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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겹지만 첫 눈이다
- 대구에 올 첫눈을 생각하며
신경현
이 공장 저 공장 이력서 싸들고 찾아다니다
불꺼진 쓸쓸한 집으로 돌아오는 실업의 사내여
오랜 싸움속에서
희망 보다 한숨이 먼저 쌓이는 천막농성장이여
밤을 세워 일을 하다
깜빡 찾아오는 졸음에 젖어버린 작은공장 노동자여
가난을 피해 도망치듯 무한경쟁의 대한민국을 찾아온 이주노동자여
눈물겹지만 첫 눈이다
절망 보다 희망을 먼저 껴입지 않으면
결코 겨울을 날 수없는 사람들에게
첫 눈은,
첫 눈이 내리는 잠시만큼은
눈물겹지만 축복이다
눈물겹지만 사랑이다
서럽지만 왠지 따스하다
눈물겹지만 첫눈이었다
토요일 일 마치고 돌아와 그래도 토요일은 밤이 좋은데, 이곳에서 얼굴보며 술 한잔 걸칠 수 있는 사람들에게 문자를 보내고, 전화를 했지만 한잔 걸칠 수 있는 기회가 꽝이 되었다. 한겨레 기사가 생각나 동보서적으로 가서 80년대산 등단 작가의 등단기를 셔터문 내릴 때까지 다 읽고 나와서 피시방에 앉아 그날 대구를 생각한다. 눈물겹지만 그리움이다.
부산으로 내려간 이유 중 하나가 제 발걸음으로는 집구석에 들어 가기 싫어서 구릉이 담 넘어가듯 이종사촌 형들의 등에 떠밀려 억지스럽지만 집구석에 가끔씩은 갈 것 같은 느낌이 있었다. 잔정이라곤 전혀 없던 피붙이, 그 아들도 그대로 이어받아 억지스레 찾아간 엄마. 점심을 같이 먹을 요량이었지만 가시방석처럼 느껴져 얼굴만 보고는 칼바람처럼 뒤돌아 섰다. 후회로 대구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눈물겹지만 집구석이었다.
동대구역에 도착해서 녹평으로 향하던 버스 정류장에서 첫눈을 맞고는 눈물을 겨우 참으며 경현이 형에게 전화했다. "형, 눈물겹지만 첫눈이네요" 변비 앓듯 하지 말고 쑥쑥 쾌변을 보듯 글을 쓰게 하기 위해 가끔씩 전화해서 푸짐한 안주에 소주 걸치고는 집까지 가서 문청이던 한창 때의 이야기와 몇 권의 책을 챙겨주던 경현이 형. 첫눈을 보니 형이 생각났다. 그리고 홍철 형이불렀다던 그 노래도 듣고 싶었다.
아무리 술을 먹어도 취하지 않는 날이 있다. 내게 안 좋은 술버릇 중 하나가 기절해서 자는 걸 즐기는 것이다. 요즘은 아예 그럴 질 않고, 사람을 만나 수다 떨고 싶어 술을 찾는다 그러다 마실 사람 없으면 이 악물고 참는다. 한 일주일 참으면 술을 마셔도 취하지 않는 것 일까. 아니다 보고싶은 사람과 함께 마시니 취할 시간이 없었던 것 같다. 낮술부터 시작된 2007년 마지막 날. 한잔 걸치고 잠시라도 잘 생각이었다. 뜨거운 몸으로 안달 난 남녀사이도 이럴까. 무슨 할 이야기가 그리 많았을까. 집에 와서 와인에 병맥주까지, 또 맥주를 마셨다. 너무 행복했다. 딱 세상이, 내 삶이 이 기분이었으면.
앞으로 영원히 있어야 할 산, 앞산. 술로 시작된 2008년, 앞산에서 시작된 무자년. 기억하자. 패배로 기억될지라도, 기억하다 용량 초과로 터져버리거나 미쳐버리더라도 살아남자 그리고 기억하자 또 싸우자. 잠시 대구를 떠나 있어도. 이런 생각들로 함께 한 상수리 나무와 함께 서 있었다. 잠시 공간앞산달빛에서 몸을 녹이는 동안 난 취하기 위해 부지런히 술을 마셨지만 부질없는 짓, 술만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공간에 있던 기타가 눈에 들어온 사람들끼리 자연스러운 노래가 흘러 나왔다. 조만간 땅과자유 회원들 반은 기타를 보물 1호로 지정할 것 같은 느낌으로 기타에 대한 예찬과 투덜거림이 양념으로 들어간 노래를 본능적으로 난 엠피쓰리에 녹음하고 있었다. 홍철형의 노래를 마침내 듣고는 난 너무나 대책없이 감상적이어서 탈이야 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눈물 젖은 박수를 쳤다.
