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북한 4차 핵시험의 핵심

<기고> 강호제의 '과학기술로 북한 읽기' ①
강호제  |  tongil@tongilnews.com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승인 2016.02.17  13:56:20
페이스북 트위터
최근 북한의 4차 핵시험과 인공위성 광명성 4호 발사에 대해 다양한 평가와 보도가 나오고 있지만 사실관계 마저 불분명한 주장이나 기사들도 적지 않은 실정이다.
북한과학기술사를 전공한 강호제 경남대학교 극동문제연구소 객원연구위원의 3회에 걸친 기고문을 통해 북한의 핵과 인공위성에 대한 과학적 접근을 시도한다.
필자는 서울대학교 과학사 및 과학철학 협동과정에서 북한 과학기술사 및 과학기술정책을 전공했으며, 박사논문은 "북한 과학기술 형성사1"(선인)로 출판됐다. /편집자 주

 

북한 관련 뉴스가 대부분 그렇지만 관련 정보들이 ‘실제 그대로의 사실(fact)’인지 나름대로 ‘추론한 혹은 추정한 정보(estimated value, reasoning value)’인지 구분하기 매우 어렵다. 특히 북한 관련 정보를 직접 접하는 것조차 법으로 금지된 듯한 착각을 하게 하는 한국의 현실이 이런 구분을 더욱 어렵게 한다.

분명한 사실은 ‘추론한 혹은 추정한 정보’는 가공하는 과정에서 오류가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의도적으로 오류를 유도할 수도 있다. 추론한 혹은 추정한 정보를 생각의 출발점으로 삼으면 이후 추론과정이 얼마나 합리적이었느냐에 상관없이 진실에서 멀어질 수밖에 없다.

북한 관련 문제는 오랫동안 정치, 외교, 군사의 영역이었다. 하지만 북한 문제는 경제 문제이기도 하고 과학기술의 문제이기도 하다. 특히 핵시험 관련 사안에서는 과학기술적 문제를 제대로 분석하지 못하면 제대로 된 의미를 읽어낼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잘못된 결론에 도달할 수도 있다.

이 글에서 필자는 북한 과학기술정책사를 공부했던 경험을 토대로 핵시험에 대한 북한식 셈법을 추론하려 한다. 과학기술적 지식을 최대한 활용하여 믿을만한 정보를 분석한 후, 그 의미를 다양한 정치, 외교, 군사 등 차원에서 살피고 최종적으로 북한의 경제발전전략과 연결시켜 보려 한다.

분석을 본격적으로 진행하기 전에, 활용한 자료나 정보는 전적으로 언론에 공개된 것에만 의존함을 밝힌다. 미국, 중국은 물론 어떤 누구도 북한이 공표하기 전에 시험 진행 사실 자체를 알지 못했기 때문에 그냥 언론에 공표된 정보만 활용하는 것이 지금으로서는 최선의 일이고 가장 기본적인 일이라 할 수 있다. 달리 말하면 일반인이라도 '합리적'으로만 분석하여도 첩보 등 북한 정보를 많이 알고 있는 전문가나 전문기관과 같은 수준으로 추론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정리해본다. 실제 그대로의 사실만을.

실제 그대로의 사실

1. 2016년 1월 6일 10시에 수소탄 시험이 성공적으로 진행되었다는 조선중앙통신의 발표
2. 2016년 1월 6일 10시 여러 관측소에서 인공지진 관측
3. 2016년 1월 6일 12시 30분까지 최소 우리 정부는 핵시험 여부를 몰랐다.
4. 이번 핵시험은 북한 정부가 인정한 4번째 핵시험이다.
5. 대략 3년 주기로 핵시험을 진행하고 있다. (2006, 2009, 2013, 2016)
6. 수소탄을 언급한 최초의 핵시험

아무도 몰랐다

드러난 사실 중에서 가장 우려할 만한 부분은 북한에서 밝히기 전까지 핵시험 사실을 전혀 몰랐다는 것이다. 아직은 명목상 전쟁 중인 국가 사이에서 상대방의 동향을 파악하지 못한다는 것은 군사, 안보적으로 심각한 문제이다. 특히나 핵무기라고 하는 어마어마한 파괴력을 지닌 무기시험을 사전에 인지하지 못했다는 것은 앞으로 두고두고 반성해야 할 부분이다.

북한의 핵시험에 대해서는 그 의도와 성공/실패 등에 대해 다양한 평가가 나올 수 있지만 적어도 우리 정부의 사전 탐지 능력에 대한 평가는 하나 뿐일 것이다.

북한이 발표하기 전까지 몰랐다는 점은 지난 1998년 8월 31일 ‘광명성 1호’ 시험발사 당시와 유사하다. 북한 당국이 9월 4일 공식 발표하기 전까지 북한의 인공위성 시험발사(혹은 장거리 미사일 시험발사) 사실을 알고 있었던 곳은 없었다고 한다.

당시에는 예상치 못한 인공위성 시험발사 2년 만인 2000년 10월 북.미 사이의 최고 수준의 협약인 북.미 코뮤니케가 발표되었다. 서로 상대방 체제를 존중하고 평화를 위해 노력한다는 관계 정상화를 위한 협약이었다.

숫자 신비주의, 과학기술 신비주의

보통 사람들은 정확한 숫자를 기반으로 추론하는 것에 대해 어려워한다. 또한 어려운 과학기술 이론을 기반으로 한 추론에 대해서도 약간의 거부감을 갖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 이런 방식의 추론에 대해서 과정은 무시한 채, 결론만 보려하는 경향이 있다. 결과만 보고 받아들이거나 그냥 무시하기 위함이다.

