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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자신의 과학 : 맑스주의와 자연 -맑스주의 과학 II
리차드 레빈스 (Richard Levins)
부르주아지의 부흥과 현대 과학의 탄생
사회를 과학적으로 분석하면 더 나은 세상을 향한 프로그램에 이르게 된다는 생각은 맑스보다 3세기 앞선다. 과학은 신흥 부르주아지에게 생산 방법과 항해도구의 발전과 같은 실질적 가치를 주었고, 봉건적 관계에 복무한 신학의 권위에 저항할 수단도 제공해 주었다.
과학은 부르주아 혁명의 기치 중 하나였다. 민주주의처럼, 과학의 슬로건은 사회적 토대가 필요로 하는 그 이상까지 나아갔다. 과학은 구체제와의 투쟁에 필요한 것 이상으로 도전과 독립의 수준을 분명히 했기에, 잠정적으로 새로운 부르주아 질서에도 위협이 되었다. 그러나 과학의 실용적인 가치만이 논증되었다.
잉글랜드에서 과학은 17세기 중반에 사회적 지위를 얻었고, 실제로 영연방의 공식 정책이 되었다. 당국의 중요한 문제를 조사할 때 과학으로 인해 정치 혹은 종교까지 확대하지 않는다면 그리고 과학에 따른 자유가 위험한 선례를 남기지 않는다면, 유럽의 가장 보수적인 정부까지도 과학 부흥을 지원했다. 대부분 유럽의 기존 과학자들은 이러한 역사적 타협을 받아들였고, 주목받을 만하지만 성가신 것은 발견조차하지 않았다. 혁명적인 갈증은 무뎌갔다. “이 시대 초기에 코페르니쿠스는, 신학을 비판하는 편지를 쓰고, 뉴턴은 신의 최초의 충격(역주- 뉴턴은 최초 물질의 운동에는 신이 개입해야 한다고 믿었다.) 이라는 가설로써 이 시기를 끝맺었다”(엥겔스, 자연 변증법)
과학과 철학의 통일
과학의 영역에 모든 인간 경험을 포함하려는 사람들은 실험실 과학과 일정한 거리를 두었다. 실험실 과학은 좁게 경험적이며 신중하고 중립적인 것에 국한하려고 하며, 거대한 인간의 관심사에 개방형 질문을 던지는 철학자들을 의심했다.
맑스와 엥겔스는 철학과 과학을 구분하는 이분법적 사고를 거부했다. 둘 중 하나를 택하지 않고, 그들의 모든 철학적 도구로 과학에 접근했고 과학적 탐구 대상으로 철학을 고찰했다. 엥겔스(자연 변증법)는 17, 18세기 과학의 기계론적인 사고방식을 기술한 후에, “자연에 대한 이런 경직된 사고방식에 균열을 일으킨 사람은 자연과학자가 아니라 철학자였다(칸트의 태양계의 기원에 대한 성운설)”고 보고하였다.
맑스와 엥겔스가 발전시킨 세계관은 과학도 아니고 철학도 아니었다. 완전히 새로운 지적범주로 종합적인 어떤 것이었다. 그 내용에는 사회적 토대, 조직형태 그리고 실천관계를 포함한다. 학계의 필요에 의해, 맑스주의를 전통적인 학문영역에 끼워 맞추려는 시도들이 종종 있어 왔다. 예를 들어 알튀세르의 경우 맑스주의 과학을 맑스주의 철학과 분리하였다. 맑스주의자는 맑스주의를 대학의 경제학부에서, 역사학부에서, 정치 과학, 철학, 문학 혹은 자연과학부에서 가르치지만 그들이 가르치는 것은 동료나 학장이 이해하는 그런 경제학, 역사, 철학, 문학일 수는 없다. 확실히 이를 정당화하려는 지적 압력은 존재하고 있다. 단지 학문의 한 분야로써, 기본적인 것만을 성취하려 할 때 맑스주의는 파괴된다. 그러므로 맑스주의의 생존력은 맑스주의 사상의 발전을 위한 별도의 학술적 기반, 출판, 맑스주의 학교, 학회 혹은 정당 등에 의존한다.
맑스주의는 부르주아 혁명시기의 과학으로부터 권위에 대한 거부, 논증, (우리의 바램을 제거하고) 있는 그대로 보는 것에 대한 중요성 그리고 국제적인 지적 상호교류의 개념을 받아들였다. 맑스-엥겔스 시대에, 권위의 폐기란 세상을 있는 그대로 편견 없이 바라보는 것을 통해 종교적 권위를 폐기하고 모든 권의 도전하는 것 의미했다. 문맥상, 이러한 주장은 순진해 보인다. 편견 없이는 볼 수 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자유주의 이성에서도 편견은 우리의 형성에 영향을 준다고 하며, 더 깊게 변증법적 이성에서도 편견 없이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한다. 그러므로 편견의 폐기는 실제 연구수행이나 과학의 이상적인 상태를 설명하는 말이 아니다. 과학에는 자기비판이 요구된다. 그리고 우리는 항상 오래된 것을 조망하며, 새로운 것에 접근한다. 그리고 이러한 접근 방식을 항상 의심하는 지속적인 자각이 필요하다.
각각의 과학에는 실수를 인식하는 자기만의 전통적인 패턴과 그 실수를 피하기 위한 방법론을 가지고 있다. 맑스주의의 주요한 방법론적 통찰은 다음과 같은 역사적 유물론자의 가르침이다. 세계 상황에 관한 일반적인 견해들(특히 이데올로기)은 그 상황[을 구성하는] 일부 정보일 뿐이다. 그리고 그 세계를 이해하는 과정으로 그 상황 자체를 가지고 분석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들 원칙은 모두 합쳐, 과학에 객관성과 자연과 사회에 대한 진리 발견을 요구할 때 기초가 된다. 즉 객관성은 [과학이 가진 기본] 조건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추구해야 할] 과정이다. 그것은 우리가 편견을 갖고 세상과 맞서는 과정, 다른 사람의 편견이 우리의 편견과 맞서는 과정이며, 여러 가지 다른 편견으로 우리가 가진 여러 편견과 맞서는 과정이다. 객관화의 과정은 결코 끝이 없다.
객관성을 달성하기 위한 우리(맑스주의자의) 방법은 개인 특유의 편견과 다른 그룹의 편견에 대응해서 꽤 잘 작동한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 같이 공유하고 있는 편견을 강화시키기도 한다. 예를 들어 동물 행동에 관한 연구는 실험의 정확성을 개선하고 해상도를 안정화시킴으로써 매우 정교한 실험을 수행할 수 있다. 반면에 거의 전반적으로 우리가 가진 성적 편견에내에서 연구가 수행된다. 그런 성적 편견은 페미니스트 연구자들의 활발한 저항에 의해서만 상당히 균열을 낼 수 있다.
그러나 “과학적”이라는 말은 제한된 의미에서만 “객관적”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레닌이 “실무적인(businesslike)"이라는 말의 의미를 바람직한 성격으로 경험이 많고, 책임 있고, 훈련된 그리고 현실감 있는 성격으로 생각했지만, 교묘하거나 개인주의적이거나 탐욕적이거나 정직하지 못하다는 뜻으로 사용하지 않았다. 그리고 일반적인 말로 ”고결하다“는 의미는 용기 있고, 명예롭다는 뜻으로 사용되지만 지독하고 고집 있거나 성차별주의라는 뜻은 아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과학적”이라는 말을 사용할 때 이것의 의미는 실제 과학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이상화된 과학을 의미한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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