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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택지킴이'들의 겨울나기를 지원하는 모금운동

평택을 지키는 또하나의 투쟁
'평택지킴이'들의 겨울나기를 지원하는 모금운동


모금운동 계좌
대구은행 254-13-094101 (박기홍)
국민은행 962701-01-223536 (박기홍)
농협 150103-52-009393 (박기홍)

 


전국에 계신 나락한알 카페 식구 여러분,

그리고 땅과자유 대구모임 동지 여러분!

 

평택 대추리와 도두리, 땅과 평화를 지키기 위한

주민들과 평택 지킴이들의 평화적 저항운동이

힘겨운 상황 속에서도 의연하게 이어지고 있습니다.

 

평택 미군기지 이전/확장을 저지하고

미군기지 재배치 전면 재협상을 이루어 내기 위한

전국 방방곡곡 양심적 시민들의 투쟁 또한 끈질기게 이어지고 있습니다.

 

지난 9월 24일 평화대행진에 적극 참여했던

땅과자유 대구모임은

매주 수요일 평택의 상황을 더 많은 시민들에게 알리고

투쟁의 불씨를 이어가기 위한 노력을

대구지역에서, 미약한 힘이나마 계속하고 있습니다.

 

비록 당장에 큰 투쟁을 우리 스스로 조직하지는 못하더라도

평택의 주민들과 현지에서 함께 투쟁하는 지킴이들과 마음과 뜻을 함께하고

투쟁의 불씨를 꺼뜨리지 않기 위해 기도하고

작은 실천으로라도 끈기있게 연대하는 것이

지금 시기, 우리 모두의 의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취지에서, 우리들 연대 투쟁의 일환으로서

땅과자유 대구모임 및 나락한알 카페 식구 가운데

평택 지킴이로서 현지를 지키고 있는 동지들의

겨울나기를 지원하기 위해 투쟁기금 및 물품을 모아 보내려고 합니다.

 

11월 말까지, 한시적으로 진행할 모금운동을 위해

별도의 은행계좌를 마련했습니다.

11월 한달 동안, 적극적으로 여기에 참여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대구은행 254-13-094101 (박기홍)

국민은행 962701-01-223536(박기홍)

농협 150103-52-009393(박기홍)

 

그리고 현지의 지킴이들과 연락해서, 긴요한 물품의 목록을 확인하겠습니다.

확인되는 대로 공지할 터이니, 모금과 함께 물품의 후원도 부탁드리겠습니다.

 

저희의 바람은, 이 작은 우리의 실천이

아래로부터의 상호부조와 연대의 잔잔한 파문을 일으켜,

비록 큰 투쟁, 거창한 운동은 아니더라도

운동의 현장을 지키는 우리 동지들을 실질적으로 지원하는

또하나의 뜻깊은 운동, 우정의 운동으로 확장되어 나가는 것입니다.

 

부디 우리 평택 지킴이 동지들이

고립감과 외로움, 그리고 현실적인 여러 악조건을 이겨내고

주민들과 함께 평화와 생명의 터전인 평택땅을 앞으로도 의연하게 지킬 수 있도록

마음과 정성을 모아주십시오.

 

다시한번 관심과 참여를 간곡히 호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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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남이’에서 ‘하나코’가 된 ‘훈’ 할머니

‘이남이’에서 ‘하나코’가 된 ‘훈’ 할머니

 

「일본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한번도 소리질러보지 못한 훈 할머니, 켜켜이 쌓인 분노를. 침묵을 강요한 세상에, 언제까지든 숨어있기를 바라던 세상에 말한다. 그들이 끌고 가 꽁꽁 감추어두었던 어쩌면 그대로 영원히 사라져 주기를 바랐을 ‘나’, ‘지금 여기 있다’고.」(본문 인용)


2005년은 해방 60주년, 그러나 올해 들어서 벌써 네 분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께서 돌아가셨습니다. 일본의 진심어린 사죄의 말 한마디 못 듣고 생애를 마감하셨습니다. 눈을 감는 그날까지 일본의 작태는 묵묵부답으로 생존자 할머니들이 빨리 생을 마감하기를 바라면서, 불난 집에 부채질하듯이 망언을 일삼고 있었습니다. 대구 상인동에 거주하시던 김분선 할머니께서 2005년 1월 10일 눈을 감으셨습니다. <정신대할머니와함께하는 시민모임>에서 활동하면서 제일 먼저 저를 반겨주시던 김분선 할머니를 떠나보내야 했습니다. 비통한 마음은 아직도 제 가슴 한 구석에 남아있습니다. 항상 저의 손을 꽉 잡고는 놓아주지 않던 할머니의 따뜻한 손이 자꾸 생각납니다. 해방 60주년이라. 그래서 기쁘신가요. 저는 자꾸 슬퍼집니다. 저의 슬픔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요?

