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근황 20140929

밀린 번역을 하느라, 업무 외에는 아무 것도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업무 시간 외에는 라디오 들으며 번역하고, 배고프면 밥 해먹고, 그러다 심심하면 청소하고 빨래하고... 그래도 진도는 늘 생각 만큼 못 나간다. 읽을 때는 몰랐는데, 문학 중에서도 난이도가 좀 높은 작품을 고르게 된듯 싶다.

 

나름 보람된 이런 저런 일을 하고 있지만, 읽고 싶은 책을 읽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 좀 안타깝긴 하다. 아울러 박사논문을 위한 나머지 절반의 준비 작업도 미뤄지고 있다. 그런데 번역은 또 어찌보면 책을 잘 읽기 위한 훈련과정이기도 하다. 아직은 본격적인 자기 학문을 하기 위한 학문적 기본 체력과 근력으로서의 언어 능력이 여전히 많이 부족한 듯 싶다.

 

그래도 경험상 시간이 지나면 번역은 마무리될터이고, 부족한 대로 세상에 내놓일 것이다. <민주수업>의 운명은 어떨까...? 늦어도 10월 말에는 초고가 나올터이니...

 

7년의 유학생활을 잠정적으로 정리하고 돌아와서 첫 번째 학회 발표 기회가 주어졌다. 국내에서의 발표는 공식적으로는 처음인데, 좋은 경험이 되리라 본다. <진영진 문학의 탈식민 실천>이라는 제목으로 하게 되었는데, 2차 자격고사 때 정했던 제목 그대로이다. 그때 답안에 썼던 내용을 정리해서 발표할 예정이다. 진영진 문학을 통해서 대만-남한의 상호참조를 위한 잠정적 테제 세 가지가 제기될 것이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세월호와 국민성 비판

온갖 폭력이 난무한다. 뉴스를 보고 있을 수가 없다. 정권도 언론도 인간을 존중하는 방법을 모른다. 나도 잘 모르겠다. 가르쳐주질 않았다. 아무도... 수많은 죽음 앞에서 그저 권력의 안위의 논리에 갇혀 있다. 그러나 직시하자. 그들이 그럴 수 있음은 또한 그 수많은 희생자들의 부모와 가족들의 지지 덕분이 아니었던가. 그리고 지금도 그렇지 않은가. 우리 어른들도 그들의 자기정당화를 위한 시간끌기에 동참하고 있지 않은가. 이후에 또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 

 

이 광경이 얼마나 익숙한가. 20세기 내내 반복되어 왔던 우리의 역사가 아닌가. 그 역사를 한번도 제대로 반성하지 못하고, 그것을 반성할 지식과 문화를 가지지 못했고, 그 방법을 알지 못했던 무지한 민족의 업보라 할 수 밖에... 지식이 그에 값하려면 지금이라도 같이 살아가는 방법을 고민해야겠다. 

 

4.19... '역사를 감당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곰곰히 다시 생각하게 된다. 지식인들의 위선, 망상, 가식은 이미 충분했다. 이제 진정 자신의 삶을 걸어야 한다. 윤리적 삶에 값하는 지식 작업을 해내야 한다.

 

 

지난 4월 19일에 남긴 노트의 일부이다. 지금 보니 결국 역사는 무정하게 관철된다. 비극은 비극대로 다시 하나의 역사적 완성을 이루고 있다.

 

생산에 참여하지 않고도 먹고 살 수 있다는 것은 특권인가? 그렇다. 그것은 특별하고 또 특수한 권리이다. 물론 그 권리에는 엄청난 책무가 따른다. 그것은 자신의 양심에 대해 또 대중과의 관계에서 윤리성을 확보해야 한다는 측면에서 그렇다. 지식의 차이가 불평등을 낳지 않는 윤리성...

 

이 책무는 역사로부터 주어진다. 역사와 현실 사이의 간극은 이와 같은 '영매'적 존재에 의해 화해가 이루어질 수 있다. 그렇다, 지식과 예술은 결국 '영매'적인 활동이다. 이름 없이 죽어간 자들... 억울하게 죽어간 자들... 기록되었으나 망각된 자들, 또는 아예 기록되지 않은 자들. 그들의 피는 바로 지금 현실의 역사적 조건이다. 

