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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해문화 서평(2014 봄호)

* 앞서 서평 후기에서 이야기된 바 있는 『황해문화』 2014년 봄호에 실린 서평이다. 굳이 이 서평이 아니어도 잡지를 구독하실 분들은 구독하실 것이고, 이 글을 읽으려고 잡지를 따로 구독하실 분은 없을테니, 관심 있는 분들이 볼 수 있게 블로그에 올리는 것도 나름 의미가 있을 듯 싶다. 


『황해문화』 서평:

역사를 감당한다는 것

『핵심현장에서 동아시아를 다시 묻다』(백영서, 창비, 2013)

 

연광석(延光錫)*

 

비평의 맥락

한국 발 동아시아론을 주도해온 주요 연구자 가운데 하나인 백영서 교수의 『핵심현장에서 동아시아를 다시 묻다』는 매우 흥미로운 저작이다. 이 책은 단지 ‘동아시아’라는 어떤 대상에 대한 논술에 그치지 않고, 독특한 주체 설정과 방법론을 통해 나름의 ‘동아시아’론을 구성해나갈 뿐 아니라, 동시에 현실 개입을 통한 세계체제의 변혁이라는 웅장한 포부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한반도를 포함한 동아시아의 여타의 핵심현장에서 벌어지는 시민의 참여를 ‘새로운 지구질서’를 수립하는 노력으로 평가한다. 이와 같은 동아시아론은 분단체제론의 심화/확장 판본이라 할 수 있다.

 

분단체제하의 한반도가 현존하는 세계체제 유지 및 미국의 강경세력이나 군산복합체의 자기재생산에 결정적 역할을 한 핵심현장인만큼, 시민참여형 통일은 미국 패권주의에 균열을 일으키고 세계체제를 장기적으로 변혁하여 새로운 형태의 전지구적 공동체 건설의 기회를 늘릴 것으로 기대한다.

 

이와 같이 오끼나와와 한반도-물론 대만 등 그밖의 사례도 거론될 수 있다-핵심현장에서 벌어지는 시민의 적극적인 참여가 바로 ‘이중적 주변’으로서 겪는 억압을 극복하는 집단적 실천이라 하겠다.(25쪽)

 

지면관계상 분단체제론에 대한 상세한 논의를 전개할 수는 없지만, 이와 같은 동아시아론에서 분단체제론과 그로부터 연역되어 제출된 복합국가론이 세계체계하에서의 남북한 체제 재생산의 구조적 복잡성을 해명하고 나름의 대안을 제시하는 강점이 오키나와 및 대만 등의 ‘주권’ 또는 ‘자치권’ 논의에 원용될 수 있다는 자신감도 감지된다. 저자가 언급한 바와 같이 이와 같은 분단체제론은 이미 대만에서 양안관계를 새롭게 해석하는 사상적 자원으로 원용되고 있다. 물론 우리는 이를 한국으로부터의 일방적인 수출이 아니라 대만 지식계의 주체적인 수용으로 읽으면서 그 나름의 독창성에 주목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저자는 이와 같은 동아시아론을 제기하면서 그 나름의 지식 방식으로서 ‘사회인문학’을 제출한 바 있다. 이를 필자의 방식으로 이해하면, 단순히 사회과학과 인문학을 결합하는 것을 넘어 ‘역사-지식-주체’라는 사상적 층위의 사유를 포함하고 있는 것으로 냉전과 편향적 현대화를 거쳐 일정하게 역사와 현실로부터 유리되어온 우리의 주류적 학문방식과 차별성을 갖는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이러한 사상적 실천은 냉전의 질곡하에서 다소간 정체되고 단절되었다가, 80년대 모종의 사상해방의 공간을 계기로 해서 일정하게 복원된 바 있다. 그것은 궁극적으로 남한의 역사적 개별특수성을 바탕으로 변혁적 전망을 도출하고자 했던 시도들에 의해 일정하게 가능했었는데, 그 과정에서 다소간 뒤늦게 출발한 분단체제론이나 동아시아론의 경우 ‘분단’이라는 역사적 개별성의 포착을 바탕으로 그 구조적 복잡성의 해명과 대안적 실천 내용을 지식 작업의 과제로 삼아 구체적인 현실에 개입하는 실천을 해왔다.