 

항상 그랬지, 냄비처럼 끓었다 식었지 않았던가 하지만 작년 이맘때쯤이죠. ‘이승연사건’을 물어본다면 어렴풋이 기억하시거나 아님 모를 수도 있으시겠죠. 또 지난 해 9월에는 서울대 경제학부 이영훈 교수가 TV에서 정신대가 조선총독부의 강제동원이 아니라 한국인의 자발적인 참여로 이뤄진 상업적 공창이었다는 요지의 망언은 기억하시겠죠. 모를 수도 있죠. 당장 내 발등에 떨어진 졸업과 취업이 더 중요하니까요. 하지만 감히 제가 부탁을 드리지요. 이건 아니지 않습니까. 잊지 마시고, 당신들이 생을 마감할 때까지 기억해주세요. 할머니들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습니까 “우째. 니들은 가만히 있노!” 잘 기억해보세요. 97년 6월 13일 캄보디아 신문 ‘프놈펜 포스트’에 놀란 만한 기사가 하나 실렸습니다. 1943년 일제에 의해 캄보디아에 위안부로 끌려간 한국 여성이 수도 프놈펜 북쪽 교외의 한 마을에 생존해 있다는 놀라운 소식이었습니다. 한국일보가 다음날 이를 특종으로 보도했고 나라 전체에 알려졌습니다. 바로 훈 할머니의 이야기입니다. 이제야 기억하시겠죠.

 

하나코가 되어야 했던, 훈 할머니가 되어야 했던 이남이
올해가 훈 할머니가 돌아가신지 4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훈 할머니가 한국을 찾을 때처럼 언론의 관심은 없지만 <정신대할머니와함께하는 시민모임>에서는 희미해져가는 기억과 자료를 모아 「버려진 조선의 처녀들」(아름다운 사람들)을 작년에 펴냈습니다.
할머니의 어릴 적 이름은 이남이입니다. 달거리도 시작하기 전인 열여섯 나이로 강제로 끌려간 곳은 싱가포르. 그곳에서 붙여진 이름이 하나코였습니다. 이남이라는 이름은 버려진 채로 오직 하나코로만 불려졌습니다. 캄보디아 프놈펜으로 옮겨지면서 하나코에서 다시 훈 할머니로 살아야만 했습니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자기가 누구인가를 말하지 않아야 했습니다. 아무도 불러주지 않는 이름 이남이. 그렇게 이남이는 지워져갔습니다.

 

까만 뿔테의 두꺼운 안경, 짧은 머리, 훈 할머니를 만났습니다. 책으로였습니다. 이미 할머니를 놓쳐 버린 후였습니다. 무거운 마음으로 다가서면서 오히려 저의 그런 마음 때문인지 할머니의 마음만 더 불편하게 만들어 놓은 것 같습니다. 그저 외할머니한테 했던 것처럼 어리광도 부리고, 수다도 떨고 그렇게 다가가야 했었는데. “할머니 죄송해요” 다시 만난다면 그렇게 할게요.
책 표지의 할머니 얼굴을 다시 봤더니 보살님 얼굴입니다. 미간 위의 돋아난 점이 부처님의 그것과 꼭 닮았습니다. 당신께서 스쳐간 곳, 당신에게 눈물과 상처만을 안겨준 한국, 일본, 타이완, 싱가포르, 사이공, 캄보디아. 슬픈 아시아, 그 아픈 역사를 온몸으로 받아 안아 힘없는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곳. 그러나 당신께서는 오히려 우리의 상처를 보듬어 주듯 따뜻한 손을 내밀고 있습니다.