어렵고 혼란스러운 상황이 오면 좀 더 엄밀히 들여다보고 분석해야 하지만, 어렵고 복잡하다는 이유로 쉽게 결론주의에 빠지는 것이다. 그래서 북한과 관련한 정보나 분석들은 숫자나 과학기술 논리 뒤에 의도를 숨겨두는 경우가 많다. 일종의 숫자 신비주의 혹은 과학기술 신비주의라 할 수 있다.

이번 핵시험과 관련한 분석들도 이런 모습이 많이 관찰된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핵시험의 규모에 대한 추산이다.

이번 핵시험과 관련하여 외부에서 유일하게 관측가능한 정보는 지진파와 관련한 정보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전국 180곳에 있는 지진관측망을 통해 이번 핵시험이 관측되었고 전세계 27개의 지진관측소(Seismic station)에서 지진파를 실시간으로 감지하였다고 한다.

관측된 지진파를 통해 1)관측시간과 2)지진파의 측정 강도를 알 수 있다. 여러 곳의 관측 시간을 분석하면 핵시험이 어디에서 진행되었는지 실험 장소를 추정할 수 있다. 이전의 3차례 핵시험 관측 경험까지 고려하면 꽤 정확한 위치를 추정할 수 있다. 그래도 추정이기 때문에 오차가 약간은 있을 수 있지만 그 오차범위는 1~2km를 넘지 않는다고 한다. 즉 골짜기 하나, 산 하나 정도의 오차 이내에서 정확한 위치를 파악할 수 있다.

문제는 ‘측정한 지진 강도’를 가지고 ‘진원의 지진강도’를 추정하고 그것으로부터 ‘폭발력’을 추정하는 부분이다. 핵시험 이후 대부분의 언론에서 측정한 지진강도가 아니라 진원의 지진강도 추정치와 이를 통한 폭발력 추정치를 마치 확정된 값인 양 소개하고 있다.

이 추정치는 정확한 값이 아니라 오차를 포함한 값이므로 숫자 하나로 규정하기 보다 대략적인 값만 확인하면 된다. 아무리 지진강도의 추정이 정확하다고 하더라도 그 인공지진을 일으킨 폭발력을 추정할 때에도 오차가 생긴다.

제일 중요한 핵무기의 성능인 폭발력은 이처럼 2번 이상의 추정치를 구한 다음에서야 알 수 있는 값이라 오차가 많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 즉 정확한 값을 추산하기 매우 어렵다.

따라서 이번 4차 핵시험과 관련해서 흘러나오고 있는 지진강도 몇, 폭발력 몇 kt이라는 값은 크게 중요하지 않은 값이다. 공개된 정보를 대략적으로 살펴보면 지진강도가 4~5, 폭발력이 10여 k 정도라고 하니 ‘매우 강력한 무기’가 시험을 통과하여 ‘생산’되었다고 판단하면 된다.

지진 강도에서 3 이상이면 일반 사람이 체감할 수 있고 5 가량이 되면 건물에 금이 가기도 한다. 국내에 있는 측정장비에는 대략 2.7이상의 감도가 측정되면 자동으로 경고신호가 발송된다고 하니 매우 강력한 인공지진이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히로시마나 나카사키에 터트린 핵무기, 즉 실전에서 사용된 유일한 핵무기의 폭발력이 20kt정도 였으므로 이것보다 약간 작은, 하지만 역시 무시무시한 폭발력을 가진 핵무기 시험이 성공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추정치 이외에 핵무기의 종류, 즉 플루토늄, 우라늄, 수소(리튬) 중 어느 것이 얼마나 사용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이를 알기 위해서는 핵시험 이후 발생하는 방사성 물질을 채집하여 분석해야만 알 수 있다.

하지만 핵시험장 근처가 아니라 그 곳으로부터 몇 백km나 떨어진 곳에서 이러한 방사성 물질을 채집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실제로 지난 2차, 3차 핵시험 당시에는 방사성 물질 채집에 실패했다.

어떤 종류의 핵물질을 얼마나 사용하였는지는 물론 어떤 방식으로 작동하는 핵무기인지도 모르기 때문에 이를 두고 성공이냐 실패냐를 따지는 것은 완전히 무의미다. 북한에서 스스로 밝기기 이전에는 구체적인 내막을 전혀 알지 못하고 성공, 실패도 따지지 못한다.

따라서 우리가 알 수 있는 최대치는 “막대한 폭발력을 지닌 핵무기가 4번에 걸쳐 시험되고 그로 인해 강력한 인공지진이 발생했다”는 것이다. 조금 더 나아간다면 “작은 폭발력이 작은 규모의 핵무기를 뜻한다면 미사일에 탑재하여 활용할 수 있을 정도로 소형화, 경량화된 것”이 시험에 사용되었다는 것까지일 것이다.
 

   
▲ 전국에 분포된 지진관측소. [사진출처 - 기상청]
   
▲ 북한 4차 핵실험 직후 관측된 지진파. [사진출처 - 기상청]
   
▲ 북한의 4차 핵실험 지진파 진원지를 적시하고 있는 기상청 관계자. [사진출처 - 기상청]
 

실패와 성공의 차이

북한의 핵시험과 인공위성 발사시험에 대해서는 항상 ‘실패’라는 말이 따라 붙는다. 정확한 정보도 파악하지 못한 상태이지만 ‘실패’라는 판단은 어떤 결론보다 빠르게 나온다. 이번 4차 핵시험도 마찬가지였다. 핵시험에 쓰인 원료는커녕 시험의 목표도 제대로 파악이 안 된 상태에서 ‘실패’라는 말이 먼저 붙었다.

이처럼 북한의 첨단 군사 기술에 대해 ‘실패’라는 말을 붙이는 이유는 뭘까? 이에 대해 고대 그리스 철학자 제논의 논리에서 힌트를 찾을 수 있다. 그는 물체의 ‘운동’을 부정하기 위해 매우 이상한, 하지만 반박하기 쉽지 않은 논리를 제시하였다.

