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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 선생님의 《反抗絕望》이 번역되었다. 교수신문에 역자의 글이 올라왔다.
http://www.kyosu.net/news/articleView.html?idxno=29196
《反抗絕望》이 《절망에 반항하라》로 번역되어 나왔다. 제목에 대해 사족을 달자면, 중국어의 '反抗'을 축자적으로 '반항'으로 번역해야 했는지 다소 의문이다. 책을 아직 입수하지 못했으니 관련된 역자의 설명이 있는지는 확인하지 못했다. 이 번역을 틀렸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저항'이라는 일반적 번역어를 포기할 정도로 왕 선생이 쓴 '反抗'이 독자적 의미를 따로 가지는지의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 만약에 그렇다면 우리말의 '반항'에 하나의 또 다른 의미를 추가할 수 있는 계기가 된다. 암튼 수년 동안 '저항'으로 읽어왔던 나로서는 다소 어색하지 않을 수 없는 제목이다.
5년 전에 전錢 선생님 수업을 듣고, 3년 전에 왕汪 선생님 수업을 들으면서 사실 초보적으로 둘 사이의 비교연구를 모색해본 적이 있었다. 왕 선생님은 본래 많이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수업을 듣기 전에 이미 초보적인 비교를 해서 薛毅 선생의 노신 수업의 텀페이퍼로 왕 선생의 '실존주의'적 측면을 다소 무식하게 정리해 본 적도 있었다. 그래서 나중에 도출된 과제는 왕 선생님의 '절망에 대한 저항'과 전 선생님의 '망각에 대한 거부' 사이의 차별성에 대한 논구였다. 낭만주의, 실존주의, 현상학, 해석학으로 이어지는 흐름은 사실 기본적으로 '개체'와 '세계'를 대면시키는 구도이다. 그래서 사실 개체의 관계 속의 자유와 그 근거로서의 공동체의 개별적 역사를 해석할 수 있는 사상적 구도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내가 보기에 이와 대칭적인 또 다른 사상 구도가 세계체계론과 그 아류들이다. 사실 왕 선생님의 노신 연구는 그 이후의 중국 현대성 연구와 강한 연속성을 갖는다고 나는 보았다. 왕 선생님의 논의에 진정한 의미에서의 '주체'의 문제의식이 늘 부재한 것은 이 때문이다. 왕 선생님의 '존재론'적 편향과 대조적으로, 전 선생님의 '망각에 대한 거부'는 '인식론'적 편향일 수도 있다. 여기에서는 존재론과 인식론의 서로 다른 조합이 어떤 효과를 내는지는 구체적인 풍부한 조사와 연구를 통해 분석되어야 할 것이라는 정도만을 지적해둔다. 물론 사상적 과제의 도출이 '역사'적 단절과 관련된다는 의미에서 나는 여전히 전 선생님의 논의에 다소 더 주목하고 있다.
왕 선생님의 이 논의가 새로운 것일까? 이런 의문을 제기해본다. 물론 새로운 것이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새로움을 인식할 시각과 관점을 우리가 가지고 있는 지는 의문이다. 중국을 또 다른 '보편'/'특수'로 받아들이는 우리의 주체성 부재의 문제는 생각 보다 뿌리가 깊다. 이는 식민성의 문제이다. 왕휘 선생을 우리 안에 맥락화하여 우리 자신을 불편하게 만들지 못하는 왕휘 선생에 대한 연구, 나아가 중국 연구는 사실 뿌리가 없는 중국 연구이다. 주체 없이 대상에 함몰되는 중국연구이다. 왕휘 선생의 작업에 대한 우리의 주체적 지적 작업은 우리 자신을 불편하게 할 뿐만 아니라 나아가 왕휘 선생 자신을 곤혹스럽게 하는 것이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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