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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延光錫(2013),〈二二八、五一八與六四:冷戰與失語〉,《人間思想》第五期,頁224-231의 한국어 판본이다.
2.28, 5.18, 그리고 6.4: 冷戰과 失語
“이와 같은 하늘, 이와 같은 구름, 그리고 이와 같은 마음, 어떻게 쓸까?”
陳映真의 「雲」에서
延光錫*
1. ‘光州에서 解放으로, 민중진군xx년’
1997년 3월 대학에 입학해서 접했던 학생운동권의 언어와 문화는 내게 매우 신선한 것이었고, 매우 매력적이었던 것이기도 했다. 당시 나의 모교에서는 1980년대 대중적 학생운동이 복원된 이후, 학교 역사상 처음으로 ‘민중민주파[1]’가 1996년 말 총학생회 선거에서 당선되어 1997년 1년의 운영을 맡게 된 상황이었고, 나의 고향 농촌 사회와 문화의 붕괴 속에서 ‘계급’적 문제에 관심이 많았던 나는 자연스럽게 총학생회 활동에 참여하였고, 또한 민중민주파와 관련한 서클에도 참여하게 되었다. 그 가운데 각종 토론회의 문건에서 볼 수 있었던 ‘광주에서 해방으로, 민중진군 xx년’라는 연호와 구호는 매우 인상 깊었다. 그것은 1980년 광주민중항쟁을 원년으로 삼는 학생운동 나름의 연호였다.
실제로 1980년의 광주항쟁은 ‘朝鮮戰爭’을 거쳐 분단 속에서 ‘좌익’이 궤멸된 남한의 학생운동 뿐만 아니라 사상운동 및 민중운동에서 관건적인 전환을 촉발시켰던 계기였다. 그 가운데 가장 중요했던 것은 대중들의 의식 속에 ‘민주’와 ‘자유’로 인식되었던 ‘미국’이 군사쿠데타 정권의 폭압의 배후로서 ‘미 제국주의’로 재인식되었던 측면이다. 그로부터 남한 사회에 대한 사상적/이론적 인식의 시도와 관련한 논쟁도 촉발되었다. 사실상 1980년대 중후반에 전개된 사회성격논쟁/사회구성체논쟁 또한 이러한 ‘광주’라는 계기를 통해 사상/이론 운동이 고조되는 과정 속에서 출현한 것이었다.
광주민중항쟁이 발발한지 이미 33년이 되었다. 1980년대와 1990년대, 심지어는 2000년대까지도, ‘光州’를 ‘元年’으로 삼고, ‘광주’로부터 ‘새로운 삶’을 찾고자 했던 적지 않은 사람들이 있었다. 물론 1990년대의 사상적 ‘해체’와 ‘전향’을 거쳐 그러한 연호와 구호를 점차 사용하지 않게 되었지만, 어쩌면 그것은 사실상 다른 방식으로 전환되었을 뿐, 그 ‘새로운 삶’이 전제했던 모종의 단절은 회복되지 않은 채 계속되고, 그 후과는 더욱 심화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동시에 90년대의 전환 속에서 광주는 ‘민주화’ 운동으로 ‘폄훼’되었다. 그리하여 ‘국가’는 본질적으로 그대로인 채, ‘광주 5.18’은 ‘국가기념일’이 되었고, ‘인권’과 ‘민주’의 상징이 되어, 지금 광주는 ‘인권도시’로 세계에 알려지고 있다. 1997년말 집권에 성공한 김대중 정부는 ‘광주’와 ‘민주화’의 상징적 인물로 부각되었지만, 광주민중항쟁의 근원적 배경 가운데 하나가 1970년대 세계경제의 위기로서의 미국을 비롯한 중심부의 신자유주의적 전환의 남한 경제에의 파급효과였던 점에 비추어 볼 때,[2] 김대중 정부의 ‘IMF의 요구를 초과 수용한 신자유주의적 전환’은 매우 역설적인 것이 아닐 수 없다.
지금도 매년 5월이면 광주에서는 의례적으로 서로 다른 ‘기념’ 행사가 열린다. 하나는 위로부터 계승하는 ‘민주화’ 운동으로서의 광주이고, 다른 하나는 ‘민중’ 항쟁으로서의 광주이다. 그러나 후자의 무기력을 더이상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현실이기도 하다. 마치 ‘광주’는 ‘관념’ 속에 갇힌 채, 이미 그 의미를 다한 것처럼 느껴진다. 그것은 적어도 내게는 우리가 ‘광주’로부터 찾고자 했던 ‘새로움’의 시효만료인 것 같다. ‘광주’를 이야기할 언어는 사라진 것 같다.
