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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일 아키바 토르 주한 이스라엘 대사는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전쟁범죄를 저질렀다고 비난하는 편지를 받았다”며 <한겨레>에 ‘가자도 중동의 싱가포르가 될 수 있다’는 글을 기고했다. 최근 한국의 160개 시민사회단체가 이스라엘을 아파르트헤이트 국가라 규정하고 아파르트헤이트의 종식과 팔레스타인 가자지구 폭격 중단을 요구하는 서한을 이스라엘 대사관에 전달한 데 따른 것이다.
기고문에서 전쟁범죄에 대한 이스라엘 대사의 반론은 “자위권”이라는 단어에 집약됐다. 하마스가 먼저 “침략”했고 이스라엘은 방어했을 뿐이라는 주장이다. 역사적 맥락을 삭제하고 사실관계를 편집해 유리한 부분만 남긴 후 피해자의 언어마저 빼앗는 것은 이스라엘의 오랜 전략이다. 하마스가 최후통첩을 보내기 전 이스라엘은 이슬람 성지인 알아크사 사원 내부까지 난입해 기도 중인 신자들과 시위대에 무차별 공격을 퍼부었다. 시위대는 동예루살렘 셰이크자라에서 팔레스타인 주민을 내쫓고 불법 유대인 정착민을 이주시키려는 이스라엘의 식민화 계획에 저항하고 있었다. 하마스는 이들에 대한 이스라엘 국경경찰의 살인적 공격을 멈추라는 최후통첩을 보냈던 것이다.
누가 침략자인가? 분명히 하자. 군사점령은 평가의 문제가 아닌 사실행위다. 견해가 충돌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란 뜻이다. 이스라엘은 1967년 동예루살렘을 포함한 서안·가자지구를 군사점령했고, 점령지 동예루살렘을 1980년 자국 영토로 병합했다. 유엔(UN)을 비롯한 국제사회는 불법적 영토 병합을 당연히 인정하지 않았고, 이스라엘이 군사점령지 전역에서 철수할 것을 일관되게 요구해 왔다. 그런데 이스라엘 대사는 오히려 팔레스타인이 침략자고, 동예루살렘 주민은 이스라엘 시민권을 얻으면 된다고 주장한다. 예루살렘 인구의 인종 구성을 따질 필요도 없이, 동예루살렘의 유대인 정착촌은 존재 자체로 제4차 제네바협약을 정면 위반하는 전쟁범죄다.
그럼, 시민권을 얻은 팔레스타인인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1948년 이스라엘 건국 당시 자행한 인종청소로도 다 지우지 못한 팔레스타인 원주민은 현재 이스라엘 인구의 20%를 점한다. 칼란수바와 네게브 사막에서 이스라엘은 이들 시민권자의 집과 마을을 허물고 강제이주시킨다. 이들을 차별하는 법률만 60개가 넘고 2018년엔 헌법적 위상의 유대민족국가법도 제정됐다.
건국 이래 이스라엘은 ‘역사적 팔레스타인’ 땅 전체를 “유대화”해 왔다. 7백만 팔레스타인 난민이 고향 땅을 밟는 것조차 금지하고, 점령지 가자지구를 15년간 봉쇄한 채 대규모 폭격으로 주민을 주기적으로 학살하고, 점령지 동예루살렘과 서안지구에 불법 유대인 정착촌을 확장하고, 이스라엘 내 팔레스타인인의 집을 부수고 강제이주시키는 것. 유대화의 다른 이름은 아파르트헤이트다. 이런 상시적 침략 하에 오히려 유엔 헌장 상의 자위권을 보장받는 쪽은 팔레스타인이다.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식민화를 정당화하기 위해 하마스의 이슬람주의에 대한 대중의 반감에 곧잘 호소한다. 하지만 일제강점기 우리의 경험을 토대로 보면, 식민화에 맞선 팔레스타인의 투쟁이 정당하다는 걸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하마스는 2006년 선거에서 승리한 팔레스타인의 정당이다. 점령자 이스라엘에 사실상 백기를 든 자치정부에 실망해 팔레스타인 주민이 선출한 대표자다.
이스라엘은 민주주의의 가치를 강조하면서도 피점령지의 민주적 선거 결과엔 승복하지 않았다. 결과가 구미에 맞지 않자 가자지구 주민에 대한 집단처벌을 시작했다. 2007년 가자지구를 봉쇄한 이래 칼로리까지 계산하며 생필품·의약품 등 모든 물자의 출입을 통제했고, 항구와 공항을 폭격해 초토화했다. 학살이 거듭되자 가자지구의 모든 정당이 무력투쟁에 나서게 됐다.
