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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촛불은 이제 새로운 여행을 시작합니다

[땅과자유 메시지]

우리의 촛불은 이제 새로운 여행을 시작합니다

‘우리쌀과 농업을 지키기 위한 촛불문화제’를 마무리하며

 

 

  우리 ‘땅과자유’ 모임은 ‘녹색평론을 읽는 대구독자모임’과 함께, 지난 2005년 11월 24일부터 오늘 2006년 6월 11일까지, 200일 동안, ‘우리쌀과 농업을 지키기 위한 촛불문화제’를 이어왔습니다.

 

  작년 11월 23일, 국회에서 날치기로 자행된 쌀협상 비준안 처리, 그리고 경찰 폭력에 의한 전용철, 홍덕표 농민 살해가 350만 농민은 물론, 이 땅 풀뿌리 민중 전체에 대한 폭거이자 선전포고라고 규정하고, 이에 대한 불복종 투쟁을 전개하기로 결의하였던 것입니다. 

 

  우리는 무엇보다 더이상 ‘우리쌀’을 지키는 것이 농민들만의 고립된 투쟁이 되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도시에 살며, 농민들이 지어주시는 양식에 기대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생명붙이들로서 우리쌀과 농업을 지키는 일에 함께하는 것은 땅과 농촌, 농민에 대한 최소한의 도리이자, 곧 우리의 주권과 민주주의, 평화를 지키는 가장 근본적인 길이라는 것이 우리의 소박한 생각이었습니다.   

 

  여느 해에 비해 몹시도 추웠던 지난 12월의 칼바람, 연말연시의 소란함, 거기다 설 연휴까지 거치면서, 그리고 이후 대구백화점 앞 광장의 느티나무들이 겨울을 이기고 새싹을 틔우고 그 잎이 무성해지는 계절의 변화를 함께하면서, 우리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우리쌀과 농업을 지키기 위한 기도의 촛불을 밝히고, 1만 7천명 가까운 시민들로부터 지지 서명도 받았습니다. “쌀은 생명이다, 농민은 존엄하다”, “농촌은 뿌리다, 농사가 희망이다”, “민중을 쥐어짜는 한미 FTA 반대한다”라고 적힌 우리의 현수막은, 그동안 바람을 맞고 비에 젖어 우리의 쉰 목청만큼이나 거칠어졌습니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외부나 위의 힘으로부터 커다란 사회적 변화가 일어날 것을 기대”하는 대신, “자신이 가진 힘을 의식하고, 그에 따라 개인으로서 또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행동할 수 있다”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함으로써, 패배감과 절망감을 스스로 떨쳐버릴 수 있었습니다. 미국의 아나키스트, 애먼 헤나시가 피켓 시위를 하고 있는 동안, 그렇게 해서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느냐는 냉소적인 질문을 받았을 때 했다는 대답, “아뇨, 하지만 세상이 나를 바꿀 수 없다는 것은 나는 확신합니다”라는 그 대답을 수시로 떠올리면서, 우리는 추운 겨울의 광장에서도 ‘유머 감각’을 결코 잃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또한, 그동안의 촛불집회를 통해 우리는 평택 황새울과 새만금, 천성산과 날마다 ‘함께하였습니다’. 비록 몸은 그 현장들과 떨어져 있지만, 그 각각의 현장에서 외치고 투쟁하고 기도하고 있는 모든 풀뿌리 형제들과 우리는 ‘촛불’을 통해 분명히 이어져 있음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지난 2월 말과 3월 초에는 비정규직 법안 날치기 처리에 맞서 싸우는 노동자들, 그리고 철도 상업화에 저항하여 파업을 벌인 철도 노동자들의 긴급하고 절박한 호소를 이 촛불집회에서 공유하고, 비록 작은 목소리, 투박한 논리로나마 이를 시민들에게 전하기 위해 외치고 또 외쳤습니다.

 

  이제 우리는 지난 200일 동안 이어왔던 우리의 기도와 투쟁인 이 촛불문화제를 마무리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이러한 결정이, 우리쌀과 농업을 둘러싼 여러 조건과 환경들이 조금이라도 나아졌기 때문이 아니라는 것은 길게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렇기는커녕, 오히려 지금의 상황은 우리의 농촌과 농민의 운명, 그리고 우리 풀뿌리 민중 전체에게 더욱 가혹한 시련과 엄중한 결단을 요구하는 쪽으로 전개되고 있습니다. 우리 농업을 짓밟고, 우리 풀뿌리 민중의 삶을 더욱 악착스레 쥐어짤 것이 뻔한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체결하기 위해, 이 땅의 권력 엘리트들과 부자들, 그리고 제국(帝國)인 미국의 지배자들과 초국적기업은 바로 이 시각에도 자신들의 밀실에서 시간표를 하나씩 하나씩 작성해가고 있습니다. 우리들로서는 도대체 무슨 일이 어떻게 전개되고 있는지 알지도 못하는 채, 우리의 생존과 주권, 민주주의와 평화,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이 한낱 거래품목으로 협상 테이블에 올라, 마침내 저들의 손아귀로 넘어갈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이러한 시기에 하필 그동안 이어왔던 우리의 촛불과 목소리를 거두어들이는 것은, 감히 말하건대, 우리의 ‘첫마음’을 추스르고, 더 먼 길을 가기 위해 신발끈을 조여매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의 쉰 목청을 가다듬어, 더욱 분명하고 정확한 우리의 언어로써 말하기 위한 여정의 일환입니다. 아니, 부디 그러한 의미가 되기를 간절히, 간절히 바랍니다.

 

  그동안의 여정에 대해 자화자찬 하거나 자기연민에 빠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잠시 한걸음 벗어나, 반드시 냉정하고도 차분한 반성과 평가로써 우리 자신을 돌아볼 것입니다. 다만 오늘은, 그동안 우리의 촛불과 목소리에 함께해온, 그리고 성원해준 수많은 벗들에게 우리의 결정을 보고하고, 깊은 감사의 인사를 전하는 것으로 그치겠습니다.

