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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국을 앞두고...

젊은 좌익 연구자의 비관주의를 극복하는 것이 중요하다. 게다가 그것은 다소간 패배주의, 써클주의, 선민의식과 결합되어 있다. 8-90년대의 어떤 전환과 분명 관련되어 있을 것이다. 이 때문에 연구자는 사상적 과제를 인식하지 못하고, 연구를 통한 사상적 돌파를 끌어내지 못하게 된다. 그러다 보니 좌익이론의 비현실성은 더욱 심화되고, 현실과의 관계에 있어서 우익만도 못한 자기만족적 성과로 그치게 된다. 그 구체적 표현이 운동 추수적 좌익 이론이다. 운동 뒤에 숨은 이론은 사실 이론이 아니다. 80년대 말 이후, 역사의 전개 과정에서 이론의 지도적 역할은 사실상 부재했던 것 같다.

 

그래서 그런 가운데 성장한 우리들은 진정한 주류적 질서나 권력 체제에 제대로 덤벼보지도 못하고, 그럴 용기도 없으며, 객기를 부려 한번 덤벼봤자 바로 나가 떨어진다. 그게 적어도 근래 20여년, 우리 세대, 대략 40세 이하, 90년대 중반학번 이후 연구자들의 대체적 경험이었던 것 같다. 예전엔 참여할 마당이 없었던게 문제였다면, 지금은 멍석을 깔아줘도 놀 능력이 없다. 엘리트주의적인 추상적 담론으로 도피하거나, 운동추수적인 좌익이론주의로 머물거나 둘 중의 하나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과제에 대한 공통 인식이 주어지면 사람은 자연스럽게 모이기 마련이다. 각자의 역할도 자연스럽게 분업화된다. 그런 공통인식이 부재할 때, 사람은 흩어지고 불필요한 관념적 논쟁과 분기가 전개된다. 아마 80년대 말의 상황이 일정하게 그 기원이었지 않았나 싶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제대로 극복되지 않은채 그 후과가 재생산되고 있지 않은가 하는 심각한 진단을 하게 된다. 게다가 각종 이론물신화는 내부적 소통을 더욱 가로막고 있기도 하다.

 

그나마 분과학문으로 들어가면 나름대로 성과를 내는 연구자들이 없지 않지만, 문제는 사상적으로 그들을 묶어주는 구심도 없고 기제도 없다는 점이다. 과거에는 좌익 진보의 연구자가 주류 학문을 압도할 정도로 연구에 있어서나 사상적 실천에 있어서나 압도적이었던 적이 있었지만, 이제 그런 연구자를 만나보기란 참으로 난망한 상황이 되었다. 

 

무슨 이야기를 어디에서부터 누구와 시작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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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에 반항하라.

사용자 삽입 이미지왕 선생님의 《反抗絕望》이 번역되었다. 교수신문에 역자의 글이 올라왔다. 

http://www.kyosu.net/news/articleView.html?idxno=29196

 

《反抗絕望》이 《절망에 반항하라》로 번역되어 나왔다. 제목에 대해 사족을 달자면, 중국어의 '反抗'을 축자적으로 '반항'으로 번역해야 했는지 다소 의문이다. 책을 아직 입수하지 못했으니 관련된 역자의 설명이 있는지는 확인하지 못했다. 이 번역을 틀렸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저항'이라는 일반적 번역어를 포기할 정도로 왕 선생이 쓴 '反抗'이 독자적 의미를 따로 가지는지의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 만약에 그렇다면 우리말의 '반항'에 하나의 또 다른 의미를 추가할 수 있는 계기가 된다. 암튼 수년 동안 '저항'으로 읽어왔던 나로서는 다소 어색하지 않을 수 없는 제목이다.

