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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와 국민성 비판

온갖 폭력이 난무한다. 뉴스를 보고 있을 수가 없다. 정권도 언론도 인간을 존중하는 방법을 모른다. 나도 잘 모르겠다. 가르쳐주질 않았다. 아무도... 수많은 죽음 앞에서 그저 권력의 안위의 논리에 갇혀 있다. 그러나 직시하자. 그들이 그럴 수 있음은 또한 그 수많은 희생자들의 부모와 가족들의 지지 덕분이 아니었던가. 그리고 지금도 그렇지 않은가. 우리 어른들도 그들의 자기정당화를 위한 시간끌기에 동참하고 있지 않은가. 이후에 또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 

 

이 광경이 얼마나 익숙한가. 20세기 내내 반복되어 왔던 우리의 역사가 아닌가. 그 역사를 한번도 제대로 반성하지 못하고, 그것을 반성할 지식과 문화를 가지지 못했고, 그 방법을 알지 못했던 무지한 민족의 업보라 할 수 밖에... 지식이 그에 값하려면 지금이라도 같이 살아가는 방법을 고민해야겠다. 

 

4.19... '역사를 감당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곰곰히 다시 생각하게 된다. 지식인들의 위선, 망상, 가식은 이미 충분했다. 이제 진정 자신의 삶을 걸어야 한다. 윤리적 삶에 값하는 지식 작업을 해내야 한다.

 

 

지난 4월 19일에 남긴 노트의 일부이다. 지금 보니 결국 역사는 무정하게 관철된다. 비극은 비극대로 다시 하나의 역사적 완성을 이루고 있다.

 

생산에 참여하지 않고도 먹고 살 수 있다는 것은 특권인가? 그렇다. 그것은 특별하고 또 특수한 권리이다. 물론 그 권리에는 엄청난 책무가 따른다. 그것은 자신의 양심에 대해 또 대중과의 관계에서 윤리성을 확보해야 한다는 측면에서 그렇다. 지식의 차이가 불평등을 낳지 않는 윤리성...

 

이 책무는 역사로부터 주어진다. 역사와 현실 사이의 간극은 이와 같은 '영매'적 존재에 의해 화해가 이루어질 수 있다. 그렇다, 지식과 예술은 결국 '영매'적인 활동이다. 이름 없이 죽어간 자들... 억울하게 죽어간 자들... 기록되었으나 망각된 자들, 또는 아예 기록되지 않은 자들. 그들의 피는 바로 지금 현실의 역사적 조건이다. 

 

역사 안에 윤리적으로 서면서도, 현실에서 보상받기를 바라지 않음은 이러한 책무성을 진지하게 수행하는 자태이다. 박현채 선생처럼 말이다...이와 같은 영매는 역사를 대중에게 넘겨줌을 통해 사라진다. 그리고 역사의 진전은 지속적으로 새로운 영매를 요청한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그러한 영매가 없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鲁迅이 없다. 그래서 원혼들의 저주 속에서 비극을 마주하고 있다. 폭력은 궁극적으로 대중 내부의 상호 폭력이다. 국가의 폭력은 그것의 궁극적 표현이다.

 

지금도 얼마나 많은 이들이 고독하게 억울하게 죽어가고 있는가. 우리의 현실의 역사적 조건인 저 원혼들의 피를 닦아주지 못하는 이 비윤리적 주체들이 어떻게 지금 우리 옆의 수많은 죽어가는 자들을 돌볼 수 있겠는가? 식민을 주체적으로 脫하지 못하고, 냉전을 주체적으로 脫하지 못한 민족의 비극이다.

 

그래서 인격화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대중의 조건을 비판적으로 해명해야 한다. 노신의 국민성 비판처럼... 물론 그 전제로서 먼저 원혼을 달래는 푸닥거리가 필요하다. 역사로부터 버려진 대중들이 역사를 되찾는 과정에서 눈물바다를 이룰만한 의식이 필요하지 않겠는가. 그렇게 해서 철저한 각성이 필요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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