 

  무엇보다 우리는 지난 200일 동안 우리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지지 서명으로써 뜻을 함께 해준 1만 7천명 가까운 동료 시민들에게 깊이 감사드립니다. 여러분의 뜻은 지난 5월, 지방선거 직전 열렸던 ‘지역농업 지키기 정책제안 기자회견’을 통해, 우리쌀과 농업을 지키기 위한 시민들의 목소리로서 분명히 전달하였습니다. 시민 한분 한분이 서명으로써 밝혀주신 이 촛불의 목소리는 앞으로도 우리의 여정과 함께할 것입니다.

 

  지역의 여러 스승과 선배들, 그리고 크고작은 여러 단체의 동지들께도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 실제 우리의 기도와 투쟁의 노력에 비해 그동안 많은 분들께서 과분한 칭찬과 격려를 해주셨습니다. 특히 우리들 여정에 관한 호소력 있는 보도로써 우리의 목소리를 지역에 성실히 알려주신 몇몇 기자들의 각별한 관심과 호응도 잊지 않겠습니다.

 

  기꺼이 생업의 장 한켠을 우리에게 내주고, 거친 목소리가 내는 소음과 불편함을 묵묵히 참아주었을 뿐만 아니라, 우리 여정에 누구보다 깊은 관심을 표하고 격려해주신 대구백화점 앞 광장의 노점상 어르신들, 점포의 상인들께도 감사의 인사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그 외에도 일일이 열거하기 어려운 많은 분들의 우정에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마지막으로, 지난 겨울 그 혹독한 추위 속에서, ‘묵묵히 서서 버틴다는 것’의 의미를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우리의 현수막을 자신의 여린 가지에 매달아 겨울바람 소리로 함께 외쳐주었던 네 그루의 느티나무, 그 다정한 동무들에게도 이 자리를 빌어 사랑과 감사의 인사를 바칩니다. 지금 이 벗들은 대구백화점 앞 전기시설 지하매설 공사 때문에, 삼덕초등학교와 신천변 사이의 녹지대로 옮겨졌습니다. 지난 5월 31일 저녁, 갑자기 이 동무들의 서늘한 그림자가 사라져버린 초여름의 광장에 서서, 우리는 겨울 한파 속에서도 느낄 수 없었던 너무나도 폭력적인 황량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며칠 동안이나 우울함과 당혹감에 빠져 있던 우리는, 중구청 공원 녹지과를 통해 어렵사리 그 동무들의 소재를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관청과 공무원들에게는 이 나무들이 한낱 시의 ‘재산’에 불과할지 모르겠지만, 우리에게는, 그리고 많은 시민들에게는 메마르고 번잡하기 이를 데 없는 이 도심 한복판의 광장에서, 우리가 하늘과 땅에 연결된 존재임을 묵묵히 확인시켜 주었던 유일한 존재였습니다. 콘크리트 더미 속에 뿌리도 한껏 깊이 내리지 못하고 우리와 함께 그저 근근이 살아가는 운명이면서도, 먼저 우리를 위로해 주었던 너그러운 존재였습니다. 온갖 허깨비 개발과 돈칠갑, 전시행정을 ‘정책’이랍시고 밀어붙이기 전에, 가로수 한 그루 옮기는 일조차 시민들에게 미리 고하고 작별의 시간이라도 예비하는 정도의 품위있는 행정, 생명과 시민을 섬기는 정책을 펴 나가기를, 새 대구시장과 자치단체장들에게 엄중히 촉구합니다. 우리쌀과 농업을 지키는 데 작은 힘이나마 보태고자 하는 우리의 보잘것없는 여정은, 바로 그러한 ‘애틋함’과 ‘우정’에서 비롯했던 것임을 이 자리에서 고백합니다.

 

 우리의 촛불은 이제 새로운 여행을 시작합니다.

 

  우리쌀과 농업을 지키기 위한 우리의 노력은, 대구경북 지역에서 지금 막 첫걸음을 뗀 ‘농업회생과 지역자치를 위한 사회연대’에 대한 전폭적인 지지와 협력으로 이어질 것입니다. 지역의 농민과 노동자 시민이 말로만의 ‘농-도 연대’가 아닌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연대, 즉 지역 농산물 직거래를 통해, 시장과 자본의 손아귀에서 우리의 농업과 식량에 대한 통제권을 되찾기 위한 이같은 ‘아래로부터의’ 노력이야말로, 세계화의 폭압에 맞서는 ‘저항 투쟁’과 함께, 풀뿌리 민중의 자율 / 자급 / 자치를 스스로 조직하고 실현하는 또하나의 중요한 길이라고 우리는 믿습니다. ‘시장’과 ‘국가’를 넘어 풀뿌리 민중의 자율 / 자급 / 자치를 민중 스스로의 손으로 조직하고 실현하기 위한 다양한 노력 가운데 하나로서, ‘농업회생과 지역자치를 위한 사회연대’가 실제적인 성과를 이루어 나가기를 바랍니다. 지금 그 길에 먼저 나선 전농 경북도연맹, 민주노총 대구지역본부, 전교조 대구지부, 대구한살림 등의 모든 선배와 동료, 동지들로부터 우리는 더욱 많이 배우고 미약한 힘이나마 보태겠습니다.

 

  우리의 생명과 주권, 그리고 민주주의를 부자들과 미국에 팔아넘기려는 ‘한미 FTA’를 저지하기 위한 투쟁, 그리고 평택 대추리 도두리의 땅을 탈환하고 황새울에 농민들의 평화로운 자치공동체를 다시 세우기 위한 투쟁은, 오늘 우리가 촛불문화제를 마무리하는 것과는 별개로, 끈질기게 함께해 나갈 것입니다. 더 성실한 공부, 여러 조직 및 개인들과의 더욱 폭넓은 교류와 토론, 배움을 바탕으로, 보다 정교하고 힘있는 우리의 목소리를 갖기 위해 노력할 것입니다.

