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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조점으로서의 대만

藝術人生님의 [대만과 남한의 상호참조] 에 관련된 글.

 

대만이 남한에게 참조점이 될 수 있는 것은 일본의 식민지배를 받았다는 점, 그리고 대만이 중국에서 분단되어 떨어져 나왔으며, 남한이 조선에서 분단되어 떨어져 나왔다는 유사성에서 일차적으로 주어진다. 이는 당연하게 대만이 중국의 일부로서 또한 남한이 조선의 일부로서 갖는 역사적 계승성을 전제하는 논리이다. 그러나 그러한 '식민'/'분단'의 유사성은 궁극적으로 역사 안에 놓여져야 한다. 즉, 중국과 조선이 역사적으로 공유하는 모종의 국제주의적 구역區域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경험이 분단과 현대적 국민국가의 형성으로 유실되거나 망각이 강요되면서 사상과 실천이 역사적으로 단절된 상황을 낳았고, 표류하는 붕뜬 주체 상태 속에서 사상에 근거한 아래로부터의 구성적 조직력은 갈수록 약화되고 결국 극단적 폭력에 무방비로 노출되는 상황에까지 다다른 것이다.(이번 세월호 사건은 매우 징후적이다) 그래서 '중국'은 분단된 조선의 일부인 '남한'에게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리고 그러한 '중국'의 분단된 일부로서의 '대만'은 또 다른 차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남한에게 '중국'이 이상적 참조점이라하면, '대만'은 현실적 참조점이라고 대략 정의해둘 수 있겠다.

 

현실적 참조점으로서의 대만은 남한과 유사하면서도 다른 역사적 경험을 했다. 이를 아주 잘 드러내주는 매개가 진영진(陳映真, 1937~ )이라는 대만의 문학가이자 사상가라고 할 수 있다. 우선 남한에는 적어도 해방이후 문학가이자 사상가라는 이 전통이 부재하거나 매우 희박했다고 할 수 있다.(그나마 김지하 정도가 일시적으로 그에 육박했던 것 같다) 이 전통은 '노신'에게서 유래하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사상 아래에서 문학이 실천의 기능을 담당하는 것이다. 진영진의 표현으로 하면 '무엇'을 써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이 전제되며, 그러면서도 그것을 쓸 수 있는 능력을 갖춰야 된다는 것이다. 그 '무엇'이 곧 '사상'이다.

 

남한의 관점에서 볼 때, 진영진이 '노신'과 같은 사상가이자 문학가가 될 수 있었던 데는 두 가지 요인이 먼저 주목된다.(물론 중국에서의 노신의 위치처럼, 대만에서도 진영진 외에는 사상가+문학가에 값하는 인물은 거의 없는 것 같다. 물론 진영진은 노신과 달리 혁명 이후 혁명이 좌절된 당대 역사를 살아온 특수성이 그 문학과 사회적 실천에 반영된다. 특히 정치조직을 직접 만들고 조직가로 활동하기도 했다. 그 성과들은 현재 이른바 '통일좌파'로 다소 왜소해진 상황이다)

 

첫째, 중국의 일부로서의 대만을 재전유하였고, 또 노신의 사상을 전유할 수 있었다. 그는 자각적으로 중국의 신문학을 공들여 배웠다.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바로 1945-1949년이라는 해방 공간 전후에 대륙에서 건너온 교사 및 지식인들의 역할이 컸다. 진영진은 이때 대략 소학교 및 중학교를 다녔다. 중학교 때 노신을 접했고, 20대 중후반 여러 계기를 통해서 노신 등 중국의 신문학, 모택동 등을 접했다. 즉 청일전쟁의 결과로 1985년 일본에 할양되어 식민 지배를 받은 대만에서 태어난 이른바 '본성인' 출신인 진영진은 해방공간 및 그 여파와 유산 속에서 중국과 노신을 전유할 수 있었다. 본래 대만의 식민은 대만과 일본의 관계에서 주어진 것이 아니었다는 점에서 대만인에게는 '비주체'적이었는데, 민족적 주체성과 사상적 전통의 계승으로 이러한 식민성의 제약을 극복하는 탈식민을 시도했고, 이를 통해 중국으로의 복귀하고자 했다. [광복 이후의 조선에는 '노신'이 없었고, 분단 이후 남한에는 '노신'과 '중국'이 모두 없었다. (북조선이 '중국'의 역할을 하지 못했음은 내전의 형식과 관련되는 것 같다.)]

