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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8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9/07/28
    이것이 MB판 '복불복 게임'인가?(1)
    구르는돌
  2. 2009/07/27
    한미FTA가 노무현의 유산이 아니라고?(3)
    구르는돌
  3. 2009/06/26
    타인의 정리해고(5)
    구르는돌
  4. 2009/06/16
    백기완 선생님의 <장산곶매 이야기>(2)
    구르는돌
  5. 2009/05/30
    지역주의 타파가 노무현의 업적??(1)
    구르는돌
  6. 2009/05/30
    진중권 자살세 발언, 변희재에 덜미를 잡히다!!!(6)
    구르는돌
  7. 2009/05/28
    어이없는 프레시안(7)
    구르는돌
  8. 2009/05/28
    노무현 사망으로 한국사회가 집단 환각에 빠졌다!!!(5)
    구르는돌
  9. 2009/05/27
    김상봉 교수 한겨레 기고글에 달린 댓글(1)
    구르는돌
  10. 2009/05/27
    그를 위한 통성기도를 강요하지 말라!(13)
    구르는돌

이것이 MB판 '복불복 게임'인가?



 

한겨레 '왜냐면'에 투고한 글. 과연 실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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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MB판 ‘복불복 게임’인가?

 - 평택에서 재연되는 죽음의 버라이어티 쇼를 중단하라



요즘 예능 프로그램 중에 최고의 인기는 단연 ‘1박2일’이다. 이 프로그램의 묘미는 뭐니뭐니해도 저녁식사와 잠자리가 걸린 복불복 게임. 자신의 노력 여하와는 상관없이 전적으로 운에 맡기는 이 게임은 ‘1박2일’의 30%를 넘는 시청율의 수훈장이다.

그런데 여기 ‘1박2일’의 아성에 도전하려는 복불복 게임이 있다. 그것은 웃음과 재미를 주는 ‘1박2일’의 복불복과는 차원이 다른, ‘운명의 장난질’에 가깝다. ‘1박2일’에선 결과를 알 수 없긴 해도 운명의 선택지를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이 출연자들에게 있다. 그러나 이들은 어떤가? 이들은 전적으로 타의에 의해 이 프로그램의 출연자가 된 무리의 일부에게 어느 날 갑자기 편지를 보낸다. 그 편지에 ‘해고’라고 적혀있으면 야외취침, 그렇지 않으면 실내취침.

이것은 지금 경기도 평택, 쌍용자동차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다. 그러나 이 하드코어 복불복 게임에 걸린 것은 하룻밤 잠자리 같은 것이 아니다. 얼마 전 이 프로그램에 강제로 섭외되어 해고 편지를 받은 노동자의 아내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에서 보여줬듯이, 생존의 문제를 두고 게임을 벌이는 것이다.

물론 이 게임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이미 올해 초 용산에선 철거 계고장 한 장에 의해 결판 난 복불복 게임의 결말이 어떠했는지, 우리는 가감없이 보고야 말았다. 좀 더 멀리는 2006년 같은 평택의 대추리에서 미군기지 이전 결정에 의해 평생의 삶의 터전이 삽으로 흙을 퍼내듯 들려나간 농민들이 있었다. 최근 보도에 따르면 당시 합참의장이었던 이상희 현 국방부장관은 대추리에 총기로 무장한 군인을 투입할 계획까지 세웠다고 한다. 그 때는 단지 계획에 그쳤던 것을 이젠 실행에 옮기려는 것일까? 현재 쌍용차 주변엔 살인무기라 할 수 있는 테이저건으로 무장한 경찰 병력들이 진을 치고 있다고 한다.

정부는 ‘선진화’를 국정운영의 최우선 목표로 세워 노사 모두가 경쟁력 강화에 힘써야 한다고 역설하고 있다. 선진화든 경쟁력 강화든, 좋다. 그러나 이런 무작위적 인종청소를 연상시키는 정리해고 복불복 게임이 당신들이 말하는 경쟁력 강화인가? 심지어 사측에선 이번 갈등의 초기부터 비해고대상 노동자들을 동원하여 해고 노동자들의 파업을 무력화시키려는 악날한 행태를 보여왔다. 당신들은 혹시 일본 영화 ‘배틀로얄’이 현실이 되길 바라는가?

얼마 전 MBC 스페셜에서 방영된 ‘타인의 정리해고’편을 보니 평택 시민들은 대부분 이번 노조의 파업에 무관심하거나 부정적인 시각을 갖고 있는 듯 하다. 파업 때문에 평택 경제가 마비된다는 우려도 들린다. 그러나 시민들의 두루뭉실한 바람처럼 파업이 파괴되고 나면, 그리고 경제위기의 후속 여파가 더 밀려든다면, 여지없이 평택 시민들도 이 ‘죽음의 복불복 게임’의 다음 출연자가 될 것이다.

정부와 쌍용차 사측에게 묻는다. 국내의 어떤 시청자도 즐겁게 볼 수 없는, 이 죽음의 버라이어티 쇼는 누굴 위해 만들고 있는 것인가? 혹시 해외 투자자의 투자 유인을 만들기 위한 전시용인가? 그런 식으로는 투기자본의 경제를 살릴 수는 있을 지언정, 이명박 대통령이 최근 중도강화론을 이야기하면서 목청을 높인 ‘서민경제’를 살릴 순 없다. 언제까지 이 무고한 노동자 서민들의 죽음을 전 세계에 전시할 텐가? 죽음의 버라이어티 쇼를 중단하라. 그렇지 않다면 국민들로부터 위임받은 당신들의 권력을 내려놓는 것 외엔 방법이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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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FTA가 노무현의 유산이 아니라고?

