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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과 안중근의 화해

 

 

조현 2014. 12. 01
조회수 548 추천수 0
 

 

이토를 쏜 붉은 심장 앞에서 우리는 하나가 되었네

동학의 후예들 중국 항일 유적지를 찾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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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얼빈역에 올해 초 들어선 안중근기념관을 둘러보고 있는 임형진 교수 등 답사단


천도교(동학)인들이 동학혁명 120돌을 맞아 독립운동가들의 역사현장을 찾았다. 해방 70돌을 앞두고서다. 지난 20~24일 4박5일간 중국 헤이룽장(흑룡강)성 하얼빈에서 지린(길림)성 지린시까지다. 천도교는 동학혁명을 거쳐 3·1운동을 주도해 우리나라 근대사에 지대한 족적을 남긴 종교다. 근대 우리나라에서 나온 최초의 민족종교로서 민족정신이 남달랐던 천도교인 중에도 일제가 강점한 한반도를 벗어나 압록강을 건너 독립운동에 투신한 이들이 적지 않다. 4박5일 항일유적지 답사. 동학 진압군과 피해자 후손도, 남과 북도, 좌와 우도 하나되었던 항일 투사들의 마음으로 화해의 마음을 모았다.


이번 답사엔 천도교의 정신적인 지도자 격인 연원회 한광도 의장(전교령)과 강훈 부의장, 김인환 종무원장, 이순종 여성회장, 고윤지 동학민족통일회 상임의장 등 주요 간부 14명이 함께했다. 이번 답사는 10년째 청년들을 데려와 항일유적지를 돌며 역사의식을 일깨웠던 ‘120주년동학혁명기념사업추진위원회’ 실행위원장인 임형진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가 시종일관 열변을 토하며 이끌었다. 임 교수는 10여년 전부터 매년 대학생과 천도교 청년들, 김을동·송일국 모자가 이끄는 청산리역사대장정과 한국종교인평화회의(KCRP) 팀 단장 등으로 항일유적지 답사를 이끌어왔다. 항일 당시의 고난을 되새기며 아파하는 탄식과 희망이 함께하는 전 답사과정을 동행했다.


화해1: 동학의 후예들, 동학도에게 총을 겨눈 안중근과 만남
동학의 후예들이 하얼빈국제공항에 내려 가장 먼저 달려간 곳은 하얼빈역이었다. 그곳은 안중근이 1909년 10월26일 오전 9시30분 일제 동아시아 침략의 기획자인 초대 총리 이토 히로부미를 조선 군 참모장의 이름으로 처단한 곳이다. 
하얼빈역은 1천만 인구로, 중국 동북지역 최대도시의 관문이다. 웅비하는 중국을 말해주듯 현대식 고층빌딩들이 둘러싸고 있다. 역 광장 한가운데 안중근기념관이 보인다. 안중근이 순국한 지 100년이 넘은 지난 1월에야 문을 열었다. 일본 아베 정권의 반성 없는 역사왜곡에 한·중이 ‘안중근’으로 하나가 되어 내놓은 것이다. 좁은 문을 열고 들어가니, 사형선고를 받은 안중근이 일본인 교도관들에게 써준 한자 글씨들이 맞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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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탕 큰 사진)안중근이 이토를 처단한 하얼빈역. (사진 속 작은 사진 위) 안중근이 저격한 장소, (아래)안중근기념관 앞에서 기념촬영한 답사단.

 

 

외세와 봉건에 항거한 조선 근대의 첫새벽인 동학도들과 안중근은 애초 동지가 아니었다. 1894년 동학농민전쟁이 발발하자 안중근의 부친 안태훈은 군대를 조직해 동학군 진압에 나선다. 개화파와 연계를 맺고 있던 안태훈이 개화정책을 펴던 갑오내각을 지키기 위한 행동으로 역사가들은 보고 있다. 당시 16살이던 안중근도 진압군의 선봉에 섰다. 안중근 부자는 진압군이었고, 30여만명의 동학도들은 온 강토에 피를 뿌리며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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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의 글씨 '국가안위노심초사'