 

‘나’, 지금 여기 있다
매주 수요일이면 일본대사관 앞에서 수요시위가 있습니다. 시작한지 14년이라는 세월을 눈앞에 두고 있습니다. 2월 23일로 645회째를 맞이하였습니다. 기록을 갱신하기 위해서도, 기네스북에 오르기 위해서도 아닙니다. 일본 정부는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대해서는 부인을 하고, 한국 정부는 침묵하고 있습니다. 거동이 불편하신 고령인 할머들께서는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수요일이면 일본대사관으로 향합니다.

현재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로 등록된 할머니들이 215명입니다. 일제강점하 강제로 끌려갔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를 기억한다면 등록된 피해자는 빙산의 일각일 뿐입니다. 전쟁터에서 또는 병으로, 무관심으로 생을 마감했던 분들이 훨씬 많습니다. 지금까지 89명이 돌아가셨습니다. 현재 생존 할머니들은 126명입니다. 이 숫자는 생의 마감을 기다리는 번호표가 아닙니다. 결코 착각하지 마세요. 여러분의 가슴 한 켠에 훈 할머니가 남아 있길 바랍니다.

 

대구대 신문 2005. 3. 2(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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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와 함께

추석 연휴 기간에 친구와 함께 팔공산을 올랐다. 대구와서 동갑내기 친구를 사귄 건 처음인데, 산을 좋아한다는 것에 마음이 맞아 첫 산행으로 팔공산을 잡고 몇 주 전부터 준비를 했다. 1박 2일 코스로 비박을 하기로 했다. 민간인 신분이 아닌 군바리 때 혹한기 말고는 비박이 처음이라 걱정 반 기대 반이었다.

 

파계사에서 시작하여 파계재를 지나 헬기장에서 잠을 잘까 한참을 둘이서 고민하다 조금만 더 가보자는 결론을 내리고 갔는데, 얼마 못 가서 어둑해주지는 바람에 적당한 곳에 자리를 폈다. 라면에 소주에 한잔 걸치고는 이런저런 이야기가 술술 나왔다. 이렇게 비박하며 한 잔하는 맛 정말 괜찮은 것 같았다. 헬기장에서 잤다면 야경과 별을 보며 더 좋았을텐데, 아쉬웠다.

 

몇 잔이 오고가며 말도 트고, 다음 산행 약속도 잡았다. 모난 성격에 죽마고우 빼고는 다시는 친구를 못 사귀줄 알았는데 이렇게 만날 수 있는 친구가 있으니, 그럭저럭 살만 한 것 같다.

 

이른 아침에 일어나 신선한 공기를 마시며 짐을 꾸렸다. 갈증으로 원래 가고자 했던 곳까지 마실 물을 확보해서 갈 수 있을지 걱정이었다. 마당재를 지나 서봉에서 라면에 맥주를 곁들여, 국물은 밥을 살짝 삶아서 아침을 해결했다. 알콜 파워 덕분에 동봉까지 가뿐히 올랐다. 원래는 신령재를 지나 갓바위까지 산행하려고 했으나, 그냥 신령재에서 내려왔다.

 

다 내려와 버스 타고 늦은 점심을 해결하기 위해 음식점에서 또 맥주를 까고 말았다. 술로 시작해 술로 끝나는 산행이었는데 낮인데도 취하기 보다는 말똥말똥 했다. 이런 기분 간만에 느꼈다.

 

  팔공산, 동봉을 얼마 안 남겨두고 내려다보니 대구가 손바닥하게 보였다.




  내 친구다.

 산행에 맞춰 티셔츠를 선물해준 재홍이형 고맙소~ 옷이 때깔난다^^

 내려오면 찍었는데 '구절초' 인 것 같은디^^;;

 쑥부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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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4일] 평택 수요선전전

평택 미군기지 확장저지 수요선전전 [10. 4]

 

일시: 2006년 10월 04일(수) 오후 6~ 7시 30분

 

장소: 동대구역 앞

 

 

9명의 땅과자유 회원들이 참가하여 평택 미군기지 확장저지 수요선전전을 진행하였습니다.

시내에서 진행하던 선전전을 추석을 맞아 동대구역에서 귀성객 대상으로 촛불을 들고 노래를 부르며 시작하였습니다. 사진 전시와 더 많은 유인물을 나눠주기 위해 발에 불이 나도록 뛰어 다녔습니다.

