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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8, 5.18, 그리고 6.4: 冷戰과 失語

*이 글은 延光錫(2013),〈二二八、五一八與六四:冷戰與失語〉,《人間思想》第五期,頁224-231의 한국어 판본이다.

 

2.28, 5.18, 그리고 6.4: 冷戰失語

 

“이와 같은 하늘, 이와 같은 구름, 그리고 이와 같은 마음, 어떻게 쓸까?”

陳映真의 「雲」에서

 

延光錫*

 

1. ‘光州에서 解放으로, 민중진군xx년’

1997년 3월 대학에 입학해서 접했던 학생운동권의 언어와 문화는 내게 매우 신선한 것이었고, 매우 매력적이었던 것이기도 했다. 당시 나의 모교에서는 1980년대 대중적 학생운동이 복원된 이후, 학교 역사상 처음으로 ‘민중민주파[1]’가 1996년 말 총학생회 선거에서 당선되어 1997년 1년의 운영을 맡게 된 상황이었고, 나의 고향 농촌 사회와 문화의 붕괴 속에서 ‘계급’적 문제에 관심이 많았던 나는 자연스럽게 총학생회 활동에 참여하였고, 또한 민중민주파와 관련한 서클에도 참여하게 되었다. 그 가운데 각종 토론회의 문건에서 볼 수 있었던 ‘광주에서 해방으로, 민중진군 xx년’라는 연호와 구호는 매우 인상 깊었다. 그것은 1980년 광주민중항쟁을 원년으로 삼는 학생운동 나름의 연호였다.

 

실제로 1980년의 광주항쟁은 ‘朝鮮戰爭’을 거쳐 분단 속에서 ‘좌익’이 궤멸된 남한의 학생운동 뿐만 아니라 사상운동 및 민중운동에서 관건적인 전환을 촉발시켰던 계기였다. 그 가운데 가장 중요했던 것은 대중들의 의식 속에 ‘민주’와 ‘자유’로 인식되었던 ‘미국’이 군사쿠데타 정권의 폭압의 배후로서 ‘미 제국주의’로 재인식되었던 측면이다. 그로부터 남한 사회에 대한 사상적/이론적 인식의 시도와 관련한 논쟁도 촉발되었다. 사실상 1980년대 중후반에 전개된 사회성격논쟁/사회구성체논쟁 또한 이러한 ‘광주’라는 계기를 통해 사상/이론 운동이 고조되는 과정 속에서 출현한 것이었다.

 

광주민중항쟁이 발발한지 이미 33년이 되었다. 1980년대와 1990년대, 심지어는 2000년대까지도,  ‘光州’를 ‘元年’으로 삼고, ‘광주’로부터 ‘새로운 삶’을 찾고자 했던 적지 않은 사람들이 있었다. 물론 1990년대의 사상적 ‘해체’와 ‘전향’을 거쳐 그러한 연호와 구호를 점차 사용하지 않게 되었지만, 어쩌면 그것은 사실상 다른 방식으로 전환되었을 뿐, 그 ‘새로운 삶’이 전제했던 모종의 단절은 회복되지 않은 채 계속되고, 그 후과는 더욱 심화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시에 90년대의 전환 속에서 광주는 ‘민주화’ 운동으로 ‘폄훼’되었다. 그리하여 ‘국가’는 본질적으로 그대로인 채, ‘광주 5.18’은 ‘국가기념일’이 되었고, ‘인권’과 ‘민주’의 상징이 되어, 지금 광주는 ‘인권도시’로 세계에 알려지고 있다. 1997년말 집권에 성공한 김대중 정부는 ‘광주’와 ‘민주화’의 상징적 인물로 부각되었지만, 광주민중항쟁의 근원적 배경 가운데 하나가 1970년대 세계경제의 위기로서의 미국을 비롯한 중심부의 신자유주의적 전환의 남한 경제에의 파급효과였던 점에 비추어 볼 때,[2] 김대중 정부의 ‘IMF의 요구를 초과 수용한 신자유주의적 전환’은 매우 역설적인 것이 아닐 수 없다.

 

지금도 매년 5월이면 광주에서는 의례적으로 서로 다른 ‘기념’ 행사가 열린다. 하나는 위로부터 계승하는 ‘민주화’ 운동으로서의 광주이고, 다른 하나는 ‘민중’ 항쟁으로서의 광주이다. 그러나 후자의 무기력을 더이상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현실이기도 하다. 마치 ‘광주’는 ‘관념’ 속에 갇힌 채, 이미 그 의미를 다한 것처럼 느껴진다. 그것은 적어도 내게는 우리가 ‘광주’로부터 찾고자 했던 ‘새로움’의 시효만료인 것 같다. ‘광주’를 이야기할 언어는 사라진 것 같다.

 

2. 홍성담 『5월 판화전』과 王墨林의 『안티고네』

2013년 9월 대만 台北에서는 5.18과 관련된 중요한 문화예술 행사가 열렸다. 하나는 대만의 판화가 黃榮燦을 기념하는 홍성담 5월 판화전이고, 다른 하나는 동아시아 계엄의 역사를 재구성한 왕묵림의 <안티고네>라는 연극이다. 두 행사 모두 고령가(牯嶺街) 아방가르드 소극장에서 연대활동으로 진행되었다. 나는 지난 3월 서승 선생에게 왕묵림 선생의 <안티고네> 작품의 구상을 소개하면서, 둘 사이에 홍성담 판화전의 기획 논의가 시작되는 물꼬를 텄던 역할을 한 바 있고, 9월과 10월 대북과 부산에서 공연된 <안티고네> 극본의 번역을 맡으면서 이 연극에도 일정하게 관여한 바 있다. 그 과정에서 나는 ‘광주’에 대해, 그리고 그 역사적 맥락에 대해 고민할 기회를 갖게 되었다.

 

어찌보면 ‘광주’를 이야기할 언어를 잃어버린, 따라서 ‘원점’을 잃어버린 나에게 ‘광주’는 홍성담의 판화전과 왕묵림의 <안티고네>와의 만남을 통해 되돌아온 셈이었다. ‘새롭게’ 되돌아온 ‘광주’는 이제 나에게 더이상 과거의 ‘광주’가 아니었다. 그것은 ‘판화’를 통해서 다시 모습을 드러낸 ‘민중’의 ‘광주’임과 동시에, ‘2.28’과 ‘6.4’ 사이에 놓여진 ‘동아시아’의 역사적 사건으로서의 ‘광주’였다. 홍성담의 판화에 곁들여진 시 <大同世界 2>는 ‘민중’의 본연적 ‘사랑’의 힘을 말하고 있다.

