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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3/12/13
    10월 7일의 진실
    뎡야핑
  2. 2018/05/15
    이스라엘 건국 70년, 팔레스타인 인종청소 70년
    뎡야핑

10월 7일의 진실

이 영상을 찍은 후에도 10월 7일 노바 뮤직 페스티벌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관련해서 많은 사실이 드러나고 있다. 아래 인용글은 비슷한 시기에 쓴 거고, 최근 거는 인용문 아래

10월 7일, 하마스가 이스라엘을 공격한 날의 이야기를 해 보겠습니다. 이날 이스라엘의 음악축제가 열린다는 걸 사전에 알게 된 하마스가 군사작전을 짜서, 축제 장소에 쳐들어가 비무장한 민간인을 200명 넘게 살해했다는 이야기에 저도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온전히 믿기는 힘들었습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는데요. 먼저 저는 이슬람 정치 운동의 대척점에 서 있는 세속주의자기 때문에 하마스를 조금도 지지하지 않습니다. 그렇대서 하마스를 실제 이하로 깎아내리거나, 반대로 어찌 됐든 팔레스타인 저항 세력이기 때문에 좋게 볼 생각도 없습니다. 제가 있는 그대로 이해하는 하마스는 온건한 이슬람주의 세력으로, 예전에 시리아나 이라크에서 창궐했던 IS 같은 극단적 이슬람 정치 세력과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이스라엘은 하마스가 IS와 같다며, 하마스가 아기 머리를 베었다거나 여성의 몸이 부서질 때까지 강간했다는 둥 입에 담기도 끔찍한 짓을 저질렀다고 무수한 프로파간다를 퍼뜨렸지만, 이후 이런 사실이 없다는 게 이스라엘 언론을 통해 속속들이 드러났습니다. 일단 사실 여부와 무관하게 가짜 뉴스(허위 조작 정보)를 퍼뜨려 집단 학살을 자행할 근거를 만든 것뿐입니다. 아무튼 그런 IS나 할 법한 짓을 하마스가 했다는 이스라엘의 주장을 서양의 정부들과 언론들이 사실이라고 퍼뜨렸습니다. 일단 퍼뜨리고 나중에는 정정하고 있지만 자극적인 가짜 뉴스가 퍼지는 것과 정정된 뉴스가 퍼지는 속도와 범위는 무서울 정도로 다릅니다. 저는 하마스가 IS와 다르며, 오히려 서로 적대하며 서로 죽고 죽이는 관계라는 것도 알고 있지만, 무엇보다 첫 군사작전이 목표로 한 게 고작 민간인 학살이라면 팔레스타인 사회에서 신임을 유지할 수가 없기 때문에, 어째서 하마스가 그런 짓을 한 건지 납득이 가지 않았습니다.

더더군다나 한국 언론에는 하마스 단독으로 이스라엘을 공격한 것처럼 나오지만, 실제로는 지난 몇 년간 오랜 분열을 딛고 팔레스타인 저항 세력들이 단일한 무장 투쟁 전선을 만들었고, 10월 7일 알아크사 홍수 작전은 이들이 함께 계획한 것입니다(참고로 앞서 말한 ‘파타’는 무장 해제했기 때문에 공식적으로는 함께하지 않습니다). 하마스도 그렇지만, 좌파 세력이 그런 민간인 학살을 작전으로 짰다는 걸 그대로 믿기가 어려웠습니다. 또한 하마스는 민간인을 학살했다는 의혹을 부정하며, 고의적으로 민간인을 노린 것이 아니고, 이스라엘 군경과 무장한 경비대와 정착민 등과 교전하는 과정에서 민간인들이 살해됐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리고 인질들을 인간적으로 대우하는 영상을 계속 내보냈죠. 이번 군사작전의 목표는 이스라엘 감옥에 갇힌 5천에 가까운 해방 운동가들을 석방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수감자와 교환 협상하기 위해 이스라엘 인질을 최대한 많이 데려가고, 또 군사 기지를 공격하는 게 그 수단이었고요. 참고로 수감자(인질) 교환은 거의 유일하게, 이스라엘이 협상에 응하는 영역입니다.