멀리 영양에서 오셔서 멋진 목소리로 노래도 불러 주셨고, 고향으로 가는 길에 들러 왕송편을 전해준 회원들도 있었습니다.  

 

다음 주도 변함 없이 수요선전전은 진행됩니다.

장소는 공지하도록 하겠습니다.

 

   동대구역에서 '평택 미군기지 확장저지'의 목소리를 외쳤습니다.


   선물 보따리로 가득 찬 귀성객의 양손에 유인물 나눠주는 게 쉽지 않았지만,

      한숨 고르며 열심히 배포했습니다.


   한숨 고르고 출구 앞에서 열심히 나눠 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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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시장에서 웃다

서문시장에서 웃다

 

2년 가까이 일하던 사무실에서 그리 멀리 않은 곳에 있던 서문시장을 개인적인 일로 찾은 적은 없었다. 배낭 매듭이 터진 채 2년 동안 제대로 사용도 못하고 놔둔 것을 1박 2일이 산행 약속이 잡히고서야 발걸음을 뗄 수 있었다. 가방 수선 집이 있다는 정도의 귀동냥으로, 대목장으로 인산인해일 텐데도 이런 사정은 개의치 않고 그저 내 마음이 움직이는 대로 서문시장으로 갔다. 발품을 많이 팔아야 할 줄 알았지만 쉽게 가방 수선집을 찾았다. 조금만 기다리면 된다고 했다. 일단 맡겨 놓고는 사람 구경할 요량으로 시장 안으로 들어갔다.

 

생각만치 붐비지는 않았다. 건어물전에는 활기가 넘쳐났다. 선물 세트가 진열되어 있는 곳도 마찬가지였다. 칼국수, 수제비로 요기를 하는 사람들도 보였다. 시장에 오면 알 수 없는 힘이 생긴다. 가끔은 시장에 가고 싶을 때가 있다. 돈을 들고 뭘 사러가기 보다는 살아있다는 것을 보고 싶어서. 뚜렷한 목적 없이 마냥 걸으며 보고 있으니 이 시간에 이렇게 시간을 보내도 되나 일중독 비슷한 걱정이 밀려왔다. 그것도 잠시 지금의 기분을 만끽하고 싶었다. 오후 햇살 받으며 분잡한 시장을 걷는 이 기분, 정말 오랜만이었다. 잠시지만 내가 지금 행복하구나라고 느껴졌다.

 

엄마가 시장가는 날이면 기다렸다가 같이 가겠다고 생떼를 부리면서 함께 가면 엄마랑 같이 걷는 시장은 아주 풍족했다. 엄마랑 쪼그려 앉아 떡을 사먹거나, 보리밥집에 가서 집에서 먹는 반찬과 별반 다르지 않는 반찬에 아주 맛있게 먹었다. 그럼 엄마는 누가 보면 집에서 굶긴 줄 알겠다며 혀를 끌끌 찼다. 보리밥 주인 할머니께서는 어린애가 보리밥이 입맛에 맞지 않을 텐데 잘 먹네 라며 웃으셨다. 이런 기억들이 남아 있어서인지 백화점보다는 시장이 좋다. 화려한 불빛 아래 가격표 보기가 무서울 품목이 진열된 백화점에 가면 나의 허름한 옷의 터진 소매와 옷깃에 낀 때가 들통 날까봐 불안한 게 사실이다. 홈플러스나 이마트도 매한가지다. 시장은 전혀 그런 걱정 없이 낮술에 불콰한 얼굴로도 걷을 수도 있다.

 

포목점을 지나면서는 겨울용 이불이 없다는 사실이 막 떠올라 주춤거리며 이것저것을 보았다. 일 마치면 술 마시기 바쁘고, 주말은 그저 늘어지게 잠잘 뿐, 그 생활의 반복. 맹탕한 나를 스스로가 좀 더 챙긴다면 이번 겨울에는 따뜻하게 이불을 덮고 잘 수 있을 것이다. 서문시장에서 내가 좀 사람답게 살아야할 건더기를 만들었다. 조금 전에 지나친 양말 세트가 진열된 곳을 다시 찾았다. 항상 빚만 진 것 같았던 2년 가까이 일했던 사무실을 지척에 두고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더구나 추석 아닌가. 사람 구실하기 위해 양말 세트를 10개 샀다. 예쁜 것으로 고르기 위해 망설이기도 했다. 내내 인사 제대로 못 드리고 나와 할머니께, 사무국 일꾼한테 마음이 쓰였는데 차차 갚을 요량으로 더디지만 제대로 하자.