 

大同世界二[대동세계 2]

 

相愛的話

首先想到的是離別

每一條胡同口裡聚滿了人群

聚在一起心裡想的卻是離別

所以把自己擁有的一切與人分享

 

有時候離別會更神聖和偉大

為了今後你我天各一方而孤獨的日子

我們無私地分享了自己擁有的一切

 

離別是為了自己深愛的人

把自己的一切都獻出來的一種儀式。[3]

 

우리는 광주를 ‘항쟁’으로 이해해 왔지만, 그에 앞서 그것은 ‘민중’의 ‘나날’이 가진 역사적 생명력의 표현이었다. 만남과 이별, 삶과 죽음 사이에서, 어떤 ‘숭고’한 이념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날’을 살아가기 위한 원리로서 광주의 ‘민중’은 ‘사랑’과 ‘나눔’을 체현해 내었다. 나는 이 판화전에서 ‘광주’를 다시 역사화하기 위한 출발점으로서 ‘민중성’과 ‘민족성’을 본다.

 

한편, 왕묵림은 이 판화전의 의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발언한 바 있다.

 

이 활동은 신 대만인에게 반드시 보충되어야 하는 중요한 수업이다. 신 대만인은 1987년 계엄 해제 이후의 대만인의 의식을 말하는 것으로, 이는 계엄 이전에 본적으로 대만인과 외성인을 나누었던 것과 다른 것이다.

신 대만인이라는 말의 배후에는 대만인이 계엄으로 빠져나온 존재성에 대한 설명이 있다. 39년 동안 대만의 계엄 역사는 간단히 말해서 국가가 무기를 든 군대를 이용해서 그들에게 합법적으로 사람을 잡아들이고 죽이는 권력을 부여한 것이었다. 계엄이 해제된 이후 내가 더욱 관심을 갖는 것은 39년의 계엄 역사가 지금 여전히 존재하는가, 만약 존재한다면 어떤 방식으로 존재하는가에 대한 것이다.

나는 계엄 해제 이후의 신 세대 대만인의 몸에서 그들이 계엄의 경험을 반드시 가지고 있지 않았음에도 계엄의식을 가질 수 있는 존재임을 본다. 대만의 계엄 역사는 이미 대만 현대문화의 일부분이 되었다. 대만의 계엄 역사 또한 대만 현대성의 일부분이 되었다고도 할 수 있다. 대만인의 신체 감각 활동에서 그것이 생활이든, 문화생산이든, 계엄의식을 가진 존재를 볼 수있다. 특히, 대만인의 도덕 의식에는 매우 강렬한 계엄의식이 내재해 있다. 이는 역사가 반드시 경험을 통하지 않고서도 문화의 일부분이 될 수 있고, 개인의 존재가 계엄을 반영할 수 있음을 증명한다. 이는 내가 1987년 계엄해제 이후 지금까지 계엄문화를 중심으로 나 자신의 문화 생산을 발전시켜온 배경이다. 마지막으로 한 마디 하자면, 계엄은 대만을 떠난 적이 없다.[4]

 

냉전과 계엄의 역사를 극복하는 방식은 단순히 ‘계엄’에 대한 반대로서의 ‘계엄해제’일 수 없으며, 그 ‘역사’가 형성한 ‘문화’와 ‘의식’의 극복하여 자신의 존재감의 획득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그런 맥락에서 왕묵림이 마주한 ‘신 대만인’의 문화와 의식의 문제 또한 그 ‘새로움’의 배후에 있는 ‘역사적 단절’을 주목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단절을 문제화하기 위해서는, 그 단절로 공고화된 ‘탈역사화’된, 즉 ‘새롭게’ 형성된 현대적인 ‘국가/국민’ 내부의 담론의 틀을 넘어서는 하나의 장치로서 역사적 ‘동아시아’가 제시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5.17에 선포된 계엄령 전국 확대 조치의 구실이였던 ‘북조선의 남침설’ 조작에서 볼 수 있듯이, 민중적 차원에서 광주 ‘5.18’은 바로 냉전적 반공주의 논리를 중요한 배경으로 하고 있다. 5.18은 삶을 지키기 위한 민중의 저항이었지만, 식민과 분단이 낳은 역사적 모순은 냉전적 이데올로기와 결합되어 ‘5.18’의 가능성을 제한하고 있었다. <안티고네>에서 다루는 것처럼, 2.28을 판화로 표현한 황영찬의 처형 역시 반공주의의 폭력이다. 이와 같은 ‘반공주의’는 사실상 본래 우리의 역사 속에 내재적이었던 ‘역사적 공산주의’를 제거하는 구체적 실천이었다. 이러한 냉전의 역사과정 속에서 우리는 역사로부터 단절된 ‘표류하는’ 주체가 되었고, 이러한 주체는 역사 속의 자신을 해석할 수 있는 언어를 자신 안에 갖지 못하고, 계엄이 해제되고 이른바 ‘後-冷戰’으로 진입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민주화’를 댓가로 ‘계엄’과 ‘냉전’의 본질로서의 ‘폭력’을 내재화한 ‘비윤리’적 주체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 ‘비윤리적 주체’는 망각된 역사의 귀환을 억압함을 통해, 민중의 일상적 삶의 요구로부터 주어지는 주체성의 가능성을 내부에서 제약하는 모순적 상황이다.

<안티고네>는 그래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될 수 있다.

 

이는 현실의 모순에 대항하는 이와 같은 시도들이 아주 쉽게 기존의 언어의 틀에 갇힐 수 있고, 그래서 역사에 의해 지탱되어야 비로소 진정으로 기층과 민간의 언어로 전환될 수 있음을 상기시켜 주는 것이다. 좀 더 나아가 보면, ‘저항’ 자체는 ‘일상’과 융합되었을 때, 비로소 인민의 ‘민주’적이고 ‘윤리’적인 생활방식의 창조를 담보할 수 있게 된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문학적 텍스트로 제시된 대만의 백색테러, 남한의 광주민중항쟁, 그리고 북경의 6.4 천안문 사건은 비록 역사 내부의 민중의 공동 저항 경험으로 그려지지만, 그러한 역사적 저항의 경험은 일상 속의 기층 인민의 요구를 반영하고, 종국에는 일상으로 돌아가야 하는 저항으로 해석된다.[5]

 

‘5.18’과 ‘2.28’은 모두 민족적 생활양식을 지켜가고자 했던 민중의 삶의 요구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그것은 식민-제국주의의 ‘현대성’의 폭력적 관철에 대한 저항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이 우선적으로 무수한 희생으로 마감된 실패한 저항이었다는 사실과, 다른 한편 ‘민주화’의 상징으로, 즉 다시 ‘현대성’으로 포장되었다는 이중적 ‘비극’을 마주하지 않을 수 없다. ‘광주’, 나아가 ‘2.28’은 어떻게 다시 우리의 역사와 현실 안에 자리잡을 수 있을까?

 

그것은 우선적으로 나에게 사상적 과제로 제시된다. 이는 역사에 기반하여, 미래를 이야기할 수 있는 새로운 실천을 지시한다. 이는 우리가 이들 역사에 강요했던 ‘새로움’, 즉 냉전의 과정 속에서 진행된 인식론적 탈역사화를 반성하고, 이를 재역사화하는 계기를 우리 역사 안에서 찾아내야 함을 의미한다.

 

3. 朴玄埰의 고독과 광주의 ‘역사화’

남한의 사상가 박현채(1934-1995)는 1990년 <광주 5월민중항쟁 10주년기념 전국학술대회>에서다음과 같이 ‘광주’에 대해서 논술한 바 있다.

