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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감당한다는 것 20140419

"망각을 거부하라"

 

역사로부터 현실로부터 뿌리뽑힌 민족이 마주한 위기가 현실화되고 있다. 공동의 삶에 기초한 공동체의 유대는 그저 기억 저 편에 어렴풋하게 화석처럼 남아 있을 뿐인가 싶다. 위기의 현실화 속에서 그 폭력의 태연함 속에서, 마치 언제 우리가 하나의 민족이었느냐는 듯 비웃음이 들려오는 듯 하다. 이는 최소한의 윤리의식도 느껴지지 않는 잔혹한 폭력의 현장이다.

 

인간성 상실의 전면적 위기를 마주하면서도, 동물적 권력 욕망, 물질적 욕망의 논리에 의해 파편화된 사회를 극복할 논리를 갖추지 못한 절망적인 지식과 문화의 무능이 근본적인 문제임을 인식하자. 

 

지금 우리는 폭력의 악순환으로 빠질 것인가, 강요된 망각의 역사를 되찾아 윤리적 관계를 복원할 것인가 그 기로에 서 있는 것이 아닐까. 

 

念念不忘,必有迴響。

잊지 않고 기억하면 결국 응답이 있으리라.

 

***

온갖 폭력이 난무한다. 뉴스를 보고 있을 수가 없다. 정권도 언론도 인간을 존중하는 방법을 모른다. 나도 잘 모르겠다. 가르쳐주질 않았다. 아무도... 수많은 죽음 앞에서 그저 권력의 안위의 논리에 갇혀 있다. 그러나 직시하자. 그들이 그럴 수 있음은 또한 그 수많은 희생자들의 부모와 가족들의 지지 덕분이 아니었던가. 그리고 지금도 그렇지 않은가. 우리 어른들도 그들의 자기정당화를 위한 시간끌기에 동참하고 있지 않은가. 이후에 또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 

 

이 광경이 얼마나 익숙한가. 20세기 내내 반복되어 왔던 우리의 역사가 아닌가. 그 역사를 한번도 제대로 반성하지 못하고, 그것을 반성할 지식과 문화를 가지지 못했고, 그 방법을 알지 못했던 무지한 민족의 업보라 할 수 밖에... 지식이 그에 값하려면 지금이라도 같이 살아가는 방법을 고민해야겠다. 

 

4.19... '역사를 감당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곰곰히 다시 생각하게 된다. 지식인들의 위선, 망상, 가식은 이미 충분했다. 이제 진정 자신의 삶을 걸어야 한다. 윤리적 삶에 값하는 지식 작업을 해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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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원식

최원식 선생님의 책을 꼼꼼히 읽어보니 참으로 감동적이다. 아마도 그 문명론적 사유 때문이겠지만, 확실히 백낙청 선생과는 전혀 다른 입지점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동아시아론도 백영서 선생님이 백낙청 선생의 기본 틀에서 확장한 것에 멈추는 반면, 최원식 선생님의 동아시아론은 전혀 다른 독창성을 가진다. 그런 의미에서 <창작과비평>의 담론 또한 그 내부적 복잡성을 고려할 필요가 있음이 분명해진다. 암튼 분단체제론이 당시 민족모순(민족론)과 계급모순(민중론)이라는 보편주의적 현실성을 다소 방기하면서도 그것들의 이원화되어 전개된 보편주의적 운동론에 막힌 사상적 흐름을 여는 틀거리로서 역할을 했음이 최원식 선생님의 작업을 통해 증명되는 듯 싶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단체제론이 그 세대적 한계로 인해 민족-민중론을 희생시켰음은 상기될 필요가 있겠다. 그렇게 해서 박현채 선생의 민족-민중론과 최원식 선생의 문명론이 결합될 가능성이 열릴 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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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책 출간에 부쳐

<전리군과의 대화>의 출간으로 개인적으로는 또 하나의 매듭이 지어졌다. 이 책은 지난 2012년 가을 <모택동 시대와 포스트 모택동 시대 1949-2009 다르게 쓴 역사> 출판 기념 집담회의 토론 내용을 정리한 것이 주가 되었고, '꿈과 같은 인생'이라는 전리군 선생의 자신에 대한 학술 및 인생 결산의 글을 번역하여 앞쪽에 배치하고, 뒷쪽에 졸고 '전리군의 다르게 쓴 역사'의 한국어판을 넣었다.

 

일반 독자들은 어떻게 읽을지 가늠하기 어렵지만, 순서대로 읽는 것이 좋을 듯 싶다. '꿈과 같은 인생'은 참으로 감동적인 글인데, 학술과 삶을 일체화하여 살아온 전형으로서의 전리군 선생의 진면목이 드러난다. 이 글 하나만으로도 이 책은 충분히 돋보이지 않나 나름 자부한다.

 

책의 핵심 내용은 물론 박재우, 백승욱, 백원담, 조희연, 이홍규 등의 국내 지식인과 전리군 선생이 나눈 토론과 대화인데, 이 또한 기간의 단편적이고 왜곡된 전리군 이해에 일정한 교정 작용을 하여, <모택동 시대와 포스트 모택동 시대>를 (다시) 읽어내기 위한 중요한 논점들을 제시해주고 있다.

 

마지막에 들어간 나의 졸고는 <인간사상> 2기에 실린 글의 축약번역한 것인데, 지금와서 보면 부족한 부분이 적지 않게 보이지만, 나름대로 전리군 선생의 사상적 작업의 궤적 속에서 <모택동 시대와 포스트 모택동 시대>의 함의를 밝히고자 쓴 글로서, 중화권 뿐만 아니라 국내의 논의에서 공히 나타나는 편향적 독해에 대해 내용보다는 그 관점과 방법적 차원의 차별성을 보여주고자 노력했다. 솔직히 말해서 전리군의 모택동 비판은 그 자신도 황자평 선생의 지적에 동의한다고 했지만, 사실 모택동적인 측면이 상당히 많고, 또한 매력적이고 위력적이다. 연구자들의 경우 오히려 노신과 모택동이 사상적으로 어떻게 교직되어 구현되는지를 중심으로 전리군의 <모택동 시대와 포스트 모택동 시대>를 읽을 필요가 있다는 개인적 생각이다.

 

암튼 다른 작업들이 진행되는 가운데 또다시 과거의 작업과 만나게 되었다. 이런 만남은 참 흥미로운데, 일정하게 잊고 지내는 것들을 상기시켜주기 때문이다. 전리군 선생님으로부터 배웠던 것을 잠시 잊고 있었던게 아닌가 하는 반성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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