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竹內好와 丸山真男, 그리고 溝口雄三

 

溝口선생님의 《中國의 公과 私》에는 1972년 《理想》에 실린 그의 젊은 시절의 논문 두 편이 수록되어 있다. 그는 이 두 편의 글에서 죽내(竹內) 선생과 환산(丸山) 선생을 동시에 비판하는 입장을 취한다. 죽내 선생에 대해서는 '원죄의식'에서 비롯된 '자기 부정의 원점으로 대극에 결상되는 자기 의식의 세계로서의 중국' 인식의 문제를 지적하고, 그렇게 해서 파악된 '일본' 및 파시즘의 죄가 '민족 일반'으로 확산되어 비판의 대상이 모호해진다는 점을 지적한다. 간단히 말하자면, 일종의 속죄의 심리가 작용하여 '중국'에 대한 모종의 주관적 '이상화'라는 문제를 노정하고, 그렇게 해서 '상대'적으로 파악된 '일본'의 주체성이 '가상적'이라는 점을 지적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한편, 환산 선생에 대해서는 사실 비교적 간단하다고 할 수 있는 비판인데, 앞서 《일본 정치사상사 연구》에서 내가 파악했던 '본질화된 주자학 인식(일종의 탈역사화된 '무')'으로부터 역사와 단절되어 도출되는 일본의 '근대'와 마찬가지로 그것이 '유럽'적 사유에 기반하여 '자유'를 분열(또는 '저항)의 측면에서 파악할 뿐, 사회질서를 만들어내는 정치적/도덕적 자유로 파악하지 못한다는 점을 지적한다.

 

사실 이 두 비판은 모두 일본의 '주체성'에 대한 해명에 있어서 선배 사상가들의 한계를 지적한 것이라 할 수 있겠다. 환산 선생의 문제는 비교적 간단하고, 나도 동의하지 않을 수 없는 비판인데, 그것이 갖는 '구조' 비판으로서의 '탁월함'이 사실상 '역사'를 희생함을 통해서 가능했다는 측면에서 볼 때, 그러한 지식 실천의 효과는 다소간 엘리트주의적일 수 밖에 없었던 셈이고, '주체성'의 측면에서 내재적으로 대중적 전유를 기대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라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그런 측면에서 환산 선생의 작업이 '정치적'으로는 '비판적'이었지만, 지식방법의 차원에서는 현대적 학술체제 하에서 '순응적'이었던 것이고, 대중적인 차원에서 전개되지는 못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죽내 선생에 대한 비판의 경우, 그후 구구 선생님의 작업들과 함께 놓고 바라볼 때, 다소간 혼란스러워 보인다. 그것은 구구 선생의 '방법으로서의 중국'의 기본적인 모티브가 죽내 선생의 '방법으로서의 아시아'와 맞닿아 있고, 양자가 기본적으로 주체성으로서의 '독자적인 것'을 설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구구 선생은 이 작업을 중국(과 일본)의 '전근대'로 확장시켜 그 내용을 풍부화했고, 이로부터 중국과 일본의 '독자성'을 '내재적'으로 파악하고자 했다. 환산 선생과 비교해서 볼 때, 기본적으로 '보편성'에 대한 거부를 바탕으로, '중국'을 참조적으로 하여 '다원적인' '근대들'을 내재적으로 추적했던 셈이다. 한편, 죽내 선생과 비교할 때, 구구 선생님은 죽내 선생이 당시의 현상적인 '중국'의 표층에 속했던 특질들(모택동 및 노신, 그리고 혁명)을 역사적으로 내재화하여 계보를 파악함으로써 그 실질적 함의를 재해석해냈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의미에서 볼 때, 구구 선생님의 작업은 환산 선생에 대한 비판의 입장에서 죽내 선생의 입론을 내재적으로 비판/계승한 셈이다.

 

그런데, 그렇게 해서 최초에 제기한 '주체성'의 문제를 해결하고 있는 것일까? 다시 말해서, 환산 선생을 비판하면서 제기한 '사회질서'라는 측면과 죽내 선생 비판하면서 제기한 '민족 일반'이라는 문제는 어찌되었나? 