 

그러나 해방 후 역사에서 5.18의 1980년은 어느 점에 해당할까요. 역사는 진보의 길만을 열어 온 것이 아닙니다. 시행착오를 되풀이해 왔습니다. 1980년이 1950년보다 앞선다고 누가 이야기합니까? 그러나 여기 있는 사람들은 모두가 1980년이 1950년, 1940년보다 앞선다고 이야기합니다.[6]

 

나는 박현채의 이 말에서 역사를 살아오며 현실 안에서 발언하고자 했던 老 사상가의 고독을 읽게 된다. 이미 1980년대 중후반의 전환을 겪고 나서 ‘광주’가 ‘새로움’의 기원으로 탈역사화된 상황에 대해 박현채는 매우 불편했을 것이다. 그 자신이 ‘역사적 공산주의자’로서 참여했던 조선전쟁 중의 빨치산 경험과 그 이후의 6-70년대에 겪었던 투옥은 그가 남한의 현실을 식민, 분단, 내전, 냉전의 연속 속에서 역사적으로 파악할 수 있었던 바탕이었다. 그는 이어서 이렇게 말한다.

 

1945년, 1950년을 생각해 보십시오. 1980년의 광주에 뒤지지 않습니다. 왜 우리가 사는 역사에서 그걸 빼버리고 1980년을 강조합니까? 이것 또한 잘못입니다. 그리고 역사에서 잠재력을 이야기하고 높이 평가합니다. 그러나 잠재력 없는 역사가 어디 있습니까. 잠재력이 현실적 가능성으로 전환될 때 그 때 비로소 가능성으로서 이야기되는 것입니다. 그럴진대 이름 그대로 잠재력으로 이야기되는 걸 가지고 오늘 현실적인 평가를 그릇되게 하는 것은 올바르지 않다는 것입니.[7]

 

이러한 평가는 1990년의 남한에서 이미 매우 ‘낯선’ 것이었다. 그러했기 때문에, 박현채의 고독은 더욱 심화되었고, ‘낯선’ 것은 묻히게 되었으며, 일정한 경향성을 갖는 이러한 역사적 ‘청산’은 정치의 영역 뿐만 아니라 학술과 사상의 영역에서도 지속적으로 심화되었다. 결국에는 이러한 ‘단절’에 근거한 새로운 역사관이 출현하였고, ‘이행기 정의’라는 이름으로 역사는 목적론적으로 ‘청산’되어 ‘민주화’에 갇히게 되었다. 박현채의 고독은 단지 남한의 5.18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결국 이러한 ‘현대화’된 역사관은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 1948년 제주도 4.3사건에도, 국가를 초월하여 다시 대만의 2.28에도 적용된 바 있다.

 

박현채는 역사 안에서 현실을 이야기하고 있었지만, 그의 말은 전달되지 않았다. 나는 어떻게 박현채를 이야기할 수 있을까? 박현채에 대한 나의 말은 전달될 수 있을까?

 

4. 2.28과 5.18, 그리고 6.4

다시 <안티고네>로 돌아가보자. 이 작품에서 다루는 계엄은 2.28과 5.18에서 멈추지 않고, 6.4까지 질주한다. 얼핏 보기에 이러한 구도는 마치 동아시아의 분단과 냉전의 역사를 소거한 채 단순한 ‘국가폭력’ 비판으로 전락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세 역사적 사건은 이데올로기적인 전제를 설정하기 이전에 기본적으로 ‘민중의 삶의 요구’의 표현으로 간주된다. 따라서 그것은 일정하게 민중적 주체성의 가능성을 갖고 있다. 그러한 전제 하에서 우리는 이 작품에서 2.28과 5.18이 ‘역사’를 통해 탈역사화된 ‘민주화’의 틀에 갇히지 않는 맥락을 주목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6.4의 ‘계엄과 국가폭력’에 대한 비판은 6.4 또한 탈역사화된 ‘민주화’ 또는 ‘좌익 보편주의’의 맥락에 놓지 않음을 전제한다. 어떤 의미에서 6.4 비판은 대만의 인민들(나아가 남한의 인민들)이 가고자 했지만 가지 못했던 길을 더 잘 가고자 하는 ‘유토피아’의 구성의 계기로서 제시되는 것이다. 즉, 이는 역사에 내재한 내부적 비판으로서의 ‘6.4’ 비판을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기존 담론의 규칙를 따르는 순간 이는 이분법적으로 ‘규정’되고, 이는 사실상 ‘역사성의 귀환’에 대한 폭력적 억압이 된다.

 

먼저 솔직하게 인정해야 할 것 같다. 나는 이 ‘역사’를 토론할 ‘언어’를 갖고 있지 않다. 왕묵림이 갖는 ‘실어’적 상황의 문제의식이 ‘연극’으로 표현된 것도 같은 맥락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지만 ‘언어’를 버리고 이야기를 할 수는 없다. 우리가 ‘언어’를 잃어버린 긴 역사만큼이나 ‘언어’를 찾는 머나먼 길을 떠나야 할 것이다. 물론 우리가 찾고자 하는 그 ‘언어’는 지금 우리의 이 ‘언어’가 아닐 것이다. 내가 보기에 그 과정에서 우리에게 징검다리가 되어줄 스승들이 있다. 바로 박현채, 陳映真 등과 같은 식민, 분단, 냉전, 후냉전을 살아온 당대 속의 ‘역사적 중간물’이다. 그들의 ‘역사적 고독’은 무엇이었던가?

 

2013년 10월 11일

花園新城에서

                               

 

* 대만 국립교통대학 사회문화연구소 박사수료

[1] ‘민중민주파(People’s Democracy, 약칭 PD)’는 80년대 후반 남한의 사회성격논쟁 중에 출현한 양대 변혁노선 가운데 하나로 ‘계급’ 모순을 중심으로 남한사회의 구조변혁과 주체를 설정했던 그룹을 말한다.

[2] 1979년 박정희의 암살은 표면적으로 권력층 내부의 다툼이었지만, 사실상 그 다툼의 본질에는 당시 1970년대 말 외채위기로 인한 구조조정이 초래한 지역 경제의 파탄을 배경으로 한 대중적 시위에 대한 대응방식을 둘러싼 이견이 있었다.

[3] 徐勝主編,嚴貴德譯,〈大同世界二〉,《洪成潭版畫展》,台北:身體氣象館,2013,頁30。

[4] ‘洪成潭版畫展:光州五月民眾抗爭暨記念台灣黃榮燦座談會’(2013. 9. 13. 二二八國家記念館展演廳)에서 왕묵림의 발언.