2. 홍성담 『5월 판화전』과 王墨林의 『안티고네』
2013년 9월 대만 台北에서는 5.18과 관련된 중요한 문화예술 행사가 열렸다. 하나는 대만의 판화가 黃榮燦을 기념하는 홍성담 5월 판화전이고, 다른 하나는 동아시아 계엄의 역사를 재구성한 왕묵림의 <안티고네>라는 연극이다. 두 행사 모두 고령가(牯嶺街) 아방가르드 소극장에서 연대활동으로 진행되었다. 나는 지난 3월 서승 선생에게 왕묵림 선생의 <안티고네> 작품의 구상을 소개하면서, 둘 사이에 홍성담 판화전의 기획 논의가 시작되는 물꼬를 텄던 역할을 한 바 있고, 9월과 10월 대북과 부산에서 공연된 <안티고네> 극본의 번역을 맡으면서 이 연극에도 일정하게 관여한 바 있다. 그 과정에서 나는 ‘광주’에 대해, 그리고 그 역사적 맥락에 대해 고민할 기회를 갖게 되었다.
어찌보면 ‘광주’를 이야기할 언어를 잃어버린, 따라서 ‘원점’을 잃어버린 나에게 ‘광주’는 홍성담의 판화전과 왕묵림의 <안티고네>와의 만남을 통해 되돌아온 셈이었다. ‘새롭게’ 되돌아온 ‘광주’는 이제 나에게 더이상 과거의 ‘광주’가 아니었다. 그것은 ‘판화’를 통해서 다시 모습을 드러낸 ‘민중’의 ‘광주’임과 동시에, ‘2.28’과 ‘6.4’ 사이에 놓여진 ‘동아시아’의 역사적 사건으로서의 ‘광주’였다. 홍성담의 판화에 곁들여진 시 <大同世界 2>는 ‘민중’의 본연적 ‘사랑’의 힘을 말하고 있다.
大同世界二[대동세계 2]
相愛的話
首先想到的是離別
每一條胡同口裡聚滿了人群
聚在一起心裡想的卻是離別
所以把自己擁有的一切與人分享
有時候離別會更神聖和偉大
為了今後你我天各一方而孤獨的日子
我們無私地分享了自己擁有的一切
離別是為了自己深愛的人
把自己的一切都獻出來的一種儀式。[3]
우리는 광주를 ‘항쟁’으로 이해해 왔지만, 그에 앞서 그것은 ‘민중’의 ‘나날’이 가진 역사적 생명력의 표현이었다. 만남과 이별, 삶과 죽음 사이에서, 어떤 ‘숭고’한 이념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날’을 살아가기 위한 원리로서 광주의 ‘민중’은 ‘사랑’과 ‘나눔’을 체현해 내었다. 나는 이 판화전에서 ‘광주’를 다시 역사화하기 위한 출발점으로서 ‘민중성’과 ‘민족성’을 본다.
한편, 왕묵림은 이 판화전의 의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발언한 바 있다.
이 활동은 신 대만인에게 반드시 보충되어야 하는 중요한 수업이다. 신 대만인은 1987년 계엄 해제 이후의 대만인의 의식을 말하는 것으로, 이는 계엄 이전에 본적으로 대만인과 외성인을 나누었던 것과 다른 것이다.
신 대만인이라는 말의 배후에는 대만인이 계엄으로 빠져나온 존재성에 대한 설명이 있다. 39년 동안 대만의 계엄 역사는 간단히 말해서 국가가 무기를 든 군대를 이용해서 그들에게 합법적으로 사람을 잡아들이고 죽이는 권력을 부여한 것이었다. 계엄이 해제된 이후 내가 더욱 관심을 갖는 것은 39년의 계엄 역사가 지금 여전히 존재하는가, 만약 존재한다면 어떤 방식으로 존재하는가에 대한 것이다.
