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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공우익'의 사상화

내 나름의 해석에 따르면, 국내에서는 매우 드물게 최원식 선생님이 한문체와 한글체에 대해 각각 전통과 서구화를 표현한다는 비판을 했고, 나름의 조선적 근대성을 반영하는 국한문혼용체가 한글체에 밀려난 지점을 안타까운 마음으로 지적한 바 있다. 나는 내 나름대로 이 고민을 계속 해왔는데, 최원식 선생님의 문제의식을 만나면서 매우 반가웠다.

 

나는 이 문제를 좀더 깊이 파고 들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고, 그 하나의 매개로서 중한번역을 고민하고 있다. 이 부분은 앞으로 별도로 세심하게 접근하여 논의를 만들고 싶다. 그래서 '중한번역의 실천과 지식윤리'라는 주제를 마음 속에 품고 있다. 적당한 시기에 조건이 되면 나름의 방식으로 논의를 열어내고자 한다. 

 

물론 나는 궁극적으로는 국한문혼용의 복원이 조선적 근대성에 부합한다는 생각이고, 현재의 곤경을 돌파하는 중요한 실천 가운데 하나가 될 것이라고 믿는다. 그리고 그런 노력이 있어야 지식은 지식대로, 대중은 대중대로, 그리고 그 실천의 총합으로서의 역사는 그 나름대로, 윤리적 관계 설정 하에서, 내부의 평화와 공존 속에서, 진보의 길을 갈 수 있으리라 본다.

 

근래 다시 든 생각은 남한의 이러한 서구화된 언어체제가 형성되어 공고화되는 과정이 대체적으로 냉전 과정과 일치하는데, 이것이 지식인과 대중, 그리고 대중 내부(특히 세대 사이, 계급계층 사이) 의 소통 장애의 핵심적 원인 가운데 하나라는 가설이다.

 

전통적 의미에서의 '반공/우익' 세대의 주력인 장년층과 노년층이 세대적 단절+계층계급적 단절 하에서 굳건하게 자신의 이념적 위치를 견지한 채 건재함이 이를 방증한다. 다시 말하면 이른바 '진보'의 이념은 과거 세대와의 이중적 단절을 전제했다는 점에서 자기 근거가 박약한 것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노년층이 생리적 수명을 다하여 사라진다고 하더라도, 우리 내부의 반공/우익주의는 스스로의 힘에 의해 극복한 것은 아니라는 점에서 결국 다른 형태로 재생산되지 않는가라는 지점이다.

 

다시 말해 '반공주의' 세대의 소멸이 내부적 소통과 화해 그리고 혁신을 통한 것이 아니라, 서구화된 언어/지식 체계의 급격하고 강제/동의적인 도입 속에서 소통의 단절에 의한 것이었으며, 이는 오히려 상호적대를 심화하고 있다. 물론 우리 사회 내부의 적대는 '내전' 경험의 트라우마로 이해 정상적 적대의 형태를 취하지 못한다. 

 

그래서 어떤 의미에서 보면 이들 '반공/우익' 세대가 이렇게 역사 속으로 소멸되어 간다는 것 자체가 하나의 중요한 계기의 상실일 수도 있다. 현재의 상황은 역사를 비판적으로 계승하지 못하고 오히려 주도적으로 '망각'하는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어떻게 '반공/우익'을 지금이라도 내재적으로 '사상화'하여 극복할 수 있을 것인지 고민이 필요하다. 어쩌면 그것은 진정한 '화해'의 과정일 수도 있고, 민족적 '사상' 과제의 공유 과정이 될 수도 있다. '사랑'을 배우는 과정일수도 있고, 진정한 '투쟁'을 배울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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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5/19 근황

 

 

2차 자격시험을 준비하면서 박사논문의 전체적인 그림이 다시 그려진다. 게다가 좀더 간결해지는 느낌이 든다. 陳映真의 '민족문학론'과 박현채의 '민족경제론'의 비교참조가 핵심 내용이 될 것이다. 식민/분단/냉전/내전 등의 역사적 고리들의 뒤얽힘에 주목하면서 상호 이중성을 띠는 차별성을 확인하고 그로부터 사상적 과제를 추출하는 작업이다.

