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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루 서다

힘들어서 잠시 누워 있으면

미루가 놀라운 속도로 기어 옵니다.

 

"낑낑.."

 

꼭 제 몸통 어딘가를 짚고

반대편으로 넘어갑니다.

 

갈비뼈를 누릅니다.

 

"으악-"

 

10kg짜리가 누르니까

뼈 골절이 걱정됩니다.

 

저를 쳐다봅니다.

미안한 눈빛.

 

인제 9개월 됐다고

미안한 것도 압니다.

 

"퍽"

 

눈을 때립니다.

아직 미안한 걸 모릅니다.

 

기분이 심하게 상하지만

여러 날 관찰한 결과,

어루만지려는 동작을 하려는데

부드럽게 안되고 결국 사람을 때리게 되는 것 같단 생각이 듭니다. 참습니다.

 

마침내 몸을 넘어서 건너편으로 가면

미루는 곧바로 다음 목표를 향해 움직입니다.

 

다시 반대로 넘기.

 

하루에도 몇 번씩

이 일을 당합니다.

 

그 중 몇 번은 죽을 뻔 했습니다.

 

미루가 이유식이랑 젖을 잔뜩 먹은 직후에

누워있는 제 목을 넘었습니다.

 

불룩한 배가 목을 감싸듯이 눌러옵니다.

숨이 막혔습니다.

 

손으로 눈을 짚고 넘을 때는

이러다 큰 일 나겠다 싶었습니다.

안구보호를 위해 강제력을 동원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점심을 먹고

방바닥에 누웠습니다.

 

이건 밥 먹은 사람의

신성불가침의 권리입니다.

 

이번에도 미루가

그 권리를 침해합니다.

 

배를 짚고 올라 옵니다.

배는 견딜만 합니다.

 

"이 정도 쯤이야...미루야, 마음껏 넘어라"

 

올라오는 듯 하더니

다리를 쭉 펴면서 몸을 세웁니다.

 

아, 미루가 배를 짚고

서고 있습니다.

 

지난 번 일본 갔다 올 때

공항에서 의자 잡고 잠깐 섰었는데

이번엔 좀 더 확실히 다리를 폅니다.

 

배에 쏟아지는

엄청난 압력.

 

밥 먹은 직후입니다.

 

그래도 미루가

선다는 데, 제가 참아야 합니다.

 

자기 발로 선다는 것

그것은 매우 고통스런 과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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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물

이유식을 다 먹이면

의자에 앉힌 채로 바로 이어서

사과를 갈아 먹입니다.

 

미루가 약간의 변비 증상이

있을락 말락 해서

 

하루에 사과 두 쪽 정도를 갈아 먹이는데

이게 효과가 좋습니다.

 

"미루야, 사과. 너 좋아하는 사과~~~아, 어디가~"

 

가끔 사과를 안 먹이고

미루를 의자에서 내려놓을 때가 있습니다.

 

특별한 이유가 있는 건 아닙니다.

이유가 없는 데 내려 놓아서 문제입니다.

 

이유식을 실컷 먹어서

별로 아쉬울 게 없는 미루는

여기 저기로 몸을 움직입니다.

 

하지만 이유식 먹이기 벌써 4달째.

제 실력도 굉장합니다.

 

이동하는 입 속에

정확히 사과 담은 스푼을 집어 넣습니다.

 

'오물오물..'

 

미루는 틀림없이

사과를 목으로 넘기자 마자

다시 움직일 겁니다.

 

저는 옆에서 사과 한 스푼을 더 퍼서

기다립니다.

 

'꿀꺽'

 

이 소리는

안 들립니다.

 

목이랑 입을 자세히 보면

사과를 넘기는 걸 알 수 있습니다.

 

몸이 다시 움직이려는 찰나

그 보다 빨리 숟가락이 입을 파고 듭니다.

 

역시 전 훌륭한 아빠입니다.

이렇게 해서 오늘도 사과 두쪽을 다 먹입니다.

 

"앗"

 

턱받이가 없습니다.

사과물이 옷으로 다 흘렀습니다.