 

둘째, 대만은 지리적으로 대륙과 분리된 섬으로서의 일본의 식민지였기 때문에, 중국의 항일투쟁의 전체 과정에서 상대적으로 대륙과 거리를 가지게 되었고, 특히 광복 이후 대륙에서 전개된 국공 내전으로부터 사실상 배제됨으로 인해서 한편으로는 민족 내부의 상호폭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물질적/정신적 생활 조건의 개혁과 결부된 그 이데올로기적 대립 자체를 경험하지 못하게 됨으로 인해 1946-1949년 사이 대만에서 反국민당의 과제가 아래로부터 제시될 수 없었다. 그래서 당시 1949년을 전후한 대만의 정세는 조선반도 처럼 상호살육의 대대적 내전의 상황으로 전개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역사적 복권이 상대적으로 용이한 측면이 있으나, 다른 한편 내전이 포함하는 모순으로부터 외재적이었다는 점에서 모순 파악이 용이하지 않았고, 모순으로부터 주어지는 대중적 기초 또한 부재했다. [조선은 분단과 내전, 다시 분단이라는 과정을 겪었는데, 특히 내전이 주체적으로 종료되지 못했다는 점에서 그 내적 역사적 동력을 소실하게 된다. 물론 이는 전쟁의 출발점에서부터 중국의 '근거지'를 중심으로 한 내전과 그 성격이 달랐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게다가 식민을 통한 왜곡이라는 측면을 고려하면 인민 해방의 과정은 더욱 치밀한 준비가 필요했다고 할 수 있다. 모택동과 김일성 등의 오판을 역사화할 필요가 있다]

 

즉, 대만인을 중국인 가운데 중공에게 빼았기지 않은 국민당 지역의 중국인으로 파악하고, 이를 내전의 연속성 속에서 파악했던 국민당 지배층의 시각과, 이와 같은 국민당을 다소간 식민을 극복하고 모국으로 회귀를 도울 대리자로 파악했던 대만 인민의 시각 사이에 엇갈림이 발생했던 것이다. 다시 말해서 중국 대륙에서 반식민을 극복하고 이미 내전으로 접어든 시점에서 국민당의 과제는 기본적으로 반공주의로 표현되는 것이었는데, 일본으로부터 해방되었지만 내전의 외부에 놓였던 대만은 일본 식민의 잔재를 청산하고 중국으로의 복귀하는 민족적 과제가 우선이었던 것이다. 1947년의 228은 이런 맥락에서 읽어야 한다. 그래서 228은 단순히 중국이라는 새로운 제국이 대만을 억압한 사례가 아니라, 내전의 연속성 속에서 반공주의적 폭력의 표현으로 나타난 것이다. 이는 228 이후에 훨씬 적나라해진다.

 

진영진의 문학은 기본적으로 이러한 대만의 모순을 다루고 있다. 식민과 분단이 중첩되고, 동시에 그로부터 소외된 대만이 이를 주체적으로 극복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가 착목한 것은 두 가지였다. 첫째, 바로 식민성에 대한 역사적 검토. 간단히 말하면 일본의 식민지배의 역사적 정당성의 문제와 해결 곤란의 지점들을 파악하는 것. 50년의 식민지배가 초래한 대만의 물질적 정신적 왜곡을 치유하고자 했던 것이다. 둘째, 내전을 전유하기 위한 대만 내부 좌익의 노력들에 대한 역사적 복원과 복권. 그의 후반기 소설의 주요제재가 되는 백색테러가 그렇다. 대만의 공산당의 유격대 활동과 비참한 궤멸 등을 그가 옥중에 있었던 8년 동안 그 안에 함께 있었던 정치범들을 통해서 접하게 되고 그들이 남긴 유언이 그의 출옥 후의 활동을 결정한다.