 

 


‘국가안위노심초사’ 안중근의 글씨다. 하나 같이 민족애와 결의를 담은 안중근의 글씨 숲을 지나면서 동학의 후예들도 한마음으로 안중근을 기린다. 민족 동포를 생각하는 마음이야 다름이 있으랴. ‘안중근이 일신을 버리면서 이토를 처단한 순간, 이미 진압군도 동학도도 하나가 된 것 아니냐’는 듯 애틋한 눈길로 안중근의 사진을 바라보았다. 
임 교수는 “안태훈은 동학농민전쟁 뒤엔 동학 접주로 싸우다 쫓기던 청년 김구를 숨겨주기도 했다”며 “그 뒤 안태훈·중근 부자는 천주교에 입교했고, 안중근은 연해주에서 의병장으로 활동하면서도 사로잡은 일본군 포로들을 총까지 주어 살려보낼 만큼 신앙적 박애주의를 보였으나 이 일로 인해 노출된 은거지에 들이닥친 일본군에 패하고, 동지들로부터 심한 질타를 받아 독립운동을 포기할 것으로 점쳐지기도 했으나 굴하지 않고 다시 이토 처단이란 거사에 나서 세상을 놀라게 했다”고 밝혔다.
답사단은 기념관 창문 너머 역구내에, 안중근이 이토의 가슴을 명중시킨 자리에 표시된 표지를 오래도록 지켜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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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얼빈역
안중근과 그 아비가 동학토벌대였지만
하얼빈 역두에서 권총을 비우는 순간
진압군과 피해자의 경계가 사라지고


731부대 기념관
3천여 마루타가 잔인하게 살해된 현장
중국 한국 몽골인은 같은 피해자
중국 공산당과 국민당 깃발도 나란히

 

화성의숙
독립전사를 길러낸 2년제 군사학교
15살 김일성이 6개월간 교육받은 곳
좌우를 넘어 우리는 한몸이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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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1부대에서 희생당한 사람들의 이름은 적은 위패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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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얼빈시에 있는 일제 관동군의 731부대기념관 전시물. 관동군들이 야외에서 동사 인체실험 중인 장면.
 


화해2: 731부대 기념관에 전시된 국민당기와 독립지도자 장제스 사진 
21일 아침에 찾은 곳은 하얼빈 외곽 주거지 안에 있는 옛 731부대다. 만주지역을 장악한 일제 관동군 산하 세균전 부대다. 세균학 박사 이시이 시로 중장이 1936년 만든 이 부대에선 1만여명을 대상으로 각종 인체시험을 한 곳이다. 알려진 사망자만 3천여명에 이른다. 일본은 1945년 2차대전에 패배하자 잔혹 행위를 은폐하기 위해 건물을 폭파했다. 그러나 당시 폭파되지 않은 건물들이 상당수 남아 역사기념관으로 활용되고 있다. 건물 정문으로 들어서자 어둠 속에 터널 같은 복도 양편에 희생자 이름을 적은 위패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다. 심득룡·김성서 등 한글로 적힌 위패도 적지 않다. 전시실에 들어서자 강추위 속의 야외에서 팔을 얼리는 실험 모습을 재현한 전시물에 전율이 느껴진다. 일본군부대들은 질병이 인체에 미치는 영향을 보기 위해 산 채로 장기를 제거하는 등 일체의 마취 없이 모든 인체실험을 했다고 한다. 

피실험자는 중국인, 한국인, 몽골인 등이 대부분이었다. 중국인 중엔 국민당군도 공산당도 있었다. 한국인 중에도 민족주의자·사회주의자가 망라됐다. 일제 아래 그들은 모두 함께 고난을 겪던 피해자들이었다.


