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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학 비판

http://www.bjnews.com.cn/book/2014/08/16/329895.html

오랜만에 전리군 선생님의 목소리를 직접 듣는 듯한 느낌으로 읽어봤다. '연경학당'이라는 이슈와 관련하여 깊이 있는 통찰을 보여주고 있다. '중국학 비판'으로 현실적 조준을 하면서도, 크게 보면 세 가지 강조점을 포함하고 있기도 하다. 우선 '민족'에 대한 역사적이고 다원적인 관점(아래로부터의 창조적 역사). 둘째, 진정한 탈식민주의적 관점. 셋째, 문명론적 과제설정. 

 

 

这里有一个文化与教育的民族性问题:不同民族文化与教育之间,是不能区分优劣的。也不存在所谓落后向先进单向赶超的问题,只是互相影响、互相制约、互相吸收、互相吸纳的问题。正是在这样的各自独立发展,又相互吸收、交流过程中,各民族的文化、教育都对世界文化、教育做出独特贡献。

여기에 바로 문화와 교육의 민족성 문제가 있다. 서로 다른 민족문화와 교육 사이에 우열을 가릴 수는 없는 것이다. 이른바 선진을 향한 낙후의 일방적인 따라잡기의 문제도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서로 영향을 주고, 서로 제약하고, 서로 흡수하며, 서로 수용하는 문제가 있을 뿐이다. 이와 같은 각자의 독립적 발전, 그리고 상호 흡수 및 교류의 과정 속에서 각 민족의 문화와 교육은 세계  문화와 교육에 대해 독특성을 갖는 공헌을 하게 된다.

 

这其实就是当年鲁迅说的“西崽”,他们“倚徙于华洋之间,往来于主奴之界”,自己“懂洋话,近洋人,所以高于群华人;但自己又系出皇帝,有古文明,深通华清,胜洋鬼子,所以也胜于势力高于华人的洋人,因此也更胜于还在洋人之下的群华人”,总而言之自我感觉极端良好。这样的西崽自然是以洋人为靠山的;但鲁迅又提醒我们注意,他们“都是国粹家”。这非常深刻,可谓一语中的:今天的西崽也是时时把“中国特色”挂在嘴边的。

이는 사실 과거 노신이 말했던 '서구의 똘마니'이다. 그들은 "중국과 서양 사이에서 배회하면서, 주인과 노예의 경계를 넘나든다". 자신은 "서양말을 알고, 서양인에 가까우며, 그래서 중국인들보다 높이 있다. 그렇지만 자신은 황제를 배출했고, 오랜 문명을 가지고 있으며, 화청華清을 잘 알고 있어서 서양 귀신 보다 낫고, 그래서 중국인보다 힘이 쎈 서양인 보다도 낫다. 또한 그래서 서양인 아래 있는 중국인들 보다 낫다." 암튼 결국 자기 생각에는 아주 기분이 좋은 것이다. 이러한 서양 똘마니들은 당연히 서양인을 등에 업고 있다. 그러나 노신은 우리에게 주의를 준다. 그들은 "모두 국수주의자"들이다. 이는 매우 심도 깊은 것으로서 한 마디 말로 핵심을 찌르는 것이다. 오늘날의 서양 똘마니들 또한 때때로 "중국 특색"을 입에 걸고 있기도 하다.

 

这样一个人类文明危机与转机并存的时代,在我看来,给我们人文学者提出了全新的任务、全新的要求和全新的挑战。按我对人文学科的理解,它根本上就是一种文明的研究;现在所提出的问题,就是要对世界现有的所有的文明形态进行全面的反省,并寻找、创造人类文明发展的新的可能性。

이렇게 하나의 인류 문명의 위기과 전기가 공존하는 시대는 내가 보기에 우리 인문학자들에게 전혀 새로운 임무, 전혀 새로운 요구 그리고 도전을 제기한다. 인문학에 대한 나의 이해에 비추어 말하자면, 인문학은 근본에 있어서 일종의 문명 연구이다. 지금 제기하는 문제는 현존하는 세계의 모든 문명 형태에 대해 전면적인 성찰을 진행하고 인류 문명 발전의 새로운 가능성을 찾고 창조하자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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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다시 서울이다. 

잘 부탁한다. 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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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몇 마디...

"아쉬움이 있나?" 라는 질문을 친구에게 받았다.

"그런 것 없어" 라고 대답했다.

 

낯선 곳에 와서 7년을 조금 넘게 생활하고 떠나는 즈음에 다소 가라앉는 느낌도 당연할 지 모르겠다. 그런 가운데 이렇게 대만에서 마지막으로 몇 마디를 남기고 싶어졌다.

 

'고아'처럼 정말 홀홀단신으로 와서 어쩌면 이들이 듣고 싶은 이야기를 과장해서 지어냈을 것이다. 이들이 좋아할 만한 것이 무엇인지 눈치도 보아가면서 그 마음을 사고 싶었을 것이다. 때로는 그러면서도 나 자신을 지키고자 혼자가 되기도 했다. 먼 나라로 입양된 고아가 성장하며 겪는 느낌과 약간은 비슷하지 않을까 짐작해보았다.

 

그래서 그런 와중에 이들의 마음을 사기도 했던 것 같다. 그런데 일부의 마음을 사면 또 일부의 마음을 잃기도 했다. 관계가 멀어지기도 했고, 깊어지는 관계도 있었던 것 같다. 그 안에 얼만큼의 진실이 있었을까? 모두가 거짓은 아니었을테다. 나도 이들과 잘 지내고 싶은 진심이 있었고, 이들도 다소간 용기내어 닫혀 있는 자신의 회로를 열어낼 돌파구를 나에게서 찾고자 했던 것 같기도 하다. 물론 나 자신의 한계와 이들의 보수성은 그 계기를 반복해서 무화했던 것 같기도 하다.

 

떠나는 시점에 이런 것들이 드러나면서 또 얽힌다. 거짓이 드러나면서, 진심이 위태로와진다. 그러면서 그 사이에 복잡한 것들이 또 드러난다. 아마도 생활의 물질성이 박약해짐을 느꼈던 그 즈음부터였지 싶다. 그 즈음부터 귀국을 진지하게 고민했던 것 같다. 아마도 1년쯤 전이었던 것 같다. 당시 <북촌방향>이 생뚱맞게 하나의 촉매가 되어줬다. 너저분하고 위선적이지만, 그 자체로 든든한 물질성을 보여준다. 미워도, 싫어도 그런 물질성 속에서만 삶은 살아지는게 아닌가 깊이 생각했다.

 

미련은 아니고. 아쉬움도 아니다. 하나의 확인이라고 해두자. 선의는 선이 아니다. 무수한 선의의 행동들 가운데 진정한 선은 많지 않다. 떠나는 시점이 바로 그런 것들이 확인되는 시점이다. 나의 위선도 포함해서 말이다. 그런데 어찌됐든 그러한 하나의 던짐으로서의 '선의'가 있었기에 이런 확인의 시간도 얻어진게 아닌가 싶다. 그래서 아마 성숙한 느낌이 조금 드는 것일테다.

 

아마 이제 돌아가서 사람들을 만나면 조금 성숙한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다시 이들을 만나면 좀 더 성숙하게 관계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 내심 기대해본다.

 

20140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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