 

이럴수가

하필이면 낮에 나갈 때

제일 이쁜 외출복 입혔다가 안 갈아입혔는데

 

사과물 흐르는 건 신경도 안 쓰고 먹이기만 바빴습니다.

주선생님이 전하신 격언이 떠올랐습니다.

 

"사과물은 바로 바로 빼야 돼..."

 

곧바로 미루 옷을 벗겨 들고

화장실로 튀어 갔습니다.

 

화장실 문턱에 앉아서 빨래 비누로 옷을 박박 문질렀습니다.

미루는 뒤에 앉아서 제 등을 툭툭 칩니다.

 

"미루야, 아빠 건들지마...사과물 안 빠지면 엄마 한테 죽어..."

 

알아들을 리가 없습니다.

 

빨래비누로 빨고

세탁기용 세제 묻혀서 한번 더 빨고

마지막으로 세제를 물에 풀어 담가놨습니다.

 

그 옷에는 정말

사과물 들면 안 됩니다.

걱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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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식 먹이기 전쟁

"미루야~이유식 먹자..."

 

처음부터

고분고분 받아먹을 리가 없습니다.

 

숟가락을 입에 대면

고개를 휙 돌립니다.

 

"미루야...얌얌..이유식 먹자~~"

 

다시 숟가락을 댑니다.

이번엔 입을 조금 벌립니다.

 

인상을 쓰면서 맛을 보더니

얼굴이 펴집니다.

 

제 이유식 만드는 솜씨에

경탄을 금치 못하는 표정입니다.

 

세번째 숟갈부터는

덥석덥석 잘 받아 먹습니다.

 

두 손으로는 다른 숟가락을 가지고 놀다가

이유식이 가면 입을 벌립니다.

제비새끼 같습니다.

 

"야! 엄마 옷을 왜 물어~~"

 

밥 먹다가 별 짓 다합니다.

주선생님 옷에 이유식이 왕창 묻어 있습니다.

 

한참 먹다 보면 미루는

꼭 손으로 얼굴을 비빕니다.

 

"끼잉.."

 

턱받이를 다른 손으로 잡더니

확 풀러버립니다.

 

그래도 전 계속 이유식을 먹입니다.

철분 섭취가 적으면 빈혈이 생기는데

그러면 안 좋답니다.

 

또 얼굴을 비빕니다.

입 속에 있던 이유식이

입 밖으로 나옵니다.

 

계속 비빕니다.

이유식이 얼굴에 퍼집니다.

 

이젠 아예 얼굴을 반죽을 합니다.

쌀알과 브로콜리, 시금치, 호박이

범벅이 되서 얼굴전체를 데코레이션합니다.

 

'탁탁탁'

 

항상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는 미루

제가 방심한 사이에 그릇을 잡더니

식탁을 퍽퍽 내려칩니다.

 

식탁 유리 끝이 두 군데나 깨졌습니다.

 

"야!!! 이리 줘~~!"

 

미루한테서 그릇을 뺏었습니다.

 

"으아앙~"

 

들고 있던 숟가락을 팽개치고

얼굴이 빨개져서 미루가 웁니다.

 

이럴 땐 방법이 있습니다.

 

사과 갈아놓은 걸 입 속에

푹 집어 넣습니다.

 

그러면 오물오물 잘 먹습니다.

다 먹고 나면 웁니다. 하던 일을 마저 하는 겁니다.

 

"으아아앙~"

 

또 사과를 푹 집어 넣었습니다.

또 잘 먹습니다.

 

사과가 떨어졌습니다.

결국 안아서 달래줬습니다.

 

뒤를 돌아보니

식탁 주변이 전쟁터가 됐습니다.

 

밥 먹이고 나서

치우는 게 더 힘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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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밤에 전화

"두두두두두두두두"

 

저녁 9시 30분

전화기를 진동으로 했더니

책상 전체가 울립니다.

 

미루 재우다가

완전히 낙담합니다.

 

한 시간 가까이 실랑이 끝에

겨우 잠들기 직전이었습니다.

 

"여보세요"

"오~!! 전화 받네.."

 

"아...난 또 누구라고.."

 

사무실 사람입니다.