어제 오랜만에 시립도서관엘 갔다.

시립도서관엔 다른데엔 없는 녹색평론과 진보평론이 있다.

근데 어제 녹색평론을 보다가 정말 기가 막히는 글을 발견했다.

송기호. 작년 광우병 논란때 100분토론에 출연하여 농림부 관료의 협상문 해석 오류를 폭로한 '스타' 변호사. 한미FTA반대대책위에서 통상관련 전문 변호사로 활동한 유능한 변호사.

사상적으로는 나와 별로 맞는 부분은 없는 것 같지만, 그래도 참 훌륭한 사람이라 생각했던 그 분.

 

그가 녹색평론에 <한미FTA는 노무현의 유산인가?>라는 글을 썼다.

결론은, 아래 옮겨놓은 글에서도 보면 알겠지만, 노무현의 유산이 아니라는 거다.

앞에서는 한미FTA는 민주주의의 문제이며, 그래서 자신은 노무현 정부에서 추진한

한미FTA에 반대했던 것이라고 해놓고, 결말에 가서는 노무현 대통령은 민주주의의 디딤돌이며

이명박의 한미FTA는 노무현의 한미FTA와 다르다고 말한다.

 

그전에 봤던 다른 386들의 글에서도 느꼈던 것인데,

노무현을 둘러싼 이 386들의 정신분열이 정도가 너무 지나치다는 생각이 든다.

그럼 노무현이 임기 초 한미FTA를 구상하고, 임기 말에 가서는 결국 체결 하기까지

그 수년 간, 노무현에게는 이명박의 영혼이 빙의되기라고 했단 말인가?

노무현이 추진하는 FTA는 '애통'한 일이고, 이명박이 추진하는 FTA는 '분통'터지는 일인가?

 

이 글로 인해 나의 올 해 목표가 하나 세워졌다.

노무현에 대한 기억을 둘러싼 386들의 정신분열의 원인은 무엇인가?

답이 나올때까지 파 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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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FTA와 민주주의

 

내가 노 대통령 재임 시 한미FTA를 강력하게 비판하였던 이유는 민주주의 때문이었다.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이명박 정부의 사례가 보여주듯이, 대중이 5년에 한번씩 대통령 선거를 위해 투표소에 갈 수 있다고 해서 민주주의가 보장되지는 않는다. 허헌중 지역재단 이사가 이번호 녹색평론에 썼듯이, 자본과 시장을 민주적으로 관리할 수 있을 때 비로소 민주주의가 가능하다. 노동자가 일상적인 노동 공간에서 무방비적으로 축출당하는 곳을 민주주의라 할 수 없다.

한미FTA는 바로 이 민주주의를 전복시킨다. 자본과 시장이 관리를 받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본과 시장이 공적 제도를 관리한다. 수천만의 대중을 대표한 국회가 만든 법률이 단 한 사람의 미국인 투자자에 의해서, 셋 중 둘은 외국인인 국제중재에 회부당하는 것에 동의하는 법적 문서가 한미FTA이다. 단 세명의 국제중재 결정을 한국이 거부할 경우, 오로지 이를 이유로 미국이 한국에게 무역제제를 하는 것을 합법화하는 장치가 한미FTA이다.

이런 틀은 수출동원의 박정희 체제에도, 김영삼 대통령의 세계무역기구 체제에도 없던 것이었다. 그렇다면 왜 한국은 노무현 대통령 시기에 이르러 한미FTA체제를 시도하려 했을까? 왜 그 시기에 미국인 투자자를 제대로 보호하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도 무역제재를 당하는 것을 기꺼이 받아들이려 했을까? 왜 미국인 투자자에게 한국의 헌법재판소와 행정법원에 충분히 호소할 수 있는 것으로 만족하라고 더 이상 말하지 않았을까?

나는 그 이유를 한미FTA가 우리 안의 경제민주주의를 해체하기 위한 국제통화기금(IMF)체제 기득권이 택한 수단이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한미FTA가 법적 힘을 갖게 되는 날, 국제금융자본과 한국의 IMF 기득권자들은 두손을 들고 만세를 부를 것이다. 한미FTA는 자본과 시장을 민주적으로 관리하려는 노력을 좌절시키는 강력한 무기이다. 보라! 지금 이명박 정부는 세계무역기구를 핑계로 유통 대자본이 골목 상권마저 싹쓸이하는 것을 규제하려 들지 않는다. 한미FTA가 되면 자본에 대한 국가의 정당한 규제는 끊임없이 공격당할 것이다. 노 대통령의 역설을 빌면, 권력을 시장에 넘기는 법적 문서가 한미FTA이다. 노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한미FTA 서명을 마친 김현종 당시 통상교섭본부장을 영입한 곳이 삼성인 것이 우연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노 대통령이 한미FTA서명을 지시한 것은 노 대통령에게 권력을 준 대중이 흘릴 눈물을 예고한 비극적 과오였다.