 

생활의 계획도 비교적 단순해졌다. 8월 초에 귀국을 하면 청주에서 논문 작업에 매진할 계획이다. 대략 내년 2월을 초고 기한으로 잡는다. 그렇게 되면 4월 이전에는 학위를 받는 작업을 마무리할 수 있을 것 같다.(한국 귀국 전에 조정로의 <民主課민주 수업>의 번역초고를 마무리짓고, 그 후속작업은 한국에서 하게 된다. 그리고, 일본어 공부도 해야한다.)

 

그 외에 학위논문에 포괄하지 못하지만 정리해야 할 것들을 학위 논문 이후에 별도의 연구 작업으로 마무리해야 할 것이다. 일부 학위논문의 내용을 확장해야 하는 부분들도 있다. 아마 2015년부터 2016년 정도 사이에 실행가능할 듯 싶다.

 

1) 중한 번역 실천과 지식 윤리

2) 진영진의 '민족문학론'

3) 박현채의 '민족경제론'의 사상사적 의의

4) 조정로의 포스트-혁명 리얼리즘 문학

5) 전리군의 교육 사상과 지식 윤리

6) 대만과 남한의 상호참조 구상

7) 동아시아 사상해방공간의 역사적 궤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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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전 구조하의 지식과 주체성의 곤경

순리대로 가는 것이 맞다. 불안정이 주는 불안감은 오히려 필요한 긴장감이기도 하다. 사상과 문학의 통일을 이룬 자들은 대체적으로 부업 작가였다. 특히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더욱 그렇다. 진영진도 마찬가지였다. 물론 내가 작가가 되려는 것은 아니지만 최소한 '사상'을 견지하기 위해서는 그들에게 배울 점들이 있다.

 

사실 현실의 불안와 긴장이 적절한 수준에서 유지되려면 스스로 소유하지 않으면서도 넉넉할 수 있는 여유가 있어야 한다. 근래의 번민은 어쩌면 벌써 많은 것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되살펴보게 된다. 그렇다... 주어지는 만큼 순리대로 한 걸음씩 간다.

 

근래에 글을 많이 읽지는 않았고, 생각을 좀 오래 했다. 진영진의 작품을 전체적으로 재독하기 위한 기본 문제의식을 추상하기 위한 노력이었다. 대략 방향은 '냉전 구조 하의 지식과 주체성의 곤경'으로 잡았다. 이는 앞으로 박현채의 부분까지도 끌어 안기 위한 넉넉한 틀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앞서 다소 초보적으로 메모를 해두었지만, 남한의 시각에서 진영진을 읽었을 때, 역시 핵심적으로 주목되는 부분은 진영진이 마주한 사상적 과제로서의 '분단의 중첩'이라 할 수 있다.

 

식민 분단과 내전 분단이라고 할 만한 두 차례의 분단은 '대만'에게는 기본적으로 수동적이고 외재적인 것이었는데, 이는 상대적으로 이중성을 갖기 때문이다.

 

전자의 경우 수동적이었기 때문에 갖는 한계들이 분명하지만, 동시에 (조선과의 상대적 의미에서) 주체적 피식민이 아니었기 때문에 주어지는 '공백' 또한 존재한다. 지식계급의 참여 자체가 수동적이었다는 의미는 '저항' 자체가 상대적으로 박약했다는 의미인데, 조선의 경우와 같이 '저항'이 사상에 값할 수 없었을 때 초래되는 후과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로울 수 있다는 점이 지적될 수 있다. 바로 기존의 왜곡된 지식과 싸워서 내부로부터 주체적 전환을 이루는 것보다 비주체적 수용이라는 표면적 흐름의 배후에 존재하는 '공백'을 주목하고 이를 채우는 것이 더 관건이 되었던 것이다. 이는 일정하게 대만이 '준국가'의 수준에서 탈식민 작업을 진행해야만 중국에 복귀할 수 있는 주체성이 확보된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조선의 식민성은 지식적 주체성(저항의 한계)이 분석되어야 하고, 자기성찰이 매우 중요하게 되지만, 대만의 경우 지식의 공백이 분석되어야 하고, 이를 채우는 것이 중요해진다. 