 

단단히 꿰맨 빈 배낭을 메고는 양말을 담은 봉지를 들고 사무실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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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택 미군기지 확장저지 대구 수요선전전

평택 미군기지 확장저지 대구 수요선전전

 

일시: 2006년 09월 27일(수) 오후 7~ 8시

장소: 2.28공원 입구

 

9.24 평택 4차 평화대행진의 기운을 이어 받아서 힘차게 수요 선전전을 진행하였습니다.

6명의 땅과자유 동지들이 모여 300장 정도의 '사람이 살고 있다' 신문을 건네주며, 평택 대추리 도두리의 야만적인 마을파괴를 강행하고 있는 국방부와 청와대의 부당성을 알려내기 위해 뛰어 다녔습니다.

신문 배포 후 손수 만든 피켓을 흔들며, 기타 반주에 맞춰 함께 노래를 불렀습니다.

- 생존의 적, 평화의 적 미군기지 몰아내자! 
- 평택 미군기지 확장 전면재협상하라!

등의 구호를 외치고는 '땅의 사람들' 부르며 수요선전을 마쳤습니다.

 

어둠속에 빛나는 수 많은 별처럼
억눌리고 밟혀도 흔들리지 말자
오늘밤이 길다해도 끝내 싸워 이길 때까지
땅을 딛고 서야 한다 땅의 사람들

 

헐벗고 굶주린채 버림 받아도
우리들 가슴속엔  뜨거운 피 넘쳐 
온 몸으로 부딪혀서 우리 세상 만들때까지
땅을 딛고 서야 한다 땅의 사람들
땅을 딛고 서야 한다 땅의 사람들

                                                

                                               -땅의 사람들

 

*사진 전시를 진행하려고 했으나 갑작스레 부득이한 일이 생겨 1시간을 줄여 진행하였습니다. 다음 주는 추석연휴 기간이라서 참여가 저조하겠지만, 일단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동대구역이나 대구역으로 장소 변경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부정기적으로 진행하다가 수요일만은 제대로 하자는 약속으로 8월 23일부터 진행하고 있습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9. 27  공원 입구에서 노래와 구호로 평택 미군기지 확장의 부당성을 외쳤습니다.


-9.20 폭력 정권의 치부를 보이고만 평택 현재 사진을 전시하며 선전전 진행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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탕수육

탕수육

 

에어컨도 없는 칠곡 끄트머리 사무실을 들락날락 한지도 두 달이 되었다. 너무 더워 도망치고 싶을 때가 한 두 번도 아니었지만, 언제 그랬냐는 듯이 선선한 바람이 불어온다. 시끄럽지 않고 공기가 좋다는 것 빼고는 사무실 조건으로 별로다. 끼니를 때워야 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1인분은 배달이 잘 안되니, 자장면 아니면 짬봉이다. 외근을 보고 온 선배랑 스페샬 메뉴로 자장면과 탕수육을 시켰다. 항상 그렇지만 느긋하게 먹기보다는 허겁지겁 허기진 배를 채우기 바쁘다. 빨리 먹지 말아야지 하며 먹는데도 그게 잘 안 된다. 어찌 오늘은 조금 느릿하게 먹었다. 그래도 중국집 탕수육은 나름대로의 맛이 있는데 이 집 음식은 그렇지 못한 것 같았다.

 

스무 살 시작을 탕수육으로 했던 그 맛과 똑같았다. 대학 시험을 보기 좋게 떨어지고 난 그 해 겨울은 정말 추웠다. 겨울은 매양 춥기는 마찬가지지만. 갈비집 망하고 몇 년을 쉬다가 엄마는 뭔가를 하기 위해 부산 이모 집에 있었다. 이종사촌 형과 경남여고 근처 시장에 점포를 얻어 천 원짜리 탕수육을 팔았다. 엄마는 그걸 배워 고향에서 장사를 하려고 했다. 엄마는 형한테서 일 배워 돈 벌어서 대학가라고 했다. 시집 몇 권을 챙겨 들고 부산을 찾았다. 옷에는 항상 느끼한 기름 냄새가 묻어 있었다. 손바닥만 한 점포에 이종사촌형, 엄마, 나. 3명이서 겨울을 견디기 위해 밥을 먹었고 난 눈치껏 책보는 것이 유일한 낙처럼 지나간 시간이 있었다.

