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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인의 조건

그렇다. 인간학적으로 일정한 임무를 감당할 수 밖에 없는 지식인이 역사의 내부에서 현실에 내재적이기 위해서는 결국 '민족적인 것'에 대한 해명을 바탕으로 '민중'의 편에 서는 수 밖에 없다. '민족적인 것'이 '민중'의 조건이기 때문이다. 이는 '민족적인 것'을 거부하는 탈역사화된 보편주의적 지식에 대해 비판적 거리를 취한다. 나아가 겉으로는 '민중'에 편에 서서 투쟁하지만 결국 똑같이 탈역사화된 보편주의적 좌익 '이론'으로 무장하여 사실상 '민중'을 추수하는 '운동'론적 지식과도 갈등적일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이는 또한 '민중'의 구체적 삶을 기본적으로 긍정하여, 그 내재적 모순을 '민족적인 것' 안에서 해결하는 방향을 제시한다. 여기에서 어렴풋이 '민중'의 자유자재로운 삶에 대한 긍정과 지식인의 적절한 비판성의 강조가 결합되면서, '민중'과 '지식인'이 동시에 '윤리'적 삶을 구현하는 길이 어렴풋이 열리는 것 같다. 이는 '지식인'과 '민중'의 관계가 폭력적이지 않으면서, 동시에 '민중' 내부에서의 폭력이 제어되는 기제에 대한 사고를 말한다.

 

아마도 이런 이야기들은 '결론'일 듯 싶다. 이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 아주 많은 이야기를 먼저 해야 한다. 아마 그래서 이와 같은 '결론'도 언어와 담론이 되고, '전달'이 되지 않을까 싶다. 진정한 소통을 이끌어낸다는 일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간만에 지도교수를 만나러 가면서 문득 다시 한번 점검해보고 싶어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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