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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묵림王墨林 안티고네 연극평

 

* 중국어판이 먼저 작성되었고, 조만간 매체나 저널에 실릴 것 같다. 한국어판은 오늘 번역하였는데, 우선 이 곳에 저장해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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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티고네》(왕묵림王墨林 극본/연출)

연광석(延光錫, 대만 국립교통대학 박사과정)

 

 

1. “《안티고네》가 아니다”

왕묵림의 《안티고네》는 소포클레스의 원작을 저본으로 하였지만, 이를 ‘역사’, ‘현실’, 그리고 ‘유토피아’의 유기적 결합으로 번안하면서, 일정하게 《안티고네》를 넘어서는 새로운 판본을 창작해냈다고 할 수 있다.

 

나는 이 작품을 당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이 직면한 근본적인 ‘위기’라는 문제를 미학적으로 제기한 것으로 이해한다. 우리들의 ‘위기’란 어떤 것일까? 그것은 아마도 작품이 강조하는 ‘실어(失語)’ 상황일 것이다. ‘언어의 상실’은 ‘말’의 부재를 의미하지 않는다. 사실 우리는 ‘말로 가득한’ 세계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그 ‘말’들은 이미 일찍이 고정되었고, 자기폐쇄적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고정된 틀에서 무수히 반복되는 말일뿐이다. 비록 우리가 이러한 말들 속에서 가상적으로 ‘차이’를 드러내고자 하고, 그렇게 하여 자신의 ‘주체성’을 찾고자 하지만, 그것을 결국에 어떤 틀에 갇힌 말의 반복으로 전락할 뿐이다. 우리는 ‘할 말이 없다’. 그래서 우리는 이와 같은 ‘말의 세계’에서 뿌리를 내리지 못한 채, 표류하면서 또 소외된 주체로 살아가고 있다. 이는 하나의 근본적인 모순이다. 참신한 ‘이론’ 같은 것으로 해결되지 않는 것이기도 하다. 심지어 우리가 이러한 폐쇄성을 문제삼는다고 해도, 이 상황은 어떤 다른 ‘말’을 통해 해석되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실어’의 상황이다.

 

이러한 상황은 어떻게 초래된 것일까? 우리는 그저 역사에게 물어볼 수 밖에 없다. 우리의 ‘할 말 없는’ 상황을 해석하려면, 우리가 걸어온 ‘식민’, ‘분단’, ‘냉전’ 및 ‘현대화’ 등과 같은 폭력적 역사를 회피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더욱 큰 문제는 아마도 우리 자신에게 이러한 역사를 돌아볼 언어가 존재하지 않다는 것일 것이다. 혹여나 우리가 그 ‘언어’를 발굴해내어도, 사실 ‘역사적인 것’을 호소하는 언어는 듣는 이에게 전달되지 못하거나, 왜곡되어 전달되기 십상이다. 왕묵림의 《안티고네》는 이와 같은 ‘실어’적 상황을 직접 대면하여 언어와 소통의 불가능성에 도전하는 미학적 실험이다.

 

2. 망각과 유령

작품은 ‘망각과 유령’으로부터 시작된다. ‘돌아갈 집이 없고, 돌아갈 길도 찾지 못하는’ 오이디프스 가문의 ‘실어’적 상황은 어찌된 일인가? ‘유령’의 출현은 이 문제에 대한 작가의 자각적 설정이라고 할 수 있다. 역사적인 비극은 대중에게 ‘공포’와 ‘망각’을 동시에 가져온다. 그러나 현실의 모순과 위기는 ‘유령’을 소환하고, 유령은 인민이 ‘망각된 역사’를 기억하도록 자극한다. 특히, 현실의 모순이 심화될수록, 유령 또한 전면적으로 부상한다. 그리고 현실 속의 사람들은 이 유령을 통해 ‘반역’과 ‘혁명’을 꿈꾼다.

 

한편, 작품 속의 유령이 담지하는 ‘역사적인 것’은 정치 또는 이데올로기로 제시되지 않는다. 그것은 ‘문학’적 장치로 제시된다. 예를 들어, 작품이 적극적으로 원용하는 남한의 화가 홍성담의 광주 5.18판화 시, 소설가 황석영의 『오래된 정원』의 단락들 그리고 보고형식을 취한 국가폭력의 전언들 등이 그렇다. 이러한 장치들은 무대 위에서 ‘대화’의 형식이 아닌 ‘독백’의 형식을 취하고, 이는 곧 ‘소통 불가능성’을 표현하는 것이지만, 사실은 거꾸로 관객과의 대화를 적극적으로 시도하는 것이기도 하다.

 

3. 역사와 현실

그렇지만, 남한, 중국 및 대만이 갖는 공동의 역사는 무매개적으로 현실 공간에 들어오지 못한다. 그래서 작품은 공동의 역사에 소통불가능한 언어를 극도로 선명하게 대비시키는 구도를 취하게 된다. 다시 말해서, 문학적 텍스트가 제시하는 공동의 역사는 무대 바깥에서 관객과 소통을 취하고, 대화 속의 배우들은 서로 알아듣지 못하는 언어로 ‘소통’을 한다.