제논의 역설

먼저 출발한 거북이를 뒤늦게 출발한 아킬레스가 따라잡을 수 없다는 주장이 대표적인 제논의 역설이다. 아킬레스가 거북이를 따라 잡으려면 출발할 당시 거북이가 있던 곳까지 달려가야 한다. 그런데 그 동안 거북이는 원래 있던 지점을 떠나서 앞으로 나아갔기 때문에 그 자리에 없다. 첫 번째 실패이다. 다시 그 다음 지점을 보고 아킬레스가 달려간다 하더라도 거북이는 또 다시 앞으로 나아간 이후이기 때문에 역시 아킬레스는 거북이를 따라잡을 수 없다. 두 번째 실패이다.

이런 과정이 무한히 반복되다 보면 아킬레스는 거북이를 절대 따라잡을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이것이 제논의 주장이다. 실패라는 결론을 무한 반복하게 하면서 운동의 존재를 부정하게 만드는 것이 제논의 목적이었다. 물체가 운동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모두 우리 감각이 만든 착각이라는 것이다.

무한 개념

이러한 제논의 주장은 ‘무한’ 개념이 정립되면서 해결되었다. 제논의 역설은 무한개의 토막의 합은 무한하다는 설정인데 무한개의 토막을 합해서 유한한 것이 될 수 있다는 것이 증명되면서 반박된다. 즉 아킬레스가 거북이를 따라잡지 못하는 순간이 무한번 반복되더라도 그 전체를 합한 시간은 유한하게 되어 그 유한한 시간이 지나기만 하면 아킬레스가 거북이를 따라잡을 수 있게 된다는 것. 결국 발빠른 아킬레스가 느린 거북이를 적당한 시간이 지나면 따라잡을 수 있다는 결론이 합리적인 것이다. 제논의 주장이 오히려 모순이고.

북한의 시험 결과에 대한 평가

북한이 인공위성 발사체나 핵무기를 개발했다고 주장하면 항상 제논의 역설과 같은 논리가 등장하여 사실을 제대로 인식할 수 없게 만들어버린다. 북한의 모든 시험들을 실패로 규정하여 결코 성공하지 못할 것이라는 인식을 갖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하지만 북한은 매 순간의 시험들을 통해 더 높은 수준으로 발전하였고 적당한 시간이 지난 다음에는 누가 봐도 성공이라는 결론으로 도달할 수밖에 없는 상태가 되었다.

인공위성 발사체(혹은 미사일) 발사시험을 했다는 주장이 제기되면, 처음에는 고도가 낮아서 실패라고 했다가 그 다음에는 1단, 2단 분리가 안 되어 실패, 그 다음에는 인공위성이 궤도에 제대로 올라가지 않아서 실패라는 식으로 계속 실패했다는 주장이 따라 붙는다. 시험 발사의 목표보다 높은 기준을 제시하면서 실패라는 평가를 내놓으면서 모든 시도가 실패한 것처럼 만드는 논리인 것이다.

하지만 결국에는 아킬레스가 거북이를 따라잡은 것처럼, 북한의 인공위서 발사체(혹은 미사일) 발사시험은 단 분리에 성공하여 대기권을 뚫은 수준의 고도에 있는 궤도에 인공위성(혹은 탄두)을 올리는 데 성공하였다. 계속 실패라는 평가를 받았지만 사실 북한의 인공위성 발사시험은 계속 성공하고 있었던 것이다.

2012년 ‘은하 3-2호’에 대해서는 미국마저도 이례적으로 빨리 성공이라는 평가를 내렸다. 더 이상 실패라고 하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이번에 발사한 ‘광명성 4호’도 마찬가지 절차를 밟았다. 실패라는 평가는 한 번도 나오지 않았다.

발사 후 10분 만에 궤도에 올라갔고 그 순간부터 구글을 비롯한 인공위성 추적 시스템은 실시간으로 광명성 4호의 위치를 알려주었다. 이제는 성공, 실패라는 프레임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으니 이름 프레임을 걸었다. 인공위성이냐 미사일이냐.(광명성 4호에 대해서는 다음 글에서 좀 더 자세하게 이야기하겠다.)

핵시험에 대한 평가

북한의 핵시험도 마찬가지이다. 핵물질을 추출한 후, 무기화한다는 주장에 대해 충분한 핵물질을 확보하지 못했다는 주장부터 고폭장치가 개발 안 되었다, 경량화가 안 되었다, 핵융합기술이 개발 안 되었다, 다단계 핵분열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주장이 계속 제기되었던 것이다. 이는 역시 매번 평가기준을 높이면서 실패했다는 이미지를 덧입히기 위한 논리였다.

이번 4차 핵시험 발표 이후 북한이 수소탄 시험이었다는 발표에 대해 부정적인 평가가 나오는 것도 이런 맥락이라 볼 수 있다. 아직 핵무기 기술의 최첨단에 해당하는 수소폭탄이 아니라 그 기술에 못 미치는 증폭핵분열탄 수준이었다는 ‘실패’의 이미지를 띠고 있는 평가인 것이다.

북한이 어떤 물질과 기술을 사용하였는지는 물론, 무엇을 목표로 삼은 시험을 수행했는지도 불명확한 상태에서 ‘실패’라는 결론만 앞세웠던 것이다.

북한의 핵무기는 이미 2006년에 위험 수준을 넘었다

북한의 핵기술이 최첨단이라고 할 수 있는 수소폭탄까지 도달했는지 안 했는지, 핵분열탄 제조 기술도 완성된 것인지 아닌지, 미사일에 탑재할만한 소형화, 경량화에 도달했는지 안 했는지 등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이런 모든 판단은 북한에서 직접 내놓은 자료말고 평가할 수 있는 근거가 없으므로 객관적으로 판단내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적어도 북한 정부 차원의 공식 발표가 수소탄 기술을 사용하였고 경량화, 다종화 등을 추구하였다고 하니 부정할 논리적 근거가 없으므로 그런가보다 하고 바라볼 뿐이다.