올 3월 국제형사재판소(ICC)는 팔레스타인에서 자행된 전쟁범죄에 대한 조사를 개시했다. 이스라엘은 ICC에 관할권이 없다고 주장하는 한편, 기소될 가능성이 높은 정치인·군장성의 명단을 비밀리에 뽑아 증거 인멸을 시도하고 있다. 이스라엘과 함께 조사 대상으로 지목된 하마스는 처음부터 조사를 반겼다. 과거 유엔 인권이사회의 조사에서 가자 침공 당시 팔레스타인 “민간인을 방패로” 삼은 사실이 드러난 것도 하마스가 아닌 이스라엘이었다. 가자지구가 중동의 싱가포르가 될 수 없는 건 오직 이스라엘 때문이다.
한겨레 원문보기
가자지구 사진만 봐도 가슴이 철렁하는데 다 부수고 죽여놓고 싱가포르 같은 소리하는 거 보면 우리가 같은 인간종이 맞는가 21세기 사는 거 맞는가 정말 어이가 없다.
기고할 수 있도록 엄지원 기자님이 많은 도움을 주셨다. 엄 기자님은 5월에 팔레스타인에 있었던 상황도 엄청 쉽고 상세하게 정리해서 뉴스레터도 발행하셨다. : 2021. 5. 20.h_weekly 17호: 이-팔 ‘전쟁’도 ‘갈등’도 아닌 이유
공부량도 상당하고 기자님들 다 이러신가 인터뷰하면서도 감동했는데 결과물 보고는 감탄했다. 여기까지 읽으셨으면 위 뉴스레터 꼭 읽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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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르단 강부터 지중해에 이르기까지, 이 땅의 유대인 지상주의는 아파르트헤이트다”
2021년 1월 이스라엘의 한 인권단체가 낸 보고서의 제목이다. 서구 언론은 이스라엘을 “아파르트헤이트” 국가로 규정하는 것이 대단히 새로운 일인 양 앞다퉈 보도했다. 하지만 팔레스타인에 연대하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시민사회가 이스라엘을 아파르트헤이트 체제로 규정한 지 이미 오래고, 남아공의 투쟁에서 배운 팔레스타인 시민사회 역시 같은 규정을 쓴 지 오래다. 여기서 새로운 점은 이 얘기를 한 게 이스라엘 단체라는 것뿐이다. 하지만 이들은 해방운동의 주역이, 그리고 아파르트헤이트를 겪은 연대자가 같은 선언을 했을 때보다 서구 언론으로부터 훨씬 큰 주목을 받았다. 항상 그렇듯이.
2017년에 팔레스타인 해방운동에 연대하는 이스라엘과 미국의 유대인 활동가들이 기획한 평화행사에 참가한 적이 있다. 마침 같은 기간에 팔레스타인 현지 활동 예정이었고, 세계 각지에서 활동가가 오는 만큼 한국과 이스라엘의 관계도 알리고 교류도 하면 좋겠다 싶었다. 또 팔레스타인에 가려면 이스라엘의 출입국 심사를 받아야 하는데, 연대 운동가를 색출해 추방하려는 이스라엘의 심문 과정에서 미국 단체가 주최한 행사 초대장이 있으면 도움이 될 거란 계산도 있었다.
그때까지 나는 이스라엘 쪽 운동권과 그다지 접점이 없었다. 처음 이스라엘 활동가를 만난 건 십여 년 전 양측의 ‘테러’로 자식을 잃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부모 모임의 활동가 두 사람을 한국 단체에서 초빙해 만남을 주선해 줬을 때였다. 공식적인 만남의 자리에서 이스라엘 활동가가 자식을 잃은 똑같은 아픔을 얘기하는 동안 팔레스타인 활동가는 내내 침묵하고 있었다. 나는 군사점령의 맥락을 사상한 채 개인적 고통에 초점을 맞추는 활동에 공감할 수 없었고, 팔레스타인 활동가에게 이에 대해 개인적으로 토로했다. 그 활동가는 내 얘기에 수긍하면서도 더는 아무 말이 없었다.
또 한국에 온 저명한 이스라엘 활동가를 찾아가 만난 적도 있다. 팔레스타인 연대 운동가라면 누구나 미디어를 통해 접해봤을, 어쩌면 그 어떤 팔레스타인 활동가보다도 유명했던 그는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주택 철거 문제에 주로 대응하는 활동가였다. 내가 한국의 철거민을 향한 국가 폭력이 이스라엘과 닮았다고 말을 걸자 그는 그렇다면 팔레스타인보다 한국 문제에 집중하는 게 어떻겠냐고 반응했다. 해외 연대자들의 초대로 이스라엘의 군사점령에 대해 발표하러 다니는 활동가가 하기엔 부적절한 발언이었다.