전 세계 연대자 중, 저처럼 10월 7일의 일에 대해 의혹을 품은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당연하죠. 우리는 하마스가 IS처럼 행동하지 않는다는 걸 아니까요. 이스라엘이 공개한 사진과 영상을 보면 자동차와 사람이 완전히 새카맣게 불타 죽고, 키부츠의 집이 완전히 부서져 있었는데, 하마스의 경량화기로 그리고 중장비 없이 그렇게 파괴할 수 없다는 이야기들이 나왔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언론에서, 10월 7일 이스라엘 민간인 일부를 살해한 것은 이스라엘 점령군이라는 보도가 조금씩, 계속해서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미국이 이스라엘에 준 아파치 헬기가 달리는 사람과 자동차에 미사일로 폭격하는 영상과 자신이 이스라엘 민간인을 폭격하지 않았다고 100% 확신할 수 없다는 조종사의 인터뷰도 나왔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하마스는 축제가 있단 걸 몰랐다는 이스라엘 경찰 조사결과가 보도됐습니다. 경찰이 생포한 하마스 대원들의 진술도 그렇고, 원래 목/금 개최 예정이었던 음악축제는 불과 이틀 전에 하루 연장이 결정돼 하마스가 몰랐을 가능성이 높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또 이스라엘 점령군의 아파치 헬기가 음악축제에 온 사람들에게 발포했다는 내용도 나왔습니다. 이스라엘이 고수해 온 내러티브가 깨진 것입니다.

- 질라라비에 기고한 글 중에서

나는 내가 아는 사람 중에 음모론을 제일 싫어하며 음모론에 무조건적인 경기를 일으키는 사람인데. 그런데 10월 7일에 하마스가 이스라엘 민간인을 학살하는 군사작전을 짰다는 얘길 듣고, 실제로 많은 민간인 시신이 발견된 뒤에도, 너무 너무 납득할 수가 없어서 음모론자가 될 것 같아서 돌아버릴 것 같았다. 하지만 팔레스타인 저항운동이 전례 없이 세계적으로도, 한국에서도 공격받고 있는 상황에서 섣불리 내 의문을 막 얘기할 수도 없었다.

나 자신이 스스로 도저히 납득이 안 돼서 이런 저런 가능성을 생각해 봤었다. 내가 모르는 새 하마스 내 권력 관계가 드라마틱하게 바뀌어서 극단주의자들이 장악을 했다거나? 하마스 정치가 최고 대가리들은 이 군사작전을 거의 마지막 단계에야 알았다는 보도도 있었다. 하부 군사조직인 알까삼 여단이 실권을 장악했다는 것이었다. 근데 위에 썼듯 그렇게 생각하려 해도 하마스만 아니고 팔레스타인 저항 세력 다 같이 하는 건데, 이슬람 지하드랑 좌파 PFLP까지 다 같이 드라마틱한 변화를 겪어서 기존과 전혀 다른 노선을 취하게 됐다고? 그게 도저히 말이 안 됐다. 그리고 여러 번 강조했듯 하마스는 극단주의 계열이 전혀 아니다.

다른 음모론들도 있었는데 이스라엘이 위성과 감시 드론으로 촘촘하게 감시하고 있는데, 하마스의 군인이(이스라엘 점령군에 따르면 전투원 3만 명) 대규모로 훈련하고 재배치되는 걸 이스라엘이 몰랐을 리 없다. 때문에 이스라엘이 (여러 이유로) 원했거나 최소 방조한 거다. 라는 것이었다. 나는 그런 음모론까진 안 빠졌는데 왜냐면 음모론을 싫어하기 때문에;; 이 점에 대해서는 최근 뉴욕 타임즈에 기사가 나왔다. 알았지만 상상 속에서나 가능한 일이라며 무시했다고. 이건 아슈카르가 지적했듯 행위 주체성을 무시해서 그런 거임.