 

천 원짜리 탕수육 맛이 학교 앞 주전부리용이지만, 반짝 장사로 그 해 돈 맛을 볼 수 있는 장사였던 것 같다. 천 원짜리도 배달하기 위해 50cc 오토바이를 타고 동네를 다녔다. 엄마랑 같이 배달 갔다가 도저히 들어갈 수 없어 엄마가 들어갔던 경남여고. 스티커 붙이려고 다니다 헬멧 안 썼다가 의경한테 걸려 벌금 물리 뻔 하다가 눈물 쪽 뺄 만큼 빌었던 적. 참 추웠다. 배짱이라도 있었으면 덜 추웠을 텐데.

 

짧은 봄이지만 봄이 왔다. 동가리 신작로에 천 원짜리 탕수육 점포를 마련했다. 내 고등학교 시절을 남의 식당 일을 하던 엄마가 드디어 장사를 했다.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식당 구정물 묻힌 사람이 식당 여는 게 숨통 트이는 삶일 것이다. 덩달아 설레었다. 하지만 그 설렘은 짧았다. 탕수육 팔던 분식집이 동네 어른들 술판으로 변해가면서 문을 닫았지만 요기로 탕수육을 솔찮이 먹었다. 문을 닫고 나서 난 한동안 맥주 안주로도 탕수육을 먹지 않았다. 하찮은 것들이 문득 너무도 또렷이 되살아나는 구질구질함은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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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 FTA를 우려하는 <녹색평론> 전국독자모임’ 성명서

한미 FTA를 즉각 중단하라!

‘한미 FTA를 우려하는 <녹색평론> 전국독자모임’ 성명서

          


  한미 FTA라는 전대미문의 폭거가 그렇지 않아도 힘겹기만 한 이 나라 민중의 삶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다. 노무현 정부는 숱한 반대 여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독단적으로 한미 FTA라는 도박을 자행하고 있다. 지난 한 해만 하더라도 식량주권의 최후 보루인 쌀마저 개방의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비준 동의를 강행하는가 하면, 경제성장이라는 미명 아래 그 동안 일방적인 희생을 강요당해 온 농민과 노동자들을 죽음의 행렬로 내몰았던 이 나라 정부는, 사회적 약자에 대한 그 어떤 보호 장치도 없이 소수의 수혜자들을 위한 한미 FTA를 추진함으로써 대다수 서민들의 삶을 송두리째 위협하고 있다. 이라크 파병, 부안 핵폐기장, 새만금 갯벌, 천성산 터널, 평택 미군기지 문제 등에서 보여주었던 노무현 정부의 반생태적이고 반민중적인 성격은 한미 FTA 강행으로 다시 한번 분명하게 입증되고 있다.

  자유무역협정이라는 그럴 듯한 이름으로 포장된 한미 FTA는, 실상에 있어서는 미국 주도의 일방적 경제통합에 다름없을 뿐만 아니라 나아가 이 땅 풀뿌리 민중들의 삶의 현장을 경제대국의 이윤추구 시장으로 전락시킬 것이 분명하다. NAFTA(북미자유무역협정) 이후 멕시코 민중들이 겪어야 했던 처참한 고통은 한미 FTA 체결 후 우리가 맞이하게 될 현실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이다. 극심한 양극화로 인해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진 농민, 노동자, 서민들의 삶은 한미 FTA로 인해 회복 불가능한 지경에 이를 것이다. 그럴 가능성도 높아 보이지 않지만, 설령 한미 FTA가 몇몇 산업 부문에서 이익을 가져온다 하더라도 그것은 대다수 풀뿌리 민중들의 생존을 담보로 한 위험한 도박의 결과일 뿐이며 극소수 수혜 계층에만 국한된 혜택일 뿐이다.