하지만, 이런 질문들에 대한 구체적인 답이 긍정적으로 나와야만 북한의 핵기술이 위험한 것으로 판단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북한이 성공적으로 시험에 사용한 핵무기가 매우, 매우 위험하다는 것은 이미 구체적으로 증명되었다.

즉 2006년 1차 핵시험 이후 북한은 모두 4차례에 이를 외부에 보여주었다. 핵시험의 구체적인 모습은 보여주지 않았지만 매우 강력한 인공지진을 일으킬 가공할 만한 폭발력을 지닌 핵무기를 4번이나 안정적으로 시험에 사용할 수 있는 수준이라는 것을 보여주었다.

즉 북한은 2006년부터 매우, 매우 위험한 무기와 기술을 자체적으로 보유한 ‘핵무기 및 핵무기 제조 기술 보유국가’가 되었다는 점은 명확한 사실이이다.

운전면허 시험에서 70, 80점이라는 절대평가 점수를 넘으면 합격인 것과 같이, 북한은 이미 그렇게 되었다. 운전면허 시험에서 99점인지 100점인지가 중요하지 않듯이 핵무기 제조 기술이 어느 정도 경지에 올랐냐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이미 오래 전부터 상당히 위험한 경지에 올랐다고 평가해야만 하는 것이다.

3년 주기로 프로그램이 확립되었다

이번 시험과 관련하여 가장 중요한 정보는 3년 주기의 핵 프로그램이 확립되어 다른 정책과 독자적으로 운용되고 있다는 것이다. 2013년 핵보유국을 헌법에 명시하면서 핵물질 확보와 관련한 결정이 채택되면서 핵 프로그램이 확립되었다고 봐야 한다. 이는 경제-핵 병진노선에 입각한 2개의 별도 프로그램이 병진적으로 추진된다는 뜻으로 해석될 수도 있는 상황이다.

2013년 북한의 핵 정책 : 경제-핵 병진노선

북한은 2013년 1월 3차 핵시험 이후, 3월 말에 ‘경제건설-핵무력건설 병진노선’을 채택하면서 핵무력을 끝까지 완성하겠다는 의지를 천명하였다. 이는 1962년 ‘경제건설-국방건설 병진노선’을 이어받은 정책으로 선전하는데, 핵무력은 포기하지 않고 이를 중심으로 군사조직을 다시 재편하겠다는 뜻이다.

1962년 ‘경제-국방 병진노선’은 제1경제와 제2경제 즉 민수 경제와 군수 경제를 완전히 둘로 나누어 경제 시스템을 운영하였다면, 2013년 ‘경제-핵무력 병진노선’도 이와 비슷하게 민수와 군수, 특히 핵무력 부분을 완벽히 독자적으로 운영하려는 듯하다.

1962년 경제-국방 병진노선 채택 이후에는 국방 쪽이 더 우선되어 민수가 위축되었는데 2013년 경제-핵무력 병진노선에서는 경제 즉, 민수 쪽이 더 우선되었는지 경공업을 비롯한 인민생활과 직결되는 부분이 더욱 활성화되는 흐름이다.

예전에는 국방건설을 위해 우선적으로 동원되었을 군수 부분도 이제는 인민생활 향상, 즉 경제건설을 위해 더 많이 동원되는 느낌이다. 2013년 신년사부터 새롭게 등장한 ‘군민협동작전’은 아마도 군수의 민수 전환이라고 하는 스핀오프(spin-off)의 북한식 번역어인 듯하다.

즉 2002년부터 경제발전전략으로 자리잡고 추진된 국방공업 우선, 경공업-농업 동시발전 전략에 의해 우선적으로 발전된 군수 부문의 인력, 자원, 자금 등을 민수 부문으로 돌리는 활동을 ‘군민협동작전’이라고 하면서 적극 추진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2013년 병진노선은 군수 중에서도 핵무력 관련 부분은 계속에서 독자적인 시스템으로 보장하고 다른 군수 부문은 민수 부문 활동으로 적극 활용하겠다는 의미라 할 수 있다. 2015년 10월에 처음 개최된 ‘군수공업부문 생활필수품 품평회’는 유모차를 비롯한 인민생활 필수품 생산에 최고 수준의 생산능력을 가진 군수공업부문 공장들이 활용되고 있다는 증거라 할 수 있다.

스핀오프, 즉 군수의 민수 전환 전략을 이야기하면 부정적인 평가가 많다. 오늘날 일상에서 쓰고 있는 첨단 기술들 중에는 군수 기술에서 전환된 것이 많은데도 그 과정에 쉽지 않다는 뜻이다. 이들은 대부분 자본주의 사회의 사례를 기준으로 분석한 것이라 부정적일 수밖에 없다. 사기업 중심의 기술 전환은 서로 경쟁적인 관계를 바탕으로 하기 때문에 어려울 수밖에 없다.

북한의 경우 모든 생산재는 국유 혹은 공동 소유이다. 그리고 사회 전체의 통일단결 수준은 상당한 수준이다. 따라서 자본주의 사회의 경쟁적 관계와는 다른 관계에 있기 때문에 덜 어려울 수 있다. (물론 북한식 경쟁관계의 표출인 기관본위주의 같은 것은 있을 수 있다.) 그리고 군수의 민수 전환이 기업 단위로 일어나지 않고 핵심 기술인력, 자원, 재원, 설비 같은 수준에서 일어난다면 저항감이 적을 수 있다.