그 외에도 평화행사 등의 자리에서 팔레스타인 해방운동의 연대자로서 이스라엘 활동가를 만나봤지만 몇 안 되는 경험에서 나는 항상 입장차로 환원할 수 없는 불편함을 느꼈다. 하지만 매우 단편적인 만남이었고 그렇다고 또 팔레스타인 활동가들과의 만남이 항상 유쾌하고 생산적이었던 것도 아닌지라 이 불편함을 일반화할 생각은 없었다. 다만 제한된 역량을 팔레스타인 활동가와의 교류에 집중하겠다는 판단을 내린 정도였다.
아주 나중에서야 불편함의 원인을 깨달았다. 팔레스타인 해방이라는 대의에서 팔레스타인 당사자보다 이스라엘인의 목소리가 더 부각된다는 점이 불편했던 것이다. 활동을 하면서 점점 나는 내가 접하는 많은 뉴스가 이스라엘 활동가들의 운동이고, 내가 참조하는 많은 기사나 보고서가 이스라엘 활동가들의 작업임을 깨달았다. 좌에서 우까지 이스라엘 국가 정책에 비판적인 다양한 스펙트럼의 이스라엘 활동가들이 영문으로 생산하는 콘텐츠 양이 훨씬 많고, 이스라엘 활동가들의 이야기가 서구 언론에 더 보도된다. 많은 이들이 영어와 히브리어가 모국어인 이중 국적자들이고, 활동을 지원해 주는 서구의 기금도 많다. 목소리를 크게 낼 기회 자체가 더 많은 것이다.
2017년 평화행사는 팔레스타인 해방운동에 헌신하는 이스라엘 활동가들이 기획한 것으로, 팔레스타인에 친화적인 미국 단체가 후원했다. 나 같은 일반 참가자도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각국에서 유대인 정체성을 가지고 평화운동을 하는 활동가를 초빙해 팔레스타인 해방운동에 동참시키는 목적이 있었음을 참가 후에 알게 됐다. 팔레스타인 활동가 몇 명도 발표자로 초대됐다. 나는 좋은 행사구나 하고 별 생각 없이 참가했지만, 프로그램이 진행되며 금세 마음이 불편해졌다. 팔레스타인 해방을 주제로 서안지구에서 진행되는 행사인데 호스트가 이스라엘인이고 국제 활동가는 물론 팔레스타인 활동가도 게스트다. 처음으로 팔레스타인 해방운동에 대해 알게 됐다는 다른 활동가들은 이스라엘 활동가들이 설정해 둔 틀에 따라서, 그들이 제시하는 관점을 흡수하며 연대 운동을 시작한다. 가장 팔레스타인에 친화적인 행사에서조차 팔레스타인인은 주체성을 견지할 수 없었다.
행사에 참가한 팔레스타인 활동가를 따로 만나 이 행사의 주객전도 때문에 불편함을 느꼈다고 얘기했다. 팔레스타인 활동가는 공감을 표하며 더 오랜 문제의식을 나눠줬다. 강조하건대 나도 이 활동가도 이스라엘 내부의 비판의 목소리를 중시하고, 행사를 주관한 이스라엘 활동가들을 존중한다. 그러나 이스라엘 건국부터 70여 년간 이어진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지배에도 불구하고 국제사회는 이들을 점령자와 피점령자라는 억압의 구도가 아니라 서로 화해가 필요한 동등한 두 당사자로 간주하고 있다. 그리고는 오히려 이스라엘인의 목소리에 더 귀를 기울인다. 이는 국가나 국제기구에 국한되지 않는다. 여러 국제 행사, 특히 팔레스타인 해방운동에 우호적인 서구 단체에 발표자로 자주 초대받던 이 활동가가 말하길, 행사를 주관하거나 기금을 대는 서구 단체들은 팔레스타인 발표자만 있다면 행사가 편향적이라고 여긴다고 한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직접 주최하는 행사더라도, 이스라엘 측 주관이 붙거나 이스라엘 발표자가 동등하게 배치되지 않으면 편향성을 이유로 기금을 지원받을 수 없다.