이등병 백일휴가 복귀하듯 부산행 기차 안에서 녹음되어 있던 노래와 웃음소리 그리운 목소리를 들어면서
눈물겹지만 첫눈이다
눈물겹지만 내 삶이다
눈물겹지만 앞산이다
눈물겹지만 땅과자유다
눈물겹지만 대구다
사파티스타 봉기 14주년 기념 땅과자유 투쟁 결의대회
일시 : 2008년 1월 1일 0시 30분
장소 : 달비골 상수리나무숲 (천막농성장 부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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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분 뒤면 난 노동하러 가야한다. 어제부터 아! 욱쀅에서 청소를 시작했다. 무작정 했다. 머리에 잡생각이 많이 생겨 도저히 백수로 보내다간 맛탱이 갈 것 같아서. 나에게 주문한다. 난 청소노동자다 라고. 간만에 땀을 흘리고 일하니 기분이 한결 나아지는 것 같았다. 물론 이 기분이 언제까지 갈지는 미지수다.
갈피를 못 잡아 우유부단하게도 물리치지 못 했던 같이 일하자는 제안. 선뜻 응하기도 하고, 미지근하게 웃어 넘기기도 했다. 근데 사실 중요한 건 내가 막연하게 귀농을 생각하고 있었지만 그게 너무 먼 이야기처럼 느껴졌으며, 그래서인지 더 더욱 공중에 떠 있는 상태였다.
사춘기 시절 정말 죽을 똥, 살 똥 꿈을 가꿔가던 게 미대 진학 실패로 사라진 채 그저 살아왔다. 물론 운동을 만나 열정을 알 수 있었지만, 그게 꿈은 아니었다. 근데 나에게 꿈이 생겼다. 예전에도 어렴풋이 꿈꾸다 접고 또 꾸곤 했지만, 가슴에 묵직하게 다가온 건 처음이다. 물론 이것도 꼼수이긴 하나, 어쨌던 한 1년 정도는 죽을 똥, 살 똥 하고 싶어졌다.
그 1년의 삶을 위해 최소한 비용을 청소노동으로 청춘을 유예시키려고 한다. 혹시 로또 광풍처럼, 공무원 고시 열풍처럼 내가 망상에 허우적 거리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 1년쯤은 괜찮지 않을까 싶다. 장정일이가 스무 살 언저리에 느꼈던 것들을 내 식으로 당당히 말하고 싶다.
"나만의 공간에서 글을 쓸 수 있는 노트북과 카메라를 가지고, 일마치면 내가 쓰고자 하는 글을 후회없이 쓰는 것, 그 나머지 시간은 내가 보고 싶은 책 후회없이 보고 땅과자유 활동에 함께 하고 가끔씩 막걸리 한 잔 하는 것"
1년 동안만이라도. 남들은 적금통장에, 청첩장 돌리는 나이가 될지라도
‘우리는, 처음, 눈이, 맞았다’라고 말을 하면 이상한가. 그것도 동성과. 어떤 사람과 우연히 눈길이 마주쳤을 때 그 사람의 내력이 궁금해질 때가 있다. 너무나 우연히, 너무나 먼 곳에서 그런 사람을 만났다. 서울역에서 무궁화호를 타고 5시간을 달려간 곳에서 우리는 기홍(28세) 씨를 만났다. 경남 밀양의 삼랑진역에서 ‘간이역 시노래 콘서트’가 있는 날이었다. 콘서트 후에는 천태산 산자락에서 박영희 시인의 시집 『즐거운 세탁』과 르뽀집 『아파서 우는 게 아닙니다』 출판기념회가 있었다. 밀양(密陽)은 말 그대로 ‘비밀스런 태양’이 내리쬐고 있었고, 지루하기 짝이 없는 소도시의 정경에는 권태로움이 스멀스멀 고여 있는 듯했다. 그러나 우리는 거기에서 그런 숨막히는 분위기와는 정반대의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들은 서울이라는 아케이드화된 도시에서 느낄 수 없는 무엇인가를 하나씩 품고 있었다.
