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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요구

없는 길을 억지로 만드는 것은 주변에 민폐가 되기 쉽고, 만들어지더라도 사적 소유의 논리에 구속되기 쉽다. 그래서 논문을 써 놓고도 나는 길이 막혔음을 인정하고 다른 길(생활인으로서의 길)을 찾고자 했다. 그것이 주어진 정세 속에서 오히려 주체적인 선택이 됨을 그동안의 경험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이를 쌓이는 만큼 내려 놓는 행위라고 생각해 왔다. 사실 지난 10여년 동안 그렇게 내려 놓는 만큼 새로운 길이 열렸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길이 막혔는지의 여부를 확인하는 것이 쉽지는 않다. 게다가 길이 막혔다는 인식은 정세적인 것일 뿐, 고정적인 것은 아니다. 오히려 미래의 길을 열기 위한 우회로로서 다른 길을 찾았던 것이다. 물론 우회로는 머나먼 길이 될 수 있고, 짧은 내 삶에서 우회의 의미가 드러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유치했던 일정 기간을 거치고 나서 나는 이에 대해 아쉬움을 크게 갖지 않아 왔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늘 언제든지 다 내려놓을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하고 있다.

 

다소 추상적 수준에서 또는 원리적 수준에서 막힌 길을 여는 노력을 권역적 국제주의에 근거해서 진행할 수 도 있다는 인식을 가진지는 좀 되었다. 내부의 자발적인 민간 동력이 역사가 중지되기 전까지는 하나의 전제처럼 존재한다는 의미를 관계성의 맥락으로 확장하면 민간 동력의 상호확인 또한 민간간의 권역적 국제주의의 맥락에서 가능해진다는 의미다. 특히 이 맥락에서 지식(인)의 역할이 중요해진다.

 

정세적인 차원이라고 하더라도 이번에 길이 닫혔다고 판단했던 것은 나의 오만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판단할 수 밖에 없는 조건에 처해 있었다. 지금은 다시 길이 열리고 있다. 그동안의 경험과는 다소 상반된다. 늘 닫힌 상황을 인정하면서 목표를 수정하고 사적 소유화의 유혹을 뿌리쳤을 때 얻어졌던 새로운 길의 열림과는 상반되는 경험을 하고 있다. 지금은 오히려 길이 막혔다는 비관적 인식을 수정할 것을 요구 받고, 이에 따라 역으로 자기 소유(사적 소유화의 가능성은 늘 남아 있다)를 가지고 확장하며 나아가 공적 나눔의 성과를 만들어내라는 요구에 직면해 있다.

 

이 상황은 원리적으로 나의 논리과 같은 것이지만, 현실에서 나는 거의 처음으로 수동적이게 되는 느낌을 갖는다. 최근 나의 진로와 관련된 초보적 결정에서 나는 발언권이 없었거나 원리적 차원의 수긍 이상을 표현하지 못했다. 하나의 전환점임이 분명하다. 과거에는 지식 차원의 사적 소유를 거부함을 통해서 처음부터 자신의 책임성을 최대한 제한하는 소극적 실천에 머물렀다면, 이제는 소유의 논리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소유에 참여하며 직접 맞붙어 싸우면서 민족민중적 지식생산에 복무하는 적극적 실천의 요구를 부여 받고 있는 것 같다.

 

암튼 지금 나의 수동성은 문제적이다. 과거의 소극적 실천 방식에 익숙한 내가 필연적으로 경험할 수 밖에 없는 곤혹이다. 이 수동성이 지금 주어진 길 열림의 상황을 계기로 적극성으로 전환될 수 있는가가 관건이다. 이는 다른 의미에서 길 열림을 주체적으로 다시 열어야 한다는 것인데, 그러고 보니 이는 정말 거대한 요구가 아닌가. 이제는 정말 한번도 가보지 않은 길을 가야 하는 것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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