양측의 얘기를 공평하게 들어보자며 판관 노릇을 자처하는 사람들만 이러는 건 아니다. 오히려 이스라엘 역시 여느 국가처럼 국가 정책이 시민의 비판적 입장을 대리할 수 없고, 이스라엘 역시 계급 사회인데, 그곳의 노동자나 활동가, 잠재적 해방운동 세력과 연대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비슷하게 행동한다. 하지만 어떤 상황에서도 양자는 동등하지 않다. 이스라엘 사회 내 여러 모순에 저항하는 주체들은 그러나 팔레스타인과의 관계에선 점령자로 군림하거나, 최소한 적극적 방조자로서 혜택을 누린다. 해방의 가능성을 담지한 이스라엘 주체들은 오직 자신이 점령자로서 누리는 혜택을 거부하고 이스라엘의 아파르트헤이트 체제에 적극적으로 저항한다는 조건 하에서만 해방운동에 함께 할 수 있다. 물론 점령자라는 자신의 객관적 위치에 대해 성찰한 이스라엘 활동가들도 있다. 그러나 아파르트헤이트 체제 하에서 권력 관계는 개인들의 선의나 의지와 무관하게 작동한다.
팔레스타인 활동가와 대화 후 십여 년 전 한국에 왔던 피해자 부모 모임의 팔레스타인 활동가가 떠올랐다. 나는 그때, 당신도 나처럼 생각한다면, 그러니까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지배에 따른 체계적 폭력에서 ‘테러’만 떼어내 그 피해를 얘기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면 그걸 부정하는 이스라엘 활동가랑 왜 같이 활동하느냐고 물었다. 대답 없이 난감한 표정으로 웃던 그가 답해 주지 않았던 질문에 대한 나름의 답을 얻었다.
서두에 언급한 이스라엘 인권단체가 낸 보고서의 제목 중 “요르단 강부터 지중해에 이르기까지”란 요르단 강과 지중해 사이에 위치한 역사적 팔레스타인 땅을 일컫는다. 이 문구는 “요르단 강부터 지중해에 이르기까지, 팔레스타인은 해방되리라”라는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의 구호에서 따온 것이다. 이 문구를 쓰기만 해도 시온주의 세력에게 반유대주의자로 낙인찍히기 일쑤다. PLO는 인종과 종교에 무관하게 팔레스타인 땅의 모든 이들이 동등하게 살 수 있는 해방된 세속 국가 설립의 필요성을 역설했지만, 시온주의 세력은 이것이 유대인을 말살하겠다는 뜻이라고 호도했다. 정작 팔레스타인인을 말살하고 유대인만을 위한 국가를 세우겠다는 시온주의 이상은 2018년 이스라엘을 유대인만을 위한 국가로 규정하는 헌법적 위상의 ‘유대민족국가법’의 제정으로 실현되었다. 이스라엘의 노골적 인종주의에 비판적인 이스라엘 활동가들과 여타 유대 정체성을 갖고 활동하는 이들은 무차별적인 반유대주의 낙인찍기에 반대하며 팔레스타인의 입장이나 구호를 준용하곤 한다.
보고서를 낸 이스라엘의 인권단체 벳첼렘B’Tselem은 신뢰도 높은 연구와 활동으로 명망이 높다. 나 역시 많은 데이터와 근거의 1차 출처로 벳첼렘을 자주 인용한다. 벳첼렘은 점령지 팔레스타인 주민들이 직접 경험한 물리적 폭력을 기록할 수 있도록 장비를 제공하고 교육한다. 그리고 이들의 원소스에 기반해 각종 데이터와 보고서를 생산한다. 점령지 현지와의 굳건한 연결점이야말로 신뢰성의 근간이다.
그리고 그 연결점을 만들어내는 것은 이스라엘 시민권을 가진 팔레스타인 활동가들이다. 알다시피 이스라엘은 1948년 건국을 전후해 팔레스타인 원주민을 추방·학살했지만 모든 원주민을 인종청소하는 데는 실패했다. 그 결과 현대 이스라엘 인구의 약 20%는 팔레스타인인이다. 이들은 이스라엘에서 "팔레스타인계 이스라엘 시민" 혹은 "아랍계"로 분류된다. 팔레스타인에선 1948년 이스라엘 건국이라는 대재앙(아랍어로 ‘나크바’)를 기억하며 이들을 ‘48년 팔레스타인인’이라 부른다. 이에 대비해 1967년 점령당한 서안·가자지구의 주민들은 ‘67년 팔레스타인인’이라고 부른다.
