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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에서 미국으로, 흑인들의 역사

 

 

 

아프리카에서 미국으로, 흑인들의 역사
 
[제3세계 눈으로본 서구열강](21) 미국역사에서 흑인들의 역할
 
유태영 박사
기사입력: 2013/01/17 [11:32] 최종편집: ⓒ 자주민보
 
 

백인 노예상인들과 흑인노예들의 운명

우리는 미국 흑인들의 비극적인 역사에 대하여 아는 것이 극히 부족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들의 피부색이 검다는 이유 하나만을 가지고 편견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오늘 서구화된 세계에서 백인우월주의가 득세하여 미국의 주류사회에서 백인 문화가 일방적으로 통용되고 있기 때문에 미국 흑인들의 비극적인 역사에 대하여는 침묵한다.

그러므로 미국에서 흑인의 역사에 대한 기록들을 우리 재미 한인사회와 한국에 소개하여 미국에서 흑인들의 민권운동이 어떻게 긍정적으로 전개되었는가를 올바로 이해하는 것이 매우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미국의 흑인역사 인식에 대하여 도움이 되기 바라면서 “미국흑인사”를 연재 [제3세계 눈으로본 서구열강]의 21번째~23번째 글을 통해 살펴보려고 한다.

15세기에 유럽-아프리카-아메리카 세 대륙 간에 대규모로 교역이 해마다 증가하고 있었다. 4백년 동안 아프리카에서 노예로 1400만명에서 1500만명에 이르는 많은 흑인들이 마치 화물처럼 배 밑창에 실려 대서양을 건너 미국땅으로 운송됐다.

유럽의 물건들과 헐값에 교환되어 미국으로 팔려간 아프리카 흑인들은 백인 노예상인들의 막대한 이권이 되어 주요 상품으로 취급되고 있었다. 백인들의 노동력의 값에 비하면 흑인노예들의 노동력을 사들이는 비용은 공짜나 다름이 없었다.

미국인의 역사에 있어서 흑인노예상들의 성공은 로맨스로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흑인들에게는 비극적 운명으로 영원히 상기되고 있다. 흑인들의 비극에 대한 기록이 없는 미국은 미국일 수 없다. 미국의 건국역사에 있어서 흑인들은 미국 역사의 외피와 본질을 이루고 있음을 망각해서는 안된다.

흑인노예 역사 400년과 미국이 독립한 지 200여 년이 지난 1960년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처음으로 흑인노예에 대한 연구가 본격적으로 시작됐으며 미국 대학은 교육과정에 “미국흑인사”를 개설하게 됐다. 미국흑인사 연구는 미국에서 뿐만 아니라 점점 더 확대되어 오늘 지구촌에서 인권을 위한 투쟁에도 교훈적 요소로 작용하고 있으며 제3세계 인권문제에도 큰 영향을 주고 있다.

미국의 흑인에 대한 인권침해의 역사는 단지 연구의 대상이라기보다는 오늘에 있어서 서구열강이 제3세계에 대한 인권침해를 여전히 계속하고 있는데 대하여 보다 철저한 정치적 대책을 확대시키는 과제가 되어야 하겠다.

1. 대규모 흑인노예 무역시대의 시작

1400년대에 처음으로 붙잡혀 온 흑인노예들은 스페인의 식민지인 서인도 제도, 브라질, 멕시코 , 페루, 콜롬비아, 베네수엘라 등지로 판매되어 분산됐다. 그 후에 오늘의 미국 동부해안으로 많은 노예들이 대서양을 건너 수송되어 13개의 식민지로 판매된 뒤 도착했다. 노예상인들은 건장한 노예들과 병약한 노예들을 골고루 섞어 하나의 묶음을 만들어서 구매 단위로 판매했다. 노예상인들은 남미와 미국의 식민지에서 금과 은 보석과 커피, 설탕 등 식민지의 귀중한 작물을 배에 가득 싣고 유럽으로 돌아가 이중의 이득을 획득하고 있었다.

