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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아내 죽인' 조총련의 모국방문 수용한 까닭

 

[북핵 20년과 박근혜의 '역주행' ②] 박근혜 반대에도 박정희가 '국익 최우선' 결단

16.02.28 19:41l최종 업데이트 16.02.28 19:41l

 

 

국가정보원의 전신인 중앙정보부의 역사(1961~1980)는 박정희 정권의 18년 역사와 궤를 같이한다. 중앙정보부를 창설한 목적 자체가 "혁명(5.16 군사쿠데타)을 보위할 악역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중앙정보부 초대 부장을 지낸 김종필은 회고록에서 중정 창설 배경을 "혁명 과업을 뒷받침하려면 무서운 존재가 필요하다"고 밝힌 바 있다.

"5·16 혁명의 성공으로 나는 '혁명 설계자'의 임무는 마쳤다. 이젠 혁명정부를 뒷받침하는 보조자 역할에 충실하기로 했다. 국가 개조라는 큰일을 이루려면 악역(惡役)도 필요하다. 혁명 정신, 궐기의 뜻을 아는 사람이 그 일을 주도해야 한다. 남들은 해(害)가 돌아올까 두려워서 주저했다. 내가 다시 나설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중앙정보부를 만들고 초대 부장이 된 이유다."(김종필 증언록 '소이부답' 15 : 한국판 CIA의 출범, 중앙일보, 2015. 4. 3)

중앙정보부는 '한국판 CIA'가 아니라 '한국판 KGB'

김종필은 회고록에서 미국 중앙정보국(CIA)를 모델로 한 '한국판 CIA'를 만든 것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CIA와 FBI(연방수사국)로 분리된 미국과 달리 중앙정보부는 비밀정보기관이 수사권까지 가졌다는 점에서 구소련 비밀정보기관 KGB의 권능을 본뜬 '한국판 KGB'라고 하는 게 정확하다. '우리는 음지(陰地)에서 일하고 양지(陽地)를 지향한다'는 부훈도 김종필이 직접 지었다. 그는 부훈에 담은 원칙과 철학을 이렇게 설명했다.

"중앙정보부는 근대화 혁명의 숨은 일꾼이어야 한다. 정보부원은 자꾸 나타나려고 하면 안 된다. 숨어서 정부를 뒷받침해야 한다. 밖으로 드러나는 건 사람이 아니라 그 성과여야 한다. 응달에서 묵묵히 일하는 걸 몰라줘도 좋다. 우리가 만든 정보를 국정 책임자가 사용해서 국가 발전에 이바지하면 그게 바로 양지를 사는 것이다."(김종필 증언록 '소이부답' 15)

음지에서 활동하며 자신의 성과를 드러내지 못하는 것은 모든 비밀정보기관의 숙명이다. 그러나 오랜 시간이 지나 비밀이 해제되면 그 성과는 역사의 기록으로 남는다. 1975년 재일총련(조총련) 모국방문은 국정원이 자랑하는 중앙정보부의 대표적 성과 중의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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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4년 8월 15일 광복절 기념식 당시 육영수 피격 모습을 담은 현장 영상
ⓒ 국가기록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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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 8월 15일 오전 10시 23분께 광복절 기념식이 열린 서울 장충동 국립극장에서 7발의 총성이 울렸다. 4발은 저격범이 쏜 것이고 3발은 경호원들이 쏜 총알이었다. 그 중의 하나가 대통령 부인 육영수에게 맞았다. 정부 당국은 사건 발생 불과 이틀만에 북괴의 지령을 받은 조총련계 재일교포 문세광의 박정희 대통령 저격 미수 사건이라는 수사결과를 발표했다.

당시 대학(서강대 전자공학과) 졸업 후 프랑스 유학 길에 올랐던 22살의 박근혜 대통령(아래 박근혜)은 친구들과 여행 중이던 어느날 어머니한테 무슨 일이 생겼으니 급히 짐을 싸고 서울로 돌아오라는 전갈을 받는다. 박근혜는 탑승 수속을 받던 파리 공항에서 신문 1면에 실린 '암살'이라는 글자와 어머니 사진을 보고서 "온몸에 수만 볼트의 전기가 흐르는 것처럼 쇼크를 받았다"면서 국민장으로 치러진 영결식 당시의 심경을 자서전에 이렇게 적었다.