  지금 우리는 절체절명의 기로에 서 있다. 한미 FTA는 단순한 무역협정을 뛰어 넘어 사회, 문화, 제도, 관습의 영역까지 우리 사회의 근간을 뒤흔들 무서운 재앙이 될 것이다. 창간 이후 산업사회의 폭력과 생태위기에 맞서 우리 사회와 이웃의 삶을 걱정하고 고민해 온 <녹색평론>의 정신을 공유하는 ‘전국 녹색평론 독자’들은, 한미 FTA를 즉각 중단할 것을 촉구한다. 민심을 거역하고 오만과 독선으로 한미 FTA를 강행할 경우, 그에 따른 모든 책임은 전적으로 이 나라 정부에 있음을 엄중히 경고하며, 한미 FTA의 폭주를 멈추기 위한 투쟁에 연대할 것을 결의하는 바이다. 

 

 


2006년 9월 9일

한미 FTA를 우려하는 녹색평론 전국독자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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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난 돌이라 생각하며

모난 돌이라 생각하며


‘모난 돌’은 흔하게 사용되는 말이다. 그 단어가 요즘 내 주의에서 서성이고 있다. 마치 끙끙대며 말 못하고 좋아하는 사람 집 앞에서 서성거리듯이. 몇 날 며칠에 걸쳐 쌓여 있던 것을 토해내려고 쓰다 지우기를 반복하다가 스트레스가 극치를 이른 오늘 골방으로 가지고 와서 이렇게 풀어내려고 용을 쓰고 있다. 불평불만을 스스로한테 조근조근 이야기조차 못하는 것을 보며 틀림없이 모가 나도 엄청 나있는 것 같다.

 

지난주에 고향이라는 곳을 모자 꾹 눌러 쓰고 갔다 왔다. 밤늦게 도착해서 술친구이자 동지이자 뭐 그런 사이인 선생님을 보고 왔다. 이야기하지 못해서 병이라도 난 것처럼 밑도 끝도 없이 무게 잡으며 맥주 몇 잔에 풀어 놓았다. 여전히 나의 말을 차근히 듣고는 아기 달래듯 달래주었다. 어리광을 부리고 싶어 일 것이다. 여태껏 어리광 제대로 부리지 못한 것 같다. 코흘리개였을 때는 콩가루 집안이 그래도 살 만했는지 이래저래 투정도 부린 것으로 기억하지만, 반항으로 가득 차 있던 사춘기는 아니었다. 사춘기 때는 분명히 그랬다고 말할 수 있다. 상처 난 곳을 빨간 약 발라주며 괜찮다고 따뜻하게 대하는 엄마를 찾고 싶은지도 모르겠다. 골방에서 잠을 깰 때면 엄마라는 그 언저리가 희미하게 지나간다. 아침부터 우울해져 집을 나서기가 매일인 것 같다.

 

고향이라는 곳은 대낮에 고개 쳐들고 찾아 갈 수 없는 곳이라 했던가. 분명 그렇지 않는 놈들도 있을텐데. 도둑고양이처럼 찾아 갔다가 야한 비디오 틀어주는 여관에 잠시 눈을 붙이고는 허둥지둥 동네 아저씨라도 마주칠까 걱정이 앞선 채 고개 푹 숙이고 빠져나와야만 하는 그 곳. 언제쯤 그 짓을 그만 둘 수 있을까. 아이러니 하게도 그렇게 찾아간 날, 가방에 넣어 갔던 어쭙잖을 책을 해장을 하기 위해 선생님 기다리다 펼쳤다. 맑은 햇살 가득한 토요일, 하교 길의 여중학생을 보며 소주가 생각났다.

 

“고향은 피의 더러움과 성장기의 불우를 그때마다 확인시키던 ‘낙인’은 아니었던가.”

 

시발, 이번이 마지막이다. 다시는 이 지긋지긋한 곳을 안 올 것이라. 맹세하고 돌아서지만, 파도에 모래성이 사라지듯 다시 몰래 찾아오고 만다. 풀고 싶다. 근데 정말 풀리지 않는다.

꼬인 실타래처럼 꼬여만 간다. 스트레스를 받으면 받을수록 말을 잃어간다. 오히려 맞받아서 싸우고, 주사 부리듯 말을 더 해야 할터인데. 침묵으로 일관한다. 말을 잃어가고 말을 더듬는 것이 불안하다.