[5] 延光錫,〈聽《安蒂岡妮》訴說歷史性,尋找新的語言以及烏托邦〉,《苦勞網》,2013. 9. 18。 http://www.coolloud.org.tw/node/75656

[6] 「광주 5월민중항쟁의 학술적 재조명—광주 5월민중항쟁 10주년기념 전국학술대회」,『박현채 전집 1권』, 서울: 해밀, 304쪽. 이는 1990년 5월 30-31일에 열린 ‘광주5월민중항쟁 10주년 기념 전국학술대회’의 종합토론에서 박현채의 발언이다. 당시 남한의 진보적 학자들이 주축이 된 이 토론에서 박현채는 체계적으로 배제되고 무시되며, 심지어는 조롱의 대상이 된다.

[7] 앞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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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어失語

'신체의 계엄령 해제'라는 제목의 강좌 내용인데, 마침 왕묵림王墨林 선생과 진계인陳界仁 선생이 초청되어 진행된 내용이다. 일찍이 '실어失語'라는 문제상황에 대해서 나와 왕 선생 사이에 일정한 교감이 있었고, 이는 <인간사상> 5기에 대화의 형식으로 우리의 글이 나란히 실린 바 있다.

 

실어의 상황은 역사와 현실의 거리가 일정하게 불가피하다는 측면에서 보면 다소 일상적인 것일 수도 있지만, 우리와 같이 역사인식의 단절과 왜곡이 심각하여 소통 자체의 불가능과 사상의 부재 상황에 처해 있는 경우에는 이를 좀더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이와 같은 고민은 대만의 상황도 다소 유사한 측면이 있고, 그래서 왕 선생과 일정하게 교감을 이룰 수 있었던 것 같다.

 

현실 모순의 심화 속에서 역사와 다시 만나고자 하는 절박함을 느끼면서, 그 둘이 만나 어울리는 '사상'을 표현하고자 하지만, 그것은 기존의 언어로 표현되지 않는다. 기존의 언어에는 그 개념들, 이론들, 형식들이 모두 포함되어 있다. 이를 변혁하지 않고서는 막 다시 피어나려는 '사상' 자체가 다시 기존의 틀에 갇혀 버린다. 이와 같은 문제의식에서 우리는 역사의 전개에서 예술의 작용을 역사-현실-주체의 고리들과 연결지을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그것의 가능성을 왕묵림 선생의 <안티고네>에서 처음 구체적으로 보았다.

 

말을 잃어버린 곳에서 말을 하는 행위는 모순적일 수 밖에 없다. 그래도 해야 한다. 이미 거기에는 새로운 언어가 꿈틀 거리고 있다. 힘을 모아야 한다.

 

 

 

日  期:2014年07月18日
地  點:台北當代藝術館
主持人:吳瑪悧/國立高雄師範大學跨領域藝術研究所 副教授兼所長
與談人:王墨林/藝評家、陳界仁/藝術家
 
由左至右:吳瑪悧、王墨林、陳界仁
吳瑪悧(以下簡稱「吳」):歡迎大家參與春之夜。今天的主講者是台灣在解嚴前後,兩位非常重要的藝術實踐者及論述者。我先介紹王墨林。王墨林出生於1949年—戒嚴開始的年代,因此非常具有意義。後來他念了政戰戲劇系,在軍隊待了十年。退伍後到日本接觸左派的社會運動、小劇場、舞踏等,而把相關的資訊介紹到台灣,並且開始對於當時也在街頭進行表演的行動者撰寫評論。這些文章結集為《都市劇場與身體》。後來又寫了一本書《台灣身體論》,當中非常理論性的再去把各種不同有關身體的論述,進行自己閱讀上的筆記跟反思。
 
另一位講者陳界仁於1960年代出生,在復興美工畢業後,對於當時社會氛圍及藝術世界有不同的想法,開始與一些年紀相仿的年輕藝術家們,一同試圖在非主流的空間進行一些展演活動,如我們現在說的替代空間、閒置空間等,那些作品本身因為發生場所以及內容的特殊性,很具有反體制的想法。
 
界仁今天將以更早期的作品《機能喪失第三號》做為討論主軸,即便在這些年間,他不是以自己去做表演或展現所謂的行為藝術,但界仁透過影像記錄的方式,基本上也屬於一種表演的安排,亦可說是一種廣義的行為藝術。今天透過兩位開創形式的藝術者回憶當年所發生的事,並藉由今天的討論,重新對照、思考,我們首先就請界仁開始。
 
﹝播放《機能喪失第三號》﹞
 
陳界仁(以下簡稱「陳」):各位朋友大家好,1983年作的《機能喪失第三號》,距離現在快30年,隔了那麼久,我已不可能回到當初的狀態來談這個事件。事實上,幾乎有超過20年的時間,我都沒再看過這件作品的紀錄影片,現在只能憑記憶和此刻的想法,談我當時為甚麼會去做這件事,以及它對我後來的創作有什麼影響。
 
當時會去西門町做《機能喪失第三號》,只是直覺地認為,像我這樣在戒嚴時期出生、成長、受教育的「戒嚴之子」,如果不直接面對戒嚴體制對自由的限制,尤其是,如果不將自身置於戒嚴令下禁止集會與遊行的「公共空間」、不將自己放在違反戒嚴法的臨界點上,與戒嚴體制進行直接的碰撞,那我是不可能真正「看見」和「認識」被戒嚴體制規訓過的身體與行為模式,以及清理已內化至意識深處的戒嚴意識。更不可能在戒嚴體制下,對生命的意義和社會的組構型態,展開其它的想像。
 
1982年我還在服兵役時,就開始思考實踐這個計劃的可能性,退伍後,1983年的年中,我約了我弟弟和周圍的朋友,問他們願不願意參與這個計劃。當時我23歲,周圍朋友的年紀大約在19歲到25歲之間,他們不是在等當兵,就是剛進入社會工作的人。可能因為大家都很年輕,也都受不了戒嚴時期令人窒息的生命狀態,結果居然沒有人在意會不會因違反戒嚴法,而付出我們無法想像的代價,反而很興奮地答應參與這個計劃。
 
至於會選擇當時聚集最多電影院的西門町武昌街,作為實踐這個計劃的地點,主要是我當兵休假時,曾在那裡被七、八個便衣警察誤以為是逃兵,而被當街逮捕過,所以知道武昌街那裡隨時都有便衣警察在監控街上的狀況。我覺得只有在這種監控狀況下實踐這個行動,才算真的把自身置於違反戒嚴法的臨界點上。
 
10月30日出發去西門町前,我們已先穿好類似犯人服裝的衣服,搭公車到武昌街後,又遇到幾個朋友的朋友,他們知道我們的計劃後就臨時加入這個行動,於是我們把多準備的相機、攝影機交給他們,然後蒙上頭套,像是要被槍決的犯人,一個挨著一個往前走,十幾分鐘後,我們開始大聲嘶喊……。當時現場立刻圍了許多好奇的路人,還有人問其它圍觀的群眾是不是抓到「匪諜」了。從我們一開始行動,警察就已經在旁邊監看,或許因為當時是「增額立法委員改選」的政治敏感時刻,再加上越聚越多的圍觀群眾,讓警察一時不知該如何處理,才使得我們的行動能持續下去。
 