"날마다 어머니의 죽음이 일일 드라마처럼 수시로 방영된다는 사실은 견디기 힘든 고통이었다. 범인은 일본 여권을 가진 간첩 문세광으로 밝혀졌다. 배후세력에는 조총련이 도사리고 있으며 북한의 지령에 의한 범행이었다."(박근혜, 절망은 나를 단련시키고 희망은 나를 움직인다, 위즈덤하우스, 2007년)

박근혜, "'간첩 문세광'과 '조총련이 도사리고'…"

'간첩 문세광'과 '조총련이 도사리고' 같은 표현에서 박근혜의 북한에 대한 시각을 가늠할 수 있다. 박근혜는 이후 학업(유학)을 포기하고 어머니를 대신해 퍼스트레이디의 길을 걷는다. 박근혜는 자서전에 이때의 '정치수업'에 대해 "아버지가 국토시찰이나 산업현장을 방문할 때면 아버지를 수행하면서 많은 것을 배웠다"고 기록했다. 또한 "'국익 최우선'이라는 아버지의 정치신념은 확고했다"면서 "화가를 아버지로 둔 아이가 다른 아이들보다 빨리 미적 감각을 습득하는 것처럼, 나는 대통령인 아버지를 통해 외교감각을 익히고 다른 나라의 정상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해 나가는 중요한 노하우를 배웠다"고 기록했다.

70년대는 김일성이 통일전선전략을 펼치는 가운데 남북한이 극심한 체제경쟁을 벌이던 때였다. 75년 4월30일 월남이 북베트남에 패해 베트남전이 종결(당시는 '베트남 공산화')되자 인도차이나 사태로 인한 안보 위기가 고조되었다. 고위 탈북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실제로 김일성은 베트남 통일에 고무되어 남한 민중의 호응에 의한 통일을 낙관했다고 한다. 육영수 저격으로 시작된 '북괴 규탄 안보궐기대회' 같은 관제데모는 '베트남 공산화'로 더 빈번하게 열리던 시절이었다.

그 무렵 중앙정보부는 북한과 재일총련(조총련)과의 연계를 끊을 본질적 해법으로 제시한 '조총련계 모국 방문단 사업'을 두고 갑론을박했다. 조총련계 모국 방문단 사업은 문세광 사건 이후 74년말 정보부 차장보를 하다가 주일공사로 간 조일제(10-11대 국회의원 역임)의 아이디어였다. 조일제의 아이디어는 '참신'했지만 정보부로서는 '혁신적'인 그 내용을 차마 청와대에 건의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 무렵(75. 5. 21) 박정희는 김영삼을 청와대로 불러 "내자(內子)가 없으니 꼭 절간에 있는 것 같아요. 나 이런 절간 같은 데서 오래 할 생각 없어요"라고 말하면서 손수건을 꺼내 눈가를 훔치기도 했다. 대통령의 이런 사정을 잘 아는 정보부로서는 영부인을 저격한 조총련계의 모국방문을 건의하기가 부담스러웠던 것이다. 또한 대통령의 이런 사정을 잘 알기에 정보부가 '채홍사' 역할까지 담당한 사실은 김재규가 박정희를 시해한 10.26 사건의 법정 재판에서 드러난 바 있다.

모국 방문사업, 조일제 아이디어→김영광 건의→박정희 재가

김영삼과의 영수회담 이후 어느 날 박정희는 청와대로 신직수 중앙정보부장과 김영광(14대 국회의원 역임) 중정 판단기획국장, 그리고 박경원 내무부장관 등을 불렀다. 함께 국수를 먹으면서 환담을 하던 박정희는 아무 말 않고 듣기만 하는 김영광에게도 "좋은 생각 있으면 얘기 해보라"고 말을 시켰다. 이때 박정희와 김영광 사이에 오간 대화는 <남산의 부장들>(김충식, 폴리티쿠스, 2012년 개정증보판)에 자세히 나와 있다.

"각하, 작년의 문세광 사건 이후 재일 조총련 문제를 보다 적극적으로 다루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에게 우리 대한민국의 발전상을 보이고 각하의 영도력을 보인다면 반드시 성공하리라고 생각합니다."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박 대통령은 손끝을 부르르 떨었다. 조총련이라는 말에 눈빛이 달라지면서 역겨운 기색이었다. 좌중은 어색해질 수밖에 없었고 김영광은 후회했다. 남산에 돌아온 신직수 부장은 김 국장을 질책했다. "왜 각하께 조심하지 않고 그런 말을 불쑥하오. 그쪽(조총련)은 영부인을 살해한 가해자인데 '가해자의 손을 잡고 각하 가슴에 품으시라'고?"