 

필자 또한 이와 같은 작업의 자장 안에서 동아시아를 사유하면서 저자 및 창작과비평 그룹의 글에서 많은 계시와 영감을 얻은 바 있다. 특히, 분단체제론에서 동아시아론으로 이어지는 주체적인 학문 실천은 냉전이라는 특수한 조건하에서 사상적 흐름의 단절을 겪은 우리에게 매우 소중한 자산이다.

 

그렇지만, 필자가 보기에 20여년 동안의 숙성을 거쳐, 다시 한 권의 책으로 정리되어 우리에게 모습을 드러낸 이 동아시아론 또한 역사적 제약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는 않아 보인다. 이 또한 기본적으로 1980년대라는 일시적 ‘개방’ 공간으로부터 출발하여 발전해온 역사적 성과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나름의 발전이 80년대의 사회구성체/사회성격 논쟁 속의 ‘전환’(또는 이원화)과 90년대의 포스트주의적 ‘탈주’의 흐름속에서 미약하나마 온전히 사상적 역할을 담당한 공헌은 인정해야 하지만, 20여 년을 경과한 지금 그것이 출발부터 가질 수 밖에 없었던 역사적 제약들을 드러냄으로써 동아시아론을 더욱 풍부히 해나가는 작업도 필요한 시점이라 할 것이다.

 

이 저작은 내외적으로 복잡한 참조 체계 안에서의 대화를 통해 내용을 구성하고 있는데, 이 글에서는 기본적으로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역사-지식-주체’라는 사상적 층위의 사유를 중심으로 쟁점들을 드러내고자 한다. 간단히 부연하자면, 이 세 범주의 유용성은 ‘역사는 대중에 의해서 만들어진다’는 대전제하에서, 올바른 지식은 역사로부터 주어지며 그러한 지식의 매개가 없이는 올바른 변혁 주체의 형성이 불가능하다는 관점에 있다. 따라서 역사로부터 주어지지 않는 보편-특수주의적 지식에 대한 경계와 그것의 표현으로서 대중의 현실적 모순과 매개되지 않는 엘리트주의-포퓰리즘을 윤리적으로 비판하는 입장을 취한다.

 

냉전과 ‘이중적 주변의 시각’

저작은 동아시아와 중국을 다루는 1부와 2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먼저 동아시아를 다루는 부분에서 특히 눈길이 가는 대목은 ‘핵심현장’으로 제시된 한반도, 오키나와, 대만을 중심으로 동아시아를 다시 사유한다는 ‘이중적 주변’의 시각이다.

 

서구 중심의 세계사 전개에서 비주체화의 길을 강요당한 동아시아라는 주변의 눈과 동아시아 내부의 위계질서에서 억눌린 주변의 눈이 동시에 필요하다는 문제의식이다.(205쪽)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이중적 주변으로 제시된 것이 한반도, 오키나와, 대만이다. 이들이 이중적 주변으로 묶인 이유는 기본적으로 중국과 일본 및 한국 등의 ‘국민국가’를 상대화할 수 있는 긴장을 내부에 갇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가 이들 사이의 차별성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지만, 흥미롭게도 ‘한반도’가 상대화의 대상이 그 내부에 분단된 채로 존재한다는 차별성에 관해서는 조금 더 해명이 필요하다. 사실 저자의 논의 전반에서 이른바 ‘북조선’은 체계적으로 배제되고, ‘한반도’는 기본적으로 ‘한국’의 주도성을 전제한 개념으로 제시되는데, 그런 의미에서 논리적으로 밀고나가면 ‘한국’이 ‘한국’을 상대화하는 역설적 상황에 빠지게 된다. 다시 말해서, “동아시아 내부의 위계질서에서 억눌린 주변”으로서의 한반도는 기본적으로 중국과 일본이라는 역사적 제국과의 관계 속에서 그 주변성을 인정 받게 되는데, 대만이나 오키나와와 달리 한국은 현실의 대상 없이 과거의 역사에 기대어 스스로 주변성을 주장하게 되는 셈이다.