나는 계엄 해제 이후의 신 세대 대만인의 몸에서 그들이 계엄의 경험을 반드시 가지고 있지 않았음에도 계엄의식을 가질 수 있는 존재임을 본다. 대만의 계엄 역사는 이미 대만 현대문화의 일부분이 되었다. 대만의 계엄 역사 또한 대만 현대성의 일부분이 되었다고도 할 수 있다. 대만인의 신체 감각 활동에서 그것이 생활이든, 문화생산이든, 계엄의식을 가진 존재를 볼 수있다. 특히, 대만인의 도덕 의식에는 매우 강렬한 계엄의식이 내재해 있다. 이는 역사가 반드시 경험을 통하지 않고서도 문화의 일부분이 될 수 있고, 개인의 존재가 계엄을 반영할 수 있음을 증명한다. 이는 내가 1987년 계엄해제 이후 지금까지 계엄문화를 중심으로 나 자신의 문화 생산을 발전시켜온 배경이다. 마지막으로 한 마디 하자면, 계엄은 대만을 떠난 적이 없다.[4]
냉전과 계엄의 역사를 극복하는 방식은 단순히 ‘계엄’에 대한 반대로서의 ‘계엄해제’일 수 없으며, 그 ‘역사’가 형성한 ‘문화’와 ‘의식’의 극복하여 자신의 존재감의 획득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그런 맥락에서 왕묵림이 마주한 ‘신 대만인’의 문화와 의식의 문제 또한 그 ‘새로움’의 배후에 있는 ‘역사적 단절’을 주목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단절을 문제화하기 위해서는, 그 단절로 공고화된 ‘탈역사화’된, 즉 ‘새롭게’ 형성된 현대적인 ‘국가/국민’ 내부의 담론의 틀을 넘어서는 하나의 장치로서 역사적 ‘동아시아’가 제시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5.17에 선포된 계엄령 전국 확대 조치의 구실이였던 ‘북조선의 남침설’ 조작에서 볼 수 있듯이, 민중적 차원에서 광주 ‘5.18’은 바로 냉전적 반공주의 논리를 중요한 배경으로 하고 있다. 5.18은 삶을 지키기 위한 민중의 저항이었지만, 식민과 분단이 낳은 역사적 모순은 냉전적 이데올로기와 결합되어 ‘5.18’의 가능성을 제한하고 있었다. <안티고네>에서 다루는 것처럼, 2.28을 판화로 표현한 황영찬의 처형 역시 반공주의의 폭력이다. 이와 같은 ‘반공주의’는 사실상 본래 우리의 역사 속에 내재적이었던 ‘역사적 공산주의’를 제거하는 구체적 실천이었다. 이러한 냉전의 역사과정 속에서 우리는 역사로부터 단절된 ‘표류하는’ 주체가 되었고, 이러한 주체는 역사 속의 자신을 해석할 수 있는 언어를 자신 안에 갖지 못하고, 계엄이 해제되고 이른바 ‘後-冷戰’으로 진입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민주화’를 댓가로 ‘계엄’과 ‘냉전’의 본질로서의 ‘폭력’을 내재화한 ‘비윤리’적 주체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 ‘비윤리적 주체’는 망각된 역사의 귀환을 억압함을 통해, 민중의 일상적 삶의 요구로부터 주어지는 주체성의 가능성을 내부에서 제약하는 모순적 상황이다.
<안티고네>는 그래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될 수 있다.
이는 현실의 모순에 대항하는 이와 같은 시도들이 아주 쉽게 기존의 언어의 틀에 갇힐 수 있고, 그래서 역사에 의해 지탱되어야 비로소 진정으로 기층과 민간의 언어로 전환될 수 있음을 상기시켜 주는 것이다. 좀 더 나아가 보면, ‘저항’ 자체는 ‘일상’과 융합되었을 때, 비로소 인민의 ‘민주’적이고 ‘윤리’적인 생활방식의 창조를 담보할 수 있게 된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문학적 텍스트로 제시된 대만의 백색테러, 남한의 광주민중항쟁, 그리고 북경의 6.4 천안문 사건은 비록 역사 내부의 민중의 공동 저항 경험으로 그려지지만, 그러한 역사적 저항의 경험은 일상 속의 기층 인민의 요구를 반영하고, 종국에는 일상으로 돌아가야 하는 저항으로 해석된다.[5]
‘5.18’과 ‘2.28’은 모두 민족적 생활양식을 지켜가고자 했던 민중의 삶의 요구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그것은 식민-제국주의의 ‘현대성’의 폭력적 관철에 대한 저항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이 우선적으로 무수한 희생으로 마감된 실패한 저항이었다는 사실과, 다른 한편 ‘민주화’의 상징으로, 즉 다시 ‘현대성’으로 포장되었다는 이중적 ‘비극’을 마주하지 않을 수 없다. ‘광주’, 나아가 ‘2.28’은 어떻게 다시 우리의 역사와 현실 안에 자리잡을 수 있을까?