북한의 경제발전 전략

고난의 행군을 끝낸 직후인 1998년에 무엇보다 우선적으로 김정일 위원장이 챙긴 것이 과학기술 분야였다. 강성대국 건설 전략에서도 3대 기둥 중 하나로 소개되었다. 아직 완성하지 못한 경제대국 건설을 위해 필요한 것이 과학기술이라고 하면서 중시되었다.

1999년 새해 첫 일정을 ‘과학원’ 현지지도로 시작하고 이 해를 ‘과학의 해’로 선언하기도 하였다. 또한 장기 경제발전 계획은 마련하지 못하였지만 과학기술 발전 5개년 계획은 1998년부터 지금까지 4차에 걸쳐 계속 마련하여 추진하고 있다.

2002년 새로운 상황에 맞추어 정립한 경제발전 전략은 국방공업 우선, 농업-경공업 동시 발전 전략이었다. 1962년부터 별도 영역으로 독립시켜 보호 육성한 군수 분야의 발달한 과학기술 즉 국방 과학기술을 적극 활용하여 경제발전의 동력원으로 삼겠다는 전략이었다. 군수의 민수 전략, 즉 스핀오프(spin-off) 전략이었다.

하지만 이를 제대로 시행하기 위해서는 국제적, 군사적 긴장 관계가 풀리는 것이 필요했는데, 북핵 문제가 다시 불거지면서 계속 해결되지 않아 제대로 시행되지 못하였다.

2차 북핵 위기는 결국 북한의 핵무력 확보까지 이어졌고 이는 북한의 경제발전을 위한 안정적인 환경, 대규모 자금 마련 등을 어렵게 하였다. 2002년부터 시행하려 했던 경제발전 전략은 2009년까지 지연될 수밖에 없었고 그 마저도 충분한 환경이 조성되지 못한 상태에서 북한의 자력만으로 시행되었다.

2009년 8월 첨단돌파 전략이라는 형태로 시행된 북한의 새로운 경제발전 전략은 지연된, 한계가 많은 경제발전 전략이었다. 이는 결국 더딘 변화, 굴곡 많은 사업시행으로 이어졌다.

군사적 대결 상황을 종식시키지 못한 결과, 북한 지도부는 핵과 운송수단 모두 완비하는 방향으로 결심을 굳혔고 이는 최근까지 4차 핵시험, 광명성 4호 발사까지 이어진 것이다.

실험과 시험의 차이

북한의 핵‘시험’을 남한 언론에서는 한결같이 ‘실험’이라고 한다. 이는 단순한 언어 습관의 문제가 아니라 앞에서 이야기한 부정의 이미지 덧씌우기와 연관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실험과 시험을 한글로 쓰면 ‘ㄹ’ 한 획의 차이이지만 의미는 확연히 다르다. 실험은 이론을 발견하고 가다듬어 나가는 과학연구 활동의 일환이고 시험은 구체적인 상품, 생산물을 만들어나가는 과정과 연결되어 있는 활동이다. 즉 기존에 없었던 과학이론이나 주장을 탐구하는 과정에서 ‘실험’을 하는 것이고 새로운 상품이나 생산물을 만든 이후 제대로 작동하는 지 살펴보기 위해 ‘시험’을 하는 것이다.

만일 이러한 정의 차원의 설명이 어렵다면, 그 활동의 결과가 성공하게 되면 어떤 결과가 오는지 살펴보면 좀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실험’에 성공하면 과학이론이 참이라는 것을 증명할 수 있다. 반면 ‘시험’에 성공하면 그 시험에 쓰인 제품이 제대로 작동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론의 생산을 위해 ‘실험’을 하고 제품 생산을 위해 ‘시험’을 수행하는 것이다.

흔히 과학기술이 발달하면 경제가 발전하게 된다고 생각한다. 즉 과학기술의 발달, 생산력 향상, 경제 발전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이다. 이를 모든 경로가 하나로 이어져 있다고 선형모델이라고도 부른다. 하지만 실제 과학기술의 발달 경로와 경제 발전 경로는 매우 복잡하고 여러 층위로 구성되어 있으며 서로 다른 흐름들이 서로 독립적으로 존재하므로 하나로 자연스럽게 이어지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험과 시험을 구분하기 위해 선형모델을 활용해보면 이해하기 좀 더 쉬워진다. 과학자들이 고심한 끝에 ‘이론’을 제기하면, ‘실험’과 ‘토의’를 이어가다가 ‘수정’과 ‘보완’을 거듭한 끝에 최종적으로 ‘참’이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참으로 밝혀진 이론 중 일부가 ‘생’' 현장의 필요한 곳에 도입되려면 여러 번의 ‘시험’을 거듭하면서 상품이나 생산 공정의 수정을 해야 한다. 이러한 일들이 반복된 다음 최종 ‘시험’을 거치면 새로운 상품이나 생산 공정이 완성되었다 할 수 있다. 여기서 ‘실험’은 과학 연구 쪽에 속해 있다면 ‘시험’은 생산 쪽에 속해 있다는 것이 명확히 보인다.

실험과 시험의 차이는 영어로 번역하면 너무나 명확하게 구분된다. 실험은 experiment이고 시험은 test이다. 북한의 핵시험에 대해 남한 언론에서는 experimet라고 하는 핵실험으로 일관되게 쓰고 있지만 모든 영어 표현은 test로 표현된다.

[핵실험, 핵시험 용어와 관련한 좀 더 자세한 내용은 프레시안에 기고한 글을 참고하라. <관련기사 보기>]

북한 과학기술/핵물리학의 역사

북한의 인공위성 발사시험이나 핵시험이 진행되고 나면, 북한의 과학기술 수준에 대한 이야기가 항상 따라 나온다. 남루한 영상으로 소개되던 북한이, 경제가 낙후하여 밥도 제대로 못 먹는다는 북한이, 망하기 직전이라고 하는 북한이 어떻게 이렇게 발달한 기술들을 보유할 수 있었느냐는 의문에서 파생된 이야기일 것이다.