내가 아니라고 생각했던 다른 이유는 이스라엘 점령당국이 보인 태도 때문이다. 처음에 다른 공격으로 인한 피해는 미친듯이 선전선동에 이용하면서도 노바 축제에 대해서는 굉장히 뒤늦게 선전전에 활용하기 시작했다. 특히 내가 제일 음모론자가 될 것 같았던 게, 영상 마지막에 빼먹었다고 넣은 저 얘기 때문임

10월 9일 네타냐후 수석 보좌관의 노바 음악 축제에 대한 인터뷰:
“파티는 그 혼란에 적지 않은 기여를 했다”며 “파티 참가자들을 비난할 생각은 없지만 때로는 누적된 조건이 있는 경우도 있는데, 이는 누구도 계획하지 않은 상황”이라고 덧붙였다.

저 인터뷰 후 이스라엘 사회에서 왜 피해자 탓을 하냐고 엄청난 비난을 받은 뒤 보좌관은 자기 말이 사실은 너무 많은 인명 피해 때문에 신원 식별 과정이 더뎌져서 했던 말이지 피해자들 비난한 게 아니라고 해명했는데, 뭔 소리임? 말이 안 됨. 그래서 저 멘트 때문에 이상하다, 이상하다 계속 이러고 있었음. 그리고 그 뒤에 점령군의 아파치 헬파이어 미사일과 탱크에 일부 이스라엘 민간인들이 살해됐다는 보도가 나온 다음에 역시. 저 말이 그냥 말 그대로, 하마스가 계획적으로 학살을 자행한 게 아니고, 자신들도 (당연히) 민간인을 죽이려던 건 아니고, 그런 누적된 조건의 결과로 누구도 계획하지 않은 교전 중 살해가 있었던 것. 이게 그냥 너무 아다리가 들어맞는다. 하마스가 설명했던 거랑도 일치하고.

그리고 영상에서 조금 말하다 왜 때문에 까먹고 다 얘기를 안 했는데 하마스 등 팔레스타인 저항세력의 군사작전의 목적은 이스라엘 감옥에 갇힌 5천 명(지금은 8천 명)의 팔레스타인 정치 수감자를 석방시키는 것이었다. 즉 최대한 많은 인질을 데려가 최대한 많은 수감자를 교환-석방시키는 게 목적이다. 그런데 많은 민간인을 학살하는 것이 대체 자기네 목적을 달성하는 데 왜 유리하다고 판단하겠는가? 그렇게 비합리적이라고 가정하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된다.

최근상황

예상대로 이스라엘은 모든 걸 덮는다. 이미 매장된 시신도 많다. 증거가 될 불태운 자동차들도 다 폐차시켜 없애 버렸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최근 내가 주의 깊게 보고 있는 것은 이스라엘 측 사상자 숫자다.

이스라엘은 사망자를 10월 7일 제외하고 105명이라고 말하는데, 부상자가 5천이 넘고, 그 중 장애 등록된 병사가 이미 2천이고, 1천이 등록 대기 중이라고 한다. 사망자에 비해 부상자 규모가 너무 크다.

사실 이 뉴스를 보고도 너무 화가 나서 한밤중에 미친듯이 소리를 질렀는데... 이미 자국민 인질 살해하는 데서 다 보여주긴 했지만 어떻게 이렇게 자국민의 신변 보호는 안중에도 없고. 이렇게 많은 사람이 다치는 게 이스라엘로서도 전례 없는 일이라고, 벌써부터 전쟁 후 군인들의 포스트 트라우마 걱정하던데, 애초에 그러면... 트라우마 생길 일을 안 만들어야 할 거 아닌가. 사회를 완전히 훼손하면서도 위정자들은 단기적 이해관계밖에 못 본다. 정말 답답하다. 이스라엘 사회가 망가진 대가는 유대인들보다 팔레스타인인들이 훨씬 더 치뤄야 할 것이다. 그래서 더 절망스럽다.