 

  촛불문화제가 39일째를 맞던 지난 2006년 1월 1일, 우리는 멕시코의 ‘사파티스타’ 농민군의 ‘봉기 12주년’을 기리는 특별한 행사를 대백 앞 광장에서 연 바 있습니다. 그날 우리가 ‘사파티스타’를 따라 붉은 스카프를 두르고 검은 스키마스크를 착용했던 것은 결코 캠페인을 위한 ‘퍼포먼스’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북미 자유무역협정, 즉 ‘나프타’의 발효일이었던 1994년 1월 1일 새벽을 기하여, ‘얼굴 없는 존재’로 살아왔던 멕시코 인디오 농민들이 마침내 자신의 존엄성을 엄숙하게 ‘선언’했던 그날의 정신을 되새기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리고 멕시코의 형제들이 바로 그날을 위해 10년이 넘는 세월을 인고하며 조직하고 준비했던 그 모범을 따라, 우리 또한 이 땅 농민과 모든 풀뿌리 민중의 ‘자기해방 선언’을 위한 지난한 여정에 성실히 함께하겠다는 다짐을 새롭게 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이제 다시 시작하는 우리의 여정은 바로 그날의 그 다짐 위에 서 있습니다.

 

                                                                             2006년 6월 11일

                                                                                       땅과자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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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귓볼이 하나도 없노?" [2005.3]

비타민을 들고 할머니 집을 찾았다.

집에서 자전거를 타고 가는 도중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봄비가 내렸다.

경대로 가서, 자전거 파킹시켜놓고, 우산을 빌려서 할머니 집까지 쉬엄쉬엄 걸어갔다.

예상치 못했던 봄비로 괜히 분위기 잡으며 발품을 팔았다.

 

할머니집에 도착해서, 비타민은 하루에 한 알씩 먹는다고 이야기했다.

영수는 어제와서 자고 갔다고 했다.

스위스가는 날짜를 일러주었고,

유선방송을 끊어버렸다고해서, 정규 채널이 잘 잡히는지 확인을 했다.

유선이 없어도 정규방송은 깔끔히 잘 나왔다.

 

테레비를 켜놓고는 이야기를 하다가,

드라마에 푹 빠져 한 시간을 남짓있었다.

할머니께서 강냉이 박상을 꺼내주셨다.

강냉이를 하나 둘씩 먹고는 있는데, 할머니께서

나보고

"귓볼이 하나도 없노?"라고 물었다.

그래서 거울을 보니, 정말 귓볼이 없었다. 할머니는 귓볼이 많은데.

귀걸이를 해서 귓볼을 키우라고 하셨다.ㅋㅋ

이참에 귀걸이를 할지, 깊이 고민해봐야 겠다.

그리고 양손을 봐주셨다.

"귓볼하고 눈매를 보면 성깔 있겠는데, 손보니까 괜찮네"

사실, 내가 신경질적인게 사실인데, 그래도 괜찮다 하니 조금은 희망적이다.^^

역시 자기의 성깔이 외모에 묻어나는 걸 느꼈다.

착하게 살아야지.

 

드라마가 끝나면서 일어났다.

사무실에 가지고 가라며, 고추장과 무말랭이를 챙겨주셨다.

넉넉함을 느꼈다.

내친김에 그냥 할매집에서 내 방까지 봄비를 벗삼아 또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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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평택시 팽성읍은 농사짓는 주민들의 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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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는 추상적인 것이다. 민중만이 구체적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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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공포를 지우고 싶다

그 공포를 지우고 싶다

-5월 4일 대추분교에서 이 정권의 끝을 보다

 

48시간을 꽉 채우고, ‘즉결심판 출석통지서’를 들고 유치장을 나왔다. 함께 연행되었던 동지에게 담배를 빌려 경찰서 현관에서 피웠다. 젠장할 비 때문에 갈 길을 더 머뭇거리게 했다. 연행이 되지 않았더라면 일부러 올리는 없을 분당에서 대구행 버스를 기다렸다. 저녁에 도착해 대백 앞 민주광장에서 열린 ‘평택 강제집행규탄 촛불집회’에 참가했다. 걱정해주신 선배들에게 인사도 드렸고, 아비규환의 대추분교의 모습이 담긴 선전물을 시민에게 건네주었다.

 

막걸리 몇 잔으로 나의 생활로 돌아 왔다. 며칠이 지났고, 4시간 거리의 평택이 딴나라처럼 잊혀 지는 듯 했다. 적어도 나에게 있어서는. 무덤덤해진 건지 연행과 유치장의 경험으로 의연해진 건지 나답지 않게 분노가 표출되지 않았다. 나의 술버릇으로 봐도 한 번쯤은 억병에 취해 실수가 나올 법 한데 그렇지 않았다. 면회를 온 선배가 보낸 메일을 보고서는 차츰 그 진의를 알 수 있었다.

 

조서 꾸미면서 국가와 개인의 관계나 사법체계의 힘을 피부로 느꼈을 꺼라 생각한다. 조지오웰은 이 경험을 위해 일부러 경범죄를 짓기도 했다는데 너는 어쩌면 가장 저렴한 댓가로 값진 경험을 한지도 모른다. 훌륭한 작가나 활동을 위한 자양분을 얻은 걸로 생각해라, 축하한다. 시간이 지나면 아무것도 아닌 게 돼버리지만 지금의 떨리던 감정을 잘 기억해두었으면 좋겠다.

 



잊혀진 게 아니라 묻혀 있었던 것이다. 나의 분노가 거대한 국가의 힘으로 눌려 있었던 것이다. 찍 소리 못하게 만드는 공포가 아직도 지워지지 않는 것이다. 여느 평범한 아저씨였을 형사들은 조서를 꾸미며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정당한 법집행인 걸 아느냐, 국회에서 통과되고 합법적인 절차로 인한 국책사업인걸 아느냐, 불법집회 사실을 아느냐? 앵무새처럼 형사들은 각자에게 물었다. 스스로 정당한 저항이라 생각하면서 근데 무엇 때문에 묵비권을 행사하느냐 당당하다면 정당하게 말하라! 라면 오히려 기세등등했다.

 

국가의 위임을 받아 조사관으로서 충실히 임무 수행을 하고 있지만 왠지 말싸움만 하다가 끝날 평행선 같은 조사가 공명정대한 조사였는지 궁금했다. 타이핑한 조서를 확인하라며 문서를 내밀었다. 나의 말은 이미 나의 말이 아니었다. 조사관이 얻고자 했던 답을 얻기 위해 조목조목 묻고 또 물었고, 그 정답만 기재 되어 있었다. 그래서 난 이런 식의 조사라면 다시 질문을 해줄 것을 요청했으며 묵비권으로 응하겠다고 했다.