等我們的行動全部結束後,警備總部的人才趕到現場,這反而讓圍觀群眾更加騷動,在群眾的層層包圍下,警備總部的人和警察盤問我們剛剛行動的目的時,我們隨口編造說是來幫新聞局舉辦的金穗獎拍片後,他們就只要求我們留下身分資料,警備總部的人拿走我們預先準備好的假名片,就要我們和現場群眾馬上散去,出乎意外地,我們就這樣離開了現場。
 
事後回想,以戒嚴時期警備總部擁有的巨大權力,居然會讓我們以那麼牽強的理由離開現場,我想除了當時是「增額立法委員改選」的政治敏感時刻外,另一個更可能的原因是——圍觀群眾形成的無組織「集會」狀態,讓警備總部的人和警察有所顧忌,擔心引發不可預期的群眾事件,才是他們為什麼會讓我們離開的真正原因。
 
幾年後,我更體認到那些圍觀群眾,不只意外地保護了我們,同時也因為他們形成的無組織「集會」狀態,才讓我們類似「遊行」的行為,因他們的聚集,而被轉換成一場「遊行」與「集會」並置的行動,也讓原先被嚴密監控的街道,暫時失去功能,成為了某種意義上的廣場或劇場,甚至群眾圍著警備總部的人和警察的好奇觀看,也成為某種反國家監控的「觀看行動」。我的意思是──在那個當下,警備總部的人和警察反而成為了被群眾包圍與監看的對象,也使他們暫時失去作為監控者的權力位置。
 
雖然當年做《機能喪失第三號》時,既不可能事前對外宣佈,更不可能於事後公開發表,除了現場圍觀群眾外,也沒什麼人知道這件事,而這個微小行動,更不可能對戒嚴體制有絲毫的改變;但那次的經驗,讓我隱約體會到無論在多嚴密的監控機制下,被監控的空間都有可能被滲入和穿透,甚至,我們可以從被監控空間的內部,對權力機制進行某種「質變」;或者說,一旦我們對生命價值觀與社會的組構型態,開始進行其它想像時,原先國家機器看似嚴密的管理與監控機制,也不再有效了。我的意思是──當我們改變自身的欲望與想像,也同時是在戒嚴體制內製造一個裂隙。
 
《機能喪失第三號》給我的另一個經驗是──當時我是五名帶著頭套蒙著眼睛的演出者之一,雖然蒙著眼睛還是可以聽到與感覺到周圍人群的騷動情況,但走著走著,我從原先擔心這樣做會不會害了參與的朋友,到後來慢慢有種戒嚴體制對我已「不再有效」的平靜心情。雖然到現在,我還說不清楚當時心理狀態轉變的原因,但那個經驗已成為我身體記憶的一部分。可是幾天後,當紀錄行動過程的八毫米影片沖洗出來時,我卻只能在影片中看到行動的外部行為與現場群眾的騷動情況,而不可能看到我「內在感受」的變化,這個失落的經驗,讓我後來想去探究「內在感受」可以如何被顯影的可能性,不過還要等到十九年後,我真正有機會拍片時,才開始去探索這個可能性。
 
同時,以戒嚴時期台灣社會的封閉狀況,我既不清楚什麼是行為藝術,我和參與的朋友們,也只是在高職或高中畢業後,希望能找到一份工作的一般人,即便如此,人總有從生活經驗中積累而生的感受想去訴說,儘管我們可能還找不到準確的「語言」,但人總會以各種方式去實驗和爭取如何「說出」的方法,這也讓我體會到我們的感性與想像應以具體而複雜的「現實」與生命經驗為出發點,而不能將我們具切身性的感性經驗,框限在既有藝術史的美學範疇與問題意識內。只是在戒嚴體制下,我們不但被切斷與歷史的任何連繫,即使想去認識當時的「現實」,也只能在層層的迷霧中摸索。
 
總之,從那時開始,如何理解和認識歷史與「現實」等問題,就一直困擾著我,
這也是1987年解除戒嚴後,我反而逐漸放棄創作的原因之一。
今天很難跟年輕朋友們,再重述那些因時代因素,對我造成的困惑,我姑且試著規納幾個原因,看可不可能說的清楚一點。一:1987年7月15日國民黨政府突然宣布解嚴,好像從此我們就進入「民主」時期,但我對這個「轉變」過程是有疑慮的──從1949年宣布戒嚴到1987年解嚴,至少有將近4個世代的人,成長、受教育於戒嚴體制,但解嚴後,台灣社會並沒有對戒嚴體制進行深刻的全面清理,那麼,在戒嚴時期被集體植入的冷戰/反共/戒嚴意識,又怎麼可能自動消除呢
?雖然解嚴後,有無數人批判、反省、嘲諷國民黨的威權、戒嚴體制,但大多數批判給出的「自由」與「民主」想像,卻是美國式的資產階級代議制與自由市場。
 
我們不應忘了戒嚴體制的成立,背後是因為美國的全力支持才可能形成的。換句話說,戒嚴體制一方面是美國與國民黨共構排除泛左翼的規訓機制,另一方面是美國對台灣社會植入美式「自由」、「民主」與進行文化冷戰的生命治理時期。當我們今天批判新自由主義時,是不是該同時反省新自由主義在台灣形成的過程,而這只要檢閱1987年至今的歷史,就可以清楚認識到──正是那些帶著美式「自由」、「民主」想像的「民主人」,把台灣一步步推入當前的新自由主義處境。當然,我要到很後來,才看清楚這些問題。
 
我的第二個困惑是:從戒嚴時期到解嚴初期,我所接觸到所謂現、當代藝術的片斷知識,就是來自〈今日世界〉雜誌、美國文化中心、舊書攤販售的〈美術手帖〉和國內的藝術雜誌,但這些雜誌和書刊中引介的現、當代藝術作品,卻與我們具體的現實生活和感受,有著巨大的落差。我很疑惑為甚麼只有一種以西方歷史與社會脈絡為書寫座標的藝術史,而沒有將不同地方的人與其感性,視為平等與同屬於當代的其它藝術史?譬如畢卡索受非洲雕刻影響,所創作出的立體派作品,被藝術史學者認為是前衛的,而影響畢卡索的非洲雕刻卻被貶為原始藝術,或者,維也納直接行動團挑釁歐洲宗教的血淋淋行為演出是藝術,而台灣的乩童不是另一種行為演出?同時,當Andy Warhol反覆複製消費符號時,台灣農村的大量年輕人口,卻被剝奪掉生產自身感性的權利與時間,開始被納編入國際分工體系下的加工出口區。或是像某些台灣美術史,把曾為軍國主義畫過戰爭畫,以及作為日本殖民政府對台灣進行視覺治理的石川欽一郎,描述成台灣現代繪畫的啟蒙者
,就像某些歷史學者選擇性的把八田與一,為服務殖民母國所蓋的嘉南大圳、烏山頭水庫,美化為是對台灣農業發展作出巨大貢獻一樣。這種殖民現代性的史觀,不但反應了台灣的後殖民心態,更忽視了台灣民間藝術工作者的存在價值。今天,我們都知道這些論點與整個殖民現代性與現實的政經權力,有著不可分割的關係,但當時的我,只是隱隱覺得這種藝術史觀是不公平的。
 
