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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항쟁의 두 젊은이를 기억하시나요

 

등록 :2017-06-07 14:06수정 :2017-06-07 22:01

 

30돌 앞둔 6·10항쟁 
 
전두환 사진 불태우던 이 청년 
1987년 6월10일 저녁 경남 마산에서 시위에 참여한 한 청년이 양덕파출소에 걸려 있던 전두환 사진을 떼어내 불태우며 구호를 외치고 있다.
1987년 6월10일 저녁 경남 마산에서 시위에 참여한 한 청년이 양덕파출소에 걸려 있던 전두환 사진을 떼어내 불태우며 구호를 외치고 있다.
“1987년 6월항쟁 당시 마산 양덕파출소에 걸려 있던 전두환 사진을 떼어내 불태운 청년을 찾습니다.”

 

‘6월항쟁 정신계승 경남사업회’는 7일 “6월항쟁 30돌을 맞아 10일 저녁 6시 경남 창원시 마산합포구 창동사거리에서 기념식을 열고, 창동사거리 바닥에 지름 1m 둥근 동판으로 만든 표석을 설치한다”고 밝혔다. 표석은 항쟁 당시 시위대가 마산 양덕파출소를 불태우고 이 과정에서 파출소에 걸려 있던 전두환씨 사진을 떼어내 불태운 한 청년의 모습을 형상화했다. 표석엔 또 3·15의거, 4·19혁명, 5·18광주민주화운동을 밑거름 삼아 6월항쟁이 일어났다는 뜻으로 ‘3월의 의기, 4월의 선혈, 5월의 희생이 6월 민주항쟁으로 꽃피다’라는 글이 새겨졌다. 디자이너인 김의곤 경남사업회 운영위원이 도안했다.

 

‘독재 타도, 호헌 철폐’의 열기로 뜨겁던 1987년 6월10일 저녁 6시 마산에서도 전국 동시다발 집회인 ‘박종철군 고문살인 은폐조작 규탄 및 민주헌법쟁취 범국민대회’가 열렸다. 하지만 경찰이 행사장인 3·15기념탑 일대를 원천봉쇄하자, 참가자들은 거리행진에 나섰다. 시위대는 마산어시장, 불종거리를 거쳐 마산종합운동장 쪽으로 향했다. 마침 이날 마산종합운동장에선 대통령배 축구대회 한국과 이집트 대표팀 경기가 열리고 있었다.

 

저녁 6시50분께 시위대가 마산종합운동장 앞을 지나가려 하자, 경찰은 최루탄을 마구 쏘며 이들을 막았다. 최루탄은 운동장 안으로도 날아갔다. 이집트 선수들이 경기장에서 나뒹굴기 시작했다. 결국 이집트 선수들은 경기를 포기한 채 퇴장했고, 뒤이어 한국 선수들도 퇴장했다. 주심은 전반 34분 경기 중단을 선언했다. 관중들은 거세게 항의했고, 경찰은 이들을 해산시키려고 운동장 밖으로 내몰았다. 하지만 흥분한 관중들까지 시위에 참여하면서, 시위대 규모는 3만여명으로 불어났다.

 

그날 마산 축구경기장에 최루탄 
시민 3만여명 거리시위 물결 
대통령사진 떼어내 불붙인 장면 
“6월항쟁 민심 상징” 표석으로

 

시위대는 운동장에서 500m가량 떨어진 양덕파출소로 몰려가 파출소를 불태우고, 이어 민정당 지구당 사무실까지 불태웠다. 양덕파출소를 불태우는 과정에서 한 청년은 파출소에 걸린 전두환씨 사진액자를 떼어내 불태웠다. 이 모습을 담은 사진을 보면, 20대 청년이 불타는 전두환 사진을 높이 치켜들고 힘차게 구호를 외치고 있다. 하지만 이 청년이 누구인지는 밝혀지지 않은 상태이다. 이날 마산 시위에 참여했다가 경찰에 연행된 사람은 200여명에 이르렀다.