아파트값 폭등과 사교육비 폭발이 상징하듯이, 참여정부가 자본과 시장에 대한 민주적 관리를 제대로 못한 결과 IMF 이후 해체와 빈곤의 위기를 맞은 중하층, 중산층들이 사적 이익의 극대화를 위해 선택한 것이 이명박 정부다. 그러므로 노 대통령이 한미FTA를 비판한 것은 매우 중요한 것이었으며, 노 대통령은 그 비판에 귀를 기울여야 했다. 그럼에도 그는 권력이 시장에 넘어갔다고 말했을 뿐만 아니라, 시장을 민주적으로 관리하려는 치밀하고도 집요한 노력을 수행하지 못했다. 오히려 한미FTA를 비판하는 사람들을 쇄국론자로 몰아세웠다. 참으로 애통한 과오였다.

 

한미FTA는 노 대통령의 유산인가

 

노 대통령이 몸을 던져서라도 지키고자 했던 뜻은 대중의 행복한 삶과 민주주의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뜻은 이명박 정부의 한미FTA로는 실현할 수 없다. 왜 그런가? 이명박 정부가 참여정부의 비젼2030를 폐기했기 때문이다. 비젼2030은 사회복지 지출을 획기적으로 늘리려는 노대통령의 종합미래구상이었다. 노 대통령은 한미FTA가 초래할 경제민주주의의 퇴행을 1,100조원에 달하는 비젼 2030의 예산으로 보완하고자 했다. 물론 이는 시장의 패배자들을 조장해 놓고 그들에게 세금을 걷어 치료하는 것이므로 온당치 않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는 이마저 폐기했다. 지금 그 어떠한 관료도 더 이상 비전2030을 말하지 않는다. 노 대통령의 한미FTA는 이명박 정부의 것과 같지 않다. 이명박 정부의 한미FTA는 노 대통령의 유산이 아니다.

또한 이명박 정부는 농업선진화위원회라는 것을 만들어 쌀의 전면 수입개방(관세화)을 검토하고 있다. 이렇게 되면 한미FTA는 질적으로 전혀 달라진다. 노 대톨령의 한미FTA는 쌀을 일단 비켜가는 구조이다. 쌀이 수입자유화가 되지 않아 '수입관세율'이라는 것 자체가 없었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가 쌀을 전면 개방하면, 쌀의 수입관세율이 나올 것이고, 그러면 관세율 폐지를 중요 목적으로 하는 한미FTA는 조만간 쌀을 포함할 수 밖에 없다. 쌀이 농업과 국민생활에 갖는 위치에서 볼때, 전과는 질적으로 다른 FTA로 변질된다. 또한 국제금융위기를 낳은 국제금융자본을 민주적으로 관리하려는, 세계 정세의 근본적 변화에서 볼 때에도, 이명박 정부의 한미FTA는 노 대통령 때의 그것이라 할 수 없다. 한미FTA는 더 이상 노 대통령의 그것이 아니다.

노 대통령은 수백만 사람들의 진실된 추모와 애도 속에 갔다. 노 대통령을 떠나보낸 대중은 노 대통령에 대한 집단적 기억에서 자양분을 얻으며 새로운 역사를 감당할 것이다. 한미FTA라는 과오에도 불구하고, 대중은 노 대통령을 한국 민주주의의 디딤돌로 삼을 것이다. 그는 사람들이 가장 사랑하고 추모하는 대통령이 될 것이다. 나 또한 단 한번도 직접 만난 적이 없는 그를 사랑하고 추모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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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정리해고

어제 인터넷으로 MBC스페셜 <타인의 정리해고>편을 봤다.

쌍용차 노동자들의 정리해고와 이를 둘러싼 해고 대상 노동자와 명단에서 제외된 '살아남은' 노동자들의 갈등을 섬세하게 다룬 다큐멘터리의 수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근데... 참... 기분이 그렇다.

왜냐하면 해고 대상자 명단이 발표되고 나서 '한솥밥' 먹던 노동자들이

둘로 갈라지고 나서, 그들은 순식간에 극한 대립 관계로 돌변했다.

그런데 파업하는 노동자들의 주장과 그것에 반대하는 쪽으로 '내몰린' 노동자들의 논리가

사실상 똑같다는 사실에 새삼스레 놀라고 말았다.

 

사측은 해고 명단에서 제외된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파업반대 결의대회를 조직한다. 그리고 이에 불참시 불이익을 주겠다고 협박했다.

파업투쟁 가족대책위는 결의대회가 열리는 운동장 앞에서 바로 어제까지 '동료'였던 사람들을 향해

울분을 토한다.

 

"여러분들도 처자식이 있으시다면, 우리 맘 이해할 거 아니에요? 그런데 어떻게 이러실수가 있어요? 어떻게 여길 와요?"

 

한편 결의대회가 끝나고 인터뷰에 응한 결의대회 참가 노동자는 말한다.

 

"처자식이 있는데 어떻게 안와요. 불이익 준다는데... 목구멍이 포도청인데 어쩔 수 없죠."