순순히 질문에 응했던 나에게 조금 전에 커피와 담배를 웃으면서 전해주던 얼굴이 금방 굳어 버렸다. 신경질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내가 윽박지르면서 조사했냐고 반문했다. 묵비권으로 벌써 처리를 다 했던 경찰은 아쉬워하며 한 건 할 수 있었네 하는 둥 직업 경찰 본연의 임무로 탈바꿈한 모습을 보고 말았다.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터라 귀찮았는지 더 이상 묻지도 않고 조서 꾸미기를 끝냈다.

 

반신반의했던 국방부의 대화가 결국 속임수로 끝나고 말았다. 지역의 청년․학생들로 긴급하게 조직을 하여 5월 3일 밤 11시를 넘겨 대추초교에 도착했다. 새벽 4시의 결의대회를 앞두고는 사이렌이 울리기 시작했다. 운동장에 모인 많은 수많은 대오를 보고는 나름대로 안심을 하였다. 하지만 이 생각도 단박에 깨지고 말았다. 여명이 트기 전에 미군기지 안 도로에는 끝도 없이 전경버스와 장비를 실은 화물차량, 군용차가 물 밀릴 듯이 들어오고 있었다. 여명이 트고는 배치가 다 되었는지 움직일 명령만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신문사 기자들은 헬멧을 쓰고는 어딘가를 뛰어 다니고, 방송국 아나운서는 첫 방송을 위해 멘트 연습에 열중이었다. 마치 이라크 전쟁 발발을 알리는 미사일이 목표물을 명중하며 아나운서의 상세한 설명으로 생중계를 보는 듯한 착각을 일으킬 정도였다. 방송국의 첫 방송과 함께 악어 입을 벌리듯 미군기지의 문은 열리고 새카만 전경들이 밀고 들어 왔다. 내리 쪽에서는 순식간에 밀려 학교 근처까지 들어 왔고, 학교 정문 쪽에서도 밀려 연좌 농성으로 전경을 막아내고 있었다.

 

나는 학교 뒤편에서 대치 중인 대오 후미에서 함께 했다. 이 순간부터 정말 보지 말아야할 것과 이 자리가 아니었으면 못 봤을 그래서 더 더욱 두 눈 부릅뜨고 봐야 할 것들을 확인했다. 학교 뒤편에 아직도 엄연히 생활을 하고 있는 주택이 있는데도 골목에, 옥상에, 틈이라는 틈은 전경들로 가득 메우고 있었다. 아침 한술도 겨우 떴을 시간, 정말 코미디 같은 상황을 난 보았다. 방패와 죽봉으로 일촉즉발의 순간 대문이 열리더니 중학생쯤 되어 보이는 교복 입은 남학생이 대치상황을 보고는 어리둥절함과 빽빽한 사람들로 학교 갈 길이 사라져버린 대문 앞에서 멈칫거리다 집으로 들어가며 대문을 닫을 수밖에 없는 참담한 모습을 보고 말았다.

 

학교를 못 가게 만드는 전경과 군인이 중학생의 등교쯤은 아무 상관없을 것이고 국방부와 이 나라 정부는 중학생의 등교쯤은 ‘전략적 유연성’ 앞에서는 눈곱만큼의 가치도 않을 것이다. 학교를 가지 못했을 그 학생은 이 세상이 과연 어떻게 보였을까. 그리고 그 모습을 평생 어떤 무게로 짊어지고 살아갈까. 새내기인 듯한 대학생의 발언은 욕으로 시작해서 욕으로 끝났다. 어떤 장광설, 어떤 논리적인 발언보다도 더 현실인 것이다. 직파한 논을 무자비하게 짓밟고 온 전경과 군인들을 눈에 앞에 두고서 욕이 아니라면 무엇으로 설명되겠는가

 

주민들이 만들어주신 주먹밥을 먹고는 몇 시간도 못 되어 운동장을 내어주고는 학교 2층으로 몰리게 되었다. 죽을 수 도 있겠구나. 그래서 살기 위해 학교로 올라가게 되었다. 체험해보지는 못했지만 순간적으로 건국대와 연세대에서 일어났던 일들이 머리 속을 스쳐 지나갔다. 2층으로 올라가는 동안 앞에서 들리는 비명과 군홧발 소리, 전경들의 방패소리 적어도 나에게 있어서는 공포 그 자체였다. 더 이상 갈 곳 없는 학교 2층. 계속 들려오는 소리들.

 

그 공포를 어찌 할지 몰라서 한동안 연락을 하지 않았던 평상시라면 몇 번을 망설였을 사람들에게 무작정 전화를 돌렸다. 그리고 지금의 상황을 설명하며 지역에서 할 수 있는 일들을 부탁드렸다. 300명가량의 인원이 2층을 가득 메웠다. 몇 시간의 진정국면으로 접어들면서 운동장을 가득 메운 전경들과 용역들을 보았고, 하늘로는 태극기가 선명히 보이는 헬기로 철조망을 묶고는 쉴 새 없이 나르고 있었다. 2층에서 보이는 내리 쪽의 들판에는 위에는 주황색 체육복을 입은 군인들이 철조망을 치고 있는 모습들이 보였다.

 

3월 말 나는 함께 활동하고 있는 ‘땅과자유’ 회원들과 평택으로 농활을 가게 되었다. 그날 나는 도두리 쪽에서 일손을 돕게 되었다. 오줌 눌 곳도 없는 끝도 보이지 않는 너른 그 땅을 전쟁을 치룰 미군의 기지로 내준다는 말인가. 팽성대책위 사무실에 붙어 있던 “쌀은 생명을 살리지만, 무기는 생명을 죽입니다.” 가 자꾸 생각날 수밖에 없었다. 그날 함께했던 회원들은 하나 같이 입을 모았다. ‘평택을 생각하며, 평택을 지키는 것이라면 함께 싸우자’ 그래서인지 ‘땅과자유’ 회원들은 일명 대추리병이라 불리는 병에 전염병 돌 듯 돌아 아파하고 있다. 그날 고생했다면 챙겨주신 흑미 다섯 포를 나누어 먹었다. 내가 먹었던 그 흑미가 이제는 철조망을 치고 있는 군인들의 군홧발에 의해 다시는 맛보지 못하게 되었다.