 

역사 안에 윤리적으로 서면서도, 현실에서 보상받기를 바라지 않음은 이러한 책무성을 진지하게 수행하는 자태이다. 박현채 선생처럼 말이다...이와 같은 영매는 역사를 대중에게 넘겨줌을 통해 사라진다. 그리고 역사의 진전은 지속적으로 새로운 영매를 요청한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그러한 영매가 없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鲁迅이 없다. 그래서 원혼들의 저주 속에서 비극을 마주하고 있다. 폭력은 궁극적으로 대중 내부의 상호 폭력이다. 국가의 폭력은 그것의 궁극적 표현이다.

 

지금도 얼마나 많은 이들이 고독하게 억울하게 죽어가고 있는가. 우리의 현실의 역사적 조건인 저 원혼들의 피를 닦아주지 못하는 이 비윤리적 주체들이 어떻게 지금 우리 옆의 수많은 죽어가는 자들을 돌볼 수 있겠는가? 식민을 주체적으로 脫하지 못하고, 냉전을 주체적으로 脫하지 못한 민족의 비극이다.

 

그래서 인격화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대중의 조건을 비판적으로 해명해야 한다. 노신의 국민성 비판처럼... 물론 그 전제로서 먼저 원혼을 달래는 푸닥거리가 필요하다. 역사로부터 버려진 대중들이 역사를 되찾는 과정에서 눈물바다를 이룰만한 의식이 필요하지 않겠는가. 그렇게 해서 철저한 각성이 필요하지 않겠는가.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국가의 이데올로기적 기구?

 『탈정치시대의 정치』(汪暉 지음, 성근제. 김진공. 이현정 옮김, 돌베개)는 기본적으로 충실한 번역이라는 전제 하에서 약간의 사족을 붙인다.

 

134쪽 각주를 보면 옮긴이는 기존에 중국어에서 "意識形態國家機器"로 옮기던 Appareil idéologique d'État 또는 Ideological state apparatuses를 于治中 선생의 의견에 따라 "國家的意識形態機器"로 옮긴 왕휘 선생의 방식을 따라서 우리말의 번역어도 '국가의 이데올로기적 기구'로 바꾸었다.

 

대단한 이론적 문제제기를 하려는 것은 아니고, 번역에 있어서 주의할 지점을 하나 지적하고자 한다.

 

우선 于 선생의 지적은 옳고, 왕휘 선생이 이를 수용한 것도 옳은데, 옮긴이는 그 이유를 설명하지 않고 있다는 문제가 한 가지 지적될 수 있겠다. 이는 영어의 어법과 중국어의 어법의 차이에 따라서 수정된 번역어가 제시된 것인데, 그 이유인 즉, 중국어에서는 소유 주체가 소유 대상에 대한 수식어 보다 앞에 오는 것이 일반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구'의 소유 주체는 '국가'이고, '이데올로기'는 수식어인데, 이런 경우 중국어에서는 '국가'의 '이데올로기'적 '기구'라는 식으로 번역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과거에 번역된 '이데올로기-국가-기구'라는 방식은 중국어 어법에 맞지 않고, 오해를 불러올 소지가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적어도 현실의 한국어 어법은 적어도 이 문제와 관련해서 영어식 어법과 유사하다. 사실 큰 차이는 아닌데, 이데올로기적 국가기구라고 하든, 아니면 국가의 이데올로기적 기구라고 하든, 우리말에서는 '국가'가 소유주체라는 부분은 변화가 없고, 다소 뉘앙스에서 강조점의 차이를 줄뿐이다. 그렇지만 기본적으로 우리는 '이데올로기적 국가기구'가 더욱 자연스럽다.

 

예를 들면, '아름다운 나의 조국'이라는 표현과 '나의 아름다운 조국'이라는 표현은 의미 상 차이가 없고 일반적으로 가능한 표현이지만, 우리에게는 기본적으로 전자가 익숙하고 자연스럽다. 사실 이 지점은 나 또한 중국어 문헌을 한국어로 번역하면서 종종 실수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그래서 내 의견으로는 중국어에서 중국어 어법에 맞게 번역어를 고친 사정을 충분히 이해하고 공감하더라도, 그것이 우리말의 번역어를 수정할 만한 사유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히려 내가 생각할 때 문제적인 것은 '기구'라는 번역어인데, 이에 대해서 나는 이미 '장치'로 일정한 합의가 있는 줄 알고 있었던 상황에서 다소 의아했다. 게다가 중국어에서도 장치와 가까운 의미인 "機器"로 번역하고 있다. 기존의 알튀세르의 수용의 맥락에서는 쟁점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