 

"근데 목소리가 왜 이렇게 작아요"

 

건너편은 아주 시끌벅적합니다.

 

"애 재우다 나왔거든요.."

 

"하하하..그래요? 지금 어딘대요?"

 

술취했습니다.

취한 인간의 전형적 대화법을 구사합니다.

 

머리 끝에서 발끝까지

화가 났습니다.

 

"어디긴 어디야..집이지.."

 

"집이 어딘데?"

 

집은 또 왜 묻나 싶은데

무슨 할 얘기가 있어서 그런 것 같지도 않습니다.

 

"집은 왜 물어? 대방동이야.."

 

"오호, 대방동~"

 

도저히 저의 지금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는 말투입니다.

 

"근데 왜 이 시간에 전화했어!!!"

 

버럭 화를 냈습니다.

하루 내내 스트레스가 쌓였는데

잘 됐습니다.

 

저쪽에서 미안해하면서 통화하면

화도 못 내고 괴로웠을텐데

화 내기 딱 좋게 말을 합니다.

 

"아..미안해요.."

 

화내고 나니까 미안하다고 하더니

옆 사람을 바꿔줍니다.

 

"오랜만이예요"

 

미루가 옆으로 기어오더니

본격 사운드를 내기 시작합니다.

 

"애 옆에 있어요?"

"네..근데 이 늦은 시간에 웬일이예요?"

 

"늦긴 뭐가 늦어요. 인제 9시 30분이구만.."

"그건 일할 때 얘기죠...하, 진짜.."

 

"알았어요...근데 이번 주 토요일날 시간 있어요? MT같이 가게"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습니다.

있는대로 화를 냅니다.

36년의 내공을 담은 온갖 욕설을 패키지로 보내줍니다.

저쪽에선 안절부절 못하다가

백배 사죄를 합니다.

다시는 밤에 전화 안 하고

낮에도 먼저 문자를 날리겠다고 약속합니다.

 

이런 상상을 하면서

계속 화를 내볼까 했지만

소심해서 그만뒀습니다.

 

전화를 끊고

미루가 자기까지 3시간 걸렸습니다.

 

12시 20분

겨우 재우고 시계를 보니까

다시 온몸이 화 덩어리가 됩니다.

 

육아휴직이 얼마 안 남았습니다.

 

어떤 사람은 육아하는 사람 처지를

끝까지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겠구나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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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경길

다시 생각해봐도

이번 설 귀경길은

기억에 참 많이 남습니다.

 

"상구...설날표 결제했어?"

 

빛나는 인터넷 표구하기 전쟁에서

서울-김제간 표를 두장씩 예약한 저는

결제 마감일 다음날 주선생님이 이렇게 물어봐서

어이없어하는 표정으로 대답했습니다.

 

"아니. 큰일났다."

 

저 자신에게

어이가 없었습니다.

 

"현숙아~인터넷 다시 들어갔더니.. 남아있는 표 있다 있어!!"

 

설이 끝나고 올라오는 길,

새벽 5시 4분 기차를 타게 됐습니다.

 

무궁화호는

그 새벽에 다들 자는데

실내불을 환하게 켜놓고 달립니다.

 

미루가 잠이 깰까봐

우리는 미루 눈을 최대한 가렸습니다.

 

"이번 역은 익산, 익산역입니다.."

 

화들짝 놀랐습니다.

귀를 안 막았습니다.

 

기차 방송이

이렇게 클 줄 몰랐습니다.

 

"위아 어라이빙 앳 익산, 익산 스테이션"

영어로도 합니다.

 

"고노 예끼니.."

일본말로도 방송합니다.

 

"뭐라고 하는 지 알아들을 수 없는 말..."

중국말까지 합니다.

 

미치겠습니다.

그래도 미루는 잡니다.

 

"서울까지 열번은 더 방송하겠구만.."

 

그래도 이 정도 길이면

잘 넘어갈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한 20분쯤 더 달렸는데

승무원분이 띡하고 마이크 켜는 소리가 들립니다.

 

"우리 열차는 광주를 새벽 4시쯤에 출발하여..."

 

무슨 안내할 게 있는가 봅니다.