중앙전시장에 눈길을 끄는 사진이 있다. 국민당기와 장제스(장개석)의 사진이다. 공산당이 지배하는 중국에서 오랫동안 금기시돼온 사진들이다. 그런데 중국 정부가 관리감독하는 기념관에 공산당과 중국의 패권을 두고 싸웠던 국민당기와 장제스가 등장한 것이다. 
반면 다음날 방문한 하이린시의 한중우의공원 내 한국독립운동가 전시실엔 좌익독립운동가들이 배제돼 있다. 한중우의공원은 김을동 한나라당 의원이 주도하는 ㈔백야 김좌진장군 기념사업회가 김좌진의 독립운동 근거지였던 하이린시로부터 땅을 기증받아 건립한 김좌진장군기념관 성격의 장소다. 임형진 교수는 “남한에선 여전히 보천보전투를 이끈 김일성의 동북항일연군과 조선의용대를 창설한 김원봉 등 좌쪽의 독립운동가들을 여전히 배제한 데 반해 중국은 최근 독립운동사를 통해 중국과 대만의 통일을 모색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임 교수는 이어 “1930년 김좌진이 산시의 정미소에서 정신이 오락가락했던 공산계열의 박상실에게 암살되자 ‘공산주의자가 항일 영웅을 죽였다’며 좌우의 극한 갈등 유발 요인이 됐는데, 실제 박상실 뒤엔 일제의 끄나풀 김봉환이 있었기에, 일제에 의해 항일 독립운동가들의 내분을 조장하기 위한 술책으로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훗날 김좌진 장군을 측근에서 보좌한 이강훈, 정환일, 임기송씨 등의 인터뷰집인 <일제하 36년-독립운동실록>엔 김봉환이 하얼빈영사관 경찰부 소속 마쓰시마 형사의 회유로 변절, 공산계 급진주의자인 박상실을 사주해 김좌진 장군을 암살한 것으로 적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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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위)화성의숙이 있는 화뎬시의 휘발하강, (사진 아래)화성의숙 터에서 천도교 의식인 시일식을 거행하고 있는 답사단.

 


화해3: 김일성의 스승 천도교인 최동오가 이끈 화성의숙
화성의숙을 찾아가는 길은 멀고 험했다. 지린성 둔화시에서 출발한 버스는 비포장 산길을 달린 지 5시간 만에 화뎬시 휘발하강에 도착했다. 발해의 건국자 대조영이 당나라 군사를 대파한 곳이다. 지금은 화뎬시 시민공원이 된 이곳엔 독립운동가들이 1924년 세운 화성의숙이 있던 곳이다. 화성의숙은 독립을 위해 싸울 전사를 길러내는 2년제 군사학교였다. 이 터는 3년 전 임 교수와 정정숙 교화관장 등이 주소만 들고, 노인들의 증언을 토대로 찾아냈다.


화성의숙 숙장(교장)이 3·1운동후 천도교 대표로 상해임시정부에 참여해 임정 법무부장(장관)을 지낸 의산 최동오(1889~1963)다. 1926년 15살의 김일성이 이 학교에 왔다고 한다. 독립운동가였던 아버지 김형직이 죽자 장례에 모인 친구들에 의해 부친과 친분이 있는 최동오가 이끄는 이 학교에 보내졌다는 것이다. 최동오는 숙장으로 있으면서도 생계가 어려워 아들 최덕신조차 베이징의 고아원에 맡기고 와 부인의 삯바느질로 연명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김일성은 그 집에서 먹은 조밥과 시래깃국을 훗날에도 잊지 못했다고 한다. 김일성은 6개월 만에 이 학교를 중퇴하고 지린시 육문중학교로 전학을 갈 때, 시야에서 멀어질 때까지 머리와 어깨에 눈이 하얗게 쌓이도록 서서 손을 흔들던 스승을 회고하곤 했다고 전한다. 최동오가 1948년 김구와 함께 통일정부 수립을 위해 평양에 남북협상 대표단으로 갔을 때 김일성은 스승에게 북에 남아줄 것을 부탁했으나 최동오는 이에 응하지 않았다. 그러다 한국전쟁 때 김일성의 ‘모시기 작전’에 의해 납북됐다. 그의 아들 최덕신(1914~1989)은 남한에서 육군 중장으로 예편하고, 5·16 후 외무부 장관과 제7대 천도교 교령을 지냈다. 그러나 박정희 정권과의 불화로 76년 도미한 데 이어 86년 월북해 천도교 청우당 중앙위 위원장과 조선종교인협의회 회장을 지냈다. 현재 조선천도교회 중앙지도위원회 위원장 겸 천도교청우당지도위원회 위원장인 류미영씨가 그의 부인이다.