16-18세기의 유럽의 노예상인들은 그 때 당시 선량한 중상층에 속하는 사람들이었다고 한다. 프랑스, 영국, 코펜하겐, 리스본 등지의 출신들로서 그 중에는 귀족들도 노예무역에 착수하여 막대한 부를 쌓기도 했다. 그들은 점잖은 신사였고, 성실한 남편과 훌륭한 아버지들 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공통점은 모두 다 진실한 기독교인들이었다.

하지만 만일 누군가 그들에게 질문하기를 <흑인노예를 사고 파는 노예무역이 그 얼마나 끔찍한 죄악인가>라고 따지면서 비난을 한다면 아마도 그들은 조금도 치욕을 느끼지 못하며 오히려 그들은 대답하기를 <그것은 오직 무역일 뿐이며 우리는 소매상이 아니라 도매상이다>라고 뻔뻔스러운 대답을 하면서 변명과 부귀를 과시하고 신의 축복이라고 주장했다고 한다.

유럽의 열강들은 아프리카를 “케이크”를 나누어 먹는 식으로 노예무역에 뛰어들어 아프리카 대륙을 분할하여 각각 한 지역, 또는 한 구역을 독점하는 방법으로 노예무역을 추진했다.

프랑스는 모리타니에서 시에라리온에 이르는 지역에서 노예무역을 독점했다. 아프라카 노예무역의 중심지인 황금해안의 광활한 지역에서 네덜란드가 13개 지역, 영국이 9개 지역, 덴마크가 1개 지역을 차지해서 노예무역을 경쟁적으로 진행했다. 노예무역의 두 번째 중심지인 가나, 토고, 카메룬, 나이지리아에서 프랑스와 영국은 노예무역을 놓고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었다.

18세기에 들어서서 아프리카 노예무역의 중심지인 제 1, 2, 3, 4지역이 고갈되자 유럽인들은 방향을 아프리카 남쪽으로 더 내려가 동부해안인 모잠비크까지 진출하여 노예무역을 확대하여 계속하고 있었다.

그런데 유럽의 백인들 가운데 아프리카 흑인들을 붙잡아 노예무역을 감행하면서도 양심의 가책 따위를 느끼는 백인은 한 사람도 없었다. 오히려 유럽의 백인들은 아프리카 흑인들이 유럽의 문명에 접촉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변명을 했다.

유럽인들의 노예무역은 나라의 왕과 정부, 그리고 반드시 성직자들의 뒷받침을 받고 있었다. 이러한 현실에서 누가 감히 나서서 노예무역에 대하여 비난이나 반대를 할 수 있었겠는가?

유럽인들의 노예무역선이 출항을 하기 전에 선장은 반드시 대서양 횡단항해에 관한 세부사항과 운항일지를 점검한다. 그런데 그 운항일지의 맨 첫 페이지에는 <주님과 성모님의 이름으로 이 항해일지가 비롯될 지어다>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 기록을 출항 몇 시간을 앞두고 선언했다.

유럽인들의 노예무역선의 대서양을 향한 출항이 정치적으로 제왕적이며 종교적으로 신의 축복 속에서 출항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와는 정반대로 아프리카 노예들은 잔악한 인간사냥에 의하여 붙잡혔고 노예상인들에게 판매되어 초만원이 된 노예선에 화물처럼 가득 실렸고 이런 흑인노예들이 가득차면 출항을 했다.

노예선에 가득찬 흑인들은 거의 발가벗은 몸으로 누울 수조차 없는 좁은 공간에서 발목에는 족쇠고랑이 채워져 있었다. 배안에서 들리는 소리라고는 쇠사슬이 부딪치는 소리와 채찍질 소리뿐이었다. 물론 흑인들의 비명과 신음소리들이 배안에 가득 차 있었다. 노예선은 포로들이 들끓는 강제수용소로 변했다.

