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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데이-전평(10월2일-토)

사랑하는 당신에게

 

전평의 조직활동과 관련해서는 추후에 다시 살펴 볼 것이다. 이는 당시 내외부적으로 급격한 정세를 반영하고 있기 때문에 '현재의 수준으로' 단순화 하기가 쉽지않다(p200 전평의 조직활동)

한편, 전평의 문화활동은 참으로 놀랍게 다가온다. '기관지는 집중적 선전선동자인 동시에 집중적 조직자가 되어야 한다.'는 기조하게, 투쟁의 전달과 수렴, 확대, 배포와 통신원 확대등 기본적인 활동에 충실하면서, 당시로써는 유일한 전평및 노동자 내부의 소통매체로 위치 했었다.

 

한편으로 노동자들의 또 다른 문화 교양면이다. 언뜻, 45년의 시대만을 (시간적 과거) 생각한다면, 서적, 음악, 연극, 영화, 무용등 연예활동이 일천했을 것으로 선입견을 갖을수 있지 않겠는가? 허나, '전평 집행위원장 허성택이 1946년 1월 1일 신년사에서 강조하듯이 조합원 대중등을 질적으로 강화하기 위한 구체적 방법의 하나'로 '교양문제(문예활동)'는 중요하게 집중실천 되었다.

 

예를들어 '1945년 4월 조선 출판 노조에서는 다가오는 5월 1일 노동절에 대한 계몽선전과 준비를 위하여 강좌반을 조직하여 박봉연, 이선운, 김원식이 각분회와 직장의 순회 강좌를 개최했다'는 기록등 일반교양, 정세, 심지어 '한글'교양까지강습회와 교육, 시국강연회의 이름으로 다양한 교양활동이 전개된것이다.

 

또 하나는 연예활동이 아주 보편적으로, 그리고 일상적으로 전개되었다는 점이다. ' 전평, 서울지평은 46년 제 20주년 '610만세 기념연예대회'를 ------ 출연 종목은 악대, 합창, 독창 , 무용, 춤, 유회, 시뮤레이션, 촌극, 시낭독 등 이었다. 지도요청으로 하면 각 문화 단체에서 사람을 파견해 준다.---- ' 거나 '서울지평는 46년 3월 1일 ---- 31절기념 노동자 위안회를 연다.'는 등의 자료에서 (전노신) 보이듯이, 일상적이고 당연한 '노동자들의 문예활동' 모습이 목격된다. 그리하여, 46년 5월 1일 메이데이는 약20만명, 47년 51대회는 약50만명이 운집하여 - 그 야말로 새세상과 노동해방을 염원하는 당시 노동자들의 모습- 10에서 20가지의 요구를 담은 행사를 성사할 수 있었다.

 

이와 비교해 대한노총은 46년 700명 47년 2만 5천명을 동원했다고 하는데, 이 마져 당시의 격렬한 좌우대립을 실감케 한다. 46년 대한 노총대회에서 '민재홍'은( 안재홍? - 3월3일)축사를 했다는 데 그내용이 반동적인 극치다. " 8시간 은 그만두고 10시간 20시간이라도 노동하라, 노자는 친선하자" 는 따위 였다고 --

 

**** 메이데이노래 - 한번 불러볼까?

 

1. 들어라 만국의 노동자들아/ 우렁차게 들려오는 메이데이의

시위대가 행진하는 발자국 소리/ 미래를 고하는 고함소리를 !

2. 오래인 압박과 착취밑에서 / 신음하던 조선의 노동자들아

오늘은 만국의 노동자의 날 / 세계의 동무들과 발을 맞추자 !

3. 압제없는 세상을 신설키위해/ 착취없는 사회건설키위해

강철같이 단결한 우리 노동자 / 불은 깃발 선두에 나부낀다 !

4. 완전해방과 자주독립도 /인민의 새나라 세우는 데도

정의로 싸우라 우리 노동자/ 정의로 싸우리라 삼천리 강산 !

5. 인민의 적 물리치고 나가는 곳/ 자유의 새세상 동터온다.

지키자 메이데이 노동자들아/ 지키자 메이데이 노동자들아 !

 

참으로 감동적이고 벅찬 노래이지 않나?

 

허나 48년 메이데이는 불허로 개최되지 못한다. 안타깝게도 ---

이 장면에서, 현재와 당시의 상황을 비교해본다. 어찌 단순비교가 가능하겠는가? 하지만, 조직과 투쟁, 의식과 연대성등에서 상당히 수준높았던 , 즉 혁명적 시대에 걸맞는 노동자등의 활동, 그것이 존재 했었고, 이는 현재로 살려야 할 자산임에 틀림없다.

 

전평의 그것과 '1987- 1992'의 시대에서 보이는 노동자 정치활동은 두고두고 보아도 참으로 놀라운 것이다. 조공과 전평의 관계, 정치단체(정당침 기타)와 전노협의 관계는 , 현재에도 여전히 연구되고 고민되(노조와 정치조직의 관계) 어야 한다.

 

(노동자 정치) 91년경 '한노당' 으로 집결한 선진 활동가가 5000명 이라니!

87년 에서 92년경까지의 '상호연대형' 노동자 정치의 활동은 , 허나 한마디로 실패했다고 보여진다. 필자는 '전노협 사수 투쟁과 노동자 정치운동의 이념적 조직적 분화'를 의미있게 살펴보고 있지만, 쏘권의 몰락만큼이나 그 충격이 가해진 것처럼, 그 왕성했던 운동은 쇠락을 면치 못했음을 확인한다. 그런 측면에서 실패라는 것이지!

 

날씨가 10도씨 떨어져 10도라고 하네.

방금전 그리고, 서울의 상도동에 강제철거가 시행되었다는 티브화면이 나온다. 아나운서와 기자조차 '추워지는 날씨에 어찌 살라고?' 하는 항의성 보도가 나오는데, 당사자들의 울분과 한은 얼마나 크겠는가 !

어찌 빈민 뿐이겠는가? 농민과 노동자들의 가슴이 검게 타들어가는 가을시대이다.

 오늘은 여기까지, 안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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