몇 안 되는 비슷한 나이 또래의 사람이어서일까. 우리는 처음 눈이 맞았다. “한잔 하시겠어요?” 하고 먼저 말을 건넸다. 그러자 그는 잔을 내밀며 “삶이 보이는 창에서 왔지요?” 하고 되물었다. 자신은 대구에서 <땅과 자유>라는 단체에서 활동하고 있다고 소개한다. ‘땅과 자유’라.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름이다 했더니 다름 아닌 내가 가입한 몇 안 되는 포털사이트 카페 중 하나였다. 대구에서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단체였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자신이 본격적으로 운동을 하게 된 계기가 『삶이 보이는 창』에서 나온 『말해요, 찬드라』 때문이었다고 한다. 이쯤에서 우리의 눈길이 하나의 길에서 충돌한 이유를 알 것만 같았다. 그것은 하나의 기시감 같은 것이었으리라.
“박영희 시인 출판기념회 자리가 저한테는 일석이조인 셈이 됐어요. 밀양에서 한참 방황할 때 제 버팀목이 되어 주셨던 이응인 선생님하고 근 3년 만에 만나 소주를 한잔 했고, 고등학교 때 국어 선생님이었던 고증식 선생님한테 드디어 인정을 받을 수 있었으니 말입니다.”
같은 자리에 있던 고등학교 선생님인 고증식 시인이 기억하는 그는 특별히 공부를 잘한 것도 아니고 눈에 띄는 학생도 아니었다. 어느 날은 기홍 씨가 찾아와 『창작과 비평』을 정기구독하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하냐고 물었다고 한다. 선생님은 고등학생이 읽기 어려울 것이라 판단했지만, 기홍 씨는 그때 『말』이나 『리뷰』 같은 잡지를 읽고 있었고 그것이 입시 문제집보다 읽기 편했다고 한다. 선생님은 제자를 무척이나 자랑스러운 눈으로 바라보고 계셨다.
그는 대학에 떨어지고 문학교실에서 1년가량 공부하게 된다. 거기에서 그는 이응인 선생님과 시보다는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와 운동에 관한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지금까지 운동의 언저리에서 활동하게 되는 바탕을 만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에 구체적인 계획은 아무것도 없었다.
“막 제대를 했을 때 이란주의 『말해요, 찬드라』를 읽었어요. 그 책을 읽고는 이주노동자 운동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죠. 그래서 무작정 안산의 외국인노동자센터를 찾아갔어요.”
그러나 그것도 쉽지는 않았다. 찾아간 곳에서 만난 상근자는 이주노동자들과의 끊임없는 상담으로 바빴고, 그는 사무실에 뻘줌하게 앉아 있어야만 했다. 그러다가 민주노동당 지역위원회를 찾아가 가입한다. 그러나 타향에서 계속 백수로 지낼 수도 없는 노릇이었고, 일차적으로 이주노동자와 함께할 수 없는 것 때문에 고민한다. 그때 고향 선배에게 대구에서 활동을 해보자는 제안을 받고는 다시 짐을 싼다. 그리고 그는 대구의 ‘땅과 자유’라는 모임에 처음 나가게 되고, 거기서 여러 가지 고민들을 듣게 된다.
“처음 만난 날 필이 꽂혔어요. 물 만난 물고기처럼 신났죠. 2004년 3월 문정현 신부님하고 함께한 ‘평화유랑단’이 대구에 방문하는 일정에 맞춰서 지역에서 평화 주간을 만들어서 한 달을 집중했죠. 비록 한 달밖에 안 된 사이였지만 굉장히 가까워졌어요. 제가 원래 낯가림이 심한 편인데 전혀 그런 게 없었죠.”