我的第三個困惑是:1977到1978年的鄉土文學運動,提出要關懷自己的在地現實,一方面這對當時的我,有很大的啟發,我也很認同他們的呼籲。但另一方面,現實是如此複雜,如果只以寫實主義為手段顯然是不夠的。就像剛剛提到,當我看《機能喪失第三號》的紀錄影片時,發現我當時的內在狀態,是無法以紀實方式呈現出來的。總之,對那時的我而言,還沒有能力去釐清和了解這些問題的複雜性與連帶關係。
 
在找不到答案下,我胡亂看了不少雜書,其中一個部份是農民起義與民間宗教的關係,當然,那個時候的書是不會用「農民起義」這樣的詞彙,但從原始道教、彌勒降生、太平天國與農民起義的關係,以及五四運動等歷史,都或多或少影響我當時思考事情的方式。所以當年作行為藝術的驅力,更多是受到這些「農民起義」歷史,或是像農民演戲給農民看的「落地掃」的影響,而不是藝術史中的行為藝術。
 
簡化的說,當我們今天談什麼是「身體解嚴」時,很像是在做某種歷史回溯,一不小心就可能把問題意識「過去式」化,但對我而言,無論是日殖時期的殖民現代性,冷戰、反共、戒嚴時期殖入的親美與戒嚴意識,到當代新自由主義下的生命政治等等,是有其連續性的。或者說,如果要追索我們何以處於當前的不堪狀態,以及日趨嚴重的貧富不均等問題時,那麼關鍵可能不是用「斷代」的方式,去思考戒嚴與解嚴等問題;法律上的解嚴,不等於戒嚴意識就此消失,更多的可能是戒嚴意識已內化為集體無意識,並且成為形構今日新自由主義的條件之一。所以談「身體解嚴」的重點,或許並不在「解嚴」,而是歷史性地重新檢閱我們的身體與意識,如何在國際與國內權力機制的操控下,從過去被規訓的身體,一步步被質變為今日的生命狀態。從某方面說,「解嚴」並沒有帶來真正意義上的自由與解放,反而讓我們在誤以為進入「自由」與「民主」後,把追問什麼是人的解放的課題,讓渡給了政黨、媒體以及各種代理人。對我而言,如果從現在的視角,討論什麼是廣義的行為藝術,我想那應該是以自己的身體,探勘台灣社會中還未被追問的各種議題,以及繼續探尋「何謂解放」的各種可能性。
 
吳:從界仁所講之中,我讀到的重要訊息是在於,台灣的解嚴前後,在藝術世界雖然促成很多所謂身體解嚴式的創作,不過他比較不想把這些事情放在所謂行為藝術的脈絡裡面來看。
 
我想提出一個有趣的事情,《機能喪失第三號》是在1983年所做,謝德慶的作品其實也在差不多那個時候被介紹到台灣來,如果我們看謝德慶最早是在1978、1979年在做的《籠子》,1980、1981年做的《打卡》,1981、1982年一整年都在室外,也就是說,謝德慶在1980年代初開始展開這些行為藝術表演時就已介紹到台灣;李銘盛也是在差不多的時間走到戶外,例如他1983年開始徒步環島的作品《生活精神的純化》,目的想把自己放空,也想要去認識這塊土地;以及1984年的《包袱119》、1986年的《非線》等。
 
我好奇的是,即便界仁不想要放在行為藝術的脈絡裡面來談,為什麼在那個年代有這麼多的表演藝術出現?大墨的《都市劇場與身體》書裡就介紹,那個年代一直到1990年代初,有很多年輕人創作者大部分都不是美術系畢業的,都在街頭開始展開他們的表演。接著就請大墨來談談。
 
王墨林(以下簡稱「王」):剛剛聽了界仁從他作品的創作背景一直講到現在,加上他對這整個行為藝術的想法,我想到的是:我們在台灣談行為藝術的話語權,為了要合乎現代性的審美,我們就會用很多西方的理論來詮釋,剛剛界仁也談到這是有問題的,但若從我們自己本地的或本土的脈絡來談,那我們的話語又在哪裡呢?
 
剛剛講到八田與一,他是個非常嚴重的錯誤,他被推為是對台灣的水利、水壩有貢獻,可是我們完全沒有談到關於蔣渭水的歷史,事實上日本對台灣抽很重的水利稅,蔣渭水為此還向殖民政府請願,另外像台灣的農產、農業、稻米收割完全納進日本計畫中,做為他們供應的國內物資,這些都沒有談,就只說他建了一個水壩,觀點都是片面的。要思考的是,當我們要談現代性時,或想把自己納入現代性的脈絡中,文化在哪裡?
 
《機能喪失第三號》中所談到的戒嚴,這個作品呈現最重要的不是蒙面綁手的犯人,而是畫面中,警察、警車等這些東西所突顯戒嚴時代重要的象徵性意義:「介入」。介入就是一種行動,受到華爾街的影響後,流行把行動講成「佔領」,我們先不談現在被公民運動所論述化的占領行動,在戒嚴時代沒有公民運動、沒有占領,甚至連行動這概念都沒有。
 
從後設的角度來看「公共空間」,跟現在的概念完全不一樣,現在的公共空間,可以是華納威秀的廣場,那時候沒有公共空間可言,因為整個空間充滿戒嚴的狀態,完全沒有任何解放的可能。剛剛界仁的作品,定格時,看到警備總部的便衣,那一片肅殺之氣是你們現在絕對感受不到的,太陽花學運警察的場面很壯觀,但這樣的壯觀並沒有當時的肅殺氛圍。原因在於當時沒有所謂的人權、民主自由的概念,基本上只有想對大家既有認定的規矩和遊戲規則進行反叛,或是在想經由這個反叛後有沒有新的可能性,只不過話語也不足,思考也不寬闊,就是一種從身體發出的動能,覺得需要對抗。
 
剛剛界仁所說的讓我想到,為何他的《機能喪失第三號》不是在台灣或是一般的行為藝術脈絡裡。1988年的行動劇《驅逐蘭嶼的惡靈》,我也把它放在我所寫的行為藝術脈絡裡面來談,因為它就是一個跟身體有關的行動,但最重要的不是只跟自己的身體有關,而是「我們的身體」,也就是剛剛一直在講的觀眾、群眾。
 
我們現在講的劇場倒不是演戲的這個劇場或是行動劇場,群眾的概念是由布萊希特(Bertolt Brecht, 1898-1956)所提出,他特別重視群眾,當然你可以說林懷民跟賴聲川也很重視群眾,但他們重視的是觀眾所意味的經濟效益,但布萊希特認為最好的演出就是從戲中一直演到外面去,直到觀眾一起跟著走出劇場。但觀眾必須通過一種對這個演出的想法,問題是有沒有給他想法?
 