팔레스타인 사회를 망가뜨린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재능있는 사람들이 아니 그냥 모든 사람들이 살해되고 있다. 건물 잔해에 묻혀 죽은 것으로 추정되는 사람들을 합하면 살해된 사람이 2만 5천을 훌쩍 넘었다. 너무 너무 무섭다. 더는 안된다고 맨날 말하는데 매일 매일 숫자가 급격히 늘어나서 너무 무기력하다. 그래도 정말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팔레스타인에 대해 관심 갖고 자기 이슈로 삼고 있어서 정말 유일하게 기쁨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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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건국 70년, 팔레스타인 인종청소 70년

땅의 날, 나크바, 땅을 지키려는 오랜 투쟁

가자의 귀환 대행진

3월 30일 가자지구의 귀환 대행진(Great March of Return)에 참여한 팔레스타인 여성 활동가 ‘힌드 아부 올라’(16세)는 이스라엘군의 최루탄 폭격 속에서도 대열의 맨 앞, 이스라엘 저격병들이 포진해 있는 국경을 향해 달려갔다. 최루 가스로 인해 호흡곤란을 겪으며 의식을 잃어가는 시위대 4명을 구하기 위해서였다. 최루 가스에 대비해 집에서 챙겨온 양파와 향수로 4명의 의식을 깨우자마자 이스라엘 저격병들이 총을 쏘기 시작했다. 아부 올라가 구한 4인의 시위대는 그녀의 등 뒤에서 서로 손을 맞잡은 채 인간 띠를 만들어, 저격병한테서 아부 올라를 보호하며 함께 뛰었다. 다행히 다섯 명 모두 무사히 살아남았고, 아부 올라는 팔레스타인 투쟁의 또다른 상징이 되었다.

이스라엘과의 국경 인근에 밭이 있는 사람들은 이스라엘군의 주둔과 총격에 익숙해진 지 오래다. 국경 인근은 소위 ‘완충 지대’에 속하기 때문이다.

‘완충 지대’란 이스라엘이 국경선으로부터 가자지구 안쪽으로만 설정한 팔레스타인인 출입 금지 지역으로 땅과 바다를 포괄한다. 국제법은 물론 자국법도 위반하며 임의로 설정한 터라 크기는 지역과 시점에 따라 다르고 아무도 정확한 크기를 알 수 없지만, ‘완충 지대’에 출입을 시도하는 팔레스타인인은 언제든 총포를 맞을 수 있다. 그간 발포 사례를 종합하면 완충 지대는 국경에서 1.5km 안쪽 반경까지 설정되곤 하며, 이는 가자지구 전역의 17%를 차지한다. 밭으로, 바다로 갈 수밖에 없는 농민과 어민이나 비무장 시위대를 쏘는 것이 전쟁 범죄임은 물론이다.

팔레스타인인들이 귀환 대행진이라는 비폭력 시위 계획을 발표하자 이스라엘은 저격병을 100명을 배치하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실제 탱크 등 중화기와 함께 배치해 저격병이 시위대를 쏘고 있는 것도 ‘완충 지대’를 근거로 삼는다.

5월 15일 ‘나크바’까지 예정된 귀환 대행진은 팔레스타인 난민의 귀환권 보장을 호소하는 비폭력 대중 운동으로, 가자 지역에선 1987년 인티파다(민중봉기) 이후 최대 규모의 운동이다. 70년 전 이스라엘 건국을 전후해 자행한 인종청소, 즉 나크바로 당시 팔레스타인 원주민 절반 이상이 난민이 되었다. 가자 주민의 70% 이상은 난민이다. 국경을 따라 ‘완충 지대’ 위에 행진 본부가 지은 텐트촌의 각 텐트에는 70년 전 이들이 쫓겨난 마을의 이름이 붙었다.

매주 금요일마다 팔레스타인의 여러 마을에서 시위를 해오기도 했지만, 귀환 대행진을 시작한 3월 30일 금요일은 또한 ‘땅의 날’이기도 했다. 이번 시위가 땅의 날에 시작된 것은 난민의 귀환권에 더해 팔레스타인 민중의 땅에 대한, 또 서로에 대한 강한 유대감을 보여준다.

