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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어대 보위 운동(보조운동) 40주년 토론회(2011. 9.17~18) 후기

1971년 조어대 보위 운동(보조운동)을 사상적으로 어떻게 계승하고 전화할 것인가를 주제로 토론회가 이틀 동안 청화대학에서 열렸다. 보조운동은 해외 대만 유학생, 대만 내부의 대학생, 홍콩 및 대륙 등 광범위하게 진행되었고 몇 가지 단계로 구분되기도 한다. 나는 주요하게 대만 유학생 및 대만의 대학생 그리고 학생운동 및 그 후의 당외운동 나아가 좌익운동 등 대만 내부의 사회운동과의 역사적 연관성에 대한 궁금함을 가지고 이 토론회를 방청하였다.

 

조어대 보위운동은 기본적으로 백색테러와 극권 독재체제 하에서 일정하게 망각되었던 '민족적 조건'에 대한 인식의 계기를 제공했던 것 같다. 식민주의와 제국주의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할 수 있는 계기가 된 것이다. 이러한 민족적 조건 또는 민족 모순은 대중적 층위에서 정치를 전개하는 조건이 된다. 이렇게 민족적 조건에 대한 인식이 제기되면서 이 내부에 정치적으로 좌/우의 분열이 나타난다. 다시 말해서 나 개인의 표현으로 말하자면, 조어대 보위 운동은  적어도 대만에서 '민중'(즉, 정치성)의 조건으로서 민족에 대한 인식의 계기를 제공했던 것이다.

 

나는 나의 관심사와 관련해서 정홍생 선생에게 질문을 제기했다. 이 질문은 전리군 선생의 근간에서 인용된 정홍생 선생의 책 '청춘의 노래'에서의 역사 인식을 기본으로 한다. 정홍생 선생은 두 가지 조건의 변화를 지적한다.

 

1) '대륙 중국'의 변화, 즉 사회변혁의 이상적 참조점인 대륙 중국이 미국과 화해함이 대만 좌익에게 주는 의미이다. 나는 이 조건의 변화(이상적 참조점의 동요)가 대만의 좌익에게 새로운 비판사상의 자원을 모색할 계기를 부여했다고 본다. 어떤 시도가 있었는가? 그 시도는 어떻게 평가할 수 있는가?

 

2) '대만 독립 세력'의 형성 및 확대. 나는 이것이 '반국민당'적 개혁이라는 대중적 목소리에 부응함을 통해 일정한 대중적 기초를 가지고 있었고, 그렇기 때문에 좌익적 관점에서 이러한 개혁의 흐름이 전유될 수 있었어야 했다고 생각했다. 물론 현실은 개혁 보다는 '독립'에 주목하면서 본래의 좌익이 '통일파'로 전락하게 된다. 이러한 '통일'을 지향하는 것은 대만이라는 일정한 민족국가 형식과 내용을 갖는 정치체의 변혁에 대해 구체적 분석과 전망을 전혀 내놓지 못하는 것이다. 이러한 귀결은 조건 1)의 변화에 대한 대응의 실패와 관련된다고 보인다. 본래의 좌익들은 대체적으로 대륙 '중국'을 인식할 수 없는 상황에서 오히려 '과거지향적' 민족에 근거해서 점점 더 교조화된 인식을 갖게 된다. 이는 진영진의 삶의 궤적에 고스란히 드러나는 것 같다.

 

이는 나로 하여금 좌익 운동이 1950년대의 백색테러를 경과하면서 거의 궤멸된 상황에서 소수(예를 들어 진영진 등)의 지식인들이 어떤 운동의 전망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묻게 한다. 특히 1970년을 전후한 미국과 중국의 화해무드는 사실상 대만 문제가 본래의 기대나 희망처럼 '중국'이라는 외부에 의해 간단히 해결될 가능성이 희박해졌음을 의미하기도 했다. 그래서 '자기해방'으로서의 대만의 좌익적 변혁을 고민하는 흐름도 나왔던 것 같다. 현재로서는 가설적이지만, '하조' 잡지(1976~1979)는 일정하게 이러한 시도가 담긴 구체적 성과인 것 같다. 여기에는 국민당 독재에 반대하는 진영진 등과 같은 좌익 뿐만 아니라 이후 당외운동 나아가 민진당으로 전개되는 흐름을 대표할 세력도 포함되어 있었다. 당시 이미 통/독이 잠재적 긴장이었지만, 적어도 공통의 적인 국민당에 대한 대항의 성격을 가진 지식인 운동이 존재했었다고 할 수 있다. 문제는 개혁적 흐름이 일정하게 대중적 지지를 얻으면서 정치세력화되었던 반면 좌파는 이에 대해 고집스럽게 과거의 '중국'이라는 이상을 붙잡고 오히려 통일파로 관념적으로 왜소화되는 전락하는 길을 걸었다는 것이다. 대중성의 부재, 또는 대중운동을 위한 정세인식의 부재가 관건이었다고 보인다.

 

대중성의 부재는 일종의 지식인 중심주의와 관련되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흥미로운 것은 조어대 사건이 일어난 1971년 전후에 미국 유학생 중 가장 큰 비율을 차지한 유학생의 국적이 이란과 대만이었다는 사실이다. 대만 인구의 규모로 보았을 때 이러한 유학생 숫자는 매우 비정상적 규모이다. 이는 물론 미국의 전략적 유학생 정책에 기인한 것이지만, 중요한 것은 대만이 일정하게 민족국가의 형태와 내용을 가지게 되면서 이러한 기형적 유학패턴이 대만의 지식사상의 형성과 그 체계에 지대한 왜곡을 낳았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이는 단순히 미국의 학문 체계가 이식되는 차원을 넘어서 비판사상의 전통이 주체적으로 형성될 가능성 자체가 박탈되었음을 의미한다. 문득 이란의 상황은 어떨지가 참 궁금하다. 이러한 학문적 조건은 비판적 지식과 이념이 대중적 사회운동과 더욱 결합하기 어렵게 만들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러한 지식인의 문제는 지금까지도 문화적으로 계승되며 여러가지 병폐를 낳고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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