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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실>2005.8월 존 리드와 혁명의 불꽃-《세계를 뒤흔든 열흘》과 《레즈》

 

존 리드와 혁명의 불꽃-《세계를 뒤흔든 열흘》과 《레즈》


 <연대와실천> 2005년 8월호 통권 134호


우리는 중국의 수많은 제국들이 명멸했다고 해서 그들의 역사를 기억의 저편에 묻어버리지는 않는다. 또한 로마가 멸망했다고 해서 그들의 역사를 잊어버리지는 않는다. 오히려 현실의 흐름 속에서 되살려 내고 비유하며 반추한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인가 영국의 맑스주의 역사가 홉스봄이 ‘단기 20세기’를 나누는 기준이 되는, 세계 역사상 최초로 ‘현실 사회주의 국가’를 탄생시킨 ‘러시아혁명과 소련(제국?)’만은 회자 대상에서 사라져 버렸다. 마치 <역사유물론>지(誌)가 묶어 낸 ‘레닌에 대해 말하지 않기’처럼.


과연 러시아 아니 소련은 잊혀져 버렸단 말인가? 아니다. 역사의 연속선상에서 사라진 깊이만큼, 역사에 각인된 상처의 깊이만큼 소련은 침잠해 있을 뿐이다. 소련을 다시 되돌아보기 위해서는 15년의 세월이 너무 짧은지도 모른다.


《중국의 붉은 별(에드가 스노우)》,《카탈로니아 찬가(조지 오웰)》등과 함께 세계 3대 르뽀 문학 중 하나라고 일컬어지는 《세계를 뒤흔든 열흘》(책갈피)은 미국의 저명한 언론인이자 (정치가라고 하기엔 너무나 이상적인) 정치적 이상주의자인 존 리드가 러시아혁명의 격동을 페테르부르크에서 직접 겪고 난 후 쓴 책이다. 이 책은 1917년 러시아혁명에 관한 고전적인 텍스트이다. 1986년에 한국에서도 두레출판사를 통해 상당 부분이 생략된 채 소개된 바 있었다. 당시의 판매고가 어땠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2005년의 이 책의 판매고는 그리 높지 않을 것임은 자명한 사실이다. 21세기 한국은 아직 그것을 묻어두고 싶은 게다. 그러나 우리가 페테르부르크의 노동자와 병사들처럼, 또는 거대한 대륙의 농민들처럼 무언가 뒤흔들 계획을 세우고자 할 때 우리는 이 역사적 대사건을 다시 되돌아보아야 할 것이다. 또한 어쩌면 ‘혁명의 고양기’와는 거리가 먼 지금의 이 시기가 러시아혁명을 다룬 고전적인 이 책이 다시 등장하기에 더 적절한 시기인지도 모르겠다.


20세기 세계의 광활한 영토를 거대한 대륙의 사회주의로 물들인 두 혁명, 러시아 혁명과 중국 혁명을 다루고는 있지만, 에드가 스노우의 《중국의 붉은 별》과 《세계를 뒤흔든 열흘》이 다른 점은 무엇보다 초점에 있다. 스노우의 《중국의 붉은 별》에는 그들의 인구만큼이나 무수히 많은 사회주의자들이 등장한다. 모택동, 주덕, 주은래 뿐만 아니라 이들의 부인들, 구추백, 진독수, 하룡, 팽덕회 등 당과 홍군의 무수히 많은 간부와 혁명가들이 곧 그들이다. 따라서 책 말미에는 ‘중국혁명 인물사전’과 비슷한 분량으로 인물 소개로 차 있다. 그런 만큼 마치 중국 고전 ‘삼국지’나 ‘수호지’처럼, 또는 PC 게임 ‘리니지’처럼 다양한 인물 군상들이 총출동하는 역동적인 흐름을 보여주고 있다. 한마디로 무협지다.


반면 《세계를 뒤흔든 열흘》은 레닌이나 트로츠키 등 혁명가 인물들이 중심이기 보다는 ‘사건 그 자체’에 대해 더욱 초점을 맞추고 있다. 전대미문의 사건. 스노우는 러시아혁명의 전형을 앞에 두었으나 존 리드는 그렇지 못했다. 당연하게도 존 리드에게 초점은 혁명 그 과정에 놓여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약 100쪽에 달하는 방대한 후주와 부록은 바로 러시아의 정치세력들과 조직들, 러시아의 신문기사 등 자료들로 꽉 차있다. 이 후주와 부록이 독서의 속도를 가로막기는 하지만 이해를 배가시키기도 한다.