 

난 결코 그럴 수 없겠지만, 취직하고 열심히 싸이질로 뻔질나게 살고 있는 연락을 끊은 친구가 괜히 부럽기도 하며 심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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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가자

술발은 물론이거니와 약발도 잘 받아 약기운이 남아있는 동안은 살만 하다. 코감기가 번져 목감기와 몸살로 이어져 왔던 저 번주의 나의 몸의 생각하면 이렇게 맥주 한잔 걸치며 기본적인 생활을 할 수 있는 지금, 동전 양면인 것 같다.

 

그런 와중에도 한미FTA저지를 위해 서울로 향했다. 그나마 안정되었던 학원생활을 내팽게치고서 뒷수습 안 되는 특유의 무책임한 잠적으로 이어지는 생활인 줄 알면서도 가고 말았다. 어쩔수 없다고 말해야 하나, 이런 투쟁 국면을 통해 도피를 하는 건지 내 스스로도 설명이 안 된다.

 

비를 맞으며 뜀박질 속에서 나는 생각했다. 한미FTA를 저지하고 싶었다. 하지만 결론은 막지 못할 수 도 있을 것이다. 근데 이건 분명했다. 땅과자유에서 배웠고, 며칠 전에 땅과자유 학교에서 확신했던 애먼 헤나시의 말 "아니오, 하지만 세상이 나를 바꿀 수 없다는 것은 확신합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앞만 보고 걷고, 뛰는 대열 속에서 그것 하나만 생각하고 뛰었다. 청와대 인간 띠잇기를 하기 위해 청와대로 향했지만, 결국 미대사관앞에서 우왕좌왕하며 돌아왔다.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부실한 안주와 소주 몇 잔으로 한숨 돌리며 좌석에 앉았지만 생활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에 자리를 불편케 만들었다.

 

결국 혼자일 수 밖에 없고, 내 속에서 나오는 수많은 말들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정말 무뇌아처럼 살 수 밖에 없다는 절망에 빠진다. 난 진정 내 속에서 나오는 나의 분노, 용기, 기풍을 제대로 느끼며 표출하는 건지 그저 그 분위기에 나를 잊고 살아가는지 묻고 싶다.

 

조만간에 평택 대추리에서는 빈집 철거에 나선다고 선전포고를 했다고 한다. 지난 번의 싸움을 기억한다면 긴급 지침 또는 동참을 호소하는 글을 읽게 될 것이다. 지금 겁이 난다. 결국 유치장, 구치소, 감옥일 텐데. 나는 나를 어떻게 설득하고 이해하고 있는지도 모른 체, 뒷걸음 치는 것 같다. 그저 공권력이 무섭다는 이유만으로.

 

박래군은 구속이 되었다. "대추리 병"이라고 명명되어지기 시작한게 박래군의 말에 의해서란다.

나도 한때 그 병에 걸렸다고 생각했는데, 약기운이 다 떨어진 건지 증상이 들어나지 않는다. 구속과 폭력, 불심검문에 시달고 있는데도 나와는 상관없다는 듯이 느껴지고 있다.

 

정말 무서운 건, 적들이 아니라 우리의 안일함이라고 했던가.

나의 병은 분명 잠복기일 것이다. 이 잠복기가 길어 진다면 결국 난 내가 그토록 증오하며 연을 끊었던 친구, 이 절망의 시대를 너무도 잘 사는 이들처럼 되어 간다는 사실. 그 초조함, 남들은 그걸 결벽증이라 말하기도 한다.

 

나의 증상이 어떤지 진단을 못 내리지만, 병원은 가봐야겠다는 건 분명하다. 그 병의 진원지는 평택이다. 병원간다고 병이 완치되겠냐만은, 병원 안 간지도 오래된 것 같다. 약도 다 떨어진 것 같고.

 

한미FTA체결되면 병원도 제대로 못 간다고 하니, 체결되기 전에 병을 일부러 만들어서 치료를 다 받든지, 물론 돈이 없어 그렇게 하지도 못하지만 어쨌던 지금 제대로 앓고 있지 않는 "대추리 병"에 전염이 제대로 되기 위해 한 번 가야 겠다. 격렬한 전염을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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