결론적으로 이야기하면, 북한의 과학기술 역사는 매우 오래전부터 시작되었고 특히 핵물리와 관련한 연구는 매우 오래전부터 국가적 지원을 받으면서 진행되었다는 것이다.

[북한의 핵물리학의 역사는 프레시안에 기고했던 글의 일부로 대신한다. 2013년 3차 핵시험 이후 쓴 글이다. <관련기사 보기>]

월북 과학기술자

북한 과학기술의 역사는 월북한 과학기술자들에 의해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제시기 형성된 과학기술자가 다른 분야에 비해 매우 적었기도 했고, 어렵게 길러진 과학기술자들도 대부분 해방 당시 남한 지역에 거주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북한 최초의 과학기술 중앙연구소라 할 수 있는 ‘북조선중앙연구소’가 1947년 2월 설립되었다가 제대로 가동되지 못하고 김일성종합대학에 흡수된 것도 연구기관을 이끌어갈 과학기술자가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부족한 과학기술자를 확보하기 위해 북한 지도부는 다양한 노력을 기울였다. 김일성종합대학을 비롯하여 다양한 교육기관을 만들어 새로운 인재를 직접 양성하기 시작하였고 우수한 인재를 선발하여 소련 등으로 유학을 보내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렇게 길러진 과학기술자들은 실제 연구나 행정에 바로 투입할 수 없었기 때문에 곧바로 활용가능한 인력, 즉 일제시기에 교육받은 과학기술자(북한에서는 이들을 ‘오랜 인텔리’라고 부른다)를 확보하기 위해 남한에 있던 과학기술자들을 월북하도록 유도하였다.

1947년에 개교한 흥남공업대학은 두 정책이 결합된 결과라 할 수 있는데 월북 과학기술자들에게 교수 직위와 연구 환경 보장 약속을 지키기 위한 조치였다.

1952년 과학원 개원

과학기술자 확보를 위한 북한 지도부의 노력은 상당히 효과적으로 진행되었다. 인력부족으로 1947년에 실패로 끝난 중앙연구소 건설 시도가 1952년에는 성공했기 때문이다. 자연과학과 기술과학뿐만 아니라 사회과학, 의학, 농업과학 등 모든 학문 영역을 포괄한 북한 최고의 중추 연구기관인 ‘과학원’(오늘날은 ‘국가과학원’, 당시에는 ‘과학 아카데미’)이 전쟁 중이던 1952년 12월 1일에 개원되었다.

당시 과학원을 대표하는 학자들에게 ‘원사’, ‘후보원사’ 칭호를 부여하였는데 원사 10명 중 8명(80%)이 월북한 사람이었고 후보원사 15명 중 9명(60%)이 월북한 사람이었다. 이들은 최소 1960년대 초까지, 길게는 1970년대 중반까지 북한 과학기술계의 핵심 연구 인력으로 활동하였고 대부분의 성과는 이들에 의해 만들어졌다.

도상록

당시 월북한 과학기술자 중 물리학계 ‘원사’ 칭호를 받은 ‘도상록’이 북한 물리학, 좁게는 핵물리학 혹은 원자력 연구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 그는 월북할 때 동료 및 제자들과 함께 월북하여 북한 물리학계 전체를 구성하였다. 게다가 그는 월북 직후 김일성과 면담을 통해 과학기술 연구에 대한 중앙 차원의 집중 지원을 약속받았고 이후 과학원 창립 당시 실질적인 역할을 담당했을 만큼 북한 과학기술계 형성에 핵심적인 일을 하였다.

도상록은 1932년 동경제국대학 이학부를 졸업하였다. 그는 일제시기에 박사학위를 받지는 못하였다. 하지만 당시 물리학계의 최첨단 분야인 양자역학(핵물리학의 기본)에 대한 실력은 출중하여 자신의 논문을 1940년에 영문으로 발행되던 ‘일본수학물리학회기사’에 게재하기도 하였다.(“고유치 문제와 하이젠베르크의 불결정관계”, “맥스웰의 방정식에 대하여”, “전자기마당의 근본방정식에 대하여” 등이 그가 했던 강연 제목이었고 그가 발표한 논문의 제목은 “헬륨수소분자이온에 대한 양자역학적 취급”이었다.)

졸업 이후 그는 개성의 송도고등보통학교에서 잠시 학생들을 가르치다가 1940년 만주의 신경공업대학 교수로 자리를 잡았다. 해방되자마자 그는 서울로 들어와 경성제국대학을 경성대학으로 바꾸는 데 앞장섰다. 그는 흩어져 있던 물리학자들을 모아 경성대학 물리학과를 정상화시킴과 동시에 경성대를 자체적으로 운영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하지만 미 군정이 어렵게 운영되기 시작한 경성대학을 인정하지 않고 그를 비롯한 미 군정에 비판적이던 교수들을 배척하기 위해 서울 시내 여러 대학들을 통합하여 '국립서울대학교'를 설치하겠다고 발표하자 월북하였던 것이다. 당시 도상록과 함께 월북하여 북한 물리학계, 특히 핵물리학(원자력 연구) 분야를 이끌었던 사람은 한인석, 정근, 전평수, 려철기 등이었다.