 

임형진 교수는 “김일성이 사회주의와는 어울리지 않는 민족주의적 성향을 강하게 띤 것은 스승 최동오의 민족주의 교육의 영향이 적지않을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한광도 연원회 의장은 “남북한이 공동으로 표지석이라도 세워, 좌우를 넘어선 민족정신을 찾는 장소로 삼을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이곳을 찾은 23일은 때마침 일요일이었다. 강추위에 야외에서 천도교 시일식이 거행됐다. 천도교 주선원 감사원장은 설교에서 “현재 우리 민족은 몸통은 잃어버린 채 좌우 날개만 있는 듯하다”며 “함께 참회하고 중도를 잡아 화해해 몸통을 되찾기 위해 마음을 모으자”고 호소했다.

 

하얼빈·하이린·지린(중국)/글·사진 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

 

 

 

항일 격전지 동북3성은 지금…

 

1990년대 조선족학교 1500개
연변자치주 위주 250여개만 남아
조선족 교감은 우리말을 모르고
학생들은 중국어로 말했다 

 

압록강 너머 간도는 옛 고조선, 고구려, 발해 등 고대 한민족의 터전이었다. 백두산 일대에서 탄생한 청나라의 주축인 만주족이 다수인 한족을 지배하기 위해 대거 베이징으로 이주하면서 만주 일대는 텅 비었다. 청나라는 왕조의 탄생지를 신성시한다는 명분으로 아무도 들어가지 못하는 봉금지역으로 설정했다. 구한말 조선인들이 먹을 것을 찾아서, 그리고 일제하에선 독립운동을 위해서 이곳에 대거 옮겨갔다.


독립운동가들을 음지에서 말없이 도왔던 이들이 바로 간도의 한인들이었다. 그들은 돈을 모아 수많은 민족학교를 후원했고, 독립운동가들을 숨겨주고 돌보았다. 청산리대첩 때는 이틀째 잠도 못 자며 싸우느라 끼니를 때울 수 없던 독립군들에게 주먹밥과 감자를 삶아 가서 직접 먹여주던 이들도 간도의 여인들이었다. 그러나 그 대가는 참혹했다. 1920년 봉오동전투와 청산리대첩에서 독립군에 대패한 일제는 한인들에 대한 대보복을 감행한다. 그것이 간도 참변이다. 당시 일본군은 한인촌을 전소시켰다. 그때 일본군이 보이는 대로 죽인 한인이 3700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답사단은 그 후손들을 찾아 헤이룽장성 오상(우창)시 조선족실험소학교를 방문했다. 김좌진 장군이 설립한 23개 학교 중 유일하게 남아있는 학교다. 조선족학교는 199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동북3성에 1500여개나 됐지만 지금은 250여개로 줄었다. 그나마 연변조선족자치주에 집중돼 있다. 인구 400만이 사는 길림성에도 조선인학교가 단 한개만 남아있다. 216만명의 중국내 한인동포 가운데 50여만명이 한국 등으로 돈벌이를 떠나 중국내 한인공동체가 붕괴 위험에 처해 있다. 독립운동에 가장 열성적으로 참여했지만, 멸문의 화를 당하고, 현대엔 경제적으로 나은 남한에서 멸시까지 감내해야 하면서 자존감도 현저히 약화되고 있다. 이 학교에서조차 조선족인 교감은 우리말을 할 줄 몰랐고, 운동장에서 노는 학생들도 중국어로 말하고 있었다. 
천도교는 이 학교 학생들이 한글 책을 읽을 수 있는 도서관을 짓는 사업을 지원하고 있다.


조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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