며칠 후 신 부장은 (김 국장의) 사표를 받은 대신 말했다. "각하께서 김 국장 의견을 세부 게획까지 짜서 보고하라고 하십니다." 박 대통령은 그걸 결심하면서 "근혜도 반대했어. 하지만 내가 대통령이기에 결심한 거야. 조직적이고 계획적으로 해서 좋은 성과를 얻어야 해" 하고 말했다.(<남산의 부장들>, 618~619쪽)

당시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한 박근혜가 반대 입장을 취한 것이 눈에 띈다. 갑작스레 어머니를 흉탄에 잃은 23살의 나이를 감안하면 반대의 심경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앞에서 본 것처럼, 2007년 대통령선거에 나서면서 낸 자서전에도 '간첩 문세광'과 '조총련이 도사리고' 같은 표현을 사용한 것을 보면 그때의 트라우마가 여전히 남아 있음을 알 수 있다.

테러방지법은 '음지의 괴물에 날개 달아주는 격'

이후 조총련계 신문들이 연일 "총련계 모국 방문사업이 민족분열을 조장하는 짓이다"고 극렬하게 반대했지만, 이 사업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중정은 공작적 냄새를 없애기 위해 야당의 대표적 여성 정치인 박순천에게 환영사를 하도록 기획했다. 그해 9월 15일 조총련계 제1차 모국 방문단 700명이 방문하자 그는 환영사에서 이렇게 말했다.

"몽매에도 그리워하던 고국에 오신 동포 여러분! 일본으로 돌아가실 땐 고국의 흙 한줌씩을 봉투에 담아가셔서 이 땅을 생각하고 일본에 묻힐 땐 그 흙과 함께..."

'여당보다는 야당, 남자보다 여자 연사'를 내세운 중정의 기획은 방문단의 심금을 울리는 대성공이었다. 당시는 재일총련에서 만경봉호에 재일동포 조국 방문단을 경쟁적으로 태워 보내던 시절이었다. 결국 국정원이 자랑하는 조총련계 모국 방문 공작은 주일공사 조일제의 아이디어와 판단기획국장 김영광의 보고, 그리고 대통령 박정희의 '국익 최우선' 결정이 어우러져 성사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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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종필 전 총리가 2015년 11월 22일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고 김영삼 전 대통령 빈소에서 조문한 뒤 슬퍼하고 있다.
ⓒ 사진공동취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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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필은 5.16 쿠데타 후 구성된 국가재건 최고회의에서 중앙정보부법 입법 취지를 설명할 때 "수사권은 혁명정부 기간에만 잠정적으로 갖는 겁니다. 민간정부가 정식 출범한 뒤엔 수사권은 법무부 수사국에 환원시킵니다"라고 한시적 권한임을 강조했다. 그러나 그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김종필은 회고록에서 뒤늦게 고해성사를 했다.

"이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나는 63년 1월 정보부장직을 내놨다. 그해 12월 민정으로 이양했지만 정보부는 수사권을 유지했다. 그 후 후임 부장들 일부는 정보부의 기본 임무와 역할을 망각했다. 정치적 상황에 편승해 때로는 월권과 남용으로 국민의 지탄과 원성의 표적이 되기도 했다. 지금까지도 수사권을 붙들고 놓으려 하지 않는다. '음지와 양지'의 정신도 훼손됐다. 나는 정보부 창설자로서 그 책임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김종필 증언록 '소이부답' 15)

수사권을 가진 비밀정보기관은 김종필의 의도와 달리 '음지의 괴물'이 되어 버렸다. 권력기관은 한번 만들면 바꾸기 힘든 속성이 있다. 냉전의 해체와 남북교류협력으로 간첩 잡는 '일감'이 줄어들자 국정원의 수사권은 탈북자 간첩을 만들어내는 데 사용되는 용도로 유지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대통령 박근혜는 테러방지법을 만들어 모든 테러 용의자의 사생활-계좌-통신의 추적 권한까지 부여하려고 하고 있다.

테러방지법은 '음지의 괴물에 날개를 달아주는 격'이다. 개성공단 폐쇄 이후 벌어지는 '국정 역주행'은 40년 전 조총련 모국 방문사업을 재가한 박정희의 '고독한 결단'을 기억하면 할 수 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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