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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년 전 할아버지가 못 이룬 야권 통합, 손자가 이룰까

 

김병로 국민의당 대표, 1963년 박정희에 맞서 야권연대 추진했다 무산… 손자 김종인 승부수 먹힐까

이재진 조윤호 기자 jinpress@mediatoday.co.kr  2016년 03월 08일 화요일
“가장 존경하는 사람으로 조부이신 가인 (김병로) 선생님을 꼽으셨다”
“그건 내가 언제나 그렇게 생각해요”
“76세에 당을 만들지 않았나. 조부님께서”
“77세요. 그 때 조부 연세와 내 나이와 똑같아. 우연인지 모르지만.”
 
김종인 더불어민주당 비상대책위원회 대표가 중앙일보와 인터뷰에서 조부 가인(街人) 김병로에 대해 떠올린 답변이다. 
 
김종인 대표의 리더십을 놓고 조부 김병로의 정치를 따라배웠던 경험이 바탕이 됐을 것이라는 분석이 많다. 조부 김병로를 떼놓고 김종인을 평가할 수 없다는 것이다. 특히 야권통합과 관련해 할아버지의 뼈아픈 경험은 김종인 대표의 정치 인생에서 큰 부분을 차지한다. 
 
김종인 대표의 조부 김병로는 일제강점기 독립투사들을 변론하면서 민족 변호사로 명성을 얻었고 해방 후 대한민국 정부 초대 대법원장을 지냈다. 이승만 대통령이 사법부에 압력을 가할 때 사법부의 독립을 주장하며 '억울하면 절차를 밟아 항소하라'며 맞받아친 것은 유명한 일화로 남아있다. 
 
김병로는 1957년 12월 정년퇴직을 하고 본격적으로 정치 행보를 시작했다. 1940년생인 김종인 대표는 부친이 일찍 사망하면서 조부 김병로 슬하에서 자랐고 자연스레 당시 할아버지를 옆에서 지켜보면서 정치를 배웠다. 
 
1963년은 김 대표가 야권통합 실패라는 쓰디쓴 경험을 배웠던 해였다. 당시 5. 16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는 1962년 3월 국가재건최고회의에서 정치활동정화법을 제정해 정치인 4300여명의 공식적인 정치활동을 중단시켰다. 정치활동 규제는 이듬해 1월 1일 풀렸다. 
 
박 전 대통령은 군정기간 2년이 끝나면 민간에 정권을 돌려주겠다고 약속했지만 이를 번복하고 공화당은 당시 최고회의 의장이었던 박 전 대통령을 후보로 추대했다. 정치활동 규제가 풀리면서 야당은 박정희 후보에 대항해 바삐 움직였다. 그해 5월 김병로와 제2공화국 윤보선 전 대통령 등 민주당 구파 계열 인사들은 민정당을 창당했고 김병로는 대표 최고위원에 올랐다. 
 
김병로는 범야권의 대동단결을 통한 야당을 만들어 박정희 전 대통령에 맞선 단일후보 조정 작업에 돌입했다. 하지만 야권의 통합 작업은 순탄치 않았다. 윤보선을 대선 후보로 추대했지만 민정당은 범야 단일 정당을 만들기 위해 신정당, 민우당과 함께 3당 통합추진위원회를 결성하고 대통령 단일 후보를 내세우려고 했다. 그래서 그해 8월 1일 만들어진 당이 국민의당이었다. 그리고 김병로가 민정당 대표 최고위원과 국민의당 대표 최고위원을 맡을 때 그를 보좌했던 사람이 김종인 대표였다. 
 
야권통합의 틀은 만들어졌지만 야권은 대통령 단일 후보 선출을 놓고 극심한 갈등을 겪었다. 단일 대통령 후보로 거론된 사람은 김병로, 윤보선, 허정 과도정부수반, 이범석 초대 국무총리 등이었다. 1963년 10월 대선을 40여일 앞두고 국민의당은 창당대회를 열어 대선 후보를 선출하려고 했다. 군사 정권에 맞서 나라의 원로인 김병로를 대선 후보로 선출하자는 안과 당선 가능성이 큰 윤보선을 단일 후보롤 세워야한다는 안이 대립했다. 그리고 급기야 허정을 야권후보로 추대해야 한다는 의견이 맞서면서 단일정당 대통령 후보 선출은 난항을 거듭했다. 결국 윤보선은 민정당 후보로 독자 입후보했고 허정은 국민의당 대통령 후보로 등록했다. 
 