그것은 우선적으로 나에게 사상적 과제로 제시된다. 이는 역사에 기반하여, 미래를 이야기할 수 있는 새로운 실천을 지시한다. 이는 우리가 이들 역사에 강요했던 ‘새로움’, 즉 냉전의 과정 속에서 진행된 인식론적 탈역사화를 반성하고, 이를 재역사화하는 계기를 우리 역사 안에서 찾아내야 함을 의미한다.
3. 朴玄埰의 고독과 광주의 ‘역사화’
남한의 사상가 박현채(1934-1995)는 1990년 <광주 5월민중항쟁 10주년기념 전국학술대회>에서다음과 같이 ‘광주’에 대해서 논술한 바 있다.
그러나 해방 후 역사에서 5.18의 1980년은 어느 점에 해당할까요. 역사는 진보의 길만을 열어 온 것이 아닙니다. 시행착오를 되풀이해 왔습니다. 1980년이 1950년보다 앞선다고 누가 이야기합니까? 그러나 여기 있는 사람들은 모두가 1980년이 1950년, 1940년보다 앞선다고 이야기합니다.[6]
나는 박현채의 이 말에서 역사를 살아오며 현실 안에서 발언하고자 했던 老 사상가의 고독을 읽게 된다. 이미 1980년대 중후반의 전환을 겪고 나서 ‘광주’가 ‘새로움’의 기원으로 탈역사화된 상황에 대해 박현채는 매우 불편했을 것이다. 그 자신이 ‘역사적 공산주의자’로서 참여했던 조선전쟁 중의 빨치산 경험과 그 이후의 6-70년대에 겪었던 투옥은 그가 남한의 현실을 식민, 분단, 내전, 냉전의 연속 속에서 역사적으로 파악할 수 있었던 바탕이었다. 그는 이어서 이렇게 말한다.
1945년, 1950년을 생각해 보십시오. 1980년의 광주에 뒤지지 않습니다. 왜 우리가 사는 역사에서 그걸 빼버리고 1980년을 강조합니까? 이것 또한 잘못입니다. 그리고 역사에서 잠재력을 이야기하고 높이 평가합니다. 그러나 잠재력 없는 역사가 어디 있습니까. 잠재력이 현실적 가능성으로 전환될 때 그 때 비로소 가능성으로서 이야기되는 것입니다. 그럴진대 이름 그대로 잠재력으로 이야기되는 걸 가지고 오늘 현실적인 평가를 그릇되게 하는 것은 올바르지 않다는 것입니.[7]
이러한 평가는 1990년의 남한에서 이미 매우 ‘낯선’ 것이었다. 그러했기 때문에, 박현채의 고독은 더욱 심화되었고, ‘낯선’ 것은 묻히게 되었으며, 일정한 경향성을 갖는 이러한 역사적 ‘청산’은 정치의 영역 뿐만 아니라 학술과 사상의 영역에서도 지속적으로 심화되었다. 결국에는 이러한 ‘단절’에 근거한 새로운 역사관이 출현하였고, ‘이행기 정의’라는 이름으로 역사는 목적론적으로 ‘청산’되어 ‘민주화’에 갇히게 되었다. 박현채의 고독은 단지 남한의 5.18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결국 이러한 ‘현대화’된 역사관은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 1948년 제주도 4.3사건에도, 국가를 초월하여 다시 대만의 2.28에도 적용된 바 있다.
박현채는 역사 안에서 현실을 이야기하고 있었지만, 그의 말은 전달되지 않았다. 나는 어떻게 박현채를 이야기할 수 있을까? 박현채에 대한 나의 말은 전달될 수 있을까?