월북 직후 도상록은 교육사업에 전념하였다. 1946년부터 시작된 유학생 파견사업에 관여하기 시작하였고 1946년 9월에 개교한 김일성종합대학의 물리수학부 부장, 연구원장 등을 역임하였다. 그리고 “력학”, “량자력학”, “원자에네르기와 그의 평화적 리용”, “원자핵에 관한 보충 자료” 등 교재를 직접 쓰거나 번역하는 일을 많이 하였다. 1952년에는 자신의 일생일대의 꿈이었던 중앙 과학기술 연구소 설립을 위한 실무를 담당하여 ‘전국 과학자대회’ 개최와 ‘과학원’ 설립을 직접 추진하였다.

핵관련 연구기관

1952년 과학원이 설립될 당시에는 핵관련 연구조직이 전혀 없었다. 과학원은 소련의 과학 아카데미를 모방하여 만든 것이었는데 1952년 12월 개원 당시에는 8개의 연구소만 설치되었다. 과학연구활동과 기술지원활동을 구분하여 중앙 연구소에서는 이론적인 연구를 주로 담당하고 관련 부처(생산성) 산하 연구소에서는 생산현장에 대한 기술지원 활동을 담당하던 소련 시스템에 따라 학문 분야별로 연구소가 조직된 것이다.

하지만 개원 직후 북한 지도부는 소련처럼 과학기술계의 역할 분담이 어렵다는 상황을 인지하고 생산현장에 대한 기술지원까지 중앙연구소(과학원)에서 담당해야 한다는 결정을 내려 과학원 산하에 ‘공학연구소’를 추가로 설립하였다. 이로써 과학원은 9개의 연구소로 활동을 시작할 수 있었다.

당시 설립된 연구소 중에서 물리학 분야는 ‘물리수학연구소’가 설립되었는데 그 아래에는 3개의 연구실(수학연구실, 실험물리연구실, 이론물리연구실)만 만들어졌다. 북한 최초의 핵관련 연구조직인 과학원 물리수학연구소 ‘핵물리연구실’은 1955년 12월 혹은 1956년 1월에 단행된 과학원 1차 조직개편 당시 만들어졌다. ‘과학원 통보’에는 1955년 4월경에 핵물리 관련 연구실을 조직하기로 결정하였다고 나와 있다. 이 당시 새로 생긴 ‘핵물리연구실’을 최근 언론에서는 ‘핵물리연구소’로 잘못 소개하고 있다.

드브나 연합핵연구소와 공동연구

아마도 이 당시 서둘러 ‘핵물리연구실’을 꾸린 것은 1956년 3월에 설립예정이던 ‘연합핵연구소(JOINT INSTITUTE for NUCLEAR RESEARCH)’에 참가하기 위함이었던 것 같다. 모스크바 근교에 있는 드브나에 세워진 ‘연합핵연구소 JINR’는 당시 공산주의 국가 12개가 멤버로 참가하여 꾸려진 핵물리(원자력) 연구소로 북한은 창립 멤버로 참가하였다.

북한 입장으로서는 이 연구소 설립과 운영에 참가함으로써 핵물리(원자력) 관련 지식을 습득하는데 도움을 많이 받을 수 있었던 것 같다. 1959년에 발간된 과학원 통보에는 소련의 도움으로 ‘연구용 원자로’를 만들 수 있었고 입자가속기의 일종인 ‘베타트론’을 제작할 수 있었다고 한다.

도상록은 이러한 활동에 직접적으로 관여하였다. 그러한 활동을 높이 인정받아 도상록은 1973년에 김일성 훈장을 받았고 1986년에는 인민과학자 칭호를 받았다.

1958년 3월에 개최된 ‘제1차 당대표자회의’에서는 천리마운동 등으로 가속된 경제발전 속도에 맞추어 경제발전계획을 수정하면서 연구용 원자로, 베타트론 건설과 함께 ‘원자력 연구 중심’과 ‘동위원소 실험실’을 새롭게 설립할 것을 결정하였다. 이에 따라 1961년에는 원자력 관련 중추 지도기관인 ‘원자력 위원회’가 조직되었고 1962년에는 평북 영변과 박천에 ‘원자력연구소’가 세워졌으며 김일성종합대학과 김책종합대학에도 핵관련 연구소가 추가로 설치되었다.

또한 당시 원자력 연구는 ‘평화적 이용’을 위한 것이라는 목적이 제한되어 있었는데 그 대표적인 사례가 방사선 동위원소를 이용하는 것이므로 ‘동위원소 연구실’ 설치가 의결되었던 것이다.

1956년부터 구체적으로 진행된 북한과 소련 사이의 원자력 관련 사업은 흔히 알려진 것처럼 핵무기 제조와 관련된 것이 아니었다. 핵을 평화적으로 이용하기 위한 공동연구 차원의 것이었다. 북한도 소수지만 이미 훌륭한 핵물리학자들을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국제적 공동연구활동에 참가할 수 있었다.

당시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에 대한 대표적인 사례는 방사선 동위원소를 활용하는 것이다. 방사선을 이용하여 물질을 파괴하지 않은 상태로 조사할 수도 있고 동위원소를 이용한 원자 수준의 정밀한 추적 조사도 가능하여 연구 활용도가 많았다.

1956년부터 핵관련 활동에는 북한과 소련이 협력활동을 정상적으로 진행하였지만 정치적으로는 두 나라 사이에 갈등이 심해졌다. 국제 분업체계에 들어오라는 소련의 제안을 김일성이 거부하면서 빚어진 갈등은 1957년부터 계획된 북한의 경제발전계획에 소련이 반대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그리고 1956년 말에는 경제발전계획에 필수 조건인 강재 생산에 절대적인 지원을 소련이 거부함으로써 갈등은 더욱 깊어졌다. 게다가 1956년 8월에 발생한 북한 역사상 최대의 종파사건에 대해 소련이 힘을 보태는 조치를 취해서 두 나라 지도부 사이는 더 벌어졌다.

이런 상황이었던 만큼 소련이 북한에 대해 핵무기 관련 기술을 이전했을 리는 거의 없었다.