공화당 박정희 후보에 맞서 야권에서 두 후보가 나오면서 분열의 패배는 예견된 일이었다. 대선 투표일을 10여일 앞두고 허정은 후보직을 사퇴했지만 이미 야권표가 분산돼 윤보선 후보는 박정희 후보에게 15만표차로 패배했다. 김종인 대표는 조부 김병로의 집에서 윤보선과 허정이 모여서 한  단일후보 작업을 옆에서 지켜봤고 야권통합 작업이 후보 분열로 실패한 것을 목격했다. 대통령 선거 한 달 뒤에 치뤄진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공화당에 3분의 2에 가까운 의석을 내줬다. 정치에 가정은 없다고 하지만 야권 단일 후보 작업이 성공적으로 이뤄지고 박정희 후보에 맞서 야권 후보가 승리했다면 역사의 큰 흐름이 바뀌었을 것이다. 김병로는 대선과 총선에서 야권이 실패한 것으로 보고 이듬해인 1964년 1월 숨을 거뒀다. 
 
김종인 대표를 잘 아는 한 관계자는 “가인 김병로, 할아버지를 평소 존경해오고 정치를 배웠던 김 대표에게 당시 단일화 과정은 큰 정치적 경험이 됐을 것이고 최근 김 대표의 공세적인 통합 메시지와도 무관치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 대표가 국민의당에 야권통합을 전격 제안한 것을 두고 통합의 가능성을 높게 보기보다는 통합의 명분을 선점하겠다는 의도가 강하다는 분석이다. 타이밍상 적극적인 행동에 나섰을 때 조부 김병로처럼 통합의 주도권을 잡을 수 있고 설령 실패하더라도 책임을 상쇄시킬 수 있다. 한편으론 야권 분열시 공멸할 수 있다는 위기의식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에 총선 전까지 어떤 식으로든 구체적인 야권통합을 거듭 제안할 가능성도 남아있다. 
 
김 대표가 공세적인 리더십을 펼치고 있는 것도 과거 조부 김병로의 야권 단일화 과정에서 '결단'의 정치를 지켜봤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오간다. 현재까지 야권통합을 할 의사가 없는 안철수 대표를 무시하는 듯한 언행도 철저히 상대방 측의 내분을 노리고 야권통합 주체를 세우려는 의도에서 비롯됐다는 것이다. 
 
김 대표는 중앙일보와 인터뷰에서 "야당이 질 수밖에 없었던 게 야당 자체가 내부 갈등만 있지, 일치된 모습을 갖고 선거를 임하는 걸 보지 못했다"고 말했다. 또한 김 대표는 "새누리당이 내각제 개헌이라도 만약에 해버리면 야당 역할은 일본의 야당 비슷하게 가게 되는 것"이라며 "그렇게 되면 한국의 정치 경제 미래도 보이지 않는다. 나는 그런 상황이 도래하는 걸 안타깝게 생각하기 때문에 지금 이 짓을 하는 것"이라고도 말했다.
 
종합하면 김 대표는 야권 분열상으로 인한 집권여당의 개헌 저지선 확보를 막는 것이 급선무이고 이를 막지 못하면 정권창출도 불가능하기 때문에 비상 시기 자신에게 전권을 주고 따라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 김종인 더불어민주당 비상대책위원회 대표. 사진=민중의소리
 
야권 승리를 위한 내부 결속을 압박하고 국민의당에 공세적인 리더십을 펼치고 있는 것에 대해 긍정과 우려의 목소리도 공존한다. 
 
김 대표의 한 측근은 “김 대표가 우발적으로 행동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전략적으로 발언하고 행동한다고 봐야 한다. 타이밍을 잘 잡는다”며 “같은 이야기도 언제 던지느냐에 따라 굉장히 좋은 패가 되기도 하고, 또 쓸모없는 이야기가 되기도 한다. 심상정 대표, 박지원 의원 등 야권통합을 생각하는 정치인들은 많지만 이슈를 끌고 갈 타이밍은 김 대표가 가장 잘 포착한 셈”이라고 말했다.
 
더민주당 한 관계자도 “원래 야당 사람들이 도덕군자에 선비들이 많다. 그렇게 해서 이기면 가장 좋은데, 지금까지 내놓은 결과가 별로 없다”며 “정부여당은 언론에 돈, 각종 수사기관까지 다 동원하는데 얌전하게 당하기보다 공세를 펼쳐서 이슈를 주도하고 끌고가는 건 긍정적으로 본다. 정치가 신선놀음은 아니지 않나”라고 했다.
 
반면, 더민주당 한 보좌관은 “역할 자체가 선거에 이기기 위한 구원투수다보니 이기기 위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건 과감하게 다 한다”며 “선거에 도움이 되느냐 안 되느냐를 기준으로 상황을 판단하는 것 같다”고 밝혔다.
 
선거 승리라는 목표로 실용주의적 행보를 걷고 있지만 자칫 정체성 논란과 함께 노선 투쟁이 불거지면 김종인 대표의 리더십도 시험대에 오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김종인 대표를 비롯해 공관위원들도 선출된 권력이 아니다. 비선출이 선출에 비해 전권을 가진 부분에 대해 과도하다는 생각도 있지만 성과를 내고 있으니 대놓고 이야기하진 못하는 상황”이라며 “당장은 좋은 결과를 내고 있는데 대선 등 멀리 봤을 때도 좋은 결과를 가져올 지에 대해서는 우려가 있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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