 

열린우리당의 임종인의원의 방문으로 기자들만 날뛰는 상황을 창문으로 보면서 정말 살의를 느끼게 만들었던 잔인한 장면을 눈물을 참으면서 보고 말았다. 공룡 같은 포크레인의 삽날은 아름드리 나무를 순식간에 부셔버렸다. 어찌 저럴 수가 있나! 주민이자 이 학교의 소사이시던 할아버지께서 옮겨 심으면서 몇 십 년을 정성껏 키운 나무를 단 몇 분 만에 부셔버리는 저들도 집에서 한 가정의 아비일 것이며 자식들과 꽃을 키운다고 화분을 놔두지 않았을까. 그 광경을 같이 보고 있던 학생이 말했다. “옮겨라도 심지.”

 

옮겨 심지 않는 저들은 또 다시 방패와 곤봉을 앞세워 2층을 올라오고 말았다. 1분도 못 견디고 우리는 교실에 몰려 스크럼을 짜고 구호를 외쳤다. 굵직한 목소리로 구호를 외쳤던 노동자의 구호는 아직도 잊지 못하겠다. 오월 광주는 끝나지 않았다. 바로 이곳이 오월 광주였다. ‘오월의 노래’가 현재 진행형인 걸을 함께 부르며 느끼고 말았다. 그렇게 난 전경들의 의해 들려져 나갔다. 어떤 소식도 접할 수 없었던 난 5월 6일자 신문의 일면에 나와 있던 사진을 보고 또 다시 눈물을 참아야만 했다. 대추초교는 없어지고 잔해더미에 꽂혀 있는 깃발의 ‘평화’

 

학교를 가지 못했을 중학생과 수 십 년 된 아름드리 나무의 최후를 잊지 못한다. 마지막까지 스크럼을 짜고 노무현 정권의 끝을 절대 잊지 말고 기억하자며 구호를 외쳤던 처음 보는 동지를 잊지 못 한다. 나에게 즉결심판으로 벌금을 물리고 국가의 안보 또는 어떤 법적 근거를 내밀어도 2006년 5월 평택을 잊지 못한다. 결코 잊을 수가 없다.

노무현 정권의 끝을 보게 된 것은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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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배를 맛있게 피우시는 할매 [2004.10]

담배를 맛있게 피우시는 할매

 

 

일요일에 찾아뵙기로 약속해 놓고는 그만 깜박하고 지키지 못 했다. 여전히 약속에 대해서는 개념이 없는 놈이다. 많이 기다렸을텐데. 사무실에서 전화를 건다.


“할매, 사무실 총각입니더”
“그래, 와 안 오노! 심심해 죽겠다”
“할매 목소리가 와 그리 힘이 없습니꺼?”
“니를 못 봐서 그런갑다”
“조만간에 찾아 갈께예”
“그래, 알았다. 꼭 온나이”


그렇게 수화기를 놓았다. 전화기를 계속 쳐다보게 된다. 이게 아닌데 싶다. 스스로에게 짜증이 나서 대낮부터 소주 생각이 난다. 「정신대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에서 이제 겨우 수습 닦지를 뗀 새내기이다. 대구․경북 지역의 일본군‘위안부’ 피해할머니들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치유해 드리기 위해 노력하는 대구에 있는 단체이다. 대구지역에는 9분, 경북지역에는 12분이 생존해 계신다. 아직도 새내기 활동가 있지만, 할머니 앞에서는 어리광도 피우고, 따라주시는 술을 잘도 받아 마신다. 아직까지 경북의 할머니들의 다 만나보지는 못 했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다섯 달 동안 내 마음을 빼앗겨 버린 할머니가 있다. 최근 두 번이나 입원을 하셨던 김분선 할머니다.


폐렴으로 사무실 근처 병원에 입원하셨다. 갑갑하다며 이른 아침에 집에 가버리고, 의사 선생님 몰래 화장실 가서 담배 피고는 태연스레 앉아 있는 말썽꾸리기(?) 할머니다. 두 번째 입원 때는 방광암까지 발견되었다. 의사 선생님의 부탁에도 그냥 퇴원을 하셨다. 지금은 상인동의 임대아파트가 아닌 올케분의 식당 방에서 지내신다. 간호 해 줄 사람도 없거니와 혼자서 외로워 못 지낸다며 상인동에 있는 옷가지를 옮겨 놨다.


할매는 나만 보면 손을 잡으신다. 물론 지팡이 대용인 것도 있겠지만, 꼭 잡으시는 쭈글쭈글한 손으로 따스함이 전해온다. 갈 때까지 놓아주지 않으신다. 사람의 품이 그리워서 일 것이다. 할매는 화투, 담배, 술, 꽃을 사랑한다. 1년 전만해도 노인정에 나가 화투를 쳤다. 하루가 시작되는 아침이면 어김없이 화투로 그날의 점을 보곤 했는데, 요즘은 기력이 떨어져 화투를 안 친다고 했다. 건강식 만들기를 회원들과 하고 잡채와 갈비찜을 들고 찾아 갔던 선배는 할매의 강력한 권유에 못 이겨 소주 한 병을 사이좋게 나누어 마셨다고 했다. 여든이 넘으신 그것도 병을 달고 사시는 할매가 얼마나 마시고 싶을까. 담배 때문에 폐렴을 앓고 있는데 아직도 못 끊고 있는 걸 보면 두말 하면 잔소리다.


이렇게 된 연유는 15살에 잡혀가 악몽 같은 위안부 생활에서 비롯된 것이다. 남자를 받지 않는다는 이유로 인정사정 볼 것 없이 내리치는 매질에 안 받을 수 없었다. 속에 화딱지가 나서 그 때 담배를 배웠다 한다. 그 때 배운 담배라 지금은 끊으려고 해도 끊지 못한다고 했다. 겨우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그저 남들 사는 만큼 살 수가 있었을까. 할매는 구구절절한 이야기를 잘 하지 않는다. “그것 다 기억하면 나는 죽는다.” 라는 말씀으로도 알 수 있을 것이다. 할매 가슴 저 밑에 숨겨져 있는 시꺼먼 눈물이 항상 웃음꽃이 피어 있는 얼굴에서도 엿볼 수 있다. 할매는 눈물보다 웃음이 많으신 편이다. 어린애처럼 티 없이 웃음을 달고 다니신다. “예쁘다”, “곱다”라는 말을 들을 때면 활짝 핀 목련꽃 같다.