 

진영진의 문학과 사상에 대한 내 나름의 독해를 시도하기 위한 출발점을 이 정도로 잡아 둔다. 지난 가을 통독했던 진영진의 문학작품을 꼼꼼히 재독하면서 이와 같은 모종의 남한의 '결핍'을 바탕으로 한 다시 읽기가 진영진 해석을 좀더 풍부하게 해줄 수 있기를 기대하고, 나아가 다시 박현채의 고독을 재조명해줄 수 있는 또다른 지렛대가 되어줄 수 있기를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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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과 남한의 상호참조

역사적으로 두 가지 비대칭성이 확인된다.

 

1) 북조선과 중국이라는 맞은 편과의 분단의 차별성. 이는 대만이 내전 이전에 분단되고, 내전의 외부에서 내전이 불완전하게 종료되면서 분단이 고착화되었다는 역사적 사실, 그리고 남한이 내전의 내부에서 그것이 불완전하게 종료되면서 분단으로 고착화되었다는 역사적 사실 사이의 비대칭성과 결합되어 복잡화된다. 이는 남한에서 사상적 단절이 대만에 비해 훨씬 심각했으며, 회복이 더욱 곤란했음을 말해준다. 

 

2) 식민성의 차별성. 이는 대만이 청일 전쟁의 결과로 할양되었다는 점에서 대만 사회의 측면에서 볼 때, 수동적으로 식민지화되었다는 점, 한편 조선이 불평등 조약으로 인해 식민화되었으며, 조선의 역사적 전통이 왜곡을 거쳐 남한으로 일정하게 계승되었다는 점 사이에서 발견되는 차이라 할 수 있다. 특히 조선-남한의 계열은 식민성에 대한 전통적 사회의 저항이 일정하게 계승된다는 점을 보여주고, 특히 조선으로부터 내려오는 '문'의 정치원리가 일정하게 유제로 남한에서도 작동한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남한의 지식계급이 보여주는 제한적인 헌신성은 이와 관련된다.

 

이와 같은 비대칭성을 고려할 때, 진영진이 가진 독특성은 다시 주목된다. 분단 하에서도 2)와 같은 한계에도 불구하고 1)이 갖는 당대적 현실성 및 진영진의 투옥과 옥중에서의 역사적 계승성의 재확인 및 복원 등으로 인해, 진영진은 제한적으로나마 사상적 단절을 극복하게 된다. 그래서 사상가이자 문학가로서의 진영진이 탄생할 수 있었던 것이다. 진영진이 출옥 후에 '문화' 운동을 제창한 것은 그가 당장 변혁 역량이 부재한 상황을 냉철하게 인식했음을 보여주고, 그로 인해서 '주체성'의 회복이 더욱 우선된다는 점을 자각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봤을 때, (아직 매우 가설적이지만) 남한의 경우 분단 하에서의 내전과 북조선과의 대결 및 냉전 반공체제 하에서 사상적 단절이 극복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1)의 제약이 한편으로는 반공주의의 강화 다른 한편으로는 북조선으로부터의 좌익적 이탈을 낳아 사상적으로 표류하는 상황이 지배적이었던 상황으로 전개된다. 

 

따라서 대만에서 민중/민족문학이 진영진에 의해 '향토문학'으로 제창되었고, 남한에서 70년대에 민족문학이 복원되었다고 하더라도, 이를 같은 차원에서 비교하기 어렵다는 문제에 직면한다. 남한의 경우 민족문학은 복원된 적이 없었다고 보이는데, 이는 민족문학이 복원되기 위한 전제로서의 사상적 복원이 이뤄진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 형식적 표현이 바로 사상가와 문학가의 분리라 할 수 있고, 문학의 측면에서 보면 작가와 평론가의 분리라 할 수 있다. 결과적으로 보면 남한의 당대 역사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민족문학' 자체의 성립이 불가능한 조건이지 않았는가 하는 질문을 던질 수 밖에 없다.