 

'사회질서'라는 측면은 사실 '자유'가 '보편주의적 원리'에만 입각할 경우, 그것이 일정한 '해방' 및 '해체'적 기능을 가짐에도 불구하고, 종국적으로 '구성과 건설'의 원리와 결합할 수 없다는 측면에서 역사적인 것 또는 민족적인 것을 바탕으로 현실의 모순과 결합하여 주체적인 변혁의 전망을 제시해야 함을 제기한 것라 할 수 있고, '민족 일반'의 문제 또한 변혁의 과정 속에서 내부적 모순과 매개되기 위해서는 '외재적 기준'(이상화된 중국)에 의해 '타자화된 자신'에 근거할 수 없다는 측면에서 '민족적인 것'의 인식 필요성을 제기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나는 이 즈음에서 흥미롭게도 죽내 선생과 구구 선생의 장르 선택의 차이를 주목하게 된다. 죽내 선생의 글(나아가 리영희 선생의 글)은 기본적으로 노신을 계승하는 글이라 할 수 있다. 노신의 글은 기본적으로 '실천'의 글이었다. '문학'의 글이라 할 수도 있겠다. 구구 선생의 글은 대조적으로 '학술'의 글이라 할 수 있다. 죽내 선생과 구구 선생은 '민족적인 것'에 대한 추구의 측면에서 비판적 계승의 관계를 갖지만, 그 방식에 있어서 '분기'를 표출하고 있다.

 

나는 이 분기의 연원이 어디에 있을까 하고 생각하게 된다. 1972년 구구 선생의 비판에는 아직 이 분기가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는데, 그 이후의 작업들 속에서 명확해지는 것 같다. 그래서 '방식'이나 '형식'의 차원에서 보면, 구구 선생은 다시 환산 선생과 만나는 것이 아닐까? '중국'이라는 참조점을 통한 '일본'의 독자성을 해명하고자 했던 초기의 포부는 1972년 그 스스로 비판했던 죽내 선생의 '민족 일반'의 문제로 귀결되지 않는가? 물론 그렇다고 '민족 일반'에 대한 비판(이른바 '국민성' 비판) 자체가 문제가 되는 것 같지는 않다. 그것은 '사상'적 논의의 전제로서 파악되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것을 당대의 '내부 모순'과 결합시켜 주체성을 포괄적으로 사고하는 능력에 있다고 할 수 있다.(이는 '모택동'에서 시사받을 수 있음, 나아가 다소 변형되지만 박현채에게서도 볼 수 있음. 나아가 박현채를 '이론가'이자 '혁명가'로 파악할 필요.)

 

사실 죽내 선생에게는 노신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모택동도 있었는데, 특히 그가 파악했던 모택동의 근거지 이론은 사실 구구 선생에게도 일정하게 계승되는 측면이 있는 것 같다. 기체(基體)로 제시한 독자성은 근거지 이론과 통하는 부분이 있다. 그렇지만, 모택동은 이론가이자 동시에 혁명가였다는 점에서, 다시 말해서 근거지의 주체성에는 민족적인 것 뿐만 아니라 민중적인 것('반봉건)이 함께 결합되어 있었다는 점에서 구구 선생의 모택동 계승 또한 죽내호 선생에 대한 비판적 계승과 마찬가지로 부분적인 것이었다고 파악된다.

 

종합하자면 구구 선생은 기본적으로 환산 선생이 전제하는 유럽적/보편주의적 시좌를 거부했고, 죽내 선생과 함께 '중국'을 참조적으로 '민족적인 것'의 독자성을 인식하고자 했지만, 방법적으로 죽내 선생의 노신처럼 비판적 개입의 측면을 계승하지는 못했던 것 같다. 그래서 실천적으로 죽내 선생의 '모택동'을 부분적으로만 전유할 수 밖에 없었던 듯 하다. 물론 이렇게 파악된 한계를 구구 선생 개인에게 돌리려는 것은 아니다. 그의 성과는 '일본'의 당대 현실의 제약과 조건 안에서 평가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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