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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모택동의 대외개방과 대만 관련 메모

 모택동의 이러한 전략적 결정[1971~2년 미국과의 관계개선)의 작용은 세 가지 측면이 있습니다. 첫째, 중국의 대외개방의 신 시대를 열었습니다.[1]그리고 대외개방은 필연적으로 대내적 개혁을 가져옵니다. 이러한 의의에서 중국 개혁개방의 시대는 모택동이 연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는 모택동이 중국의 일반인에게 물려준 중요한 유산이며, 그 이후의 중국에 비교적 넓은 공간을 물려준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날 중국의 발전은 모택동의 최초의 개척에서 크게 득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이 점은 자주 사람들에 의해 무시되지만, 사실 매우 중요합니다. 나는 앞의 강의에서 등소평 및 그 후계자의 시대를'포스트 모택동 시대'라고 불렀습니다. 그 중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모택동의 이러한 결정의 두 번째 작용은 대만의 운명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대만 역사의 새로운 시기를 열었다는 것입니다. 나중에 대만에서 독립 자주가 강조되고, 금지된 당 활동의 공간을 열어, 후에 '대만 독립' 세력이 출현하여, 이른바 '남록(藍綠)대립'[2]의 구도를 형성하였습니다. 이는 모두 중미 국가 관계의 변화와 직접적으로 관련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앞에서 중미 화해가 대만의 청년 세대의 사상에 준 충격과 그 영향이 이후 대만 몇 세대의 사상적 방향을 결정하였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이 점은 여러분이 아마 더욱 두텁게 체험한 것일 것입니다.



[1]1972년이 중국의 경제개방의 첫 해가 된다. 모택동의 검열과 동의를 거쳐서, 국가계획위원회는 플랜트, 화학섬유, 화학비료 및 연속 압연 기술설비를 수입한다. 이는 신 중국 성립 이래 가장 규모가 크고 종류가 많은 국외 선진 기술 설비 도입 프로젝트로서, 장기적으로 폐쇄적이고 기술이 선진국에 크게 뒤진 국면을 타파하기 시작했으며, 중국 국내의 개혁에 대해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轉引自逄先知、金沖及主編:《毛澤東傳》(下),頁1622-1623。

[2][역주] 남색을 상징으로 하는 국민당(國民黨)과 녹색을 상징으로 하는 민진당(民進黨)의 대립 구도를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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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대목은 개혁개방 이전과 이후를 모택동 시기와 등소평(개혁개방) 시기로 나누는 구분이 갖는 허구성을 구체적으로 논증하고 있다.  이는 모택동 이후의 시기가 그 연속성을 강조하는 의미에서 '포스트' 모택동 시기라는 전리군의 기본적 관점의 기초이다. 아울러 이러한 중국의 변화 및 중국과 세계의 관계 변화는 대만에 일정한 조건으로 작용한다. 물론 이러한 관점은 좀 더 역사적으로 구체적이게 논증될 필요가 있다. 그런 측면에서 몇 가지 가설적으로 메모를 해 둔다.

 

1) 중미관계의 개선은 미국이 '대만을 버리고' 중국과 손을 잡았다는 의미에서 대만의 지배세력인 국민당과 자유주의 우익의 통치성의 위기를 불러오지만, 대만의 국민당 우익 정권에 대한 저항의 참조점을 대륙의 공산당으로 삼아 왔던 백색테러 이후 미미하게나마 존재했던 대만의  범 좌익에게도 위기를 불러 온다.

 

2) 국민당은 경제발전과 중화 민족주의 등을 통해서 자구책을 마련하고 실행하기 시작한다. 경제발전 및 민족주의는 일정하게 위기를 관리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3) 그럼에도 대중적 층위에서 국민당을 중심으로 한 우익 지배체제는  일정하게 균열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는 '대만주체성' 등의 담론을 동원하여 국민당이라는 지배체제와 경쟁관계를 형성하지만 이데올로기적으로 개혁적 자유주의의 노선을 보임으로써 기존 국민당과 상당한 공통분모를 가진 이른바 '대만독립세력'의 출현으로 전개된다.

 

4) 이러한 지배체제의 균열을 틈타 또 다른 자유주의 세력이 일정한 개혁성을 기반으로 대중을 동원하여 그 목적을 달성하게 되고, 중국 공산당의 변화로 인해 참조점이 상실된 대만 범 좌파는 이념적 쇄신이나 혁신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오히려 개혁적 자유주의 세력이 설정한 통일/독립이라는 주체성의 담론 구성에 흡수되면서, '통일파'로 전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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