물론 이 책에도 수많은 인물들이 나오지만 그들은 이름 없는 노동자, 병사, 농민들이다. 즉, 존 리드는 지도자에 초점을 맞추기 보다는 볼셰비키가 어떻게 노동자, 병사 등 대중들과 호흡하면서 혁명을 전진시켰는가를 다루고 있다. 모든 계급의 정파와 투쟁하기를 거부하지 않았으며, 또한 주장이 같은 자들과 연합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던 볼셰비키. 그래서 코민테른은 존 리드에게 미국의 공산당 분열 이후 공산주의노동당과 공산당의 통합을 결정하고 중국공산당과 국민당의 합작을 강력하게 주문했던가.

20세기 영화사에 길이 남은 러시아의 영화감독 에이젠쉬타인은 이 책을 원작으로 삼아 혁명 10주년인 1927년 영화 ‘10월’을 제작하기도 했다. 그러나 영화 ‘10월’은 스탈린의 비판으로 인해 재편집되기도 했고 존 리드의 책 《세계를 뒤흔든 열흘》은 금서(禁書)로 분류되었다.


헐리우드의 진보적인 배우이자 유명한 바람둥이 워렌 비티(Warren Beatty)는 1981년, 존 리드의 생애를 다룬 영화 《레즈》(Reds)를 제작했고 감독했으며 그 자신이 존 리드로 출연했다. 1967년 《세계를 뒤흔든 열흘》을 처음으로 접한 그는 영화 제작의 마음을 굳혔지만 그러나 영화화 하는 데에는 15년의 시간이 필요했다. 아무도 ‘빨갱이’에 관한 영화에 투자할 사람이 없었다. 어쨌든 그는 이 영화를 통해 82년 아카데미상 감독상, 촬영상, 여우조연상을 받았다. ‘지옥의 묵시록’, ‘마지막 황제’ 등을 촬영한 비토리오 스트라로가 촬영을 맡았고, 지금은 늙은 배우가 된 연기파 배우 잭 니콜슨이나 진 핵크만 등이 조연으로 출연하기도 한다. 나이 든 무정부주의자 ‘엠마’로 분한 모린 스테이플턴은 이 영화로 여우조연상을 받았다.


존 리드와 그의 부인 루이스(다이안 키튼)의 만남을 시작으로 해서 둘의 운명은 혁명의 기나긴 여정과 함께 한다. 진보적인 저널리스트인 리드는 좌파 노동조합 조직인 IWW(세계산업노동자동맹)의 활동에도 참여했고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자 부인 루이스와 함께 혁명을 직접 경험하기 위해 러시아로 떠난다. 이들은 그 후 미국으로 돌아왔고, 존 리드는 1919년 이 책을 집필하였고, 루이스는 미국 전역에 사회주의 러시아 혁명을 설파하러 다닌다. 친공반전(親共反戰)적인 기사들로 인해 법정에 선 루이스는 신을 부정하는 빨갱이 나라 소련을 지지하며 여성의 투표권도 없고 기만적인 정치가 판치는 미국에 대해 정면으로 비판하고 나선다.

존 리드는 사회당의 활동에도 적극적으로 가담하지만 반대파에 밀려난다. 반대파를 결집해 공산주의노동당을 만들었지만 코민테른은 공산당과의 합당을 결정한다. 크리스마스 때까지는 돌아오기로 약속했지만 혁명정부는 그를 돌려보내지 않았고 그 시각, 루이스는 경찰의 미행과 침입 등을 감수하고 있었다.


그의 오랜 친구이자 무정부주의자인 엠마는 함께 10월 혁명에 열광했으나 이후 빈곤과 질병을 타파하지 못하는 혁명정부, 민주주의가 질식되는 모습, 무정부주의자들의 투옥과 사형 등을 지켜보며 소련에 대한 희망을 버린다.


