만 정권 자체가 지난날의 친일파들을 규합해 구성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8.15해방과 더불어 지하에 은거한 친일파들은 미군정의 적극적인 등용으로 고개를 쳐들었으며 이승만 정권의 비호 아래 이전의 권력을 다시 거머쥐었다. 그러니 친일청산이 제대로 될 리 만무하였다.


국민은 통일정부를 원했다.

1948년 8월의 삼천만 조선동포들은 너무나 당연하게도 누구나 할 것 없이 통일된 단일정부를 원했다. 김구 선생과 김규식 선생이 38선을 넘어 평양의 남북제정당사회단체연석회의에 참가한 것도 전민족적으로 뜨겁게 불타오르는 통일정부수립 요구를 거부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승만 정권은 통일정부를 반대하고 남한만의 단독선거를 끝내 강행하였다. 38선 이남의 단독정부를 지지했던 것은 바로 미군정이었다.

38선 이남의 민중들은 너나없이 단독정부 선거를 반대하였다. 4.3 항쟁이 바로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고 민족통일정부를 수립하기 위한 제주도민의 군중적 투쟁이다. 여순항쟁 역시 단독정부 반대, 민족통일정부를 요구하는 4.3 정신의 연장선이라 할 수 있다. 이들 상당수는 지리산으로 들어가 빨치산이 되기도 하였다.

1948년 5월 10일 제헌국회 선거는 정당한 절차로 치러지지 못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던 당시 상황에서 미군정은 제헌국회 투표율이 무려 95.5%였다고 밝혔다. 서울이 93.3%, 경기가 96.5% 등이었으며 4.3 항쟁으로 난리가 난 제주지역마저도 투표율이 86.6%라고 주장하였다. 심지어 글을 몰랐던 이들도 상당수였는데 전 유권자의 95.5%가 투표를 했다는 미군정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음은 자명한 이치이다.

1948년 4월 말, 신문들은 “약 500명을 인터뷰한 결과 91%가 선거 등록을 강요당했다”고 보도했다고 한다. 4월28일, 유엔임시위원단은 “(1)미곡배급통장을 발급하는 지방행정사무실에서 등록 실시, (2)통장을 몰수하겠다고 위협해서 강제 등록, (3)경찰과 청년단체가 등록권유”와 같은 사항을 투표자 등록 부정행위로 지적하였다. 유엔임시위원단 위원장인 야심 머기는 “투표소 둘레나 안에서 향보단원을 발견했다. 어떤 투표소엔 경찰이 투표소 안에 있었다. 어떤 투표소는 (투표의) 비밀이 결여됐다”고 했다.

결국 1948년, 대한민국이라는 단독정부의 구성은 한반도의 분단을 더욱 굳어지게 하였다는 점에서 결코 정상적인 건국과정이었다고 할 수 없다.

이승만 정권은 국민의 염원이었던 통일정부 구성을 외면한 채 미군정을 앞세워 38선 이남의 단독정부를 구성했다. 이승만 정권은 국민의 염원이었던 친일청산도 외면하였다. 이승만 정권이 임시정부의 정신과 법통을 승계하였다고도 볼 수 없다. 그런데 8.15를 건국절로 기념하자니, 친일의 냄새가 짙게 배여 있는 이들의 건국절 논란이 더욱 황당할 따름이다.

곽동기 상임연구원 / 우리사회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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