 

필자는 이와 관련해서 이 저작에 ‘냉전’이라는 역사적 구조에 대한 문제의식이 다소 결여되어 있지 않나 하는 의구심을 갖게 된다. 다시 말해, 냉전과 마찬가지로 탈냉전 역시 민중의 주체적인 실천에 의한 것이라기 보다는 다소간 수동적으로 주어졌다는 측면에서 볼 때, 탈냉전의 계기는 냉전의 후과를 직시하는 성찰적 태도 위에서만 긍정적 함의를 가질 수 있다. 그리고 냉전의 후과와 관련해서 한국이 역사적 식민성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으며, 또한 그 효과로서 일정하게 주변적 위치에만 머물러 있지 않다는 인식이 포함되어야 할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 필자는 전후 동아시아에서 냉전체제의 형성은 주체적 탈식민de-colonialization 실천을 봉쇄하였고, 지역적 차원의 비/대칭적 분단체제들을 초래하였는데, 그 과정 속에서 동아시아 내부의 또 다른 비대칭성을 형성한 바 있다는 가설을 구상하고 있다. 이를 남북한 및 중국 양안(兩岸)의 차원으로 좁혀서 사고하면, 바로 냉전의 적극적 축으로서의 ‘중국-한국’의 역할 강화와 ‘대만-북조선’의 소극적 축으로의 주변화라는 특징으로 제시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비대칭성은 일정하게 그 내부의 지식담론을 조건 짓게 되었는데, 특히 1980년대 이후의 지적 흐름 속에서 중국과 한국은 서로 공명하면서 유무의식적으로 ‘국가’를 기본단위이자 주체로 전제하는 논의의 구도를 형성 및 주도하고 있다. 북조선의 경우 아직 단절된 지적 관계망이 복원되지 않은 상황이기 때문에 논의가 다소 어렵지만, 대만의 경우에서 볼 때, 한국과는 전혀 다른 성격의 지식담론이 형성되고 있고, 그 주요 특징으로 아시아의 ‘사상해방’의 관계망의 중심 역할이 두드러진다는 것이 필자가 관찰한 핵심이다.[1]

 

따라서, 이러한 적극적 축으로서의 한국을 주변으로 설정하기 위해서는 좀더 복잡한 논의가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이러한 설정은 분단체제론에서 연역된 복합국가론이라는 발상이 주권론의 층위에서 논의를 시작하여, 위로부터의 주체론을 전개하는 것과 관련되는 것 같다. 이러한 주권 담론은 저자가 데리다를 원용하듯이 현실에서는 아나키즘적으로 수용될 수 있는 ‘주권의 나눔’이라는 모종의 탈역사적 보편주의 원리에 기대고 있는데, 그런 만큼 핵심현장 사이의 역사적 차별성은 고려되기 어렵게 되고, 한반도의 원리가 다른 핵심현장에 일방적으로 관철되어 그들을 모종의 대상으로 타자화하는 경향도 보인다. 관계에 있어서 공생을 지향하고, 시민의 참여를 통한 ‘내부 개혁’을 강조하지만, 모종의 보편적 원리에 근거한 자기개혁과 타자와의 관계설정은 내부에서는 아래로부터 현실의 모순과 매개되기 어렵고, 외부의 타자와의 관계에 있어서는(저자의 반복되는 부인에도 불구하고) ‘한반도(한국) 중심주의’라는 혐의에서 자유롭지 못하게 된다. 이를 좀더 명확히 하자면, ‘한반도/한국’을 문제화하는 자기성찰적 주체성이 전제될 때, 타자와의 공생과 내부에서 아래로부터의 변혁 모두 가능성을 얻게 된다고 이야기될 수 있다.

 

‘한국’에서 본 ‘동아시아’

사실 저작의 이러한 한계는 ‘한국’과 ‘한반도’라는 단위/주체 설정에서 기인한다고 할 수 있다. 냉전의 제약 속에서 불가피하게 굳어진 측면도 있지만, 주지하다시피 ‘대한민국’은 반도의 남측에 위치한 사실상 불완전한 국가를 지칭하는데, 여기에서 그것의 역사적 계보가 ‘대한제국’으로 거슬러 올라가고, ‘대한제국’이라는 모종의 탈역사적 현대화의 결과물이 식민, 백색테러 및 내전의 폭력적 과정을 거쳐 ‘대한민국’으로 계승된 바 있음이 환기될 필요도 있다.[2] 따라서, 이와 같은 ‘분단체제’ 하에서 우리가 경험한 냉전과 ‘탈냉전’의 비주체성은 한반도와 한국이라는 단위/주체 설정 자체에 주의를 요구한다.