我不知道影片中演出的人頭部被紅布包紮是不是有特殊意義,因為台灣在1960年代的時候就已經有共產黨,但不是中國的那種共產黨,而是在成大或台大有些對左翼抱著浪漫思想的大學生,覺得為了反對國民黨或蔣介石,需要自己要搞個共產黨的圖書會之類的,這樣的產物在我們後來看,就是一種浪漫主義的結果,不是真的要組織地下黨或地下工作,就是浪漫主義對「革命」想像的結果。但不管怎樣,界仁敢在那個反共戒嚴年代,公開用紅布示眾,就是一個突破禁忌的行動。其實那時候界仁似乎隱隱約約有個「左」的東西在那裡晃動。
 
1985年我從日本回來後,就在陳映真的《人間雜誌》工作,那時候因為鄉土文學運動的影響,在1980年代,我們開始要面對種種生活環境的問題,如台灣的現代化而造成的農村破產、工廠的勞資糾紛問題等等,對現今而言,「愛台灣」比較重要,但當時沒有這樣的概念,只關注當下社會所發生的不公不義,包括工人問題、農民問題,基本上都有點左翼的色彩。
 
我在《人間雜誌》工作的時候,因為都報導社會底層的一些小人物,同時我也在搞所謂的小劇場運動,有一位朋友對我說,這些前衛劇場只有你們搞藝術的自己懂、自己爽而已,那時候因為我們自己思考的不夠,沒有把自己的思想武裝化,有的都是一些教條,我們找不到合適話語討論,懵懵懂懂的就只說公平正義,雖然我們自己清楚這個東西在現實中是不會發生的。
 
我對於小劇場和前衛劇場所提出的概念和美學論述,是不是能夠回覆我那位朋友對我提出的質疑,將這些藝術觀用在那些工人、農民身上,對我來說是很大很大的挑戰。在劇場,布萊希特給了我很大的影響,劇場如何能跟現實環境結合,這樣的實驗該如何進行?
 
1987年那時《人間雜誌》正在連載關曉榮在蘭嶼的攝影報導,他的攝影給我最強烈的意象就是核廢料的問題,那時反核的概念在台灣是非常薄弱的,不要說台灣本島,連在蘭嶼都沒有。關曉榮提出後,我便想試著做一個反核的劇場,但那時該怎麼做真的不曉得,我找了黎煥雄和小劇場的朋友來討論,周逸昌在法國的時候,看到街頭運動、示威運動有使用布偶,王俊傑還設計了一個反核的海報等等,我們找蘭嶼青年會的郭建平一起來參與,後來把核廢料當蘭嶼的惡靈來驅逐就成為這行動的名字,大家連夜把布偶做成惡靈的樣子。
這些現在看來都很重要,是台灣的反核運動的一個開始, 也是現在通用的「行動劇場」的開始。我們到了蘭嶼後,島上其實有很多人反對漢人去進行反核運動,不是驅逐蘭嶼的惡靈,我們反變成是被驅逐的反核者,還好我們有當地的郭建平協助進行排解,台電公司也花了很大的心力,包括給他們的回饋金、帶他們到日本去看當地的核電廠等等讓他們放心。
 
我覺得當你有種反抗的動能時,很多東西就自然出來了。要示威前的那個晚上,我跟一位已經去世的朋友王菲林,騎著摩托車到核電廠去噴漆,寫上一些反核廢料的口號等,當然第二天就被清除掉。我們打算把這次的反核行動與他們當天要舉辦的「惡靈祭」進行結合,極力取得老人家的同意後,當天老人都穿起了他們傳統戰鬥服裝組成抗議隊,大家拿起鐵桶敲打,加上大布偶、「惡靈祭」的戰鬥服裝,儼然形成了一個非常劇場化的示威隊伍。到了現場後,核廢料場大門已被關起來,我們用事先準備好的沖天炮射到裡面,這可把核廢場的人嚇壞了,只好把門打開接受抗議。演完講,離開時大家把惡靈布偶插在現場、抗議布條綁在樹上,氣氛有點詭異。一伙人又轉到海邊參加「惡靈祭」。
 
當時台北已有街頭運動,只是大家都穿著便服,乾巴巴的喊著抗議的口號,「驅逐蘭嶼的惡靈」行動劇場這樣的劇場效果給了台灣社運一個新的經驗, 那時候才開始發展出行動劇場。「行動劇場」本來叫「第三劇場」,來自那時大學非常流行、民眾性很強的第三世界電影,後來嫌這樣的稱呼太學術,經大家討論後就改為「行動劇場」。
 
而我們現在的「行動劇場」概念是那個時候產生的,現在若再來談那段歷史的話,會發現很多東西是不確定的,當中有太多實驗性與探索性,只是參加的人都把自己想到的可能性當作表現的工具,而不是用美學的概念伸張,是一個身體的動能,它跟群眾結合在一起,也就是強烈的「聚眾性 」。
 
我講的這些點點滴滴都是重要的,可以變成一個「行動劇場」產生的論述,假設到現在我們還說80年代台灣小劇場是一個「運動」的話,那麼99.9%是跟公共性的「介入」有關係的。當時像新象小劇場、皇冠小劇場和屏風小劇場等,頂多容納四、五十人,比較沒有像街頭的「聚眾性 」強當然報紙媒體都覺得很新鮮,藉此拿來作為政治性的話題。是的,它政治性很強!它也是個運動!「介入」有關,這種動能來自於我們跟「介入」有關的身體行動,這個動能不是天上掉下來的,不是自然生成的。
 
我們現在常常看到很多的街頭運動,反抗的動能和目標比我們以前都清楚,可是動能的來源很少人去分析,也許大家都是在喊喊政治口號而已。但過去我們沒有這些政治口號,反國民黨的概念也只是在從黨外到民進黨成立初階段的過程之中。那時反核運動更接近公共議題化,比如說其他罷工、環保、520農民運動,這些議題現在反而都慢慢消失沒有了,轉變成另一種政治運動。
 
戒嚴壓抑的不只是我們的慾望,還有視野和道德觀,剛剛界仁也講了戒嚴不只在一個日期上讓它結束,在解嚴跟戒嚴之間是一個出口,整個動能都藉那出口崩解出來。所以在那段時間的反抗行動,會產生出非常多不成熟,乃至於沒有被論述化,但卻保有對世界、對體制、對生活環境有一種非常具體、真實、浪漫的想像。
 
戒嚴這四十年把民眾很多動能都壓抑住,我們怎麼用左邊的眼睛看這個社會,用左邊的眼睛看我們的歷史,應該是我們面對民眾性要作到的,現在看到的「右」跟國民黨統治戒嚴那段時間的「右」非常相近,只是在話語上則完全推陳出新。
 
所以我今天看了《機能喪失第三號》影片後,個人有一些收穫,我們在台灣談行為藝術的時候,是不是要從行為藝術這樣很重要的行動的動能來談我的表現力?我是為什麼而表現?應在這樣的概念之中談「我們的」行為藝術。
 
吳:藉由剛剛大墨及界仁所講的,我們似乎在重新釐清行為藝術在台灣的脈絡它似乎不只是身體解嚴的問題,也跟空間解嚴有關,反映在還沒有所謂的公民運動的年代,表演藝術或行為藝術就成為了社會大眾或知識階層、任何有想法的人來表達自己的一個方式。
 
這樣的一個開端,也許我們也可以在其他的場次中進行相互對照與辯證,在不同年代之中的行為藝術是否發生了質變。接下來的時間開放讓大家提問,藉這個機會可以讓兩位主講者補充。
 
提問一:我回到關於藝術品本身去思考行為藝術。我們在看到真跡時我們會形容它有一個aura,但是在我的想法裡面,行為藝術這樣一個與眾不同、即時、偶發的狀態之下,它本身就是一個aura,在這前提之下,aura被記錄的時候,它已經不再是個面對面或是一個真跡的型態。那麼請問你們對於行為藝術被記錄成影片或是平面、可以被執行的狀態,被錄製或再複製的看法,或是這形式對行為藝術本身有什麼樣的影響或改變?
 