 

땅의 날 – 점령지 팔레스타인을 넘어,
팔레스타인인들의 전방위 투쟁

1976년 3월, 이스라엘 정부는 “갈릴리의 유대화” 계획을 발표했다. ‘현대 이스라엘’로 병합된 갈릴리 지역의 팔레스타인 시민권자들의 토지를 몰수하고 그 위에 유대인 마을 50여개를 건설해 갈릴리의 팔레스타인 원주민을 유대인 인구로 대체하겠다는 것이었다. 이에 대항해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인들은 총파업과 시위를 조직했고, 저항 운동은 갈릴리에서 이스라엘 전역으로, 서안과 가자로, 난민촌으로 퍼져나갔다. 3월 30일과 31일 이틀간 4천 명이 넘는 이스라엘 군인과 경찰이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전역에서 시위대를 잔인하게 진압했다. 그 결과 6명의 팔레스타인인이 살해당하고, 수백 명이 부상을 입고 또 체포됐다. 땅의 날은 이스라엘 내 팔레스타인 공동체의 토지와 정체성, 존재 자체가 위협받고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줬다. 또 팔레스타인인과 아랍인에게조차 ‘점령자의 땅’으로 보였던 ‘이스라엘’ 안에도 그에 맞서 싸우는 팔레스타인인이 있음을 드러내고 이스라엘의 분열 정책에 시달리는 팔레스타인인 민중의 결속을 높였다.

군사점령지의 팔레스타인인, 팔레스타인 난민, 이스라엘 내 팔레스타인인이란 구분은 팔레스타인인 스스로 만들어내지 않았다. 이스라엘의 폭력적인 건국과, 온갖 국제법과 유엔 결의안을 무력화시키는 이스라엘의 식민 정책에 따라 강제로 격리된 것이다. 군사점령 51년, 나크바 70년에 이른 오늘날 ‘팔레스타인’이라고 하면 보통 51년 전 이스라엘에 군사점령당한 동예루살렘·서안·가자를 떠올리고, ‘팔레스타인인’이라고 부르면 점령지에 살고 있는 민중을 일컫는 거라는 대강의 전제도 있다. 하지만 점령지 인구보다 더 많은 난민과, 현대 이스라엘의 소수민족으로 분류되는 팔레스타인인 또한 팔레스타인 땅으로부터 이들을 유리시키려는 이스라엘의 식민 정책에 맞서 싸우고 있다.

 

우리의 존재가 곧 저항이다 – 밥 알샴스

2013년 1월에 점령지 내외의 팔레스타인 활동가 250여명이 한 자리에 모여 천막 25채를 세우고 ‘밥 알샴스’(Bab al Shams)라는 마을을 만들었다, 이스라엘이 서안지구 주민들의 땅을 몰수해 지은 가장 큰 불법 유대인 정착촌, ‘말레 아두밈’ 바로 옆이었다. 이스라엘은 애초에 건국 당시부터 UN이 국제지구로 지정한 예루살렘의 서쪽을 불법 영토 병합했고, 1967년 남은 팔레스타인 땅마저 군사점령한 뒤엔 동예루살렘도 병합하려 하고 있다(트럼프 정부가 주이스라엘 미대사관을 5월 중 예루살렘으로 이전하겠다는 건, 국제사회가 여전히 인정하지 않는 기왕의 서예루살렘만이 아니라 점령지 동예루살렘의 불법 병합까지 지지한다는 의미다). 여기서 멈추지 않고, 이스라엘은 서안지구 허리에 자리한 ‘말레 아두밈’과 예루살렘을 연결해, 서안지구를 반으로 쪼개는 계획을 추진하고 있다. 밥 알샴스 마을은 팔레스타인 땅 소유주의 허가를 받아 바로 예루살렘과 말레 아두밈 사이에 지어졌다. 이스라엘이 이 일대에 4천 채의 분양주택 건설을 신규 승인한 데 대한 대응이었다.

밥 알샴스는 ‘태양의 문’이란 뜻으로, 레바논의 한 팔레스타인 난민의 삶을 그린 엘리아스 쿠리의 동명의 소설에서 따온 이름이다. 소설의 주인공은 고향 갈릴리로 돌아가려 시도하고, 마침내 ‘태양의 문’이란 비밀 동굴에서 부인을 만나게 된다. 활동가들은 성명을 통해 “밥 알샴스는 굴하지 않는 우리들의 자유를 향한 문이며, 예루살렘으로 통하는, 또 귀환을 향한 문”을 의미한다고 밝혔다.