 

해고자 명단이라는 종이쪼가리에 의해서 갈린 두 집단의 운명이지만, 어찌되었건 양쪽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논리는 하나다. '처자식'. 아니  이건 논리라고 할 수 없겠지. '처자식'이라는 한마디로 모든것을 압도하는 이 한국사회의 집단적 심리구조. 쌍용차 파업투쟁에 지지를 보내면서도 왠지 허전한 마음을 달랠길이 없다. 파업중인 노동자들이 명단에 들어가지 않았다면 그들도 지금 그들이 비난하고 있는 이들이 한 행동과 다르지 않은 행동을 했을 테니까... 그게 우리 모두를 둘러싼 단일한 논리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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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오늘 사측에서 공장진입을 시도하는 과정에서 충돌이 발생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들이 외친 구호가 '비폭력, 파업중단' 이랜다. 절묘하게도 당시 공장을 점거하고 있던 노조는 쇠파이프 등으로 무장중이었다고 하고... 공중파를 타고 시시각각 날라드는 시각이미지에 중독되어버린 이나라 국민들은 비장한 각오로 스크럼을 짜고 비폭력을 외치며 행진해 들어온 사측 직원들에게 동정표를 던지겠지? 아, 머리가 지끈지끈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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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기완 선생님의 <장산곶매 이야기>

오늘 낮에 잠깐 아트앤스터디에서 무료강좌로 제공하는 백기완 선생님의 <장산곶매 이야기> 강의를 들었다. 언젠가 학교앞, 지금은 철거된 로터리 앞을 지날 때, 우연히 까만 한복 정장(?)을 입고 지나가는 그 분의 모습을 본 적이 있다. 그 때도 느낀 거지만 백 선생님은 여기저기 깊이 패인 주름들 사이로 왠지 불기운 같은게 느껴지는 사람이다.

 

아닌게 아니라, 정말 오늘 들은 강연에서도 점잖게 얘기하다가 잡자기 불호령같은 목소리를 질러대신다. 가히 한편의 연극을 보는 듯.

 

이 강연은 그야말로 할아버지의 옛날이야기 전해주는 시간이었다. 백기완 선생님도 장산곶매 설화를 어렸을 때 할머니를 통해 들었다고 하는데, 그야말로 '구전설화'인 것이다. 일전에 대충 줏어들은게 있어서 장산곶매에 대해서는 대강 알고 있기는 했지만, 구월산 마을 사람들을 돕는 것부터 시작해서 중원의 천자와도 맞섰던 장산곶매의 이야기의 스펙터클은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이었다.

 

그런데 강의를 듣다가 갑자기 내가 찌그러드는 기분이 드는 부분이 있었다. 장산곶매는 수리라는 적과 싸움에 나가기 전에 자신의 둥지를 부순다. 결연한 싸움에 나서는데 두고가는 미련때문에 망설여지지 않기 위해서. 그런데 이 때 둥지를 부수는 매의 부리 쪼는 소리가 온 마을에 울려퍼지는데, 마을사람들도 함께 둥지를 부순다고 한다. (사람들이 둥지를 부순다는 게 구체적으로 뭘 의미하는지는 설명을 안 해 주셨다.)

 

그리곤 장산곶매는 날카롭게 솟은 발톱으로 둥지터를 박차고 날아, 작두같은 날개를 편다. 미련없이 싸운다.

 

그냥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무엇을 버릴 수 있는 존재인지. 장산곶매처럼 둥지를 박차고 오를 '준비'라도 되어 있는지... 나는 이미 한번 그 기회를 날려버리지 않았는가? 그렇다면 그 다음은 가능하다고 장담할 수 있을까? 그런 생각에 미치자 갑자기 몸이 바르르 하고 움츠러 들었다.

 

갑자기 밀려온 부끄러움 때문에 대낮부터 소금기 낀 액체가 얼굴에 번질 뻔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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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주의 타파가 노무현의 업적??

며칠전에 서점에 가서 잠깐 고종석씨의 <경계긋기의 어려움>이라는 책을 봤다.

거기 한 꼭지의 제목이 "정동영 생각"인데, 아주 인상깊었다.

지난 대선 전에 정동영이 광주를 찾아 "민주화의 성지 광주에서 이명박에 대해 우호적인 분위기가 조성되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단다. 그런데 고종석씨는 그에게 징징거리지 말라고 훈계한다. 사실 정동영이 주도해서 창당한 열린우리당의 기본 모토가 "호남표 절반을 버리고 영남표 절반을 가져온다" 였다는 거다. 결국 그런식으로 지역주의 깨자는 거였고... 지들이 호남표 버리겠다고 선언해 놓고는 어디서 또 징징거리냐... 뭐 요런 말씀이시다...

 

아, 요걸 보고 있자니 왜케 웃기는지??

요런 방식으로 생각해 보면 지금 노무현의 '업적'이라고 칭송되고 있는

지역주의 타파라는 것도 전혀 대단할 것 없는 정치수작일 뿐인 거다.

노무현이 떨어질 것 알면서도 부산을 끊임없이 찔러본 것은, 당장엔 실패해도

결국 그게 자신의 주가를 올리는 것이라는 점을 그 자신은 알았다는 거다.

지금 식으로 생각하면 이것이 곧 '민주당 외연확장'인 셈이고....

한 마디로 노무현은 이 전략을 수행하는데 있어 선봉장에 섰던거다.