4. 2.28과 5.18, 그리고 6.4
다시 <안티고네>로 돌아가보자. 이 작품에서 다루는 계엄은 2.28과 5.18에서 멈추지 않고, 6.4까지 질주한다. 얼핏 보기에 이러한 구도는 마치 동아시아의 분단과 냉전의 역사를 소거한 채 단순한 ‘국가폭력’ 비판으로 전락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세 역사적 사건은 이데올로기적인 전제를 설정하기 이전에 기본적으로 ‘민중의 삶의 요구’의 표현으로 간주된다. 따라서 그것은 일정하게 민중적 주체성의 가능성을 갖고 있다. 그러한 전제 하에서 우리는 이 작품에서 2.28과 5.18이 ‘역사’를 통해 탈역사화된 ‘민주화’의 틀에 갇히지 않는 맥락을 주목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6.4의 ‘계엄과 국가폭력’에 대한 비판은 6.4 또한 탈역사화된 ‘민주화’ 또는 ‘좌익 보편주의’의 맥락에 놓지 않음을 전제한다. 어떤 의미에서 6.4 비판은 대만의 인민들(나아가 남한의 인민들)이 가고자 했지만 가지 못했던 길을 더 잘 가고자 하는 ‘유토피아’의 구성의 계기로서 제시되는 것이다. 즉, 이는 역사에 내재한 내부적 비판으로서의 ‘6.4’ 비판을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기존 담론의 규칙를 따르는 순간 이는 이분법적으로 ‘규정’되고, 이는 사실상 ‘역사성의 귀환’에 대한 폭력적 억압이 된다.
먼저 솔직하게 인정해야 할 것 같다. 나는 이 ‘역사’를 토론할 ‘언어’를 갖고 있지 않다. 왕묵림이 갖는 ‘실어’적 상황의 문제의식이 ‘연극’으로 표현된 것도 같은 맥락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지만 ‘언어’를 버리고 이야기를 할 수는 없다. 우리가 ‘언어’를 잃어버린 긴 역사만큼이나 ‘언어’를 찾는 머나먼 길을 떠나야 할 것이다. 물론 우리가 찾고자 하는 그 ‘언어’는 지금 우리의 이 ‘언어’가 아닐 것이다. 내가 보기에 그 과정에서 우리에게 징검다리가 되어줄 스승들이 있다. 바로 박현채, 陳映真 등과 같은 식민, 분단, 냉전, 후냉전을 살아온 당대 속의 ‘역사적 중간물’이다. 그들의 ‘역사적 고독’은 무엇이었던가?
2013년 10월 11일
花園新城에서
[1] ‘민중민주파(People’s Democracy, 약칭 PD)’는 80년대 후반 남한의 사회성격논쟁 중에 출현한 양대 변혁노선 가운데 하나로 ‘계급’ 모순을 중심으로 남한사회의 구조변혁과 주체를 설정했던 그룹을 말한다.
[2] 1979년 박정희의 암살은 표면적으로 권력층 내부의 다툼이었지만, 사실상 그 다툼의 본질에는 당시 1970년대 말 외채위기로 인한 구조조정이 초래한 지역 경제의 파탄을 배경으로 한 대중적 시위에 대한 대응방식을 둘러싼 이견이 있었다.
[3] 徐勝主編,嚴貴德譯,〈大同世界二〉,《洪成潭版畫展》,台北:身體氣象館,2013,頁30。
[4] ‘洪成潭版畫展:光州五月民眾抗爭暨記念台灣黃榮燦座談會’(2013. 9. 13. 二二八國家記念館展演廳)에서 왕묵림의 발언.
[6] 「광주 5월민중항쟁의 학술적 재조명—광주 5월민중항쟁 10주년기념 전국학술대회」,『박현채 전집 1권』, 서울: 해밀, 304쪽. 이는 1990년 5월 30-31일에 열린 ‘광주5월민중항쟁 10주년 기념 전국학술대회’의 종합토론에서 박현채의 발언이다. 당시 남한의 진보적 학자들이 주축이 된 이 토론에서 박현채는 체계적으로 배제되고 무시되며, 심지어는 조롱의 대상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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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u_top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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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의 모습이 선명해지네요. 주옥같은 글 감사합니다.藝術人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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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편 없는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저 자신에 대한 하나의 작은 선언으로서의 의미를 갖는 글이었습니다.이 글에서 인용된 바 있는 연극 <안티고네>에 대한 평론은 일전에 블로그에 올려 놓은 바 있습니다.
http://blog.jinbo.net/alternativeasia/250
NeoPoo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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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한 글 매우 잘 읽고 갑니다. IMF 이후 신자유주의적 전환이 급속하게 이루어진 이후 대학에 입학하여 광주를 원년으로 하는 학생운동과 관련해서는 잔상을 구경(또는 상상)만 할 수 있었던 세대의 일원인 저로서는 예술인생님의 문제의식이 가장 긍정적인 의미에서 '오래된 새로움'으로 다가오네요. 아무쪼록 건필하시기 바랍니다 :)藝術人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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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려해주서 고맙습니다. 그런데 갈 길이 머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