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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어섬마주섬>

부산실업극복지원센터 <일어섬마주섬>에 실린 글

분노 바이러스? 사회적 연대로 퇴치하자

 

 양솔규(영남노동운동연구소 사무국장)

 

<트레인스포팅>을 만든 영국 영화감독 대니 보일은 2002년 좀비 호러물 <28일후>를 발표했다. 이 영화의 대략적인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동물권리 운동가들은 영장류 연구소에 침입해 침팬지들을 '해방'한다. 그러나 쇠사슬에 묶여 있던 침팬지들은 '분노 바이러스'에 감염된 상태였고, 분노 바이러스는 영국과 전 지구를 휩쓸고 지나간다. 주인공은 살아 남은 자들과 함께 상황을 헤쳐 나간다. 특이한 것은 이 영화는 헤피엔딩과 세드엔딩 두 가지 결말이 관객들을 기다린다는 점이다.

이 영화에는 우리에게 익숙한 장면이 하나 등장한다. 분노 바이러스에 감염된 침팬지들에게 폭력적인 비디오 장면이 강제로 상영된다. 그 장면들 중 하나는 대우자동차 노동조합원들이 1001 기동대에게 폭력을 당하는 장면이다. 한국의 경찰 폭력은 드디어 이런 방식으로 세계와 접속했다.

우리는 장밋빛 전망을 쏟아내던 21세기 새해 벽두의 요란스러움을 기억한다. 그러나 불과 얼마 되지 않아 21세기 역시 20세기만큼이나 순탄치 않을 것이라는 예측을 쉽게 할 수 있었다. 이라크에서는 수만 발의 포탄이 떨어졌고, 한국에서는 빈곤층과 노동자들의 분신, 자살, 동반자살이 이어졌다. 눈에 보이는 직접적 폭력과 위험성은 점점 더 증가되고 있다. 비록 부시는 자신의 황제등극 이후 세계는 더 안전해졌다고 믿고 있는 것 같지만, 불행히도 우리는 그런 사실을 감지할 수가 없다.

단지 눈에 보이는 폭력뿐만 아니라, 자살로 내몰고, 증오를 부추기고, 사회적 관계를 파괴하는 '은밀한 폭력' 역시 증가했다. 지배와 피지배의 연쇄고리는 사회 최상층부터 가장 밑바닥까지 전일적으로 확산되어 있다. 피지배계급이 지배계급에게 증오심을 가지는 것은 당연한 것이지만, 피지배계급 내부에도 서로간에 적개심이 증가하고 있다는 점에서 지금의 상황은 매우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조지오웰의 소설 <1984>에는 '증오주간'이라는 설정이 등장한다. 이 증오기간에는 모든 사람들이 '증오'를 실천해야 한다. 이 그럴듯하지만, 끔찍한 설정은 불행하게도 한국에, 중동에, 유럽에, 세계에 현시되고 있다.

조지오웰은 증오 '주간'을 예상했지만, 현재 상태는 전지구적 차원에서 '영속적인 증오령(憎惡令)'이 내려진 상태다. 이주 노동자들을 바라보는 경멸과 멸시의 시선, 동성애자들을 억압하는 사회, 일하는 사람들의 정당한 권리인 '파업'을 범죄시하는 풍토, 실업자에 대한 방치, 이 모든 것들이 바로 '증오의 부산물'들이다. 자신을 해방시켜준 동물 권익 운동가들을 살해하는 분노 바이러스에 감염된 침팬지들처럼, 세상의 다수는 노동자, 농민, 실업자, 여성, 동성애자 등등의 세상 다수를 해하고 경멸하며, 위협한다.


이라크 무장단체에게 죽임을 다한 故 김선일씨를 바라보며, '테러리스트에게 복수의 불벼락 내리자'고 외치는 젊은 우익들의 눈빛은 2차대전 자위대의 눈빛이고, 아부 그라이브 교도소에서 이라크 포로들을 학대, 고문하던 미군의 눈빛이다.

'증오령'은 '계엄령'과는 달리 시작일자와 종료일자가 없다. 따라서 증오령의 종식일은 누구의 명령으로 내려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누가, 어떻게 증오령을 거둬들일 수 있을까? 증오령에 복속되어 있는 평범한 대다수의 사람들은 서로에 대한 연대를 통해 '증오령'에서 벗어날 수 있다.

매시각 내리꽂히는 '분노와 증오'의 명령을 거부하고, '사회적 연대'라는 무기를 통해 우리는 지금도 전선에 서 있다. 당신은 어디에 서 있는가? 증오인가, 연대인가? 파멸인가, 해방인가? 당신과 내가 '지금' 어떻게 하는가에 따라, 21세기는 해피엔딩이 될 수도, 세드엔딩이 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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