 

후자의 경우는 내전의 외부성이라고 부를 수도 있을텐데, 조선전쟁과 비교할 때 대만은 내전의 현장인 적이 없었다는 의미에서 내전으로 인한 분단의 영향을 부분적으로만 받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민중 내부의 상호 적대와 원한의 문제는 그 기초가 박약하다는 것이고, 나중에 省籍 모순으로 표현되기도 하지만 이는 남한 내부의 적대와 비교했을 때 대체적으로 가상적 적대의 수준이다. 이로 인해서 대만에서는 국민당이라는 억압적 통치 집단과 대만 민중의 적대가 비교적 분명하고, 그로 인해서 '외부성'의 한계를 극복하는 역사적 방향도 국민당의 백색테러에 대한 재조명으로 집중된다. 그렇지만, 내전의 외부성의 한계는 근본적으로 내전의 대중적 기초로서의 이데올로기적 대립을 내재적으로 전유하지 못한다는 점인데, 따라서 단순한 백색테러에 대한 재조명만으로는 내전을 낳고 그것을 역사적으로 추동하는 민중적 역량의 구성이 용이하지 않게 된다.

 

식민 분단에 대한 인식은 내재적 전통에 대한 복원과 재계승 및 학습으로 나아간다. 투옥 이전의 과정은 대략 이러한 실천으로 채워진다. 여기에는 중국의 혁명 및 현대적 전통 뿐만 아니라 전근대적 전통까지 포함된다. 그러나 수감 기간 동안 백색테러 피해의 당사자인 대만 공산당 조직원 등의 인물들을 만나면서 대만에서 내전의 연속성을 발견하면서 그것을 내전으로부터의 외부성을 극복하는 핵심적 실마리로 삼게 된다.

 

그러나 출옥 후의 대만은 진영진에게 다시 이중적 과제를 부여했다. 하나는 감옥에서 만났고 이별했던 선배들의 유언을 집행하는 것이다. 바로 내전의 연속성으로서의 백색테러를 재조명하고 대만의 좌익을 복권시키는 것이다. 또 다른 하나는 냉전 하에서 진행된 '현대화'와 자본주의화의 문제를 민중적 시각에서 인식하는 것이다. 이는 통/독이라는 가상적 모순이 국민국가적 의회정치에 의해 물질성을 얻어 가는 과정에 대한 비판을 위해 사상을 모색한 것이다. 그래서 진영진은 '사상의 빈곤'을 반복하여 호소하게 되고 나중에 <대만정치경제학총간>을 직접 주편하게 된다. 이는 아주 직접적인 체험과 관찰에서 주어진 것인데, 당시 대만 사회에 중간층이나 상층 또는 하층에 생활 수준에서 이미 통/독 모순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노동자와 농민 계층은 외성인과 본성인 가릴 것 없이 잘 지내고 있고, 또 중상층의 부르주아들 내부에서도 그런 적대는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진영진은 로타리 클럽과 노동자들이 일하는 공장 등을 예를 들기도 했다. 진영진이 보기에, 정치경제학비판에서 주어지는 민중구성에 대한 인식은 가상적으로 구성된 통/독 모순과 대만 분리주의에 대한 비판으로서 적절했던 것이다.

 

그런데 현실을 보면 그것으로는 역부족이었나 싶기도 하다. 진영진의 판단과 인식은 대체적으로 옳았지만, 현실은 그의 뜻대로 전개되지 않았다. 냉전의 구조가 지식 차원에서 만들어낸 억압과 왜곡, 그리고 민중 생활 상에 만들어낸 변질 등은 지식의 주체성과 민중의 주체화에 질곡이 아닐 수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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