 

그런데 이 저작에서 보이는 ‘한국’이라는 단위 설정은 분단의 제약에도 불구하고 달성한 민주화라는 성과를 그 주체성의 핵심으로 파악하는 것에 의해 크게 지지된다. 마치 민주화를 통해, 단위적 주체로서의 원천적 결핍의 원인이었던 식민성과 신식민성의 문제가 해결되어 정상적 주체로서의 지위를 얻었다는 듯한 모양새다. 물론 이는 남북 유엔 동시가입으로 물질화되기도 했다. 그렇지만 우리는 식민성과 신식민성이 초래한 물질적/정신적 제약과 후과들을 역사적으로 정리할 충분한 시간을 가진 적도 없고 관련된 실천도 부족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근원적 결핍을 고려하지 않고, 한국을 주체적 단위로 설정할 경우, “1987년 민주화운동의 승리”(80쪽)로 얻어진 인권과 민주주의라는 기본적 가치 담론은 이중적 주변으로서의 핵심현장인 대만에 대해서는 그의 민주화와 공명하면서 연대적 기틀로 다져지게 되고, 역으로 북조선이나 중국에 대해서는 민주화의 결여를 지적할 수 있는 도덕적 우위의 근거가 된다. 그러나 ‘민주’라는 모종의 보편적 원리는 그 구체적 역사에 의해 밑받침되지 않을 경우, 자기 자신에게는 ‘의회주의’ 등에 의한 모종의 대리주의적 실천을 통해 민중의 정치적 소외를 낳게 되고, 타자와의 관계에 있어서는 타자의 역사적 개별성을 무화하여 폭력적 개입의 외양을 갖게 된다는 점에 유의해야 할 것이다. 이 저작에서 혁명을 경험한 중국의 역사적 전개와 현상에 대한 분석, 나아가 그러한 역사적 과정에서 또다른 한 축을 형성한 대만에 대한 분석이 다소간 ‘본질화’의 느낌을 주는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주변’ 사이의 상호참조: ‘대만’의 경우

우선 필자가 보기에 저자가 상당량의 지면을 할애하여 토론하고 있는 대만의 사례에서 이 문제를 먼저 논의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대만의 복잡성을 고려할 때, 지면 관계상 논의를 충분히 전개하기는 어렵지만, 저작에서 논의되는 ‘대만의식’ 및 ‘통독 대립구도’에 대한 역사적 설명은 다소간 ‘탈역사’적이다. 가라따니의 제국론을 논평하면서 저자는 “그 역시 다른 제국담론 주창자들과 마찬가지로 제국의 주변, 여기서는 대만인의 주체성에 대한 배려가 부족하다”면서, “통일이냐 독립이냐의 이분법이 대만사회를 분단하고 있는 실정이 아닌가”라고 역설한다.(303~304쪽)

 

그러나 역사적으로 볼 때, 대만의 식민은 청조와 일본제국과의 관계 속에서 주어졌고, 1945년 광복과 1949년 이후 국민당의 대만 통치 역시 일본제국에 대한 중국의 반제국주의 투쟁과 국공 내전의 불완전한 종결에 의해 주어졌다. 나아가 이어지는 냉전하의 친미적 독재체제에 의해 자행된 백색테러 또한 이러한 내전의 연속 선상에서 벌어진 반공주의적 폭력으로 해석될 수밖에 없다. 즉 이와 같은 역사적 관계에서 볼 때, 대만인의 역사적 저항은 대만과 중국 대륙과의 관계에서 주어진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저자는 ‘대만인의 주체성’을 중국 ‘제국’과의 대비 속에서 파악하고, 현상적인 ‘통독’ 대립구도를 그 근거로 삼는데, 이는 사실상 현실의 표층적인 정치구도에서 역사를 연역해내는 것이며, 또한 이러한 ‘정체성의 정치’가 ‘의회주의’에 의해 이용되어 오히려 대중의 정치참여를 실질적으로 가로막고 있다는 점에서 탈역사적이고 탈민중적인 접근법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의회주의는 일반적으로 민진당을 위시로 한 당외(黨外) 민주화 운동의 성과로 적극적으로 해석되지만, 그 내막을 살펴보면 사실상 국민당의 양보가 관건이 된 것으로, 분단의 공고화라는 대만 정치의 질적 전환의 완성을 표지한다고 할 수 있다. 이는 국민당이 대만독립적 지향을 갖는 리등휘(李登輝)를 후계자로 지목한 데서도 알 수 있고, 저자의 언급처럼 국민당에서 제시한 ‘신대만인’이라는 용어 또한 이 전환을 잘 드러내준다.