 

조명제 ‘6월항쟁 정신계승 경남사업회’ 사무처장은 “마산에선 6월항쟁 이후 노동자대투쟁까지 1987년 내내 시위가 끊이지 않았는데, 전두환 사진을 떼어내 불태운 장면이 당시 상황을 가장 극적으로 표현한다고 판단해, 이 장면을 6월항쟁 30돌 기념 표석에 새기게 됐다. 이와 함께 전두환 사진을 불태운 주인공도 찾고자 한다”고 밝혔다.

 

경남사업회는 10일 창동사거리에서 표석 제막식에 앞서 이날 오후 4시 ‘제1회 대한민국 패러디·코스프레 축제’를 열고, 제막식 직후엔 기념공연 ‘6월에 서서’를 연다. 또 11일 오전 9시엔 창원시 마산합포구 만날재에서 ‘6.10㎞ 걷기대회’도 연다.

 

창원/최상원 기자 csw@hani.co.kr, 사진 ‘6월항쟁 정신계승 경남사업회’ 제공

 


 

6월항쟁 뜻 새겨 빈민 품은 약사

 

 

“우리 모두가 그처럼 살 수는 없지만 그가 남긴 뜻을 기리려 합니다.”

 

90년대 도시빈민과 노동자와 함께 하다 예상못한 일로 숨진 고미애(당시 28살)씨가 6월항쟁 30돌을 앞 두고 ‘고미애 약사상’으로 부활했다. 경기 부천시약사회는 지난 3일 부천시약사회 50 년사 출판기념회에서 ‘이웃사랑 고미애 약사상’을 시 상했다. 첫 수상자는 희망재단 아동학대 피해 예방기 금이었다. 건강사회를 위한 약사회 부천지부가 기금 200만원을 전달했다.

 

고씨는 부산 출신으로 1984년 숙명여대 약학과에 입학했다. 그는 1987년 5월 약대 학생회장으로 선출 되면서 6월항쟁에 본격 참여했다.

 

당시 같은 대학 음대 학생회장이었던 친구 최도은 (53)씨는 “87년 1월 박종철 고문치사사건 이후 고문없 는 세상과 군부독재 종식을 위한 6·10시위를 준비하 던 중 6월9일 연세대생 이한열 열사가 최루탄에 맞자 연세대에서 미애와 함께 시위를 이어갔다. 6월10일에 는 전체 숙대생 6천명 중 4천명과 함께 서울역 시위에 참여했다. 미애는 88년 졸업과 함께 지역 현장으로 갔 다”고 말했다.

 

숙대 약대 학생회장 고미애씨
그날 4천명 모인 서울역 시위 동참 
부천에 약국 열고 빈민운동 온힘 
후배 약사들 ‘이웃사랑 상’ 제정

 

고씨가 동료와 함께 문을 연 아람약국은 당시엔 드문 공영약국으로 경기도 부천시 여월동에 있었다. 도시빈 민이 많은 이곳에서 그는 낮에는 약국일을, 밤에는 부천 지역민주운동협의회 상임위원과 주거권실현을 위한 부 천연합의 상담실장으로 일했다. 매주 1차례씩 도시 빈민 자녀를 위한 새롬공부방 자원교사로도 일했다. 고씨는 1992년 겨울 구정날 당번 약국을 지키던 중 외국인 노동 자의 폭력에 의해 숨졌다. 당시 부천주거연합 의장이던 지성수 목사(오스트레일리아 거주)는 “사회적 약자에 대 한 인간애가 가득한 그를 나는 ‘까칠한 성녀’라고 했다. 그가 비명에 갔을 때 ‘하나님이 계시다면 왜 이런 일이 있을까’에 고통스러웠다”고 말했다.

 

고씨의 대학 후배인 부천시 약사회 부회장인 윤선 희(50)씨는 “6월항쟁을 통해 겪은 것을 실천하고 약자 들과 소통하려던 선배의 뜻을 항쟁 30년 만에, 그리고 돌아가신 지 25년을 계기로 이어가겠다”고 말했다.

 

부천/홍용덕 기자 ydh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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