근데 요즘은 그렇지 못 하다. 모든 게 귀찮다며 밥도 거의 못 드시고, 담배만 태우시고, TV도 그저 바라볼 뿐이다. 그나마 낙이라면 자원활동가들이 찾아가는 날만 기다리시는 것 같다. 언젠가 혼자 찾아가 점심을 같이 먹고, 낮잠의 달콤함을 못 이겨 할매 방에서 잠만 자다 온 적도 있다. 그래도 좋아하신다. 더 자고 가라고, 좀 더 있다 가라고 한다. 말벗이 아니더라도 같이 있어 주길 바랄 뿐이다. 혼자가 너무 싫으신 거다.


진정으로 할머니를 위하는 게 뭔지 어렴풋이나마 알고 있다. 하지만 그게 쉽지 않다. 이런 저런 모임에, 한잔 하자던 술이 이미 새벽이고, 이런 내가 참 위선적이다. 억병에 취해 자취방에 들어오면 취기를 이기지 못 해 별의 별 상상을 다 한다. 물론 그것도 스스로의 만족이고, 다음 날 술 깨면 머리만 아플 뿐이다. 분을 삭이지 못하는 상태는 거짓이 아니다. 완전 무장으로 외통부와 일본대사관을 쳐들갈까 아니면 할매의 양자로 입양되어 아주 징그럽게 싸워 볼까. 그러다 제 풀에 지쳐 할머니들의 일상이 담겨 있는 사진자료집을 편다.


분선 할매만 담배를 물고 있는 사진이다. 아마 할매는 사랑하는 담배를 끝내 끊지 못 하실 것이다. 곁에서 할매의 말할 수 없는 모든 아픔과도 함께한 애인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가슴 속에 응어리 져있는 한을 담배 연기로 조금씩 내보는지도 모른다. 높은 자리에 계신 분들에게 묻고 싶다. 당신네들께서도 담배와 술, 화투, 꽃을 사랑하시지요. 당연한 질문을 왜 하냐구요. 아! 요즘은 웰빙바람에 몸관리를 하면서 술과 담배를 즐기신다구요. 그렇지요. 똑같은 인간인데 어찌 그 좋은 것을 마다하겠습니까. 화투는 돈 자랑을 위해, 꽃은 세컨드를 위해 사랑하신다구요. 어쨌던 사랑하시는 건 다르지 않네요. 헌데, 당신네들의 담배와 할매의 담배의 차이는 아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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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보이는 창] 2004년 10.11월호에 실린 저의 글을 옮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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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쌀과 농업을 지키기 위한... ... 149일째

 

우리쌀과 농업을 지키기 위한

촛불문화제와 서명운동 149일째 소식

2006년 4월 22일 (토)

2006. 4. 20. 땅과 자유 회원 "미지신비" 촬영 - 한겨레 '디카세상'에 기고 - 게재.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고 있었습니다. 개나리, 진달래, 벚꽃, 복숭아나무꽃(桃李花), 배꽃(梨花)... ... 뭇생명의 시간은 누가 가르치지 않아도 아름다운 사계四季를 알아 오고 갑니다. 인간도 그 생명의 시간속을 배회하는 자연의 일부일진데... 그러나 이 고운 봄날에... 이 아름다운 날에... 일탈을 벗어난 광인狂人들로 광란狂亂은 일어나고야 말았습니다. 4월 21일. 새만금 간척 사업의 끝 물막이 공사가 착공 15년만에 완료돼 세계에서 가장 긴 새만금 방조제 33㎞가 완성됐다고... 지난 3월 17일 마지막 구간 2.7㎞에 대한 공사를 시작한 이래 36일 만이라고... 이로써 15년만에 뭇생면부지들의 지옥?이 완성된 샘입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사악한 짓을 이땅에서 벌인 것입니다. 그러지 말자고 얼마나 외치고 또 울었습니까! 결국 외면하고 숨통을 끊어 버린 것입니다. 이 정권의 거짓 짓거리는 인륜人倫의 도道를 넘어선지는 오랜줄은 알았지만 이렇게 무지막지한 광인狂人들일 줄이야... 아무런 죄책을 생각지 않는, 생명의 소중함을 전혀 인지하지 못하는 광인들이 무슨 짓인들 못하겠습니까. 이제 그걸 완성하려고 또 어떤 사악한 짓을 할지... 그 수순手順은 불을 보듯 뻔한일 아닙니까. 숨길을 끊어 버린 그곳에, 뭇생명들의 사체死體들이 널부러진 그곳을 흙으로 메우기 위해 전북도내 웬만한 산山이란 산은 뭉개고 깍아 내고야 말겠지요. 잔인하고도 잔인하고... 그리고 경제가... 개발이... 라며 마구 외쳐대고 몇몇 소수자少數者의 배를 불리고... 그리고 우린 그만하자고, 더불어 살자고, 또 그러길... 또 얼마나 울어야 할지... 천성산 터널공사가 그러하고, 서울 은평재개발이 그러하고, 평택 미군기지 확장이 그러하고, ... ... 한, 두가지래야 일일이 열거하지... 그런 정권이 퇴임후엔 "전원田園에서 살고 싶다"고 했답니다. 이 땅의 땅이란 땅은 갈기갈기 찢어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고서 자기가 갈 곳은 보이는 모양입니다. 광인의 눈으로 보면 보이는게지요. 우리는 광인을 짐승만도 못하다고 하지요. 짐승만도 못하지요. 촛불문화제 145일차인 지난 4월 17일에 한겨레신문에서 취재해간 내용이 신문지면에 나온 기사를 덧붙입니다. 2006. 4. 21. 금. 대구에서 생각.
♬ 땅의 사람들 - 민중문화운동연합 ♬

저들의 '경제성장'은 우리의 '풍요'가 아니며, 저들의 '안정'은 우리의 '평화'가 아닙니다. - 땅과 자유




 

도시청년들 도심서 “우리쌀 지키자”
대구 ‘땅과 자유’ 145일간 촛불집회…시민 1만3천명 서명·성금 모아

 

▲ 땅과 자유 회원들이 대구 도심지 동성로에서 145일째 ‘우리쌀 지키기’ 촛불집회를 열고 있다.

