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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론과 운동의 비대칭성

藝術人生님의 [신식민지-반봉건] 에 관련된 글.

 

앞서 진태원 선생님의 '비판'에 대한 문제제기는 사실 80년대 이후 우리 사회의 지식(인) 문화의 역사적 궤적과 관련된다. 그 '비판'의 내용을 포함하면서 동시에 그 근거까지 역사화되어야 한다는 문제의식이다. 물론 지식문화 내부의 논의에서는 다소간의 추상화와 형식논리는 불가피한 것인데, 문제는 그것이 대중과 현실로부터 유리되어 자가발전의 논리와 동력을 갖게 될 경우이다. 아마도 그런 대표적인 사례가 대체적으로 이른바 '피디' 계열의 지식인 내지 이론가들에게 두드러지고, 그들의 영향 하에서 지적 훈련을 받은 후배 세대들도 유사하다 할 수 있다. 나아가 그러한 주도권의 형성 속에서 방어적으로 대응한 기타 흐름들 또한 내용적으로는 아니어도 형식적으로 그 흐름을 추종했음도 관찰된다. 이미 20여년이 훌쩍 지난 지금의 시각에서 점검해보면, 그 내부의 논쟁은 조금 모순되게 말하자면 '철학'적 차원에서 모종의 의미를 가질 지는 모르지만 진정한 의미에서'인문학'적인 가치는 크지 않은 것 같다. 마치 '과학'적 발견과 유사하게 역사와 사회로부터 단절된 듯 보이는 '철학'적 사유처럼 느껴진다. '보편적인 것'이기 때문에 그럴 것이다. 그나마 그것도 소수여서 대부분은 유행따라 왔다가는 정도였다.

 

그래서 나는 '역사'와 '현실' 및 대중과의 관계의 시좌에서 이러한 보편주의적이고 탈역사화된 지적 담론에 대해 문제 제기를 하는데, 어쩌면 이러한 문제제기는 다시 그 틀 안으로 빨려들어가 '스탈린주의', 또는 '모택동주의', 나아가 심지어 '종북주의' (또는 '전통주의')등등의 '주의'로 역규정될 수도 있다. 실제로 나는 '북조선'에 대해 매우 개방적인 인식론적 태도를 취하고 있고, 이는 '중국'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며, 역으로 '남한'이나 '대만', 나아가 '일본'과 '유럽'에 대해 그들의 '반봉건'을 실험적으로 사고해 본다. 아마 앞으로도 상당 기간 이러한 실험적 작업이 계속될 것이고, 만약 그것이 일정한 발언의 공간을 가진다면 이와 같은 예상이 현실화될 지도 모르겠다. 물론 그런 발언 공간 자체를 얻기 어려울 가능성이 훨씬 더 높긴 하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나의 비판 또한 기본적으로 '이론'의 영역 내부에서 유통되고 토론될 뿐이라는 점을 내가 알고 있다는 점에서 볼 때, 사실 내가 그러한 '레테르'들이 지시하는 그 외부라는 진영을 구축하고 그들의 내부를 비판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 사회에서 그 '외부'는 사실 '이론'으로 구성되어 있지 않다. 그래서 나 또한 내부적 비판자일 수 밖에 없음을 알고 있다. 여기서 아마도 '이론 없는 운동, 운동 없는 이론'이라는 다소 이분법적으로 보이는 문제를 생각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우리의 현실이 딱 그렇게 보이기 때문이다. 이는 '이론'의 문제인가 아니면 '운동'의 문제인가? 이론과 운동을 구분할 줄 알면서도 또 분리해서 사고하지 않는 것이 중요한 것 같다. 이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구체적 현실을 관찰할 필요가 있는데, 단순한 이분법으로 비난할 수 없는 일정한 '비대칭성'이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이론으로 운동을 하는 사람들'은 있어도, '운동으로 이론을 하는 사람들'은 없다는 점이다. 물론 엄격히 말하면 전자의 운동은 '기생'적인 운동이다. '운동 없는 이론'은 좋게 말해서 '이론적 운동'이고, 사실상 엘리트주의이다. 당연히 그것은 '운동'이 될 수 없다. 한편, '이론 없는 운동'은 내가 보기에 '이론'에 의해 배척되는 과거의 '사상'적 기초에 근거하고 있고, 그럼에도 '이론'의 보충과 지도를 요구하고 있다. 그 역할에 값하는 이론은 현재까지 부재한 셈이며, 아마도 '당' 운동의 반복되는 좌절은 그 원인이 바로 여기에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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