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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정기문(淺井基文) 선생 대만 방문 토론회 단상

2009년 대만 교통대학의 '진영진의 문학과 사상' 토론회가 진행되고, 2010년에 대만사회연구계간에서 특집으로 다룬 바 있는 진영진이 대만 전후의 사상 및 지식 상황을 이해하는 키워드로 주목받고 있다. 올해 안에 2009년 토론회를 정리하여 책으로 출판될 예정이기도 하다. 그는 소설가이자 사상가이며, 또 출판가로서 일정한 역할을 담당하기도 했다. 그러한 가운데, 사상가로서의 진영진의 젊은 시절의 경험을 공유하고 일정한 계기로서의 역할을 한 당시 일본 주 대만 외교관이 오늘 대만에 초청되어 토론회를 가졌다. 천정기문(淺井基文) 선생인데, 그는 동경대학 재학 중인 22살에 대학을 마치지 않고 시험에 합격하여 대만으로 오게 되었다고 한다. 대만에 오면서 모택동 선집, 마르크스레닌주의 관련 서적을 가져왔고, 이는 당시 냉전과 국민당 독재체제 하에서 사상적으로 목말라 있던 진영진의 관심을 끌었고, 독서회를 조직해서 국민당 정권의 감시 하에 천정기문 선생의 집에서 활동이 진행되었다고 한다. 그 수준은 매우 초보적인 것으로 회고된다. 1968년 진영진은 이 독서회 사건으로 구속되어 징역을 살게 된다.

 

그의 회고에 따르면 진영진은 당시 좌파 또는 사회주의자나 공산주의자라기 보다는 민족주의자이자 휴머니스트였다고 한다. 그리고 당시에 이미 아직 표면화되지 않은 대만 독립 담론에 대해 강한 비판을 제기한 바 있다고 한다. 중간에 휴식 시간을 통해 만난 汪 선생은 그가 말하는 독립 담론은 당시에 시명덕施明德, 팽명민彭明敏 등에 의해 이미 암암리에 제기되고 있었다고 한다.

 

토론회 단상을 적어 본다. 이는 박현채 선생으로부터 끌어와 발전시키고자 하는 '민족민중론'과 연관된다. 사실 개인적으로 토론회 중간에 박현채 선생의 민족민중론에 대해 나름 진일보 했다고 생각되는 내용을 정리해 두었는데, 조만간 다시 검토해서 지난 번 글의 후속 글로 개요를 작성해 보고자 한다.

 

대만의 정체성 담론 속에서 독립파는 근대적 민족주의를 표방했지만, 통일파는 반드시 그렇지 않을 수 있었다. 왜냐하면 통일은 이미 '분단'을 극복하는 미래지향성을 담지할 여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중국에의 통일됨은 당시의 인식의 지평에서 중국이라는 이상적 공산주의 세계에 참여함을 의미하는 것이었고, 당시 국제적 조건에 의해 주어진 하나의 현실적 선택 가능성이었다. 물론 현실에서 그렇게 전개되지는 않았다. 통일이 미래지향적이라면 중국 역시 '분단'을 내재화하여 정치성을 전개함을 통해 변혁됨을 전제해야 한다. 그러나 현실에서 중국 대륙은 건국 이후의 갈등이 긍정적 방향으로 해결되기 보다는 오히려 실질적으로 대만이라는 분단의 한 항을 외재화하면서 내적으로 민족국가적 체제를 공고화하는 가운데 모순이 심화되었고, 대만에서도 통일은 이러한 대륙 중국에 대한 인식과 관련된 전략도 부재한 채 관념적으로 제기 되었다. 좌익적 통일담론은 그 후 오히려 대만 독립 담론의 형성에 대항하면서 '과거의 중국'을 지향하는 방식으로 전개되었는데, 이는 현재 대만의 비판사상의 맹목점이 재생산되는 기초를 놓았다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 대만이 '사실상의 민족국가'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중요할 것 같다. 이를 인정하면서 통일을 주장하는 것은 자본주의 질서에 복무하는 민족국가간체계와 갈등적일 수 있고 진보적일 수 있다. 반면 대만 독립은 그 담롬 형성에 참여한 주체나 그들의 동력을 감안할 때 기본적으로 반공주의를 의/무의식적으로 전제한 자유주의를 전제로 설정하 있었다고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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