 

17일 오후 7시, 대구시내에서 젊은이들이 가장 많이 모이는 중구 동성로 대구백화점 앞.  20~30대 청년 예닐곱이 모여 “우리쌀을 지키자”고 소리 높여 외친다.

“쌀은 생명이다.” “농촌은 뿌리, 농민은 존엄하다.”는 외침도 들린다.  몇몇은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고, 촛불을 들고 구호를 외치는 청년들도 보인다.  대학생 차림새인 남녀와 50대 회사원, 70대 노인들이 가던 길을 멈추고 서명을 한다.  더러는 모금함에 돈을 넣기도 한다.

대구 지역 시민단체 ‘땅과 자유’ 회원들이 동성로에서 촛불집회를 여는 모습이다.  땅과 자유는 벌써 145일 동안이나 이곳에서 촛불집회를 해왔다.  국회에서 쌀 수입 비준안이 통과되던 바로 다음날인 지난해 11월24일 촛불집회가 시작됐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한번도 집회를 빼먹은 적이 없다.  설, 크리스마스, 연말연시때는 회원들이 평소보다 더 많이 참여했다고 한다.  그동안 대구시민 1만3000여명의 서명을 받았고, 20만원이 넘는 성금도 모았다.

“도시에 살고 있는 청년들이 쌀을 지키기 위해 무엇을 할까 고민하던 끝에 촛불집회를 열기로 결정했다”는 변홍철(37·<녹색평론> 편집장)씨는 “앞으로도 무기한 촛불집회를 계속하겠다”고 말했다.

땅과 자유는 대구지하철 참사가 터진 직후인 2003년 2월 말 결성됐다.

“지하철 참사와 이라크 침공사태가 발생하면서 생명이 파괴되는 현장을 지켜보고 지역에 뿌리박고 사는 청년들이 생명과 평화의 가치를 놓고 진지하게 생각해보는 모임이 필요했습니다.”  현재 땅과 자유에는 회사원, 농사꾼 등 20여명의 회원이 가입해 있다.  인터넷 포털 사이트 ‘다음’에 ‘나락한알’이라는 이름의 카페도 개설하고, 한달에 두 차례씩 모임을 열어 주로 농업과 에너지 문제 등에 관한 토론도 벌이고 있다.


땅과 자유 대표 박김기홍(27)씨는 “지금까지 반전운동과 이주노동자 분야에서도 적잖은 활동을 해왔다”며 “앞으로 다른 시민단체들이 다루기 어려운 일을 앞장서서 챙기면서 대학과 시민사회를 연결하는 고리구실을 하겠다”고 말했다.  땅과 자유는 제비뽑기로 대표를 뽑는다.  지금까지 대표 4명이 모두 제비뽑기로 당선됐다.

 

대표 기홍씨는 “선거보다 제비뽑기로 대표를 뽑으면 회원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이끌어 낼 수 있다”며 “독특하고 재미있지 않는냐”고 되물었다.

 

대구/글·사진 구대선 기자 sunnyk@hani.co.kr">sunnyk@hani.co.kr

 

 

* 이 글은 2006년 4월 19일자 <한겨레신문>에서 옮겨온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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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쌀과 농업을 지키기 위한 ... 144일째

[우리쌀과 농업을 지키기 위한 촛불문화제와 서명운동 144일째] 때와 곳 : 매일저녁7시부터 대구백화점 앞 민주광장
지난 4월 15일에는 한미 FTA 저지 1차 범국민대회가 서울 대학로에서 있었습니다. 관련 소식들은 뉴스를 통해 접하셨으리라 짐작됩니다만,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는 진리인가 합니다. 언론의 눈이란... 못내 아쉽고, 못마땅함 입니다. 머리에 "한미 FTA 결사 저지"란 머리띠를 하시고, 수심 가득한 얼굴의 늙은 농부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 농부의 모습이 우리의 오늘이 아닌가 합니다. 아주 명장면이었는데... 아쉽게도 우리가 찍은 그 사진은 컴퓨터란 멍청이가 날려버렸습니다. 너무 아까워 잠이 오지 않을 것 같습니다. 아쉽지만 그 외 우리가 찍은 사진 몇장을 이미지로 올립니다. 그리고 생각나는 글을 발췌하여 덧붙입니다. 바람이 불어오면 모든 것이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안토니오는 일어나서 다른 사람들을 만나러 갑니다. 그는 자기의 바람이 많은 사람의 바람이라는 걸 들었고, 그래서 그들을 찾아 가는 겁니다. 그것은 두 개의 바람이 충돌하면서 일어날 것이며 때가 되어야 불어올 겁니다. 역사의 회로에 들어 있는 석탄에 불이 지펴지며 타오를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위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지배하고 있지만, 밑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곧 들이 닥쳐 폭동이 일어날 것 입니다. 그렇게 폭풍은 일어날 것 입니다. 폭풍이 가라앉으면 불이 떠나고, 지상에 다시 평화가 깃들면 세상은 더이상 지금의 세상이 아니라 더 나은 어떤 것이 될 것입니다. ... ... ... ... ... ... ... ... ... ... ... ... 안토니오는 꿈을 꾸고 그리고 깨어납니다. 이제 그는 자기가 무엇을 해야 하는 지 압니다. 그는 아내가 불구덩이를 쑤시며 웅크리고 앉아 있는 것을 보고, 아이들이 우는 소리를 듣고, 동쪽에서 떠오른 태양이 환하게 인사하는 것을 보며, 손도끼를 갈며 빙그레 미소를 짓습니다. 이 나라에서는 모든 사람이 꿈을 꿉니다. 그러나 지금은 깨어날 시간입니다. 1992년 8월 라칸돈 정글에서. [ 冊 "분노의 그림자 - 멕시코 한 혁명가로부터 온 편지" 중에서 ] 2006. 4. 16. 대구에서 땅과 자유 생각.
4.15 한미 FTA 저지 범국민대회에서 만난 "평화바람" 이들은 평택 대추리에서 농사에 쓰여질 양수기를 살 돈을 모금하기 위해 뺏지와 껌을 팔고 있었습니다. 그들에게서 산 뺏지 입니다. 그래서 한 컷!
모두가 불꽃이다 백무산 태양이 불을 붙였다 들은 산화를 시작한다 초록의 불꽃이 불꽃을 전한다 둔한 우리 눈에 시간이 좀 길어 보일 뿐이다 노랗게 푸르게 붉게 불길이 번진다 들에서 산으로 산에서 물로 연료와 산소를 품은 대지에 해가 불을 가져왔다 옮겨 활활 타오른다 대지에 하나의 진리가 있다면 그것은 피워올리는 거다 탐욕과 이기심은 병든 고름 그곳에 어찌 불이 붙는가 고뇌와 절망은 젖어 불씨마저 꺼뜨린다 타고 남은 재가 기름이 된다 완전연소는 꽃에 가서 꿈꿀 일 나비도 새도 너도 나도 하나의 불꽃이다 별을 그리워하는 마음은 우리가 하나의 산화하는 불꽃이기 때문 스스로 산화하는 불꽃인 줄 모르는 자가 어찌 저리 티없이 맑게 타는 별빛에 그리움을 담겠는가 피워올리는 거다 무너지고 끊기고 곤두박질쳐도 잊지 마라 목숨에 하나의 진리가 있다면 피워올리는 거다 돌아보지 마라 뉘우침도 병이 된다 거리낌이 없다면 반성도 하지 마라 ― 백무산 詩集 《인간의 시간》(1996년) 중에서
♬ 임을 위한 행진곡 ♬ 노래 : 노래를 찾는 사람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동지는 간데없고 깃발만 나부껴 새 날이 올때까지 흔들리지 말자. 세월은 흘러가도 산천은 안다. 깨어나서 외치는 뜨거운 함성 앞서서 나가니 산자여 따르라 앞서서 나가니 산자여 따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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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쌀 지키기 141일째