그게 진보니 개혁이니 하는 거랑 아무 상관 없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는 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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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권 자살세 발언, 변희재에 덜미를 잡히다!!!

결국, 진중권 스토커 변희재의 승리인가?

아, 세상의 일반적 시선으로 보자면 나는 변희재의 승리에 안타까워해야 하지만

왜 "고것 참 쌤통이구나"라는 생각이 들까?

 

소위 진보 지식인이라는 인간들이 이번 노무현 사망 사태를 두고

보여준 신앙고백의 최종 결말이 어떤 것인지 진중권은 가감없이 보여줬다.

그리고 결국 뒷통수를 맞았다.

 

진중권, 자살세 발언 "아프게 반성한다"

 

그 동안 진보신당 게시판에 노무현의 지난 행적들을 비판하면서 추모 분위기에 일정

거리를 두려는 사람들에 대해 독설을 퍼붓더니 결국 지는 이미 몇해 전에

스러져간 목숨들을 향해 자살세를 걷어야 한다느니 아주 막되먹은 소리를 했구나...

 

난 진정, 진보신당이 진중권 같은 자를 빨리 퇴출시켜야 한다고 본다.

인간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를 갖추지 못한자가 진보의 탈을 쓰고 춤추는 꼴을 어떻게 더 봐줘야 하나?

여하간에 변희재나 진중권이나 똑같은 '적대적 공범자'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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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이없는 프레시안

어제 내가 노무현 대통령 사망 이후 진보적 인사, 지식인들이 보이는 신앙고백 행태에 대해 비판한 글을 프레시안 독자 기고에 보냈다. ("그를 위한 통성기도를 강요하지 말라")

 

그 전날에 썼던 글("노무현,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방법")도 보냈는데, 안 실렸다. 글이 너무 길어서 그랬나 싶어 이것의 약 5분의 3 분량으로 다시 써서 보내니 내 글이 '당첨' 된 것이다.

 

아, 근데 기분이 썩 좋지 않다.

가끔 신문에 칼럼을 기고하시는 분들이 자기 글이 신문 편집진에 의해서 아무렇게나 편집되어 글의 의도가 훼손되었다고 불평하는 글들을 좀 본 적이 있는데, 그 기분이 뭔지 알 것 같다.

 

아, 솔직히 글의 제목까지 바꿀 필요는 없지 않냐? "그를 위한 통성기도를 강요하지 말라"라는 제목은 "나는 똑같이 슬퍼할 것이다"라는 뭔 소린지 알 수 없는 제목으로 뒤바뀌어 있었다!!! (프레시안 글 보러가기)

 

게다가 소위 노무현 지지자들의 심기를 건드릴만한 내용들은 다 짤려있었다. 내가 욕쓴 것도 아닌데 이렇게 잘려 나가야 할 이유를 당췌 모르겠다. 인터넷 신문 기사라 분량 맞출 필요도 없을 텐데, 이렇게 편집권을 남용하나?

 

어디까지나 추측이긴 하나, 이건 내 글이 요즘 프레시안의 편집방향과 배치되기 때문인 점도 있는 것 같다. 실제 내 글은 오늘 12시부터 2시 반 정도까지 초기화면에 떴다가 사라져버렸다. 내 글에 이상한 댓글 단 노무현 지지자로 보이는 이상한 사람 빼고는 거의 본 사람이 없다는 거다. ㅋㅋㅋㅋ

 

대신 프레시안 초기화면은 노무현의 죽음을 안타까워하고, 노무현 정신을 계승하자는 결의를 담은 격문들로 가득차 있다. 그래도 프레시안은 괜찮은 언론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런 된장찌개!!!! 완전 속았다. 프레시안은 제발 2006년에 노무현 정권이 FTA추진할때 어떤 기사를 썼는지 한번 찾아보길 바란다. 이렇게 앞뒤 안 맞는 짓들을 하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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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사망으로 한국사회가 집단 환각에 빠졌다!!!

갈수록 내 독설이 늘어만 간다.

 

어쩐담. 나 이런 성격 버릴려고 했는데, 우리 전능하신 노짱께서 내 의지를 또 꺾어놓으셨다.

 

아, 노짱 탓만 할 것은 아니지.... 노무현이 아이스크림 먹는 사진까지 뿌려대며

 

그를 신화화하는 언론도 한 몫 하고 있지.

 

말이 나와서 말인데, 아이스크림 먹고, 봉하마을서 자전거타는 노무현이 소탈해 보이고

 

탈 권위주의적으로 보인다면, 그것과 아주 같은 방식, 똑같은 의미로

 

청와대 사저에서 출퇴근할때 자전거 이용하고, 대선광고에서 시장 아줌마랑 뜨거운 포옹

 

을 나누었던 이명박도 그에 못지않게 소탈하고 탈 권위주의적으로 보인다.

 

내 말이 틀렸나? 얼마 전 어린이날에 이명박도 초딩들 앞에 모아놓고 퇴임 후 환경운동

 

하고싶다고 말했단다. 이명박이 환경운동 한다면 개구라고, 노무현이 한다고 하면 진심어린

 

서민적인 면모인가? 엎어치나 매치나 이명박은 4대강 갈아엎으려는 놈이고, 노무현은 이미

 

새만금 갈아 엎은 놈인데...