무조건 빨리 끝나기만을 바랬습니다.

승무원분이 직접 하시니까

4개국어로 하진 않을 겁니다.

 

"저희 승무원은 여러분의 안전하고 쾌적한 여행이.."

 

방송이 짧으면

매우 쾌적한 여행이 될 게 확실합니다.

 

"내리실 역을 지나치셨을 경우에는 무리하게 뛰어내리지 마시고...쓰레기는 객차 사이의 휴지통을 이용.."

 

무척 많은 안내를 합니다.

 

한참을 얘기하다가

승무원분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울러, 열차 이용에 관한 몇 가지 안내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주선생님과 저는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지금까지는 열차 이용에 관한

안내말씀이 아니었단 말입니까.

 

"열차내의 기계 장비는 함부로 만지지 마시고..."

 

계속 이어집니다.

 

"저희는 3번 객차에서 근무.."

 

3번 객차로 쫓아가고 싶었습니다.

벌써 5분도 넘게 방송을 하고 있습니다.

 

"어린아이를 동반하신 승객께서는 어린 아이가 객차 안에서 뛰거나 떠들지 않도록.."

 

결국 미루가 고개를 벌떡 들었습니다.

그리고 곧바로 알 수 없는 소리를 내지르기 시작합니다.

 

어린아이를 동반하신 승객이

아이가 떠들지 않도록 하기 위해

마음을 졸였지만 이미 상황은 벌어졌습니다.

 

이대로 미루를 안고

왔다갔다해야 하나 싶었습니다.

 

"낑낑.."

 

11시 방향에서 반가운 소리가 들립니다.

고개를 쑥 빼고 보니까

엄마가 아이를 업고 서 있습니다.

 

"응애~~"

 

또 반가운 소리가

7시 방향에서 들립니다.

고개를 획 돌렸습니다.

 

역시 엄마가 아이를 업고 서 있습니다.

 

"으앙...", "에에...에에.."

 

객차 이곳 저곳에서

잠자던 아이들이 하나둘

일어납니다.

 

아까 그 방송 때문입니다.

 

어떤 엄마는 애를 안고 서서

의자에 머리를 박고 잡니다.

 

새벽 5시 30분

무궁화호 안에는

애들 소리가 가득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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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있는 거 꺼내 먹기

며칠 째 반찬이 계속 정체입니다.

 

냉장고에는 각종 고대 음식이

잘 보관되어 있습니다.

 

가히 반찬의 박물관입니다.

 

"현숙아..오늘 아침은

있는 거 꺼내 먹기의 하일라이트가 될 것 같애.."

 

좀 미안하지만 할 수 없습니다.

 

3일된 호박볶음을 꺼냅니다.

역시 3일된 닦고기 볶음도 꺼냅니다.

 

그 보다 반나절 더 오래된 국을 올려놨습니다.

딴 건 몰라도 이 순간 만큼은 많이 고통스러웠습니다.

 

눅눅해진 김도 올려놓습니다.

 

그러게 전 작게 잘라져서

한번 먹을 만큼씩 파는 김이 좋습니다.

큰 김은 꼭 남아서 눅눅해집니다.

 

반찬 그릇을 다 꺼내놓고 보니까

아무래도 너무한다 싶습니다.

 

할 수 없이 비상수단을 쓰기로 했습니다.

 

"상구..뭐 해?"

 

접시를 왕창 꺼내서

반찬을 일일이 담았습니다.

 

손님이 왔을 때나 하는 짓입니다.

 

보기 좋게 담아놓으니까

분위기가 확 다릅니다.

 

"오...좋아 좋아..오늘 반찬 죽이는데.."

 

주선생님이 한 말이 아니고

제가 한 말입니다.

 

다시 봐도 좋습니다.

이것이 바로 보기 좋은 떡의 위력입니다.

 

이런 기술은 가끔 써먹을 때

효과가 있습니다.

 

근데 다음 끼니는

또 어떻게 준비하나 걱정입니다.

 

"따르르릉..."

 

전화가 왔습니다.

어머님입니다.

 

"여보세요.."

"상구야~반찬 택배로 보냈다.."

