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박헌영

박현채는 박헌영을 어떻게 보았는가. 박현채 전집 1권에는 맨 앞에 미완으로 남은 육필 회고록이 실렸고, 그에 이어서 박헌영에 대한 박현채의 소개가 수록되어 있다. 마지막 단락이 매우 의미심장하다.

 

박헌영의 재건파노선의 정통성을 인정하는 쪽에서는 그가 나름대로의 악조건 속에서도 끝까지 굴하지 않고 투쟁했다고 평가한다. 해방 후 비록 실패로 끝나기는 했지만 실패의 책임이 박헌영 개인에게 주어지기보다는 그것은 외세의 압도적 규정력에 주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대미인식에서 보이는 초기의 타협적 태도는 근본적 오류이기 보다는 전술적 실수에 불과한 것이며, 후기의 빨치산투쟁은 극좌모험주의가 아닌 정당방위였다고 평가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박헌영의 노선에 비판적인 입장에서는 일제시대 이래 박헌영그룹은 공산주의운동에서 일개파벌에 지나지 않는다고 평가한다. 파벌투쟁으로 점철된 국내 공산주의운동의 종파성을 극복하지 못한 채 해방을 맞이한 박헌영그룹은 이를 청산하지 못하였으며, 자파 중심적이고 비민주적 조직을 건설했다는 것이다. 또한 노선상에서도 전략적 오류가 드러나는데, 초기의 우경기회주의에서 후기의 좌경모험주의로 급전하면서 평형성을 잃고 비일관성을 표출하였으며, 결국 조직을 적에게 노출당하여 단계적으로 투항할 수 밖에 없었다고 평가한다. 그러나 그는 법정에서 역사적으로 자기과오를 시인함으로써 역사적인 비판투쟁을 받아들였으며 볼셰비키적 태도를 견지했다고 평가될 것이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造反有理

조반유리는 '反'의 정치를 넘어설까?

 

오랜만에 <전리군과의 대화>에 수록된 내 글을 다시 뒤적이면서 문득 생각이 명료해졌다. 성찰에 근거한 '사상'적 작업이 갖는 중요성은 '반'에 근거와 기초 그리고 구체성을 부여해주기 때문이다.

 

나는 한국어 번역본 마지막에 이렇게 적었다.

 

"전리군은 20세기 중국에서 역사적으로 두 번의 민간사상촌락이 존재했다고 언급한 바 있다. 바로 5.4 시기와 문혁 후기이다. 이 두 시기는 어떻게 연속되고 어떻게 단절되었는가? 5.4운동은 이후 중국에서 1949년 혁명이라는 상승기로 이어졌지만, 1957년을 전환점으로 역전되었다. 1968년 제한적인 혁명성이 분출되었지만, 1957년 체제 또는 17년 체제의 복수 끝에 결국 하강기로 접어들었다. 그런 후에 다시 찾아온 것이 문혁 후기의 '민간사상촌락'이다. 이로부터 1970년대 후반과 1980년대의 상승기가 다시 도래한다. 물론 이 상승기는 1949년 혁명에 비하면 매우 왜소해진 것이다. 결국 그 상승기는 다시 1989년 6.4를 계기로 봉쇄되어 역전되고, 6.4체제를 형성한다. 그러면 6.4 이후의 역사에서 1957년의 역전 이후 찾아왔던 문혁처럼 또 다른 문혁의 '조반'이 출현할 것인가? 우리는 역사의 반복을 마주하면서 역사로부터 지혜를 구하지 않을 수 없다. '문혁'에 대한 역사적 평가가 중요해지는 것은 이러한 역사적 반복을 일정하게 예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역사는 단순하게 반복되지 않는다. 비관적으로 보면, 이 반복에는 추세가 보이는데, 바로 사상의 소실, 윤리의 붕괴, 극단적 폭력이라는 순환고리의 공고화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역사적 평가는 성찰에 근거한 사상적 작업이 되어야 하고, 그러할 때 또다른 형식과 내용을 갖고 출현할 '조반'은 단순한 '반反'의 (탈)정치에 머무르지 않게 될 것이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4.19와 5.18의 변증법

임동규 선생의 증언에 따르면 박현채 선생이 차명 또는 필명으로 쓴 글만 모아도 책으로 100여권의 분량에 달한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잘 알려진 조용범 선생의 <후진국경제론>이나, 김대중의 석사학위논문인 <대중경제론> 외에도, 박현채 선생이 쓴 글이 여러 곳에 묻혀 있는 셈이다.

 

우연찮게 <상황> 잡지 1973년 봄호(종간호)에서도 조용범 선생의 이름을 차용해서 쓴 <민족경제론 서설>이라는 글이 실려 있음을 발견했다. 사실 이 글에서 일정하게 체계를 갖춘 '민족경제론'의 구상이 드러나고 있다. 이 외에도 박현채 선생이 편집위원으로 참여한 <월간 다리>에도 조용범 선생의 이름으로 실린 글이 있는데 박현채 선생의 차명 집필인지 확인이 필요하다. 그리고 60년대부터 일본에서 발간된 <한양> 잡지에도 박현채 선생이 쓴 것으로 보이는 글이 눈에 띈다. 특히 <한양> 잡지는 지금까지도 필진들의 이력이 확인되지 않고 있는데, 대체적으로 필명을 사용했던 것 같다.

 

국내의 문학비평계에서는 1960년대를 다시 역사화하는 작업을 일정하게 진행한 것 같다. 고명철 선생, 하상일 선생 등이 민족문학론의 기원으로 <창비>가 역사로부터 단절되어 표상되는 문제를 제기하고 있고, 이를 4.19 세대의 상징권력화와 관련지어 문제화하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이들이 대체적으로 이러한 역사화를 진행함을 통해서, <창비>의 자기 성찰과 70년대 유신체제하에서 폐간되거나 단절된 이들 잡지들의 필진이 <창비>와 결합하게 되는 측면을 연결짓고 있는 부분이다. 실제로 임헌영 선생을 비롯한 <상황> 잡지의 필진들은 이후 <창비>에 결합하게 된다.

 

이렇게 해서 1960년대의 정경이 다시 드러나는 측면이 있지만, 아쉽게도 대부분의 연구가 문학비평에 초점이 맞춰진 이유로 해서, '사상'의 전반적 측면은 여전히 파악하기 어려운 상태로 남아 있다.

 

특히, 박현채 선생이 직간접적으로 관여한 것으로 보이는 <한양>, <상황>, <월간 다리>는 박현채 개인을 포함하면서도 그를 넘어서는 그 시대의 정신 상황을 조망하는데 중요한 자원이 될 것 같다. 그리고 그로부터 이어지면서도 단절되는 지점을 파악하는 단서로서 그 이후의 박현채의 작업들과 수용, 오해 및 배제의 상황을 연구과제로 채택하여 80년대를 재역사화할 수 있을 듯 싶다. 물론 거기에는 5.18이 핵심적인 계기가 된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