48년 팔레스타인인은 67년 팔레스타인인보다는 상대적으로 나은 처지에 있다고 여겨진다. 이스라엘 건국 후 18년간 이스라엘 내 팔레스타인인은 유대인과 달리 군사정부의 통치를 받았지만, 어쨌든 그것은 과거의 일이고 지금은 이들이 이스라엘 정부 구성에 참여할 권리가 보장된다는 것이다. 비록 시온주의 이스라엘군에 복무하지 않는 팔레스타인 시민권자에게 직업선택의 자유가 현저히 제한적이지만, 점령지 팔레스타인 주민에 비해 경제적으로 여유로운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유대민족국가법”이 있는 나라에서 법·제도적으로 2등 시민 취급받는 48년 팔레스타인인은 또 다른 전선에서 싸우고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이스라엘의 장기화된 군사점령은 48년-67년 팔레스타인인 사이에 위계를 만들어냈다. 이 위계는 아파르트헤이트 체제의 일부다.
아파르트헤이트 체제 아래 활동하는 이스라엘 인권단체는 체제 비판적이면서도 그 체제를 답습한다. 팔레스타인 연구자 및 활동가 하닌 마이키와 라나 타투르에 따르면 많은 이스라엘 인권단체는 유대인, 특히 유럽 출신 아슈케나지가 패권을 장악하고 있다. 조직 구성도를 보면 인종 간 위계가 분명히 드러난다. 이스라엘 유대인과, 48년 팔레스타인인, 67년 팔레스타인인으로 구성된 단체에서 상층부, 즉 단체 대표, 대변인, 국제 코디네이터, 정책 보고서 집필자 등 공식적인 역할을 맡은 대부분이 이스라엘과 미국의 유대인, 그 중에서도 얼굴이 하얀 아슈케나지다. 아랍어와 히브리어를 할 수 있는 48년 팔레스타인인은 유대인 상층부와 67년 팔레스타인인 사이의 매개자 역할을 부여받는다. 벳첼렘 대표는 2016년 가진 인터뷰에서 팔레스타인인의 목소리와 주체성을 활동에 어떻게 담보하느냐는 질문에 그 점에 대해 항상 생각한다며 “서안지구의 자원활동가 200여 명에게 비디오 카메라를 줘서 점령 하의 일상을 기록할 수 있게 해 주고, 원본 영상은 물론 팔레스타인인이 찍은 그대로 공개한다”고 답했다. 이에 대해 마이키와 타투르는 이렇게 비판한다.
“이 질문 자체가 이스라엘 인권단체의 해악을 보여준다. 인권단체들은 팔레스타인인의 경험에 대한 조정자, 즉 주체성과 목소리를 부여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중략) 답변은 팔레스타인 원주민이 할 수 있는 일은 그들의 현실을 기록하는 것뿐임을 암시한다. 이스라엘 인권운동 영역은 팔레스타인인에게 지식 생산자의 역할이나 직접 경험하는 현실을 해석할 권능을 주지 않는다. 이들이 말하는 임파워먼트(empowerment)란 파워를 빼앗은 자유주의적 임파워먼트의 전형으로, 백인 구원자라는 사고방식에 걸맞는다. 이러한 착취적이고 인종화된 관계에서 중요한 한 가지 양상은 이들 단체의 존속에 필수적인 정보와 증언을 수집하는 과정에서 팔레스타인인들이 감정적이고 정신적인 노동을 수행해야 한다는 점이다.”
벳첼렘보다 훨씬 진보적인 그룹들도 마이키와 타투르의 비판에서 자유롭지 않다. 이들조차 연대 운동의 기본 원칙인 "팔레스타인 민중이 주도한다(Palestinian-led)"를 따르지 않는다. 의도와 무관하게 언론에 훨씬 더 노출되며 해방운동의 대변자로 역할하기도 한다. 팔레스타인 현장의 소리에 귀 기울이는 국제 연대자들의 노력과 무관하게 현재 팔레스타인 인권 문제에 대해 각 사안 별로 국제사회에서 대표성을 갖는 것은 이스라엘 단체들이다.
한때 팔레스타인 해방운동의 상징이었던 PLO의 야세르 아라파트는 1974년 유엔에서 가진 유명한 연설에서 이렇게 얘기했다. “우리는 유대교 신자, 기독교 신자, 이슬람 신자 들이 평등하게, 인종·종교에 따른 차별 없이 같은 권리를 누리고 같은 의무를 지며 살아갈 수 있도록 투쟁하고 있다.” 요르단 강부터 지중해에 이르기까지, 아파르트헤이트 철폐를 위해 이스라엘 연대자들이 풀어야 할 숙제가 많다.
* 워커스 78호 기고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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