 

 

아, 그리고 요즘 방송 보니까 노무현 생전 모습을 보여주는데 기가막힌 장면이 있었다.

 

1. 노무현이 모 연설장에서 주머니에 손넣고 약간 불량한 자세로 말하는 사진. 그 장면 나도 기억하는데 당시 언론에서는 대통령 품위에 맞지 않는 자세와 언행이라고 비난의 화살을 날렸었다. 그런데 요새 언론에서는 이게 탈권위주의적인 카리스마를 나타내는 모습이란다. 아, 앞으로 나도 사람 많은데서 말할 기회 있으면 주머니에 손 넣고 고개 쭉 빼고 다녀야 겠다. 카리스마 있어 보이게.

 

2. 어제 밤 집에 오는길에 동네 호프집 밖에 설치된 뉴스에서 나온 장면. 노무현 임기 당시 서민 대통령으로서의 면모를 모아서 보여준단다. 김선일씨 이라크에서 피랍되었을 때, 자국민의 안위를 고민하며 고뇌하는 모습이 나온다. 소파에 앉아서 턱을 괴고 한껏 인상을 찌푸리면서. 아, 그랬던 그가 내렸던 결정은 무엇인가? 그의 결정으로 김선일씨는 처참한 시체로 돌아왔는데, 얼굴 한번 찌푸린 사진 한방에 노무현은 서민적인 대통령으로 다시 태어나고 있다. 노무현 그 보다 먼저간 영령들이 다시 한번 기절하실 노릇이다.

 

이놈의 대한민국, 전부 다 집단 환각에 빠진 것이 틀림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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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봉 교수 한겨레 기고글에 달린 댓글

 

 

 

   
2009/05/26 17:14:44 신고하기

이 정도의 자기성찰조차 왜 고해성사를 요구하냐며 진보신당은 노무현에게 빚진 거 없다고 하다니 참으로 강팍하고 편협하기 이를데 없습니다. 그리고 왜 하필 콕 꼬집어서 "진보신당"입니까? 그냥 "진보세력"이라고 해도 될텐데말이죠. 그런데 hkcsp님, 노동자 농민들에게 진보신당 민노당 당신들이 어떻게 비추는지 아십니까? 녹슨 거울에 자신의 모습을 비추어봐도 부끄러움을 못느끼는자가 가장 끔찍한 자입니다.

 
 
 
 
   
2009/05/26 17:14:19 신고하기

김상봉교수님의 글은 이런 저의 부끄럽고 착잡한 여러 감정들을 다 함께 녹여 주는 가장 감동적인 글이었습니다. "진보신당은 노무현에게 빚진거 없다"며 "고해성사를
요구하지 말라"는 글을 남긴 이도 있지만, 우리는 모두 척박한 이 사회의 피해자이자 동시에 공모자이기도 합니다. 악의 자양분은 방관과 침묵이니까요.

 
 
 
 
   
2009/05/26 17:13:00 신고하기

노무현의 죽음을 보며 여러 감정이 교차했습니다. 슬프고 안타까운 한편 명박이 검찰넘들 큰일났네 쌤통이다 고소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면서 드는 의문과 찝찝함, 노무현 정권때 죽은 노동자들, 난 그들의 죽음에 얼마나 관심을 가졌었나? 세상은 하나도 변한게 없는데 그들이 죽지 않았았다면 지금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

 
 
 
 
   
2009/05/26 16:33:36 신고하기

동 시대를 살아온 한 사람으로서 지금 일어나고 있는 사태에 대하여 분노와 좌절을 함께 느끼며 후대에 어떤 말로 이 상황을 설명해야 할지를 모르겠다. 하지만 이렇게 순수하고 정제된 관념으로 추이를 명확하게 말하는 분들이 우리 사회에 건재함은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감사하다.

 
 
 
 
   
2009/05/26 16:33:12 신고하기

부디 이 나라에 광명한 날이 도래하여 도도히 흐르는 정의의 물결에 몸을 실어 만민이 함께 가슴을 부둥켜 안고 함박웃음을 지을 그 날이 오길 두 손 모아 기도드린다.

 
 
 
 
   
2009/05/26 15:34:00 신고하기

hkcsp//젊은 사람 같은데... 아는지 모르겠지만... 님 같은 경우를 두고 좌익소아병이라 한다오... 그의 소속집단이 개인의 훌륭함을 보장하는 건 아니지 않소...

 
 
 
 
   
2009/05/26 12:24:08 신고하기

도대체 교수님이 그의 죽음을 보면서 부끄러움을 느껴야 할 이유가 뭐란 말입니까? 살아남은 다른 진보세력에게 고해성사를 요구하지 마십시오. 그의 죽음과는 무관하게 그에 대한 평가는 냉정하게 이뤄져야 합니다. 적어도 그간 민주당 세력을 비판해 왔던 진보세력은 노무현에게 빚진거 없습니다.

 
 
 
 
   
2009/05/26 12:23:22 신고하기

참으로 황당한 글입니다.
김상봉 교수님은 진보신당 당원으로서 강령작성의 총 책임을 맡기도 하셨던 분입니다. 그런 교수님의 정치적인 위치에서 이런 글이 합당하다고 생각하십니까? 한 생명의 죽음이 안타까운 것과 그로 인해 고인을 추앙의 대상으로 만드는 일은 전혀 별개이며, 후자는 앞으로 전개될 정치에 오히려 해악일 뿐입니다. 다름 아닌 죽은 정치인의 유령이 산 정치를 지배하는 사태가 올 것이 두렵습니다.

