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 해당되는 글 1건

  1. 2011/10/20 스크랩한 정희진씨의 글 (3)

스크랩한 정희진씨의 글

2011/10/20 01:54

가족-애인 아니면 타인

한겨레 칼럼 야!한국사회
2005.8.28


“너무나 사랑하고 있고요. 당신과 얘기하면 정말로 즐거워요. 그래도 언제까지나 친구로 지내요, 열정보다는 친구로….” 몇 년 전 중남미 코스타리카에서 가장 유행했던 노래 가사다. 제목은 ‘우리는 친구, 그뿐’. 이에 반해, “나를 버리고 가신님은 10리도 못가서 발병 난다”, “사랑은 아무나 하나”, “내 여자니까”. 한국의 유행가 가사들은, 다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상대에 대한 소유와 협박, 집착과 의무를 강요하는 내용이 대부분이다. 뜻대로 안되면 한을 품고, 저 세상까지 같이 가자고 주장한다.

‘낭만적 사랑’ 즉, 일부일처의 배타적 이성애에 기반한 가족이기주의와 군사주의가 근대 국민 국가의 쌍생아라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1949년부터 코스타리카 헌법은 상설 군대 금지를 명시하여, 현재까지 국가 예산 중 군비 지출이 제로이다. 그 돈을 교육비와 의료비로 사용하니, 무상의료, 무상교육에다가 주변국 난민까지 돌보고 있다. 이 나라는 다른 문제도 진보적이다. 여성 인물이 화폐 주인공으로 나온 지 오래고, 이미 1882년에 사형 제도를 폐지했다. 군대 없는 나라의 상상력이다. 한국은 어떠한가.

지난 60년간 ‘광복’이란 이름의 군사적 긴장 속에 살아왔으며, 군비 지출 세계 10위권을 들락거린다. 어느 것도 확실하거나 안전하지 않은 위험 사회이기 때문에, 믿을 것은 사적 관계뿐이다. 가족과 결혼은 복지 제도이며, ‘먹을 것이 해결되자’ 연애는 일상에 새로운 아우라를 주는 종교의 위치로 승격되었다. 지금 한국인들의 관계는 가족-애인 아니면 타인이다.

여성들끼리 폭력이 오갔다면, 대개는 다시 회복하기 어려운 관계다. 남성(문화)은 전혀 다르다. 패싸움이나 결투를 보라. 그들은 서로 두들겨 패고 한판 엉겨 붙고 나면, 진정한 친구가 된다. 폭력이 애무인 것이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은 동어 반복이다. 원수란 사랑이기 때문이다. 군사주의는 ‘우리’ 대 ‘적’이라는 이분법에서만 작동 가능하므로, ‘우리’ 내부의 차이는 가상의 ‘적’ 앞에서 봉합되어야 한다.

‘우리’와 ‘적’은 아무런 공통분모가 없는 ‘웬수’처럼 보이지만, 실은 ‘우리’란 ‘적’을 통해서만 설정되는 범주이므로 결국 ‘우리’와 ‘적’은 한통속이다. ‘우리’의 근거는 ‘적’이다. 거울이 되는 상대방. 이거 사랑하는 사이 아닌가? 나의 모든 불행과 상처는 너(‘적’, 애인) 때문이라는 신음은, 스스로 상대방에게 지나친 권력을 부여하는 행위다. 그래서 가장 급진적인 저항은 비판이 아니라 무관심인 것이다.

나의 존재를 ‘적’이나 애인과의 관계에서 설명하지 않고, 내 인생의 참고 문헌이 다채롭고 무수할 때, 군사주의, 가족주의, 커플지상주의 강박에서 벗어날 수 있다. ‘적’과 애인이 나와 같음을 전제하고 지향하는 사이라면, 친구로 지내는 것은 그 반대다. 동무는 말 그대로 같은 것(同)이 없는(無) 상태. 동무는 앞의 노래처럼 깊이 사랑하지만 뜨거운 관계는 아니다. 동무는 ‘서늘’할 수밖에 없는데, 이 ‘쿨’함은 보살핌 없음, 연민 없음, 너무 약해서 고통 받을까 두려워 개입하지 않는 ‘싸늘’한 것과는 다르다.

관계 양식을 기존의 관습에 의존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성장한다면 헤어질 수밖에 없다는 운명에서 서늘한 것이다. 60년 동안 미워하고 60년 동안 못 잊어하는 것은, 너무 뜨거워서 내가 녹아버린 관계다. 자기 도피가 아니라 발견을 위한, 자신을 포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확장하기 위한, 자신을 늘 새롭게 만드는 사랑/관계는 애인이나 ‘적’하고는 가능하지 않다(이 글은 이경주, 김영민, 정유진, 이대훈, 김현경의 글에서 도움 받았다).

정희진/서강대 강사·여성학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