 

따라서 대만의 현실적 문제는 통/독의 대립이라기 보다는 분단이 고착화되어 가는 가운데 의회주의를 중심으로 정체성의 정치가 만들어내는 포퓰리즘이 중국 대륙과의 관계에서 가상적 적대를 심화하여, 내부모순을 매개로 한 변혁적 정치 주체의 형성이 지속적으로 좌절되고, 동시에 중국 대륙과는 경제적으로는 일체화되어 가는 가운데 발생하는 자기분열적인 모순 상황이 만들어내는 ‘정치’의 불가능성 상황이다.

 

전통과 현대 사이의 혁명적 실천

그러면 주변이 아닌 중심으로 파악되는 중국에 대해서는 어떠한가? 이중적 주변이라는 저자의 시각에서 보면, 중국은 “서구중심의 세계사의 전개에서 비주체화의 길을 강요당했다”는 측면에서 1차적으로 주변이지만, 동아시아 내부의 위계질서 속에서는 중심으로 파악된다. 그런데 이러한 시각에는 한 가지 의도적인 생략이 있는데, 바로 중국이 모종의 혁명을 경험한 국가라는 점이다. 사실 아시아의 분단체제 형성의 원인 또한 이러한 대안적 사회 실현을 둘러싼 이념적 대립이 내전을 거쳐 외인과 결합되면서 불완전하게 결정된 데 있는데, 분단체제의 극복이 그 원인으로서의 식민-냉전을 내재적으로 사유한다면 이와 같은 혁명적 실천을 배제한 채 논의를 진행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게다가 동아시아에서 이른바 사회주의 혁명의 경험은 일정하게 국제주의적 연대의 형식을 가지고 있었고, 내용적 측면에서 전통의 봉건성과 서구적 현대성을 동시에 극복하고자 하는 시도를 포함하고 있었다. 저자는 중국을 “국민국가의 옷을 걸친 제국”이라고 비유하는데, 여기에는 전통의 제국과 국민국가라는 외형적 규정만 있을 뿐, 중국이 경험한 혁명은 체계적으로 서술과 분석에서 배제된다. 나아가 혁명과 관계된 ‘동아시아의 국제주의적 사상과 실천’ 또한 거의 다루어지지 않는다.

 

19세기 말 20세기 초 국민국가들로 구성된 국가간체제에 편입된 동아시아에서는 부국강병의 추구가 국익으로 인식되었고, 그것을 달성하느냐 못하느냐가 국가의 존망이 달린 절대절명의 과제라는 위기의식에 쫓겼다.(162)

 

동아시아 사회를 필자는 ‘민간사회’ 개념으로 파악함으로써, 구미의 시민사회 개념을 기계적으로 동아시아에 적용하지 않고 그 사회 내에서 전통성과 근대성이 결합하는 양상을 드러내고자 했다.(141쪽)

 