‘땅과 자유’는 한마디로 규정할 수 없는 게 특징이라고 기홍 씨는 말한다. ‘땅과 자유’라는 이름은 켄 로치 감독이 1995년에 만든 스페인 내전을 그린 영화 <랜드 앤 프리덤Land And Freedom>과 멕시코혁명(1910~1940년)으로부터 영감을 받아 지어졌다. 20세기 초 멕시코에서는 옥수수 농장주로부터 노예노동에 시달리던 농민들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농장주들은 노예노동에 항의하던 농민들을 말에 매단 채 옥수수밭을 달리게 했다. 이에 분노한 농민들과 멕시코혁명의 영웅 사파타는 옥수숫대를 자르던 낫을 들고 일어나 봉기한다. 그때 내걸었던 구호가 바로 “땅과 자유”였다. 그리고 1994년 북미자유무역협정이 발효되던 날, 치아파스 원주민들은 빼앗긴 땅과 자유를 찾기 위해 다시 일어났다. 기홍 씨는 이것이 멀리 떨어진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여기, 우리의 이야기”라고 말한다.
“농사를 지어야 할 땅과 그 땀으로 일궈진 인간의 존엄성이 깡그리 사라질 위기가 바로 한미FTA예요. 이런 마음을 ‘땅과 자유’의 모든 회원들이 가지고 있고, 그 문제를 온몸으로 안아 싸우고 있지요.”
그래서 이 모임은 ‘땅과 자유 학교’를 열어 공부하고, 그 고민을 바탕으로 실천하고 있다. 『녹색평론』을 기본으로 하여 매달 열리는 이 학교는 ‘세계화에서 지역화’라는 주제로 반년 동안 공부하기도 했으며 이주노동자, 한미FTA, 자치·자율·자급, 이반일리치, 삼성과 싸우는 김성환 위원장 등 다양한 주제로 고민하고 있다. 이들은 ‘공부 없이 투쟁 없다’는 신념으로 열심히 배우고, 또 실천한다고 한다. 실제로 이들은 지역의 여러 단체들과 연대하며 이주노동자 집회, 평택미군기지확장반대 집회, 한미FTA 집회 등에 참여했다.
그리고 ‘땅과 자유’는 2005년 11월부터 2006년 6월까지 200일 동안의 투쟁을 전개했다. 그 첫걸음은 2005년 11월 23일, 국회에서는 쌀협상 동의안 비준을 강행했던 날이었다. 그날 ‘땅과 자유’ 회원들은 긴급하게 모여 논의한 끝에 이는 “땅과 소농, 풀뿌리 민중에 대한 폭거”라고 규정한다. 그리고 다음 날인 24일 7시 대구백화점 민주광장에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각자 만든 피켓과 촛불을 들고 모였다. 그들은 ‘우리 쌀’을 지키는 것이 농민들만의 고립된 투쟁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농민들이 짓는 양식에 기대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생명붙이들로서 우리 쌀과 농업을 지키는 일에 함께하는 것은 땅과 농촌, 농민에 대한 최소한의 도리이자 우리의 주권과 민주주의, 평화를 지키는 가장 근본적인 길이라는 것이 ‘땅과 자유’의 생각이었다. 마이크와 앰프도 없이 “쌀 포기, 농업 포기 국회비준 규탄한다”며 목청껏 외쳤다. ‘땅과 자유’ 회원들끼리 시작된 작은 함성은 지역의 모든 단체들과 함께하는 연대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12월의 칼바람, 연말연시의 소란함, 거기다 설 연휴까지 거치면서, 그리고 이후 대구백화점 앞 광장의 느티나무들이 겨울을 이기고 새싹을 틔우고 그 잎이 무성해지는 계절의 변화를 함께하면서, 그들은 하루도 거르지 않고 우리 쌀과 농업을 지키기 위한 촛불을 밝혔다. 그리고 1만 7천 명 가까운 시민들로부터 지지 서명도 받았다. 기홍 씨는 미국의 아나키스트, 애먼 헤나시가 피켓 시위를 하고 있을 때, “그렇게 해서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느냐?”는 냉소적인 질문에 했던 대답을 자기 목소리로 말하고 있었다. “아니오, 하지만 세상이 나를 바꿀 수 없다는 것은 나는 확신합니다.”
그들은 ‘200일 투쟁’ 기간 동안 평택 황새울과 새만금, 천성산과 함께했다. 그리고 비정규직 법안 날치기 처리에 맞서 싸우는 노동자들, 그리고 철도 상업화에 저항하여 파업을 벌인 철도노동자들의 호소를 이 촛불집회에서 공유했다. 또 39일째를 맞던 2006년 1월 1일에는 멕시코의 ‘사파티스타’ 농민군 봉기 12주년을 기리는 특별한 행사를 열기도 했다. 그리고 2006년 6월 11일, ‘우리쌀과 농업을 지키기 위한 촛불문화제’는 장장 200일의 투쟁을 마치게 된다. 그러나 기홍 씨는 이렇게 말한다.