 

살았습니다.

 

다양한 설반찬이 곧 집으로 옵니다.

 

요새 시골에서 반찬 갖다 먹는거

완전히 재미 붙였습니다.

 

이게 도착하면

또, 있는 거 꺼내먹기만 하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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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루네의 일본 여행기 8

마지막 날의

아침이 밝았습니다.

 

하코네에서 서울까지 가려면

하루 종일 움직여야 합니다.

 

급행열차를 타고 도쿄로 갑니다.

하코네로 올 때 보다는 미루가 덜 힘들어 합니다.

이것만으로도 좋습니다.

 

도쿄 신주쿠 역에 도착해서

역에 붙어 있는 백화점 꼭대기에서

점심을 먹기로 했습니다.

 

"백화점으로 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죠?"

 

일본 안내원은

저 옆쪽 계단을 올라가면 된답니다.

다른 길은 없답니다.

 

이번 여행에서

제가 가장 싫어하게 된 말이

'계단'입니다.

 

유모차를 들고

여행용트렁크와 가방들을 들고

계단을 올랐습니다.

 

점심을 먹으면서

한 사람은 미루를 안고

식당 근처를 뱅뱅 돌았습니다.

 

기억에 남는 게 죄다 이런 것들 뿐입니다.

 

이제 신주쿠역에서 하네다 공항까지

공항에서 김포공항까지

그리고 김포공항에서 집까지 구간이 남았습니다.

 

공항까지 가는 지하철 표를 끊는데만

20분이 걸립니다. 엄청 복잡합니다.

 

표를 끊고 나자 우리 앞에

계단과 계단과 또 계단이 기다립니다.

 

온천으로 풀린 마음은

계단으로 새까매집니다.

 

"출출하다.."

 

열차를 갈아타는 역에서

주선생님은 빵을 사러 가게에 들어갔고

저는 유모차와 트렁크와, 가방 두개, 그리고 벗어놓은 코트 2벌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상구~어떡하지? 여기 또 와야 할 것 같애..."

 

심장이 멎으려고 합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최대한 마음을 가라 앉히고 주선생님을 쳐다봤습니다.

 

"가게에서 쿠폰을 줬어..."

 

이럴 때 안 웃으면

여유없는 인간으로 찍힙니다.

 

드디어 공항에 도착합니다.

공항에서 젖을 먹인 주선생님은

이제 많이 지쳐합니다.

 

"나 커피가 너무 먹고 싶어...잔돈이 겨우 될 것 같은데 자판기에서 뽑아올께"

 

한참을 기다리니까

주선생님이 오는데

얼굴이 울상입니다.

 

"상구...16번이 커피여서, 1번 누르고 6번 눌렀거든..."

 

주선생님은 사과주스를 들고 있었습니다.

1번이 사과주스고,

16번은 버튼이 따로 있었답니다.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

미루는 그야말로 통곡을 합니다.

너무 힘들어 합니다.

 

반경 5미터 이내의 승객들은

모두 눈을 감고 고개를 숙이고 있습니다.

다들 놀라운 인내력으로 참고 있습니다.

 

공항에 도착했습니다.

2달 쯤 어디 갔다 온 기분입니다.

 

"아저씨, 대방동이요..."

 

택시를 타고 오는 길

빗속에 멀리 국회의사당이 보입니다.

집에 거의 다 왔습니다.

 

살다 살다

국회의사당이 반가워보기는 처음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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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루네의 일본 여행기 7

역시 이번 여행의

궁극적 목적은 온천입니다.

 

힘이 있는대로 빠져서

겨우 숙소에 도착했는데

방이 아주 넓고 좋습니다.

 

"우와 좋다~~"

 

미루도 침대가 아니라

넓은 바닥에서 다닐 수 있는 게

좋은가 봅니다.

마구 팔딱거립니다.

 

방으로 따라오신, 일하시는 할머니는

진짜 작고 허리도 굽으셨고 힘도 없어 보이셨는데

 

저희들한테

숙소 이용에 대해

한참 동안 친절히 설명을 하셨습니다.

전혀 못 알아들었습니다.