[우리쌀과 농업을 지키기 위한 촛불문화제와 서명운동 141일째] 때와 곳 : 매일저녁7시부터 대구백화점 앞 민주광장
평화의 땅 평택 황새울. 지난 7일에는 대추리, 내리, 도두리 주민들이 농사짓는 것을 막기 위해 국방부는 농수로를 파괴위한 용역 직원, 전경, 레미콘 등을 동원해 농수로를 시멘트로 덮는 사태가 벌어졌고, 농수로 파괴에 저항하던 농민들과 충돌이 있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30여명이 연행되고 8명이 다치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 일이 있고난 후의 언론매체들의 보도 행태는 정말정말 화나게 하며, 진실의 현장앞에 서 있는 우리들의 마음을 너무너무 힘들게 합니다. - 국가안보와 직결되는 국책사업인 미군기지 이전에 조직적 방해는 명백한 불법 행위이며, 전문적인 외부 시위군을 막아야 한다’ - [동아] - ‘국민적 합의로 추진 중인 국책 사업이 방해받고 있는 현실이 참담하며, 공권력이 이렇게 무력해선 안 된다’ - [중앙] - ‘세상을 쥔 소수가 무기력한 다수를 호령하고 있는 요즘 세상이다. 평택 대추리는 그런 대한민국의 축소판이다’ - [조선] - 반미의 '메카'된 평택 대추리 - [조선일보 4월8일자 사설] - '평택 불법 행위'에 미온적으로 대응하나 - [중앙일보 4월8일자 사설] - 평택 벌판을 '반미 전쟁터'로 방치할 건가 - [동아일보 4월8일자 사설] 지난 3년간 주민들의 목소리에 침묵으로 일관해온 그들이 문제의 본질을 왜곡한 채 정부의 미온적 대처를 탓하고, '한미동맹을 위해 풀뿌리 민중들은 당연한 희생양으로 삼을 수 있다'는 아주 위험한 생각을 근간으로 하고 있습니다. 국가안보는 누구를 위한 안보이며, 미군기지 이전사업이 누구의 것인데, 누가 사용할 것인데, 그것이 수조원의 자국민의 세금을 퍼붓는 국책사업이 될 수 있나요? 내나라 내땅을 지켜서 올해도 농사짓자고! 하던일 멈추고 달려가서 몸으로 막았더니, 그들을 전문적 외부 시위군으로 매도하다니... 평택을 반미전쟁터라니?... 과연 이런 기사를 만들어내는 그들은 이나라, 이땅에서 나고 자란, 사는 사람이 아닌 외국언론의 특파원들이랍니까? 이런말을, 기사를 쓴 당신의 가족 누군가가 미군으로부터 폭력을 당했다면, 과연 당신은 지금과 같은 말을, 기사를 쓸 수가 있을까요?... 이게 과연 우리의 국가, 정부라고 할 수 있으며 우리언론이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일인지요? 정부의 미온적 대처나, 혈세낭비를 운운하기전에 우리 풀뿌리민초들, 내가족들의 생존권을 먼저 생각해보고 귀기울여 보고 말하는 것이 온당한 일이 아닐까요. 김지태 미군기지확장반대 팽성대책위원장(대추리장)은 국방부가 '공권력을 우습게 아는 데 어이가 없다. 어떻게 국책사업에 무모하게 대들 수 있냐'고 얘기 한데 대해 "대한민국 국민을 우습게 아는 공권력에 놀라기는 우리도 마찬가지"라고 말했습니다. "대한민국 국민을 우습게 아는 공권력에 놀라기는 우리또한 마찬가지" 입니다. 2006. 4. . 대구에서 땅과 자유 생각.
그만큼 행복한 날이 - 심호택 그만큼 행복한 날이 다시는 없으리 싸리빗자루 둘러메고 살금살금 잠자리 쫓다가 얼굴이 빨갛게 익어 들어오던 날 여기저기 찾아보아도 먹을 것 없던 날 - 詩集 하늘밥도둑 (심호택/창비/1992)
♬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 이상화 노래 : 노래를 찾는 사람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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