“200일 동안 이어져왔던 그 촛불은 아직 꺼지지 않았어요. 이제 촛불이 새로운 투쟁의 불씨로 옮겨 가기 시작한 거죠.”
이제 ‘땅과 자유’는 땅으로 돌아가 뿌리를 내리려 하고 있다. 그래서 그 뿌리가 도시로 뻗어나가 서로 이어지기를 바라고 있다. 소비적인 삶에서 벗어나, 생활이 곧 운동이고 운동이 생활로 돌아갈 수 있는 길을 고민하고 있다. 다시 말해 땅에 뿌리를 내리는 것, 그 과정을 그리고 있는 중이다. 기홍 씨는 숨막히는 도시가 아닌 흙에 뿌리를 내리고 싶다고 한다. 그래서 부지런히 준비를 하도록 스스로에게 주문을 걸고 있다고 말한다.
“결국 권정생 선생님의 말처럼 가난한 삶을 우리 스스로 선택해야 해요. 승용차를 버리고 30평 아파트를 반으로 줄이는 거죠. 그래야만 석유 전쟁에 파병을 안 해도 떳떳할 수 있잖아요.”
*격월간 '삶이보이는 창' 57호에 실린 글이다. 술자리에서 얼떨결에 인터뷰에 응했는데, '땡' 잡았다고 해야하나^^;; 함께 만들었고, 함께 하고 있는 "땅과자유"에 대한 이야기다.
미등록 이주노동자를 양산하는 실패한 고용허가제 3년을 맞아
법무부는 타기관과 합동으로 강제 단속 추방을 계획을 세워 계도기간을 거쳐
실행하려고 합니다. 법무부의 보도자료를 보면 단속 중 집단적으로 방해하는 자는 '무관용의 원칙' 운운하며 엄포를 놓고 있습니다.
3년 전 이주노동자들의 악몽과 같은 죽음의 행렬이 도래 되지 않길 간절히 바라며, 1인 시위를 진행하였습니다.
5일차 1인시위를 홍철선배와 함께 시작했습니다.
그늘이 아닌 땡볕에 서 있으니 지나가시는 분들마다 '그늘에서 하시죠~' 라며 시원한 말을 건네주시면 지나가셨다. 홍철선배의 즐거운 기타로 1시간이 후딱 지나가버렸습니다.
출입국 관리소의 직원들도 즐거운 노래때문에 싫지 않았을거라 생각됩니다. 출입국 관리소를 찾은 이주노동자의 자녀인 딸아이가 웃으면서 흥겨운 몸짓을 하며 바라 보기도 했죠.
무려 9곡의 노래를 열창했으며, '평화가 무엇이냐' 를 부를 때는 마당에서 필 받아 불렀죠 ^^
"강제 추방 중단하라!!"' "stop crack down", "노동비자 쟁취하자!!" 구호도 외쳤죠
1. 우리 승리하리라
2. 흔들리지 않게
3. 우리의 노래는 총보다 강하다
4. labor is the one
5. 평화가 무엇이냐
6. 청계천 8가
7. 행복의 나라로
8. 아름다운 것들
9. 여름
간만에 열린 땅과자유 학교에서 “내 삶과 운동을 위한 성찰”을 주제로 공부했다. 예습이 부족했던 것 같았다. 작년에는 스스로 열의를 가지고 공부를 했는데, 시와 노래를 준비도 못 했고, 주제가 내게는 진부했던가 별 고민이 없었다. 다함께 읽고 이야기 하면서 갈피를 못 잡는 생각들이 떠올랐다.
추려보면 ‘난 가난한 삶을 살고 있나? 가난한 삶을 어떻게 내 삶으로 소화해낼 것인가 그래서 어떻게 살 것인가’, ‘내게 가난한 삶은 과연 무엇인가, 그래서 나만 그렇게 살면 되는 것인가’, ‘나는 운동을 하고 있는 건가’ 뭐 그런 생각이 지금껏 계속 들었다.