 

그래도 휴식은  편안합니다.

저녁 6시가 되자, 거창한 식사가 방으로 직접 들어옵니다.

 

아까 그 할머니 혼자서

그릇을 가득 담은 판을 들고 들어오시는데

옆으로 비틀하더니 벽에 한번 부딪힙니다.

 

"휴..먹었더니 살겠다. 하루 종일 극기훈련한 것 같애..."

 

할머니는 식사 후에도

가끔씩 방에 들르셔서

이불도 펴주시고 차도 갖다 주셨습니다.

 

우리는 누워있다가도 벌떡 벌떡 일어났습니다.

괜히 혼날 것 같았습니다.

 

이제 모든 준비가 완료됐습니다.

온천으로 출발입니다.

 

이 순간을 위해서

미루용 튜브도 얻고, 방수 기저귀도 챙겼습니다.

며칠에 걸쳐 연습도 했습니다.

 

오붓한 시간이 우리를 기다립니다.

 

신나는 온천 체험!

 

물이 너무 뜨거워서

미루는 못 들어갔습니다.

튜브도, 방수기저귀도 못 썼습니다.

 

실내 목욕탕에서

미루 샤워만 시키고 나오는데

탈의실이 너무 추워서

미루는 그 어느 때보다 큰 소리로

울어댔습니다.

 

미루를 안고

따뜻한 방으로 뛰었습니다.

지하 실내 욕탕부터 2층 까지 계단이 정말 많았습니다.

 

"그럼 우리끼리라도 노천탕에 들어가자!!"

"미루는?"

 

따로 따로 노천탕에 가기로 했습니다.

사람이 없어서 혼자서 온천을 했습니다.

주선생님은 화려한 비키니 수영복을 가져왔는데

역시 혼자 했답니다.

 

온천의 효과는 확실했습니다.

 

"현숙아~이거 봐, 이거 봐...이 부드러운 피부!!"

"오..정말?"

"얼굴도 만져 봐...로션 안 발랐는데도 이래~~"

"발라..." 

 

몇 번만 더 담그면

모든 피로가 싹 달아날 게 틀림없습니다.

 

"우리 꼭 세번씩은 노천탕에 들어가자. 이게 원래 목표였잖아..!!!"

 

"그러자, 잠깐 자고 좀 있다 또 가자!!"

 

눈을 떴습니다.

새벽입니다. 젠장 너무 잤습니다.

 

주선생님과 저는

노천탕에 딱 한번씩 갔습니다.

 

미루는 다다미방에서 내내 놀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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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루네의 일본 여행기 6

이번 여행의 하일라이트는

넷째날입니다.

 

도쿄를 떠나서

하코네라는 곳으로 갔습니다.

 

인터넷으로 찾아보니까

이곳은 '천혜의 자연'을 가진 곳이랍니다.

 

우리는 고속으로 달리는

급행열차를 타고 하코네에 가서

 

등산열차를 타고 산을 오르고

케이블카를 타고 더 높은 산을 오르고

 

로프웨이란 걸 타고 온천이 뿜어져 나오는 산 꼭대기로 가서

뜨거운 물에 익힌 계란을 까 먹고

 

넓은 호수를 가로지르는

유람선을 타고

 

유리병을 직접 불어서 만들 수 있다는 곳에 가서

병을 만들어 오기로 했습니다.

 

자, 드디어 하코네로 출발입니다.

 

짐은 여전히 그대로지만

그래도 즐겁습니다.

우리는 여행을 하고 있는 겁니다.

 

하코네행 급행 열차에서

표가 없어서 따로 따로 앉았습니다.

 

주선생님은 일본 할머니 세명과

한참 웃고 떠듭니다.

 

말 안 통하는 사람과 그럴 수 있다는 건

참 신통한 재주입니다.

 

한 30분 쯤 지났을까

미루가 보채다가 울다가 합니다.

 

그래도 겨우 달래가며

드디어 목적지에 도착했습니다.

 

 

"현숙아, 숙소가 어디지?"

"일단 역 밖으로 나가자.."

 

"잠깐 미루를 업자"

"내가 안을께"

"천천히 해.."

