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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마그리트 작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ceci n'est pas une pipe

 

그가 말하는 것은 이중으로 몰아가면서 칼리그람(동어반복)은 가장 완벽한 덮을 설치한다.

이중의 통로에 의해서 그것은 말만이나 그림만으로 불가능한 포획을 확실하게 성공할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그것은 공간속에서 서체가 부릴 수 있는 꾀들을 통해 말들에 그들이 지시하는

대상의 모습을 또렷하게 부여함으로써 본래 말들이 결코 이길 수가 없는 그 완간항 부재를 쫓아낸다.

종이위에 교묘하게 배치됨으로써, 기호들은 그것들이 그리는 테두리를 통해서, 지면의 빈공간을

자르며 들어선 그것들의 덩어리를 통해서, 밖으로부터, 그들이 말하는 사물 자체를 부른다.

그리고 그에 호응하여 시각적 형태가 글쓰기를 통해 움푹하게 새겨지는바, 그 안으로부터

그것을 파며 만드는 단어들은 모호하고 이름없는 부동의 현존을 내쫓으면서 그것에 세례명을 주고 그덜을 담론들의 우주안에 가두는 의미화의 망을 솟아나게 한다.

이중의 덫, 빠져나달 수 없는 함정이다.

그러니 이제 새들의 비상, 꽃들의 변화하는 모양, 흘러내리는 빗물 같은 것들이 어디로

날아갈 수 있단 말인가?

 

...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는 풀린 칼리그람의 조각들로 이뤄진 것같다.

이전의 배치로 돌아가는 듯이 보임으로써, 그것은 칼리그람의 세 기능을 복구시키는데

그러나 그것들을 혼란에 빠트리고 그래서 언어와 그림의 모든 전통적 관계를 곤란하게

하기 위해서 그렇게 한다.

옛날의 표의문자를 복원하기 위해 형상을 ㅣㅁ범했던 텍스트가 여기서는 제자리를

되찾고 있다. 그것은 자기의 자연스러운 자리 밑의 자리로 되돌아왔다.

그림의 지주 노릇을 하는 자리, 그림에 이름을 붙이고, 그것을 설명하고, 그것을 분해하여,

일련의 텍스트들과 책의 페이지들 안에 그것을 끼워넣는 자리로.

그것은 다시 <그림설명>이 된다.

그림으로 말할 것 같으면 그것은 다시 하늘로 올라간다.

문자와 공간의 공모가 잠시 그것을 거기로부터 내려오게 한 곳으로 모든 담론적 구속에서

벗어나 그것은 다시 생래의 침묵속에서 부유할 수 있게 된다.

우리는 페이지로, 그리고 그것의 낡은 배치원칙으로 되돌아온다.

하지만 얼핏 보기에 그럴 뿐이다.

내가 여기 그림 및에서 읽을 수 있는 단어들은 그 자체가 그려진 단어들이다.

화가가 그림밖에 놓은, 그러나 그의 그림의 일반적인(게다가 위치를 확인할 수 없는)

구역안에 놓은 단어 이미지들이다.

내가 그것들에 대해 상정하지 않을 수 없었던 칼리그람적 과거로부터 단어들은 자기 그림들이

그림에 속한다는 것을, 그리고 자기들의 그림적 성격을 보존했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것들을 그 자신 위에 포개진 것으로서 읽을 수 밖에 없다.

이것들은 말들을 그린 말들이다.

이 말들은 그림의 표면에서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고말하는 어떤 문자의 반영을 이루고 있다.

그림으로 된 텍스트, 그러나 거꾸로 재현된 파이프는 텍스트의 문자를 그린것과 같은 손과

붓으로 그린 것이다.

그것은 글씨를 그림으로 보여주고 글씨의 결핍을 메울 뿐 아니라 더 나아가 글씨를 연장하고

있다. 파이프는 조그만 망가진 문자들, 조각조각나 그림의 전 표면위의 흩어진 그래픽 기호들로

채워져 있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문자표기의 형태로 그려진 그림인 것이다.

눈에 안 보이는 이전의 칼리그람적 조작은 글씨와 그림을 교차시텨 놓았던 것이고, 그리고

마그리트가 사물들을 제자리에 다시 놓았을 때, 그는 형상이 그 속에 글씨의 흔적을 끈기있게

유지하고 텍스트는 여전히 그림으로 그려진 재현이 되도록 배려를 했던 것이다.

 

미셸 푸코<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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