대서양을 횡단하는 동안 보통 10% 정도의 흑인들이 죽는 것이 예사였다. 정원이 450명인 선박에 600명이 넘게 노예들을 가득히 태우는 일은 흔한 일이었다. 열악한 환경으로 흑인들의 몸에 이가 들끓기 때문에 사슬에 묶인 채 갑판에 몰아 놓고 물줄기를 퍼부었다. 위생환경과 질병으로 인하여 1500만 명에 이르는 흑인노예들 중에서 대서양을 건너는 동안에 여러가지 질병과 학대로 인하여 150-200만 명의 노예들이 목숨을 잃었다.

2. 식민지 농장으로 팔려 나가는 흑인노예들

아메리카에 도착한 흑인노예들은 검역절차를 위하여 40일간 배안에서 기다려야 했다. 검역의 목적은 가능한 한 비싼 값으로 노예를 판매하기 위함이었다. 노예상인들은 노예들에게 영양가 있는 음식을 제공하여 주면서 외과의사의 치료를 받게 했다. 40일이 지난 후 노예상인들은 축포와 함께 노예선의 갑판에서 노예판매를 시작했다.

노예 구매자들은 흑인의 건강상태를 알아보기 위하여 팔다리로 여러가지 자세를 취하도록 요구했는데 그 후에야 노예가격이 결정됐다. 35-40세 이상의 노예들은 늙은 것으로 취급되어 가격이 낮게 매겨졌다.

매매 거래가 끝난 흑인들은 그 즉시 가슴 또는 어깨에 불에 달군 은제 낙관이 찍혀 새로운 주인의 소유물로 확정됐다. 그로부터 약 1주일 후 농장에서 노동을 시작했는데 대부분의 흑인노예들은 설탕, 커피, 목화, 쌀, 담배를 재배하는 일꾼이 됐다. 농장에서 흑인노예들은 작업감독의 채찍질 소리에 동이 트기도 전에 잠에서 깨야했으며 게으름을 피우거나 피곤한 기색을 보이면 가차없이 처벌을 받았다.

흑인노예들은 자신들이 먹을 양식과 야채를 위하여 별도로 텃밭에서 농사를 지어야 했는데 주로 일요일이나 밤중에라도 텃밭에서 일을 해야만 했다. 백인 농장주들은 거대한 농장을 경영하는데 있어서 가장 수익성이 높은 해결책은 흑인노예를 사용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수세기동안 공인하고 있었다.

보통 농장에서는 약 50명의 흑인노예를 소유하고 있었지만 또 어떤 남부의 대농장에서는 150여명의 흑인노예를 소유하여 500헥타르 이상의 농장을 운영하는 경우도 허다했다. 1790년대에 미국의 목화 생산량은 1년에 1,000톤에 불과했지만 1800년대에 들어서서 미국의 목화 생산량은 1년에 100만톤으로 급증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흑인노예 수가 급증하는데 따라서 미국의 목화 생산량이 급증했던 것이다.

흑인노예들은 절대로 소속된 농장을 떠날 수 없으며 외부와의 접촉이 엄금되어 있었다. 흑인노예들은 싸움, 욕설, 음주 등이 금지되어 있었으며 백인 주인이 가까이 있을 때는 낮에나 밤이나 반드시 일어서 있어야 하며 이를 어기면 채찍질을 당했다. 채찍질은 “채찍꾼”이 맡았는데 채찍 때문에 상처가 나면 소금물을 뿌리기도 했다.

흑인노예들은 백인 주인의 허락으로 흑인들끼리 결혼을 했다. 하지만 결혼서약에 통상적으로 들어가던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을 때까지…>라는 서약문구는 삭제됐다. 그 이유는 흑인들의 결혼은 언제라도 백인 주인에 의하여 따로 되팔릴 경우 본인들의 의사와 상관없이 헤어질 수 있어 평생적인 결혼이 성립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부부가 생이별을 해야 하고 부모와 자식이 또 생이별을 해야만 했던 흑인들의 슬픔과 눈물을 위로해주는 이는 흑인들의 “예수”뿐이었다. 하지만 흑인들이 믿는 이 “예수”도 사실은 백인들이 가르쳐 준 “예수”였다.