 

그런데 매우 역설적인 것은 진영진이 80년대에 스스로 '사상의 결핍'을 자각하면서, '남한'을 방문하고 '남한'의 변혁세력에 대해 커다란 경외감을 가졌다는 점인데, 이는 사실상 모종의 '과대평가'라 할 수 있고, 이와 관련해서 박현채가 늘 민중의 주체적 역량의 관점에서 민중과 유리된 지식계급의 급진화에 대해 경계했던 것과 크게 대조된다는 점은 특기할 만하다. 게다가 진영진은 박현채의 '민족경제론'을 원용하기도 했다. 이는 역설적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박현채는 또한 주목되어야 한다. 7-80년대 남한은 '문학'의 시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물론 지금 시점에서 보면 남한과 대만 모두 '당대'의 냉전 역사를 내재적으로 사상화하는 작업에 실패했다고 보이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만의 경우 진영진의 작업이 문학적으로나 사상적으로 남아 있고, 이를 계승하고자 하는 노력들이 진광흥 선생등에 의해 축적되고 있는 반면, 남한의 경우 그나마 이를 부분적으로나마 인식했던 박현채와 같은 이의 사상작업은 묻혀있는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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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유명사와 지식윤리

藝術人生님의 [번역과 관련한 가설적 연구 주제 하나.] 에 관련된 글.

 

'고유명사'라는 관념 자체는 '현대성'의 반영이 아닌가 유럽의 역사적 맥락에서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 물론 우리에게 이 보다 더 적실한 주제는 "이러한 '고유명사'의 체계가 어떻게 수입되어 원용되고 있는가" 이다. 물론 이는 '지식의 나눔'이라는 윤리적 문제에 관련된다.

 

일반적으로 '고유명사'가 표현하는 것은 '고유성'이다. 이는 '배타성'이라는 성격을 가진다. 그로 인해서 '번역'되지 않는다. 달리 표현하면 '독점'이다. 나는 '나'로서만 존재한다는 것이다. 너희들이 '나'를 나누어 가져서는 안된다. 이는 우리의 번역 현실에서 '번역되지 않는 고유명사'로 표현된다. 특히 유럽적 언어들의 경우 인명, 지명 뿐만 아니라 일간지 및 잡지 이름도 그렇게 '번역'되는 경우가 많다. 아마 이를 비유럽세계에까지 적용한 가장 급진적인 실천의 사례가 <창작과비평>의 '고유'한 번역실천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미지'의 세계인 유럽에 대해서 그러한 실천은 일반적 관행과 큰 차이가 없기 때문에 그나마 낯설지 않게 느껴지지만, 우리의 역사의 일부인 '중국'과 관련해서 그런 실천이 급진적으로 실행될 경우 여러 충돌이 발생할 수 밖에 없다. 물론 요즘은 '남들'도 아는 분야에 대해서는 적당히 '타협'하는 모양새도 취하는 듯 하다.

 

'번역되지 않는 고유명사'는 직간접적 번역능력을 가진 지식인만이 그 의미에 상대적으로 온전하게 접근할 수 있다는 점에서 엘리트주의적 실천의 결과물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런 위선적 번역의 대상으로만 존재해온 '유럽'에 대해서 우리는 여전히 알지못한다고 할 수 있다. 달리 표현하면 '번역자'들만 알고 있다고 할 수도 있다. '타자'를 번역하지 않는 방식은 '자신'의 번역불가능성을 주장하기에 이르게 된다. '타자'를 번역을 통한 '나눔'을 통해 이해하려고 하지 않는 것처럼, '나'를 나누고자 하지 않는다. 역으로 진정한 '번역'은 '타자'의 것을 나누어가지는 것이고, '나'를 타자와 나누는 것이기도 하다. 즉, 번역은 '나'와 '타자'의 동시적 다원화의 방법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보편성'과 갈등적이게 된다. '다원화'는 개별적 역사문화의 맥락에 근거해서 진행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진정한 번역은 이와 같은 존재론적 전제를 갖게 된다. 개별민족사가 영원히 세계사를 구성해가는 하나의 과정으로서의 역사를 전제한다. 그리고 그러한 과정에서 진정한 번역을 통한 지식의 형성과 이를 매개로한 대중의 주체화는 또한 인식론적 전제가 된다.

 

따라서, 역사 속 대중의 '주체성'은 '지식'에 의해 보증되고, '지식'은 '민족적인 것'에 의해 매개되어야만 한다. 그러한 역사적 매개를 통해서 세계와 사회에 이중적으로 존재하는 인간의 주체성이 해명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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