 

모포가 바닥에 툭 떨어집니다.

 

"아기띠 좀 뒤에서 당겨줘"

"좀 더 꽉"

 

"카메라 조심해...off로 놨어?"

 

"저기가 나가는 곳인가봐.."

"휴, 횡단 보도가 없다. 지하도로 건너야 되나봐.."

 

"저기 건너가면 안내소가 있겠지?"

"내가 여기서 짐 지키고 있을테니까 너 혼자 갔다와"

 

사람은 많고

짐도 많아 정신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미루의 대활약이 시작됐습니다.

 

미루는

등산열차 안에서 울고

케이블카 안에서 울었습니다.

로프웨이에선 보채더니

로프웨이에 내려선 칭얼댑니다.

 

주선생님과 저는

장소만 바꿔가면서

계속 미루를 달랬습니다.

 

"상구, 아무래도 안되겠다. 미루가 너무 힘들어 하는데..그만 내려가야겠어.."

 

유람선 타는 걸 취소하고

유리병 만들기도 포기합니다.

 

산 정상 쯤에서 계란 까 먹는 계획도 포기하고,

대신 주선생님이 밑에서 기다리고

제가 후딱 올라가서 그냥 계란 몇 개 사와서 나중에 먹었습니다.

 

조금만 기다리면

후지산 정상을 가린 구름이 걷힐 텐데

마음이 급해서 그냥 구름 가린 후지산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습니다.

 

몸과 마음이 완전히 녹초가 됐습니다.

 

그래도 우리에겐 마지막 희망

'온천'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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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루네의 일본 여행기 5

셋째날은 명실상부하게 노는 날입니다.

행사는 없습니다.

 

잔뜩 기대에 부풀어

아침 일찍 일어났습니다.

 

미루는 이 날 따라

놀라운 아침잠 실력을 보여줍니다.

 

아침 먹고 자더니

12시 30분에 일어났습니다.

 

오전 다 지났습니다.

 

1시엔 영화제 관계자들이

점심 산다고 나오라고 해서 갔습니다.

 

진지한 대화가 이어집니다.

 

밖에선 일본 우익 단체들이

차에 '1인 1살(한 사람이 한 명씩 죽이자)' 같은 구호를 적고

행진합니다.

 

일본 건국기념일을 기념하는

행진이라고 합니다. 무섭습니다.

 

대화가 더 진지해지더니

오후 3시가 넘어서 끝났습니다.

 

하루가 다 갔습니다. 

해지기까지 2시간 30분 남았습니다.

 

우에노 지역에 있는

과학박물관에 갔습니다.

우린 이런 거 좋아합니다.

 

주선생님과 저는

해양생물, 육상생물, 미생물, 공룡 등등에 열광했고,

특히 생물의 계통도를 기가 막히게 전시해 놓은 게 너무 치밀해서 감탄했습니다.

 

미루는 자다가

박물관 끝날 때쯤 깼습니다.

 

해가 지고 숙소로 돌아왔습니다.

미루를 먹이고, 씻기고, 재웠습니다.

 

"나가야하지 않겠어?"

"이 시간에? 밖에 바람도 많이 불고 미루도 자잖아.."

 

주선생님의 의지가 강합니다.

 

"여행 왔는데 이렇게 보낼 순 없어, 들춰업고 나가자.."

 

밤 10시에 미루를 안고

거리에 섰습니다.

 

근처엔 놀이공원도 있고,

쇼핑센터도 있고, 공원도 있고, 큰 실내온천도 있습니다.

 

다 문 닫았습니다.

실내온천은 어린이 입장 금지입니다.

길거리에 사람도 거의 안 다닙니다. 차도 별로 없습니다.

 

그래도 신나게 사진찍고 놀았습니다.

 

잠시 벤치에 앉아 쉬는데

어떤 아저씨가 시야에서 나타났다 사라질 때까지

우리를 계속 불쌍하게 쳐다 봅니다.

 

주선생님이 목에 힘을 줘 말씀하셨습니다.

 

"안되겠다. 들어가자.."

 

여행 셋째날

우린 놀기 위해 안간힘을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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