 

한편, 관객들은 자신이 이해하는 언어를 먼저 듣고, 동시에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언어의 자막을 보게 된다. 이들은 점차 이러한 작품 ‘이해’의 방식에 익숙해진다. 그러나 극중에 돌발적으로 배우들이 동시에 자신의 언어로 이야기하는 상황이 연출된다. 언어는 중첩된다. 이 때 어떤 언어도 명료하게 들리지 않는다. 이 장치는 관객들이 방금 ‘적응’한 것이 허구임을 일깨워준다. 즉 언어에 의해 갇히는 위험에 대해 경고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이는 현실의 모순에 대항하는 이와 같은 시도들이 아주 쉽게 기존의 언어의 틀에 갇힐 수 있고, 그래서 역사에 의해 지탱되어야 비로소 진정으로 기층과 민간의 언어로 전환될 수 있음을 상기시켜 주는 것이다. 좀 더 나아가 보면, ‘저항’ 자체는 ‘일상’과 융합되었을 때, 비로소 인민의 ‘민주’적이고 ‘윤리’적인 생활방식의 창조를 담보할 수 있게 된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문학적 텍스트로 제시된 대만의 백색테러, 남한의 광주민중항쟁, 그리고 북경의 6.4 천안문 사건은 비록 역사 내부의 민중의 공동 저항 경험으로 그려지지만, 그러한 역사적 저항의 경험은 일상 속의 기층 인민의 요구를 반영하고, 종국에는 일상으로 돌아가야 하는 저항으로 해석된다.

 

4. 유토피아와 살아남은 자

안티고네는 오빠의 장례를 위해 크레온 국왕에게 대항하지만, 여동생 이스메네는 ‘돌아갈 집이 없는’ 존재적 고뇌 속에 침잠한다. 현실의 모순에 적극적으로 저항하는 안티고네와 현실에 비관하며 실망하는 이스메네는 각각 위기를 대면한 두 전형을 대표한다. 일반적으로 전자는 혁명가이고, 후자는 고뇌에 빠진 지식인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작품의 이야기는 안티고네의 희생으로 끝나지 않는다. 작품은 이스메네의 역할에 변화를 준다. 이스메네는 고뇌에 빠진 인간일 뿐만 아니라, 결국 언니의 편에 서서 크레온에 대항한다. 그러나 이스메네는 안티고네와 달리 ‘살아 남는다’. 그래서 그녀는 민중과 미래의 편에 서게 된다. 이로써 안티고네는 결단, 죽음 그리고 희생을 의미하게 되고, 이스메네는 삶, 일상 그리고 지속을 의미하게 된다. 오빠 폴리네이케스는 일찍이 희생당했고, 지금 안티고네도 희생되지만, 이스메네는 민중과 함께 크레온의 체제 또는 또다른 어떤 체제에서 살아가야 한다.

 

이 작품은 ‘역사적인 것’으로부터 미래의 ‘유토피아’의 자원을 찾아내지만, 종국에 이 자원들은 ‘정원’에 위치된다. 안티고네의 희생 이후에도, 살아남은 자들은 살아가야 한다. 그들은 여전히 존재하는 ‘체제’ 하에서 ‘유토피아’를 품고 살아가야 한다. 이러한 새로운 생활방식이 ‘정원’에 투영되어 있다. 이는 어떤 정원인가? 내가 보기에 이는 ‘에로스’로 새롭게 맺어진 인간관계를 말한다. 나아가 이 정원은 과거 역사적 현대성의 논리 하에서 사람과 사람을 분리시켰던 경계들을 넘어서는 노력을 포함한다. 좀 더 적극적인 해석이 허용된다면, 내가 보기에 이는 또한 우리가 과거 ‘진보’라는 이름으로 명명했던 ‘노동자, 여성, 청소년, 장애인, 시민, 학생, 성소수자, 홈리스’ 등등의 ‘이름들’을 깊이 들여다 보고, 한편으로는 이들을 넘어서면서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역사적으로 이들을 새롭게 관계지어야 함을 의미하기도 한다.

 

게다가 이렇게 유토피아가 ‘정원’에 놓이게 됨과 동시에, 우리는 극 중에서 복건성의 민요가락을 듣게 되고, 또한 황영찬(黃榮燦)과 같은 대만의 판화가의 희생을 듣게 된다. 연극은 이와 같이 대만의 민간 문화와 역사적 백색테러를 소개하면서, 최후에 대만이라는 역사적이고 구체적인 ‘공간’으로 회귀하는 형식을 획득하게 된다.

 

5. 무거움과 감동 사이

이 작품은 아름다운가? 나는 대답할 능력이 없다. 그렇지만, 나에게 이 작품은 매우 무겁다. 그러나 동시에 이 작품에서 나는 무한한 희열을 느낀다. 나는 ‘언어를 잃어버린’ 타락 속에서 몸부림치는 나와 같은 사람들에게 이 작품이 하나의 실천 형식을 제시한다고 믿는다. 그것은 ‘역사적인 것’을 경유하여 현실을 깊이 들여다 보고, ‘미학’적 비판 형식을 통해서 새로운 언어의 실천을 만들어가는 것이다. ‘말들의 홍수’ 속에서 진정한 ‘언어’를 찾고자 하고, 또 자기 발로 역사와 현실 안에 서고자 하는 친구들에게 정중히 이 작품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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