흑인노예들 중에서 몸이 허약해서 농장에서 일을 할 수 없으면 백인 가정에서 하인으로 봉사해야 했다. 흑인 아이들은 12살이 되면 농장에서 노동을 해야 했는데 흑인노예들은 언제 어디로 또 다시 팔려갈지 몰라 근심으로 살아갔다.

3. 미국 독립전쟁에 참전한 흑인노예들과 그들의 반란

독립전쟁은 1775년에 미국 식민지와 영국 본국정부 사이에 시작되어 1783년까지 8년 동안 계속됐다. 미국 식민지 13개주가 영국 본국정부의 조세정책에 반발하여 전쟁을 일으켰으며 결국 미국의 승리로 독립을 획득했는데 이를 “미국독립전쟁”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이 미국독립전쟁에 흑인노예들이 영국군이나 혹은 미국군에 참전함으로써 노예의 신분에서 자유인이 되는 한 방법이 되고 있었다. 흑인노예들 중에서 특히 용감한 사람을 대환영하여 군인으로 입대를 시켰다. 하지만 흑인은 신분이 노예이기 때문에 자유인으로서 군인이 될 수 없다고 주장하여 “흑인징병중지”를 결정했다. 그런데 독립전쟁이 끝나지 아니하고 8년 동안 계속되고 지원병이 부족하여 전쟁수행이 위기에 처하게 되자 미국은 또 다시 흑인노예들을 무조건 군에 입대를 시켰다.

흑인노예들을 군에 입대시키는 것은 미국뿐만 아니라 영국군도 미국의 흑인노예들을 영국군에 입대시킴으로 전투력을 강화하고 있었다. 영국은 미국인의 농장에서 도망친 흑인노예들을 대환영하여 영국군에 입대시켜 자유인의 신분으로 전환시킴으로 많은 흑인들이 영국군이 되고 있었다. 약 1000명의 흑인노예들이 총을 들고 미국군을 향하여 싸우게 했다. 하지만 영국은 더 많은 흑인들을 전투가 아닌 정보원과 후방에서 근무하도록 하고 있었다.

1783년에 미국 독립전쟁이 미국의 승리로 끝났다. 영국은 영국으로 후퇴를 하면서 미국의 흑인노예 14000명을 영국으로 후퇴시킴으로써 미국에 노예손실을 안겨주었다. 영국도 흑인노예가 매우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미국이 독립전쟁을 승리로 끝낸 후에 1783부터 미국의 또 다른 문제는 흑인노예들이 백인 농장에서 일으키는 반란이었다. 미국의 백인들이 흑인노예들의 반란에 대하여 되도록이면 침묵을 지키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흑인노예들의 반란의 횟수를 축소해서 발표했다. 하지만 사실상 흑인노예들의 반란은 그 횟수가 막대했다.

그러므로 백인 농장주들은 항상 흑인노예들의 반란에 대비하여 잔혹한 대책을 준비해 놓고 있었다. 노예들이 할 수 있는 길은 반란을 일으켜 도주하는 길 뿐이었다. 최초의 흑인노예들의 반란은 1526년에 사우스캐롤라이나에서 일어났으나 실패했다. 그 후에 크고 작은 반란들이 계속되고 있었는데 1822년에 수천명의 흑인노예들이 결합하여 큰 반란을 일으켰으나 전원이 몰살당한 채 끝나고 말았다.

1831년에 버지니아에서 냇 테너라는 흑인이 “신의 계시를 받았다”라고 주장하면서 백인 농장주인의 가족 60여명을 살해하는 큰 반란을 일으켰지만 냇 테너는 곧 체포되어 사형당했다. 그는 재판정에서 이렇게 외쳤다. <나의 행동은 백인 농장주들이 도처에서 공포와 슬픔을 당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1807-1837년에 북미와 남미 여러 곳에서 피로 물든 흑인 폭동과 반란들이 끊임없이 발생했다. 폭동과 반란 외에 노예신분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개인적으로 도망하는 방법이었다. <뛰어라, 검둥아, 뛰어>가 당시 유행어와 노래가사가 되고 있었다.

