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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윤리적 민주

백영서 교수의 <핵심현장에서 동아시아를 다시 묻다>라는 책의 서평을 <황해문화>로부터 청탁 받아 쓰게 되었다. 어제 원고는 넘겼는데, 서평의 특성 상 나의 이야기들을 충분히 담기는 어려웠다. 사실 내심 '80년대', '민주', '분단체제론', '탈식민', '내전과 폭력', '표기법' 에 대해서는 좀 더 이야기를 하고 싶었는데, 여러 곳에 쟁론의 가능성을 열어 놓음으로써 과정적 의미를 갖는데 만족하게 되었다.

 

그 가운데 특히 '민주'와 관련해서는 메모를 해둘 필요가 있다고 느낀다. 내가 서평에서 비판하고자 했던 '1987년의 승리'라는 평가와 그로부터 제시되는 '민주'와 '인권' 등의 담론들의 핵심적인 한게는 바로 그것이 살아있는 사람들만의 '민주'라는 것이다. 아마도 이를 '평등'이라고 바꾸어도 마찬가지일 것인데, 그것은 여전히 '살아있는 사람들' 또는 '살아남은 사람들'의 민주와 평등인 셈이다. 따라서 '살아남은 자'의 민주와 평등은 그것이 그들의 존재를 위해 '죽은 자'들의 원혼을 달래는 윤리적 책무를 내포하지 않을 경우, 즉 탈역사적 인식의 기반에서 민주와 평등을 사고할 경우, 곧 '비윤리적 민주'가 되어버린다. 그것은 살아남은 자들의 역사적 기반으로서의 '폭력'이 사실상 정당화되고, 동시에 살아남은 자들 사이의 관계에 폭력이 내재된다. 다른 한편, 이러한 정치적 '민주'와 조금 다른 차원이지만, 경제라는 물질적 조건의 구성 요소로서의 '인구' 또한 그 나름의 효용성에도 불구하고 그것 자체만으로는 탈역사적일 수 밖에 없게 된다. 농업, 공업 내지 자본주의 및 봉건 등등의 생산방식과 구조에 대한 분석 개념들은 일정하게 그것의 역사적 복잡성을 단순화하게 된다.

 

어쩌면 이 두 가지 측면에서 80년대의 한계를 명확히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전자로부터 이른바 '민주화 세력'(창비 그룹의 담론을 포함)의 한계를 지적할 수 있고, 후자로부터 변혁운동의 한계를 지적할 수 있을 것 같다. 특히 후자와 관련해서는 이와 같은 탈역사적 분석틀로 인해, 특히 '인구'를 기반으로 하는 물질적 구조의 측면에 집중된 분석들 간의 논쟁으로 인해, 진정한 '사회성격논쟁'은 거의 진행되지 않았다는 의미에서 그렇다.

 

이런 의미에서 '역사윤리적 민주'를 제시할 수 있을 것 같다. 살아남은 자로서 어떻게 죽어간 자들의 원혼을 달래며 변혁의 전망을 세우고 미래를 열어나갈 것인가. 역사에 기반하여야만 올바른 지식이 형성되고, 그것을 매개로 변혁적 주체가 형성되며, 그러한 주체들의 구성의 원리가 아직 매우 초보적 수준의 추상이지만 바로 이와 같은 역사윤리적 민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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