소련뿐만 아니라 중국도 자체적으로 핵무기 제조 기술을 확보하였지만 북한으로의 기술이전에 대해서는 거부하였다. 이로 인해 북한은 핵관련 기술을 자체적으로 확보할 수밖에 없었다. 아마도 그 시작은 1960년대 초에 벌어진 쿠바사태였을 것이다. 미국에 대항하던 소련의 행동을 지켜보면서 북한지도부는 소련이 핵우산을 제공하겠다던 약속을 믿을 수 없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오늘날 실질적인 핵물리학 연구 책임자는 서상국이라 한다. 1938년생인 그는 1960년대 중반 즈음에 소련으로 유학갔다가 돌아온 이후 오랜 기간 김일성종합대학 물리학부 강좌장을 역임했다. 김정일이 특별히 아꼈다고 하는 그를 1998년에 <조선중앙통신>에서는 “지난 30여 년간 후대교육사업과 과학연구사업을 벌이면서 ‘양자역학’, ‘소립자이론’ 등 40여 편의 저서와 100여 건의 가치 있는 소논문을 집필했으며 8명의 박사와 20여 명의 학사(석사)를 키워냈다”고 소개했다. 그는 김일성상과 로력영웅 칭호를 받았으며 2012년에 새로 제정된 김정일상도 수상하였다고 한다.

미국의 대응 전략 : 전략적 인내, 무시, 유도

오바마 정부의 대북 정책은 ‘전략적 인내(strategic patience)’로 소개된다. 이는 2010년 11월 오바마 대통령의 발언, 즉 “북한의 ‘목적의 진정성’(seriousness of purpose)을 확인하지 않고서는 할 수 있는 조짐 없이 6자회담 재개를 위한 노력을 기울이기 어렵다”라는 말과 같은 뜻이다.

그냥 해석하기에는 북한이 바뀌려고 진지하게 이야기하고 노력하지 않는 이상 미국은 먼저 움직이지 않고 인내하면서 지켜볼 것이라는 뜻이다. 이 말을 돌려보면 이제 미국이 노력한다고 북한의 변화를 이끌어낼 수 없다는 판단이 깔려 있다. 이는 전략적 인내라기 보다 ‘전략적 포기’라는 뜻이 더 정확할 듯하다. 북한의 비핵화는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최대한 시간을 끌면서 동북아 질서를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재편하겠다는 속내라는 해석들이 있다.

사실 북한의 핵보유는 2005년 2월에 선언되었고 2006년 10월에 1차 핵시험이 진행되면서 실질적으로 증명되었다. 미국은 1차 핵시험이 진행되기 이전인 2005년 9월에는 9.19 공동성명을 이끌어내면서 북한의 비핵화를 위해 노력했지만 1차 핵시험 이후에는 비핵화를 위한 실질적인 합의를 이끌어내지 못하였다.

오히려 2008년 12월 미군 합동군사령부가 북한을 ‘핵보유국(Nuclear Power)’으로 명기한 보고서를 공개하였고, 2009년 4월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모하메드 엘바라데이 사무총장은 북한이 핵무기를 가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라고 분명히 발언하였다. 2009년 5월 2차 핵시험은 이제 북한의 핵무기 보유국이 아니라고 주장할 수 없게 만들었다. 비핵화노력이 거의 불가능하게 된 것이다.

2012년 2월 북미 사이의 비밀 협상에 의해 핵문제 해결을 위한 합의가 있었다고 나중에 알려졌지만 이는 공개되기도 전에 합의가 깨져서 무의미하다.

오히려 북한은 2012년 4월에 사회주의 헌법을 개정하면서 ‘핵보유국’을 명시하였다. 2013년 1월 3차 핵시험까지 진행한 북한은 2013년 3월에 ‘경제건설과 핵무력건설 병진노선’을 채택하였고 당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는 이를 위한 구체적인 결정이 채택되었다. 2013년 4월에는 최고인민회의에서 “자위적 핵보유국의 지위를 더욱 공고히 할 데 대하여”라는 법령이 채택되었다.

이제 북한 핵관련 문제는 단순히 보유한 핵무기 해체나 핵물질 파악 수준을 넘어 헌법과 법령 등을 수정해야 하는 복잡하고 어려운 문제가 되어버렸다. 되돌리기에는 너무 많이 나가버린 상황이라 할 수 있다.

이렇게 보면, 미국의 전략적 인내라는 정책은 전략적 포기, 전략적 무시를 넘어 전략적 유도라고 할 수도 있겠다. 어차피 핵관련 활동을 제대로 정리하지 못할 바에야 핵무기 보유를 위한 활동을 유도하여 경제발전으로 국력을 돌리지 못하게 유도하자는 게 아닐까?

북한을 핵무기 혹은 핵무기 제조 기술 보유국으로 인정하게 되면 지금까지의 북핵 협상은 비핵화가 아니라 핵 군축협상이 되어야 한다. 즉 북한을 비롯한 동북아 전체 구도가 완전히 바뀌어야 하니 최대한 시간을 끌면서 북한의 변화를 저지시키고 미국에 유리한 구도로 만들겠다는 의도가 있는 게 아닐까 싶다.

결국

북한의 핵문제는 이전과 다른 상황에 놓였음을 받아들여야 한다. 북한은 이미 위험 수준을 넘은 핵을 보유하고 있다. 그리고 북한의 핵프로그램은 독자적 흐름을 확보하고 있다. 이는 웬만하면 북한의 핵프로그램을 멈추고 없애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북한의 핵은 이제 없애지 못한다. 아니 해체한 이후에도 북한에 핵무기가 없을 것이라 장담할 수 없게 되었다. 핵포기가 아니라 핵동결부터 합의해야 한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
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