도망한 노예들은 원시림으로 들어가 그곳에서 군대를 결성하여 50여년이 넘도록 저항운동을 전개했다. 도망한 흑인노예들은 밀림에 숨어 약탈로 연명했으며 백인들은 이들을 총으로 쏴 죽여도 살인죄가 되지 않았다.

1850년에 이르러서 도망친 많은 노예들을 캐나다나 미국북부로 이동하도록 백인들과 도망한 노예들이 합의를 했다. 도망한 흑인노예 중 한 여성이 있었는데 그녀의 이름은 해리엇 터브맨이었다. 그녀는 19번이나 탈주했으며 그녀의 도움으로 300명이 탈주에 성공했다고 한다.

흑인노예들의 도망을 방지하기 위하여 1850년에 미국의 모든 주정부들이 공동으로 연방법안을 제출하여 일단 통과시켰다. 이 법안에 의하여 1857년에 남쪽에서 도망하여 북쪽에 와서 살고 있던 흑인노예를 남쪽으로 되돌리도록 하는 판결이 났다. 하지만 이 판결에 대하여 남북간에 서로 반발과 대립이 발생하는 등 복잡한 법적 문제가 전개됐다.

이런 갈등은, 1861년에 이르러서 흑인노예제도의 엄격한 고수를 주장하는 미국의 남쪽의 주정부들과 이에 반대하여 흑인노예제도의 폐지를 주장한 북쪽 주정부들 사이에 “남북전쟁”이 발생하는 역사적인 계기가 된다. 남북전쟁은 1861-1865년에 걸쳐 4년 동안 계속됐다.

자유를 갈망하는 흑인노예들이 이제는 도망칠 필요가 없게 된 것이다. 남북전쟁이 시작되면서 미국의 북부군에 입대만 하면 곧 자유인이 되기 때문이었다. 전쟁터에서 북부의 “양키군대”가 근접할 때마다 흑인들은 북부군 양키부대로 몰려들었다. 링컨 대통령의 노예해방선언과 남북전쟁 이면에는 이러한 계획이 숨어 있었다.

1865년 1월 31일에 제13차 개헌에 따라서 미국의 역사적인 노예제도의 폐지가 드디어 공시적인 선언으로 확정됐다. 하지만 1865년 4월 9일과 4월 14일에 미국역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두 사건이 발생했다.

첫째는 남부의 로버트 리(Lee) 장군이 북부의 율리시스 그랜트 장군에게 남북전쟁의 종식과 항복을 드디어 4월 9일에 선언했다. 둘째는 그 후 5일 만인 4월 14일에 존 부스(John Booth)가 링컨 대통령의 머리에 치명적인 일격을 가함으로서 사망했다. 링컨 대통령의 죽음은 흑인들의 해방의 기쁨만큼이나 큰 충격이 되고 있었다.

사실에 있어서 흑인노예 무역에 대한 반대는 1794년부터 프랑스에서 처음 논의가 시작됐으며 아메리카 개신교의 한 종파인 퀘이커 교도들이 흑인노예 제도를 종교적인 이유로 반대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영국은 뒤늦게 1807년에야 비로서 흑인노예무역에 대하여 반대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으나 실효는 없었다.

어쨌든 1865년에 흑인노예 제도가 폐지됨으로써 흑인들은 기쁨에 휩싸였다. 하지만 남쪽의 백인 농장주들은 불안에 잠겼다. 흑인노예들은 예전 작업시간의 4분의 3정도만 일을 하면서 7년 후에 완전한 자유인이 되게 된 것이다. 6세 미만의 아이들은 즉시 자유인이 되었다.

미국의 농장주들은 부족한 일손을 메우기 위하여 흑인노예를 대체하여 아시아의 중국과 인도 등지에서 약 100만명의 노동자들을 데리고 와 새로운 노예제도를 시작했다. 1900년대 초에 300여명의 한국인 하와이 노동이민도 같은 맥락이었다.

