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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론적 보편주의와 실천적 보편주의

유럽중심주의는 다양한 민족들의 역사적 과정을 형성하는 데 독립적인 문화적 불변항을 가정한다는 점에서 문화주의적이다. 그리고 유럽중심주의는 인간 발전의 일반적 법칙을 추구하는 데 관심을 두지 않는다는 점에서 반보편주의적이다. 그러나 모든 민족들에 의한 서구 모델의 모방이 우리 시대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유일한 해결책이라고 주장하기 때문에 자신을 보편주의적인 것처럼 제시한다.

사미르 아민, 《유럽중심주의》 <서문>에서 인용

 

아민의 보편주의는 보편주의적인 것처럼 제시하는 '이론적 보편주의'(문화주의이자 유럽중심주의)에 대항하는 '실천적 보편주의'라고 볼 수 있을 듯 하다. 좀 깊이 파고들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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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와 식민-지리-역사유물론

사실 현대화는 어떤 의미에서 고전의 부재화 또는 소외/대상화의 과정이기도 했다. 특히 '식민적 현대성'에 사로잡혀 여전히 빠져 나오지 못하는 남한의 현실에서 기본적으로 이는 문제화되지 않지만, 종종 중국과의 진지한 대비에서만 자신의 공허함을 징후적으로 발견하게 되는 듯 하다. 마치 꿈과 같이 잔상만 남고 사라지기 쉽지만...

 

시간은 공간을 뚫을 수 있다. 그렇지만 일단 뚫어버리면 만사만물은 생명을 잃게 된다. 그래서 우리가 진리를 인식함에는 끝이 없는 것이다. 

 

조정로 작가가 내놓은 <장자>의 '혼돈칠규混沌七竅'에 대한 나름의 해석이다. 사실 조정로 작가는 아주 오랫동안 9월 31일이라는 생일을 가지고 살아 왔다. 태어난 해는 1949년... 그래서 "신 중국이 반드시 겪어야 하는 곡절과 시련을 거부할 이유가 내게는 없다"고 조정로 선생은 말한다. 그 곡절과 시련은 무엇이었을까? 기본적으로는 역사 속에서 '우파'로 몰렸던 부친, 그러한 배경 속에서 중학시절부터, 심지어 지금까지도 의심과 비판의 눈길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자신의 아픈 경험일 것이다. 그것은 '불확실성'이 낳는 모순이다. 9월 30일이나 10월 1일이 아닌, 9월 31일로 살아온 그의 삶은 바로 이 '불확실성'을 웅변하고 있다. 9월 31일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생명의 근원으로서의 혼돈이 갖는 풍부성을 보존하는 것이다. 그것이 고통스럽더라도... 

 

이를 장자의 말을 대비시켜 의미화하면 다음과 같을 것이다. 생명의 근원으로서의 혼돈은 공간성을 의미하고, 시간에 의해 파편화된 공간은 더이상 생명을 지속시키는 근원으로서의 의미를 갖지 못하게 된다. 다시 말해서 시간적 균질화(탈역사화)는 공간적 균질화(무차별화/탈주체화)를 가져온다는 뜻이다.

 

이와 관련한 신영복 선생님의 해설도 있다. 참고할만 하다.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41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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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남한의 제3세계에서의 개별성

우리의 언어의 문제가 갖는 심각성을 호소하는 것이 다른 제3세계와의 대화 속에서 의미 있으려면 별도의 설명이 필요할 듯 하다. 실제로 민족언어로서의 문자를 가지지 못했거나, 또는 민족화된 구어의 역사도 가지지 못한 제3세계의 경우에 식민-제국주의에 의해 언어 자체가 그대로 이식된 바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언어의 문제는 그와 달리 식민-제국주의의 충격 이전부터 본래의 역사를 갖는 문자와 민족 언어문화가 존재했기 때문에 단순한 이식이 아니라, 철저한 단절과 재창조의 방식으로 식민주의적 언어체계가 형성되었다는데 있다. 다시 말해서 제3세계에서 우리가 가지는 개별성은 역사의 부재라기 보다는 단절과 왜곡이 두드러진다는 점이다. 따라서 일방적이고 강제적인 이식의 문제보다 '능동'적이고 '주체'적인 단절과 왜곡이 더욱 문제화되어야 한다. 이와 관련해서 흥미로운 논문 작업을 접했다.

 

이번 여름호로 나온 《개념과 소통》 15호에 실린 김병문 선생의 글 「들리지 않는 소리, 혹은 발설되지 않는 말과 '국어'의 구상--근대계몽기 국문 담론 분석」이 그것이다.

 

물론 번역의 문제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는 않고, 이른바 가상적 '탈식민' 이후의 전개까지 확장하지는 않고 있지만, 국어학계에서의 진지하고 성실한 고민을 보여주고 있다.

 

이 논문은 흥미롭게도 내가 '시공간의 균질화'로 식민-지리-역사유물론의 문제의식을 원용했던 부분과 유사한 논점을 구사하고 있다. 주체의 문제에 대한 편향적 접근이라는 유혹에 쉽게 빠지면서도, 동시에 그에 대한 가장 진지한 접근이 가능한 것이 국어학계이기도 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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