존 리드는 엠마의 이러한 회의에 대해 강력하게 볼셰비키와 혁명을 변호하지만 그의 마음속에서도 이 역사적 사건의 결말에 대해 불길한 감정이 싹튼다. 아내와 미국에 남겨둔 동지들을 만나기 위해 그는 목숨을 건 여정을 시작한다. 철길을 통해 핀란드의 국경을 넘지만 그는 투옥되고 이곳에서 그의 목숨을 빼앗아 가는 병에 걸리고 만다.


루이스는 존 리드가 투옥된 사실을 듣고 ‘산넘고 바다건너’ 목숨을 걸고 찾아가지만 이미 존 리드는 핀란드의 교수들과 포로 교환을 통해 모스크바로 후송된 뒤였다. 결국 그들은 다시 만나게 된다. 영화 포스터의 사진은 그들의 극적인 해후를 담고 있다. 하지만 존 리드는 죽음의 문턱을 넘어서지는 못한다. 혁명이 일어난 지 3년이 지났으며, 《세계를 뒤흔든 열흘》을 펴낸 지 1년 만에 그는 루이스의 곁을 떠나고 만다. 그의 나이 겨우 33세였다. 혁명의 와중에 멋지게 퍼지는 ‘인터내셔널가’ 노래 소리는 이 영화의 백미이기도 하다. 그 울림만큼이나 진지한 역사적 사건은 그렇게 미국과 헐리우드를 뒤흔들어 버렸다.

존 리드의 역을 맡은 워렌 비티는 할리우드에서도 유명한 진보적인 배우이다. 베트남전 참전 반대운동을 하기도 했다. 헐리우드를 통해 미국 정치계, 민주당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기도 하는 그는 99년에는 대통령 출마설이 나돌기도 했다.

때문에 미국 대선 때마다 그의 행보는 뉴스거리였으며, 클린턴 정부 시기에는 클린턴과 민주당의 우경화, 고어 대통령 후보에 대해 비판하기도 했다. 워렌 비티의 현실 정치에의 참여적인 모습은 존 리드와 많이 포개져 있다. 존 리드는 저널리스트 또는 (글의) 예술가로서 혁명에 기여하며 남기를 바라는 루이스의 간절한 바램에도 불구하고 공산주의노동당의 승인을 위해 조국인 미국을 등지고 소련으로 잠입한다. 존 리드는 스스로 혁명가가 되고자 했을지도 모른다. 자신이 세계의 진보와 이상을 실현하는 데에 그 어떤 기여를 하고자 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의 이상은 실현되지 않았다. 물론 워렌 비티는 존 리드가 품었던 이상이 민주당을 통해 실현될 것이라고는 생각지는 않을 것이지만. 미국이라는 하나의 제국에서 소련(제국)의 부활을 점치는 것은 당분간은 힘들 것이다.

불타오르기도 전에 식을까봐 미리 두려워하는 우리의 모습과는 대조적으로, 러시아혁명과 존 리드의 생애를 다룬 《세계를 뒤흔든 열흘》, 《레즈》는 시대는 어떻게 불타올라야 하는가, 무엇을 통해 혁명은 불타오르는가를 생생하게 드러내 준다.


혁명은 가능한가? 모르겠다. 혁명은 그 자체로 선인가? 모르겠다. 하지만. 혁명은 필요한가? 그래! 레닌이 만든 불꽃이라는 신문의 이름을 달고 나온 ‘록그룹 이스크라’의 외침, 그대 아직도 혁명을 꿈꾸는가? 각자의 대답이 궁금하다. 어쩌면 혁명은 꿈꾸는 것을 포함하는 미완성의 상상을 전제로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 이상성의 불꽃은 후퇴하는 현실 속에서 더욱 빛나는 것인지도 모른다.

영화의 마지막에는 존 리드를 잘 알던 노인의 음성이 흐른다.

"당신 애가 혁명을 이어받을지도 모르죠. 왜 그랬냐고? 에디슨이 왜 했는지 아는가?
......기억은 희미하지만 그는 앞에 굉장한 것이 있댔지. 생사를 걸만한 것이......
그가 그랬어."

양솔규(영남노동운동연구소 사무국장)

리뷰 출처 : 영남노동운동연구소(
http://www.ynlabor.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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