 

 

맨 밑에 두개가 내가 단 댓글이다.

그 위에는 대부분 나의 댓글에 대한 공격.

 

아무래도 저 사람들의 댓글로 봐선 아무래도 김상봉 교수의 글이

사람들에게 엄청난 심리적 위안이 되었나 보다.

 

그런데 어쩌나.... 저렇게 한 번 위안 받고 나면 하룻밤 잠은 편히 잘 수 있을지 모르겠으나,

현실은 전혀 바뀌지 않는데... 노무현이 남기고 간 파괴적인 유산은 그대로인데...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고인을 추앙의 대상으로 만들어 자신들을

토닥토닥 어루만져주는 심리적 위안이 아니라

현실에 대한 명확한 인식이다. 죽은 노무현과 산 이명박, 두 괴물의 쌍두마차가

모든 것을 집어삼키며 한국 사회의 정치를 질식시키고 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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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를 위한 통성기도를 강요하지 말라!

그를 위한 통성기도를 강요하지 말라!
 
 
고등학교 2학년 때, 잠깐 교회를 다닌 적이 있었다. 그 때까지는 나도 순수한 마음이 조금은 남아있던 터라 그냥 봉사활동같은 걸 여러사람들과 함께 다니고 싶다는 마음에 짝궁이 다니던 교회에 따라갔다. 그런데, 한 두어번 갔을때쯤에 교회에 발길을 뚝 끊어버리게 만드는 일을 겪게되었다. 그것은 바로 통성기도 때문이었다. 목사의 지시에 따라 신도들이 다같이 일어나더니 옆사람과 손을 잡고 목놓아 울부짖으며 기도를 한다. 여러사람이 한꺼번에 울부짖으니 각자의 기도내용이 뭔지 알 수도 없다. 다들 ‘용서하소서’라는 말은 반복하고 있는 것 같기는 했다. 이런 ‘과격한’ 기도 행위가 낯설었던 나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남들 다 울면서 간절히 기도하는데 나만 눈을 멀뚱멀뚱 뜨고 있으려니 여간 불편한게 아니었다. 나도 뭔가 하나님께 용서받아야 할 일을 생각해 내려고 애를 썼다. 결국 엄마, 아빠, 누나한테 잘못했던 것들을 생각해 내어 조금씩 목소리를 내 보았다. 아, 그런데 끝까지 눈물은 안 났다. 좀 억울하다 싶으면서도 그 많은 사람들이 함께한 ‘간절한 기도’에 함께하지 못한게 못내 찝찝했다. 그러나 그 일 이후로 한달도 안되어 교회에 발길을 끊었다. 있지도 않은 슬픔을 쥐어 짜낼만큼 내 감정의 상상력은 풍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8년 후인 2009년 오늘, 나는 또 다시 통성기도의 현장을 목격하게 되었다.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빈소를 찾은 많은 시민들은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눈물을 흘린다. 그 수도 봉하마을에만 60만, 전국적으로는 200만명을 넘어설 것이라고 한다. 인터넷에서는 ‘지못미’ 바람이 불고 있다. 사회원로인사라는 사람들은 앞다투어 이 사건을 계기로 우리 사회의 반성과 성찰이 필요하다고 읊조린다. 친노인사라는 사람들 뿐만 아니라 그와 정치적으로 대립각을 세워오던 (주로 진보진영) 인사들도 그의 죽음을 막지 못한데 대한 죄스러움을 드러낸다.
 
 
나는 왜 이 ‘통성기도’가 불편한가?
 
8년 전 내가 마주쳤던 그 교회의 통성기도 현장에서처럼, 지금의 한국사회는 나를 비롯해 그의 죽음에 울부짖지 않는 사람들을 참으로 불편하게 만들고 있다. 인터넷에 오가는 글들을 보면 이런 부류의 사람들은 참으로 매정할 뿐만 아니라, ‘당신의 생각이 한나라당의 그것과 무엇이 다른지 생각해 보라“는 사상검증을 받고 있는 형국이다.
 
하지만 이런 네티즌들의 공격적인 태도보다 내가 불편함을 느끼는 것은 진보진영 인사들의 신앙고백이다. 통성기도를 할 때, 단상에 선 목사는 신도들의 죄의식을 북돋기 위해 누구보다도 앞장서서 울부짖는다. 있는 힘껏 목소리를 쥐어짜고 몸을 부들부들 떨기도 한다. 이를 통해 신도와 목사 모두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의 전능하심에 감동받고 성령의 충만함을 느낀다. 지금 진보진영 인사들이 보이고 있는 작태가 이런 공허한 믿음을 강요하는 목사들의 모습과 다를바가 뭔가?
 