미국의 남북전쟁 4년 동안을 통하여 미국의 흑인들은 이제는 외국인으로서의 서글픈 노예의 신분이 아니라 미국을 자기들의 조국으로 삼고 정체성을 소유하게 됐다. 아프리카에서 노예선에 화물처럼 운반되어 미국으로 이송됐던 흑인들이지만 오늘에 있어서 미국에 대한 신념이 강화된 것은 극히 다행스러운 일이다.

글을 맺으며

1968년 4월 4일, 미국의 백인 주류사회의 인종주의에 항거한 마틴 루터 킹 목사는 백인 우월주의자 제임스 레이의 총에 맞아 암살당했다. 킹 목사는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라는 연설을 통하여 목숨을 걸고 그의 고매한 사상으로 백인우월주의를 공격했다.

<인간의 영혼을 갉아 먹는 흑인 빈민가, 인간의 영혼을 억압하는 제국주의적인 경제구조, 인간의 영혼을 짓누르는 백인의 사회구조 그리고 이러한 불의한 조건에 대하여 무관심한 채 인간의 영적인 구원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는 종교>

킹 목사는 죽음을 각오하고 최후 순간까지 미국 백인들의 죄악에 대한 회개를 외쳤다.
킹 목사가 살아 있을 때 대다수의 백인 미국인들은 그를 증오 했다. 급진적인 흑인 형제들 조차도 그의 비폭력주의에 대하여 불신의 눈길을 던지고 있었다. 그런데 그가 죽은 지 44년이 되는 오늘날 해마다 1월 21일이 되면 <마틴 루터 킹 목사 생일>을 기념하고 있다.

레이건 대통령은 킹 목사에 대하여 <빨갱이 패거리의 두목>이라고 경멸했다. 그런데 민주당 국회의원 존 코니어스의 법안이 통과됨으로 인하여 레이건 대통령은 그 법안에 할 수 없이 서명을 했던 것이다.

킹 목사를 좌경이며 빨갱이 패거리로 규탄하던 미국의 주류사회에서 킹 목사의 생일을 축하하여 국가적 공휴일로 지키는 것은 도대체 그 무엇을 뜻하는가? 미국의 백인들이 킹 목사를 정말 <정의의 선구자>로 여기고 있는 것인가? 사실 오늘 미국은 킹 목사가 꿈을 꾸었던 백인과 흑인이 한 식탁에 앉을 수 있는 우애넘치는 미국으로 변했는가?

오늘 미국이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생일을 축하하여 기념일로 지정한 것은 미국의 두 얼굴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는 위선에 불과하다. 흑인인 오바마가 백인우월주의적인 나라의 대통령이 된 것도 역시 미국의 두 얼굴을 나타내는 정치적 위선이다. 오바마 대통령 자기 자신이 흑인의 피부를 가지고 있으나 속은 백인의 얼굴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제3세계는 오바마 대통령에 대하여 <두 얼굴의 사나이>, 즉 수수께끼 같은 인물로 판정하고 있다. 흑인으로서 미국의 대통령이 된 오바마는 백인우월주의 정권을 위하여 편의상 고용된 대통령인 것이다.

오늘 미국은 백인우월주의적 얼굴과 제3세계에 대한 기만적인 우호의 두 얼굴을 가지고 있다. 미국이 흑인과 평화 없이는 미국일 수 없는 것처럼 미국이 제3세계와 평화 없이는 절대로 미국일 수 없다.

지난 1월 10일 미국의 빌 리처드슨 전 뉴멕시코주 주지사와 구글의 에릭 슈미트 회장 등 9명이 평양을 방문했다. 오바마 대통령의 제2기 행정부의 출범을 앞둔 시기에 평양을 방문하는 것은 미국의 두 얼굴을 나타내 보이는 뚜렷한 모습이다. 북은 오래전부터 북미평화협정을 하루 빨리 체결하는 것과 함께 우리민족끼리 조국통일을 성취해야 한다는 통일방안을 주장해왔다. 올해로 환갑을 맞는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전환하기 위한 북미간의 움직임을 기대해 본다.(2013년 1월 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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