마을은 불과 이틀 만에 군인들에 의해 강제철거 당했지만 이듬 해, 서안지구 내에서도 이스라엘 군정의 직접 통치를 받는 ‘요르단 계곡’의 ‘아인 히즐레'(Ein Hijleh)에서도 비슷한 시도가 있었다. 밥 알 샴스가 최초의 시도였던 것도 아니다. 무참히 부서지면서도 계속되는 시도는 팔레스타인인들이 마을을 만들고 이 땅에 존재하기 위해 이스라엘로부터 허가를 받을 필요가 없음을 웅변한다.

 

이스라엘 안에 살아도, 돌아갈 수 없는 이크리트

이크리트는 1948년 이스라엘이 건국하며 합병한 갈릴리의 작은 마을로 레바논에 가장 가까운 마을이다. 이크리트는 이스라엘군에 의해 파괴된 418개의 마을 중 하나로, 파괴된 마을의 주민들은 강제이주당한 후 지금까지도 귀환이 금지되고 있다. 다른 마을과 차이점이 있다면, 이스라엘 대법원이 이미 건국 3년 후에, 이크리트의 주민들이 마을로 돌아가서 살 권리가 있다고 인정했다는 점이다.

대법원 판결이 있어도, 이스라엘 시민권이 있어도, 이들은 국내실향민이 된 채 지금도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 이스라엘 군사법원이 국가안보를 이유로 귀환을 금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주민들은 인근 마을에 흩어져 살면서 이크리트로 돌아가기 위해 수많은 소송을 진행하고 국회에 호소하는 등 다양한 노력을 하며 60년 넘는 세월 동안 돌아갈 수 있으리란 믿음으로 고통을 감내해 왔다. 그러한 노력을 여전히 계속하는 한편, 2012년부터 3세대, 4세대 주민을 비롯한 젊은 활동가들은 이크리트의 상징과 같은 성당에서 미사를 보고 근처에 야영장을 짓고 살기 시작했다. 이스라엘 당국은 시시때때로 성당에 쳐들어와 활동가를 체포하고 야영장을 부수고 주변 밭의 나무와 농작물을 뽑아 버리곤 한다. 성당을 지키는 젊은 활동가들만이 아니라 마을 주민들도 주기적으로 방문해 미사를 보고 야영지에서 함께 시간을 보내며 마을을 가꾸고 있다. 작년에 잠시 마을을 방문했을 때 만난 할머니는 이크리트에서 보낸 어린 시절을 회상하며, 죽어서는 이 땅에 꼭 묻히고 싶다고 눈물을 흘렸다.

 

고향 땅으로 돌아가 서로를 만나기 위한
다년간의 귀환 행진

지금 가자의 귀환 대행진은 갑작스러운 이벤트가 아니다.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공동체는 1999년부터 국내 실향민을 중심으로 귀환 행진을 시작했다. 이스라엘의 건국기념일은 동시에 모든 팔레스타인인에게 대재앙의 날이었으므로, “너희의 독립은 우리의 나크바다”라는 모토로 해마다 파괴된 채 여전히 귀환이 금지된 마을로의 귀환 행진을 열고 있다. 재작년엔 120번 강제철거된 베두인 마을 ‘알 아라킵’이 위치한 네게브 사막에서 행진하기도 했다.

2011년에는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공동체와 레바논, 시리아의 난민, 서안과 가자의 주민 수천명이 국경에서 귀환 행진을 시도했다. 각각의 국경에서, 이스라엘은 시위대에 발포해 십여 명을 살해하고 수백 명에게 부상을 입혔다. 이스라엘 내 팔레스타인 활동가들은 체포했다.

가자 대귀환 행진 시작 후 22일간 네 명의 어린이와 한 명의 기자를 포함해 팔레스타인인 37명이 이스라엘군에 살해당했고, 4천명 이상이 크고 작은 부상을 입었다. 5월 15일까지 더 많은 사상자가 예상되지만 마침내 모든 팔레스타인인이 고향땅에 돌아갈 수 있을 때까지 귀환 행진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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