무엇보다도 노무현 대통령 임기 당시 온갖 진보적 운동단체의 대표는 다 맡아왔던 오종렬씨의 언사는 분노를 자아내게 한다. 그는 노 전 대통령이 ‘서민후보’였다고 추켜세우고는(프레시안은 이 기사를 전하면서 처음엔 ‘민중후보’라는 표현을 썼다가 ‘서민후보’라는 표현으로 바꾼 이유가 뭔지 해명해 주길 바란다), ‘장렬히 산화’했다고 말한다. 그가 수도 없이 한 집회장 발언들을 생각해 볼 때, ‘장렬히 산화’했다는 표현은 노동·민중열사들의 분신에나 쓰는 표현이다. 그런데 그는 노무현도 ‘장렬히 산화’했다고 말한다. 즉 ‘노무현 열사’라는 것이다. 오종렬씨에게 묻는다. 그는 이 표현을 쓰는데 한 점의 망설임도 없었는가? 비정규직의 삶에 비관하여 목숨을 끊고도 노무현에게 ‘민주화된 시대에 낡은 투쟁방식을 고집한다’고 비난을 들어야 했던 이용석 열사의 얼굴을 대하고도 감히 ‘장렬히 산화’했다고 말할 수 있단 말인가?
 
노무현은 왜 자살을 선택했는가? 수사과정에서 의문점이 많이 남는 것이 사실이지만 분명한 사실은 그는 권력형 비리에 대한 수사를 받다가 자살을 선택했다는 것이다. 그것이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기 위함이었든 자신을 믿었던 이들에 대한 미안함에서 였든지 간에 말이다. 자유, 평등, 정의, 평화 등 이 모든 숭고한 가치들은 그의 마지막 선택과는 어떠한 연관성도 없다. 그런 그에게 열사의 지위를 부여하려는 오종렬씨의 발언에 분노를 금치 못하는 것이 오직 나뿐일까?
 
또 김상봉 교수가 한겨레에 기고한 칼럼(<한 시대의 종말을 애도함>)을 보자. 그는 “그(노무현)가 권력이 청와대에서 시장으로 넘어갔다고 말했을 때, 나는 깊이 좌절하고 실망했으나, 생각하면 그것은 그 개인의 한계가 아니라 우리 시대의 한계였다. 자본이 절대 권력이 된 시대에 많은 사람들이 그 한계 앞에서 변절하거나, 세치 혀로 한계를 넘어갈 때, 그는 자기 방식으로 시대의 한계와 끊임없이 부딪혔고, 결국 좌절했다.” 라고 말한다. 이 무슨 궤변인가? 권력이 시장으로 넘어갔다는 노무현의 당당한 자기고백이 ‘우리 시대’(대체 이 ‘우리’는 누구를 가리키는 것인가? 386인가?)의 한계였다고 말하며 그에게 면죄부를 주고는 그의 삶은 치열했다는 찬사로 마무리짓는다. 그리고 글의 말미에서 “뜨겁게 사랑했으므로 내가 미워했던 마음의 벗이여, 잘 가오. 그대 영전에 오래 참았던 울음 우노니, 그대 나 대신 죽어, 내 마음에 영원히 살아 있으리.”라고 뜨거운 연정을 표시한다. 이로써 2003년부터 2007년까지 그 ‘시대’의 잔혹함을 못이겨 목숨을 버려야만 했던 수많은 열사들의 이야기는 노무현이 ‘시대의 한계와 끊임없이 부딪치는’ 동안 벌어진 한낱 에피소드로 전락하고 말았다. 또한 이 사랑고백에 담긴 무한한 ‘용서와 화해’의 정신은 침몰하는 듯 보였던 자유주의 개혁세력에게 힘찬 찬송가가 되어 입에서 입으로 불려질 것이다.
 
 
누가 노무현의 무덤 앞에 무고한 제물을 갖다 바치는가?
 
김상봉 교수의 말대로 그가 한 시대의 상징이었다면, 그 상징은 진작에 스러졌어야 했다. 그의 일생, 적어도 90년대 이후 ‘정치인 노무현’의 일생이 상징하는 바는 민주도, 정의도, 평등도 아닌 오히려 그 훈장을 밟고 일어서 기지개를 편 탐욕과 착취의 시대일 뿐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2007년, 많은 이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외부 충격을 통한 개방과 성장’이라는 미명하에 추진된 한미FTA에 반대하며 스러져간 어느 평범한 택시 노동자의 삶이 고스란히 증명하고 있다.
 
그의 죽음 앞에, 그가 진작에 버렸던 민주, 정의, 평등이라는 가치를 제물로 갖다 바치지 말라. 그의 죽음 앞에, 이미 이 세상엔 없는 소중한 열사들의 정신을 제물로 갖다 바치지 말라.
 
나는 노무현이 투신했다는 뉴스를 접한 지난 토요일 오후, 시내의 작은 영화관에서 2006년 평택 대추리에서 미군기지 확장에 의해 삶의 터전을 빼앗긴 농민들의 삶을 기록한 ‘길’이라는 다큐멘터리 영화를 봤다. 농민들은 절규했고 울부짖었다. 영화가 상영되는 한 시간 내내 나도 그들과 함께 하염없이 울부짖었다. 그 정직한 농민들에게 눈물을 선사한 자는 대체 누구인가?
 
그러므로, 나에게 노무현을 위한 눈물을 강요하지 말라. 그를 위한 통성기도를 강요하지 말라. 나는 오로지 평택 대추리에서 스러져간 뭇생명들에 안타까워 하는 딱 그 만큼만 노무현이라는 소중한 생명의 (억울한) 스러짐을 애도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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