이와 같은 저자의 인식은 국가적 층위에서 역사적으로 소급하여 해석하면 일정한 합리성을 가지는 것으로 보이지만, 사회사적 층위를 도입하면 심각한 문제를 드러낸다. 왜냐하면 그것이 동아시아 내부의 역사적 복잡성을 전통과 현대라는 모종의 탈역사화된 관념으로 단순화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저자는 중국에 관한 논의에도 이러한 인식틀을 적용하는데, 그로 인해 제국에 관한 논의에서 ‘중화제국’과 ‘미제국’이 병렬되고, 나아가 ‘미제국’과 ‘소제국’이 병렬되는 역사화의 혼동을 노정한다.(제1부 제4장) 서구의 역사는 차치하더라도, 전현대에서 현대로 넘어오는 과정에서 동아시아의 수많은 민중들이 보여준 사회주의 사회의 실현을 위한 헌신과 희생은-냉전의 제약이 온존하는 현실 속에서 그 ‘사회주의’가 무엇이었는지를 규정하기가 간단치 않지만-‘부국강병’이라는 논리로 가볍게 생략할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게다가 필자가 보기에 저자가 취하는 전통과 근대성이라는 탈역사적 기준으로는 ‘혁명’ 이후의 중국의 역사적 전개와 현실적 동태를 국가 및 대중의 차원에서 모두 파악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역사를 감당한다는 것’

한국전쟁 이후 1992년 국교수립까지의 한국과 중국 사이의 단절이 긴 역사에서 보면 막간극일수도 있다는 저자의 견해(190쪽)가 일리가 있지만, 앞서 제시한 역사-지식-주체라는 사상적 차원에서 보면, ‘냉전’에 해당하는 이 기간 동안 사상사적 흐름의 급격한 단절을 경험했다는 점은 지식과 주체의 측면에서 강조하지 않을 수 없는 변화이다. 이 때문에 우리의 지식작업에 우선적으로 ‘탈냉전’의 문제의식을 도입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동아시아론의 의미 및 용도 또한 다시 사고해 보고, 방법적 전환을 시도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는 기존의 지식의 틀에서 현재적 구도를 형성한 역사적 원인을 연역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기존의 지식 체계에서 억압되고 주변화된 사상적 실천을 새롭게 발굴하여 그 계보를 재구성하고, 나아가 역사적 전환기의 사상적 형상을 풍부화하면서, 최종적으로 주체적이고 능동적으로 20세기 우리가 걸어온 역사와 지금 처해 있는 현실을 해석할 수 있는 대안적 관점을 제출하는 것이다. 이는 물론 서구적 현대성의 역사해석과도 다르고, 그에 대해 비판적이면서도 결국 제국주의에 역사적 능동성을 부여하고 제3세계는 늘 수동적인 피해자로 서술되는 비주체적 역사해석과도 다르다. 이는 역사로 진입하여 역사의 가능성과 개방성을 열어제낌을 통해, 주체적인 역사해석의 시간과 계보를 장악하는 것이고, 그로부터 능동적인 역사/현실 인식을 획득하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역사’를 감당하여 ‘자기 역사화’하는 지식작업일 것이다.

 

우리의 동아시아론이 기존의 것을 외부로 확장하여 적용하기 보다는, 우리 내부의 억압된 것을 사상적 자원으로 길어올려 자기혁신하지 못하는 언어와 담론의 부재, 나아가 주체성의 부재를 극복하는 상호참조의 장으로서 우선적인 의미를 가져야 하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제언한다.

 

* 대만 국립교통대학 사회문화연구소 박사수료

[1] 이와 관련해서 주목되는 세 층위의 작업이 있는데, 우선 아시아 전반을 포괄하는 문화연구 저널로 Inter-Asia Cultural Studies, 양안(兩岸) 뿐 아니라 홍콩, 싱가폴, 말레이시아 등의 중국어권을 대상으로 하는 화문(華文) 국제저널 『人間思想』, 그리고 동아시아를 중심으로 하는 ‘비판잡지회의’ 등이 해당된다. ‘비판잡지회의’에는 한국에서 『창작과비평』 및 『황해문화』가 참여하고 있다. 이러한 작업 속에서 대만은 중심성을 차지하지 않으면서도 관계망 형성의 핵심적 추동력으로 작동한다는 특징을 보인다.

[2] 아울러 분단이라는 제약 하에서 일정하게 ‘반제국주의적 민족해방’의 역사적 정당성을 계승한 ‘북조선’은 남측과 다른 대안적 건설의 길을 모색한 바 있다. ‘냉전’ 과정 속에서의 ‘북조선’의 전환과 굴곡에 대한 평가는 이와 같은 ‘역사성’을 전제한 뒤에 논의가 가능할 것이나, 현재 우리의 사상적 상황은 이러한 논의를 전개할 충분한 조건이 준비되어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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