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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식민지-반봉건

사회구성체논쟁 또는 사회성격논쟁으로 불리는 80년대 중후반의 논쟁들이 최초 박현채 선생의 사회구성체론으로서의 신식민지/국가독점자본주의론으로 촉발된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은 한편으로 구체적 정세와 맞물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주체적 역량에 의해 제약되면서 '이원화'된 바 있다.

 

그 과정에서 사회구성체론으로서의 신식국독자는 민중민주파에 의해 사회성격론으로 비약되었고, 식민지 사회에 대한 사회성격론으로서의 식민지반봉건론은 사회구성체론이 본래 제기한 문제의식을 공유하지 못하면서 민족해방파에 의해 고수되였다(물론 나중에 식민지-반자본주의로 수정되기도 했다). 다시 말해서 한편에서는 사회구성체론으로 사회성격론을 대체하였고, 반대편에서는 사회성격론으로 사회구성체론을 대체한 셈이다.

 

논쟁의 촉발자였던 박현채 선생의 입장은 최초에 사회구성체론의 차원에서 제기되었고, 사회성격론의 차원에서는 분명하게 제시되지 못했는데, 추후 논쟁의 전개 과정에서 양 측에 거리를 취하면서 결국 '신식민지-반봉건 사회'라는 사회성격론으로 입장을 정리한다. 사실 논쟁은 다소 추상적이고 관념적으로 진행되었는데, 내가 보기에 이는 80년대의 '열림'이 갖는 역사적 제약에 의한 것으로 보인다. 그 핵심으로 들 수 있는 것은 모종의 '엘리트주의'인데, 그것은 '사상'적 차원에서 대중과 함께하는 변혁 운동의 역사적 단절이 낳은 후과가 80년대의 짧은 열림 속에서 쉽게 극복되지 못했다는 점일 것이다. 거기에는 지식과 사상의 '윤리'가 결정적인 듯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구성체론'과 '사회성격론'이 변혁론으로 제시된 의의는 자못 크다 할 수 있는데, 그것은 해방 이후 단절되었던 '보편성'과 '특수성'을 역사와 현실 안에서 사상적으로 결합하고자 하는 노력의 표현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논쟁을 낡은 것으로 간단히 치부할 수 없는 근거가 주어진다. 특히, 변혁의 이중적 주체로서 민중과 민족을 상정한다면, 거기에는 자본의 지구화에도 불구하고 유지되거나 유지될 수 밖에 없는 또는 유지되어야 하는 '민족'적인 역사적 단위가 변혁의 조건으로 주어질 수 밖에 없고, 동시에 그러한 조건 하에서의 민중의 사회적 모순이 매개되면서, 단순히 보편주의 또는 특수주의로 전락되지 않는 대중의 주체화를 통한 역량 확보를 통해 주체적 변혁의 전망을 제시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의미를 역사적으로 되살리는데는 박현채 선생이 최종적으로 정리한 사회성격론의 의미가 다시 음미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아직 초보적 가설에 불과하지만, 그 핵심은 '신식민지'와 '반봉건'의 함의일 것 같다. 여기에서 그 핵심은 '새로움'과 '반'에 있을 것이다. 얼마만큼 '새로운' 것이며, '절반'의 함의는 무엇인가? 그가 제시한 '신식민지'는 민중민주파의 신식민지와 어떻게 같고 다르며, 또 '반봉건'은 민족해방파의 반봉건과 어떻게 같고 다른가.

 

과거의 해석에서 사회성격논쟁의 차원에서 '신식민지'를 받아들인 경우를 보면, 80년대의 남한 사회가 마치 '식민지'와는 이미 관계가 없어진 듯, 다시 말해서 '탈식민de-colonialization'의 과제가 이미 달성되었거나, 더이상 제기할 필요가 없어진 듯이 '새로움'을 과도하게 강조하는 탈역사적 인식을 보인다. 이는 '북조선'과의 관계설정 및 분단체제에 대한 관점에서 극명해진다. 그러나 '식민지'에서 '신식민지'로의 전환은 전혀 주체적이지 않았고, 게다가 그런 이유로 '신식민지'로 전락했다는 점에서 볼 때, 그 '새로움'의 의미는 그러한 역사적 단절의 시각을 허용하지 않는다. 그래서 결국 민중민주파의 신식국독자에서 남는 것은 '국독자' 뿐인데, 그것이 갖는 '정세적' 의미를 인정해야 하지만, 전체적으로 볼 때, 사회구성체론이 사회성격론으로 비약되었음을 부정하기 어려워보인다. 그리고 그러한 '이론'에 준거한 '운동'이 대중과 함께 성장하기 어려운 것도 일정하게 증명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아울러, '반봉건'이라는 사회성격의 또다른 규정을 수용한 민족해방파는 민중민주파와의 경쟁 구도 속에서 그 입장을 견지하기 위해 전근대적 생산양식의 온존을 강조했지만, 그런 방식 역시 그 분석의 옳고 그름을 떠나서 '사회구성체'적 차원의 범주의 논의에 불과하다. 이는 박현채 선생이 누누히 강조했던 것처럼, '반봉건'의 규정이 단순히 '자본주의적 계급관계의 형성을 제약하는 반봉건적인 생산양식'에서 주어지는 것은 아니며, 나아가 그런 성격규정에도 불구하고 박현채 선생이 일제시대의 사회구성체(대략 1920년 전후)를 '자본주의'로 보았다는 점에서, 이와 같은 민족해방파의 '반봉건'의 논의는 사회구성체적인 근거를 가지지 못하며, 나아가 사회성격론으로서의 내용도 가지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동안의 전개 과정을 통해 볼 때, 다양한 '민족해방파'는 이론적으로 논리적이지 못했고, 그 내용을 가지지 못했지만, 일정하게 대중 운동과의 매개 속에서 현실의 모순과 결합되면서 '반봉건' 규정이 역사적으로 갖는 의미를 '운동'적으로 계승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역으로, 다양한 '민중민주파'는 역사로부터 분리되고, 이론주의적 규정(사회구성체적 규정)으로 사회성격론을 대체하면서, 사실상 대중으로부터 분리되었고, 이론적으로는 '엘리트주의'(일정한 지적 포퓰리즘과 함께)적 경향을 띠며, 운동적으로는 '기생'적이게 된 셈이다. 이는 역사와 현실로부터 분리된 '지식계급'이 대중에게 기생적인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관찰은 주로 변혁적 '당' 운동의 차원에서 주어진다. 변혁의 과정 속에서 '대중' 앞에서 전망을 제시하지 못하는 '당'은 당으로서의 자격이 주어질 수 없을 것인데, 그 전망이 '대안세계화', '국제주의', '평화주의' 등과 같은 보편주의 담론으로 제시될 수는 없는 법이다. 그러한 담론은 국제주의적 '당' 운동 사이에서나 '차이'를 전제하며 논의될 수 있는 사안일 뿐이다. 그 전망은 바로 변혁적 주체로서의 '민족'과 '민중'이 갖는 역사 및 현실적 조건을 기반으로 하여 내외부적 규정과 제약을 고려하면서 고유하게 설정되어야 하는 것이다. 거기에서 특히 남한 사회에서 고려되어야 할 여러 조건들이 바로 식민, 분단, 냉전 등을 거치며 형성된 물질적이고 정신적인 여러 제약들이다. 내가 보기엔 사실 박현채 선생 스스로 유무의식적으로 이 문제를 모호하게 남겨두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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