 

5년 전에 전錢 선생님 수업을 듣고, 3년 전에 왕汪 선생님 수업을 들으면서 사실 초보적으로 둘 사이의 비교연구를 모색해본 적이 있었다. 왕 선생님은 본래 많이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수업을 듣기 전에 이미 초보적인 비교를 해서 薛毅 선생의 노신 수업의 텀페이퍼로 왕 선생의 '실존주의'적 측면을 다소 무식하게 정리해 본 적도 있었다. 그래서 나중에 도출된 과제는 왕 선생님의 '절망에 대한 저항'과 전 선생님의 '망각에 대한 거부' 사이의 차별성에 대한 논구였다. 낭만주의, 실존주의, 현상학, 해석학으로 이어지는 흐름은 사실 기본적으로 '개체'와 '세계'를 대면시키는 구도이다. 그래서 사실 개체의 관계 속의 자유와 그 근거로서의 공동체의 개별적 역사를 해석할 수 있는 사상적 구도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내가 보기에 이와 대칭적인 또 다른 사상 구도가 세계체계론과 그 아류들이다. 사실 왕 선생님의 노신 연구는 그 이후의 중국 현대성 연구와 강한 연속성을 갖는다고 나는 보았다. 왕 선생님의 논의에 진정한 의미에서의 '주체'의 문제의식이 늘 부재한 것은 이 때문이다. 왕 선생님의 '존재론'적 편향과 대조적으로, 전 선생님의 '망각에 대한 거부'는 '인식론'적 편향일 수도 있다. 여기에서는 존재론과 인식론의 서로 다른 조합이 어떤 효과를 내는지는 구체적인 풍부한 조사와 연구를 통해 분석되어야 할 것이라는 정도만을 지적해둔다. 물론 사상적 과제의 도출이 '역사'적 단절과 관련된다는 의미에서 나는 여전히 전 선생님의 논의에 다소 더 주목하고 있다.

 

왕 선생님의 이 논의가 새로운 것일까? 이런 의문을 제기해본다. 물론 새로운 것이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새로움을 인식할 시각과 관점을 우리가 가지고 있는 지는 의문이다. 중국을 또 다른 '보편'/'특수'로 받아들이는 우리의 주체성 부재의 문제는 생각 보다 뿌리가 깊다. 이는 식민성의 문제이다. 왕휘 선생을 우리 안에 맥락화하여 우리 자신을 불편하게 만들지 못하는 왕휘 선생에 대한 연구, 나아가 중국 연구는 사실 뿌리가 없는 중국 연구이다. 주체 없이 대상에 함몰되는 중국연구이다. 왕휘 선생의 작업에 대한 우리의 주체적 지적 작업은 우리 자신을 불편하게 할 뿐만 아니라 나아가 왕휘 선생 자신을 곤혹스럽게 하는 것이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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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無悔》출판 기념 토론회 후기

자격고사 준비하면서 시간을 쪼개서 진명충陳明忠 선생의 회고록을 읽었다. 그리고 6월 29일 오후 月涵堂에서 열린 토론회 2부에 참여해서 간단히 발표했다. 이날 1부와 2부의 내용은 《人間思想》 여름호에 실릴 예정이다.

 

이번 토론회의 참여는 7년간의 대만 생활을 마무리하는 시점에서 주어진 대만에서의 마지막 공식 발언 기회였다는 주관적인 의미를 갖는다. 어쩌면 지난 반년 동안 시험을 준비하고 치르면서 정리했던 내용을 진명충 선생의 회고록을 계기로 해서 요약해보는 시도였다고 할 수도 있겠다.

 

주요하게는 민족해방운동과 전쟁의 과정에서 대만/조선 등 '식민지' 해방의 '주체성'의 문제, 그리고 80년대의 개방공간에서 '통/독'구도에 휘말린 좌익의 오류에 대한 지적이었다. 전자의 실마리로 식민지에서 '조선전쟁'의 민중 외부성의 문제를 가설적으로 제시했고, 후자의 문제는 역사적 비판성이 현실적 비판성과 결합되기 위한 조건에 대한 성찰을 요구했다. 담론적 정당성만으로는 현실적 비판성과 결합되지 못하고, 오히려 주류적 담론질서에 적응하면서 수동적 정체성을 갖게 되는 문제가 있음을 지적했다. 이는 사실상 대만의 통일/좌익 세력에 대한 비판적 조언이었다.

 

8월에 한국에 돌아가게 되었고, 일할 곳도 정했다. 기간 몇 년 동안 '생활'의 기초가 부실한 탓에 정신적으로도 많이 퇴락했던 것 같다. 이제 다시 생활하면서 그 안에서 더욱 진정성을 갖는 공부를 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게 된다. 쉽지는 않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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