백수 생활을 청산하고 ‘신천에스파스’ 라는 사업에 함께 하면서 우여곡절과 불화에 스트레스를 받으며 최저 임금 받는 노동자이지만 그 돈 받기도 참 힘들구나 싶었다. 처음 가졌던 꿈인 도시농업에 준하는 계획 또는 귀농 직전의 몸 다지기와 운동이 아닌 생활로서 대중과 만나는 첫 직장이라 그 속에서의 기대와 설렘이 분명 있었다.
하지만 일개 삽질하는 노동자로 강등되면서 노동 조건의 심각성이 인식되기 시작했다. 내가 너무 까탈스럽나 싶기도 하며 NGO단체의 프로젝트 사업이지만 이건 좀 아니다라는 생각에 노동 상담도 받으며 노동기본권에 대해 공부를 해야겠다는 현실이 눈앞에 떨어졌다. 나의 인생 설계와 다른 방향으로 전이되었다.
그 속에서 새로운 사람들과 의기투합하여 문제 인식을 공유하며 함께 이야기 했고, 책임자와 면담도 했다. 그 사람들과 함께하는 데 모든 걸 집중했다. 그래서 집회나 다른 행사나 모임에 소홀하기도 했다. 그 와중에 함께 했던 한 여인에게서 사랑을 받기도 했으면 연애도 했다. 그리고 많이 다르다는 것에 쿨하게 웃으면서 예전의 나로 돌아왔다. 그 찰나에 함께 했던 동료들은 떠났다. 노조 설립은 아니더라도 그에 대응하는 뭔가를 막 시작하려 순간 맥이 풀려 버렸다. 이 모든 게 한 달 안에 일어났다. 급여명세서가 나오는 직장을 정리해야 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면서 출근하고 퇴근한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길었던 연애가 끝나면서 많이 반성하게 되었다. 그 속에서 다시 나의 삶과 운동을 생각되었다. 행복했던 기억 속에서 서로 많이 싸웠다. 박노해의 시 「이불을 꿰매면서」를 편지로 보내며 나의 행동은 그렇지 않을 것처럼 말했으나 결국 이불호청을 꿰매며 찌른 바늘의 각성은 의식으로만 존재했던 것을 뒤늦게 알고 말았다. 머리 속에서만 존재하고 입으로만 바른 소리하고는 행동은 전혀 다른 나를 새삼스럽게 보고 말았다. 결국 골방에서 혼자 책만 본 게 아닌가 싶었다.
사랑하는 사람하고도 소통을 못 하는 내가 어찌 대중을 조직하고 민중을 말하는지 부끄럽기 짝이 없다. 2년 넘게 생활했던 8만원짜리 자취방을 도망치듯 나온 것도 어쩌면 가난한 삶을 이야기하기에는 나의 머리와 몸은 따로 인 것 같다. 찜통 같은 자취방을 떠나와 에어컨 나오는 고시원에서 머무는 나. 결국 나의 삶도 원룸을 원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아직도 내 꿈인 땅에 뿌리내리는 일에 대해서는 가꿔가고 있다. 그게 어떤 방향을 튈지는 모를 일이지만. 땅에 뿌리내린다고 해서 모든 게 해결되리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소음에 진저리나는 이곳에서도 분명 당장 해야 할 일과 운동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그래서 그 사람과 함께 해야 하는 일이 있다면 함께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내 꿈이 느리게 천천히 가지만은 땅에 뿌리내릴 것이다 라는 나의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그 전제 조건은 원룸과 에어컨이 내 삶에서 이별하는 순간일 것이다. 나의 생각이 너무 진부하고 식상하고 또 머리 속에만 있는 것인가? 사랑을 잃고 내 삶의 길이 흐릿하지만 권정생 선생님과 김종철 선생님의 말이 깊숙이 박혀 있다
“가난한 삶을 우리 스스로 선택해야 한다. 승용차를 버리고 30평 아파트를 반으로 줄이는 길뿐이다. 그래야만 석유 전쟁에 파병을 안 해도 떳떳할 수 있다.”
“가난한 삶과 비참한 삶은 구별되어야합니다. 10년, 20년 옷 한 벌로 지내고 누더기가 되어도 신념이 있고 사상이 있으면 위엄이 있고 아름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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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 ch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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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eat action, dear dongji!!Keep fighting!투쟁!!
자본주의 박살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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