王:答案很簡單,你把它當作為保留的檔案看,對於建構自己的主體藝術史是很重要的。
 
提問二:剛剛提到歌仔戲或是落地掃,農民演給農民看的那個感覺很迷人,就像一種烏托邦的想像,為公民、為農民而做。可是現在的問題常常好像是藝術需要專心、群眾需要散心,這些想要服務他們的人,事實上要看中產階級意識想要看的東西,是不是會讓人覺得有點沮喪或是感到弔詭的地方?
 
陳:先回到aura的問題,從某方面說,行為藝術是一種隨著行動的進行,而不斷消散的藝術,再完整的記錄檔案,都沒辦法等於真跡,而只能是行動的殘跡與斷片,我的意思是:行為藝術的迷人與缺憾,恰恰在於它的無法重複性,或許問題不在是否能完整再現真跡,或是完整保存曾於行動現場中出現的靈光,而是我們如何對殘跡進行再挖掘與再想像,換句話說,觀者的主動想像,在類似行為藝術這類作品中,扮演著再創作的關鍵位置。
 
當我們談到「作品」時,常常談的是被藝術體制「聖物化」後的物質性作品,而不是指這個「作品」可以提供我們進行多重辯證的問題意識是什麼。而行為藝術的宿命,恰恰在於它的缺憾是如此明顯與難已被凝固化,但也因為這樣,觀眾作為再想像與再創作的角色,也同時被突顯出來。
 
當藝術越來越像是一個有系統的知識,而不是一個猶待討論、辯證的感性事件時,討論空間也相對被限縮了。所以,我認為一件作品中的「不夠」與「困惑」,常常是很重要的。一個合乎既有感性與知識系統的作品,也等於刪除了可被多重辯證的討論空間,那麼,我們就只剩下一個問題──「藝術」發生了嗎?
 
關於:中產階級意識想要看的東西,與藝術家的想像是不是有落差,而這些落差,是不是會讓人覺得有點沮喪或是感到弔詭的地方?
 
今天我們大部份人,都被日常生活壓得喘不過氣,所以觀眾把展覽空間當作散心之地是完全可以了解的,對我來說,我們首先要避免把問題變成菁英與大眾的對立,而應該反過來想,如果有少部分原本只是要散心的觀眾,突然被某件作品所困惑或吸引,那麼「對話」狀態就發生了。我的意思是:改變中產階級意識,是一條漫長之路,但我們還是該相信「點滴工程」的必要。
 
提問三:我想請各位分享一下身體解嚴在這時空下有什麼樣的新解,因為今天的講座是在談當代藝術的身體性,可是身體解嚴這個概念只是某個時空的產物嗎?解嚴到現在又好多年過去了,不知道對大家來說又存在怎麼樣的新解?
 
吳:延續剛才的問題也許可以這樣問,好像你們都只在談政治的身體不談其他的身體?
 
陳:討論政治並不是政黨、學者、社會運動者的專利,在當代的生命治理下,當我們討論日常生活的種種問題時,就已是在討論政治了。同樣的,當我們談到如何表達自身的感性經驗時,必然與既有的美學體制發生某種對質與對辯關係,而這一樣是政治的。我的意思是:當我們談到政治時,也同時是在談我們這個個體的生命價值觀。
 
至於如何對戒嚴和解嚴提出新的解釋,我想以我的錄影作品《軍法局》為例,談戒嚴意識真的過去了嗎?看過《軍法局》的朋友,應知道影片真正要討論的問題是:當代表國家過去的暴力空間,可能被國家重新規劃為共識史觀下的人權博物館後,是否會讓人權問題被單義化與過去式化?致使在國家與資本結合的新自由主義下的當代人權問題,反而被某種程度的「局部化」?我的意思是:我不是反對成立人權博物館,而是在新自由主義已將治理形式演化成複雜的生命政治,而當前的壓迫形式也不再只是可見的社會狀態下,我們該如何讓人權議題不被局限於過去的歷史,以及把人權議題的討論「去局部化」,同時讓當代不可見的壓迫形式,成為是可見的。
 
同樣的,過去戒嚴時期,美國在台灣通過文化冷戰所進行的生命治理,在解嚴後,並沒有消失,反而隨著希拉蕊於2009年宣佈「重返亞洲」後,一系列針對當代個體生命的思維、欲望與社會想像,所展開新的「再改造」運動,或者說「新文化冷戰」,也日益地清晰、可見。但不同於過去的舊文化冷戰──將「自由」等同於自由市場、「民主」等同於代議制民主、個體性等同於個人主義、而文化生產則被誘導至「去政治」等策略。「新文化冷戰」更進一步把泛左翼話語,吸收、質變為詞彙與其原意和具體脈絡脫鉤後的「口號」。我的意思是:我們可以看到某些狀似進步的學者,一方面操作左翼、直接民主、後殖民理論、反新自由主義等基進話語,以及利用泛中產階級集體喪失存在感後,不斷進行去多重辯證的情感動員,另一方面又以反民主的寡頭決策,選擇性批判新自由主義全球化後的局部問題與地緣政治,而繞過如美元本位、跨國金融自由化、國營事業私有化、勞動派遣化、媒體資本化等真正核心的問題,簡言之,法律上的戒嚴早已結束,但新的生命治理形式正隨著新冷戰的發展,而逐漸擴大、漫延,那麼我們在思維上真的解嚴了嗎?這是在座的年輕朋友們,無法迴避的嚴酷課題。
 
王:之前在這裡看了當代藝術家蓋瑞貝斯曼(Gary Baseman)的展覽「歡迎來我家」,發現原來後面一些當代藝術家的作品都是抄他的,像是「床鋪」、「客廳」等等,我看到這個祖師爺在搞家庭、房間的裝置,乍看蠻無趣的,在想:難道這麼早的當代藝術就是這個樣子嗎?一直看到後面的房間才知道他好厲害,根本就是個祭壇,有很多魔鬼、精靈,然後祭壇最重要的是美國「共濟會」的眼睛圖案。「共濟會」簡而言之是組織各種西方權勢、資本主義金融家的一個宗教團體,看到最後才懂他是在批判美國現代的資本主義問題。
 
我們今天的討論可以發現,一路下來我們真的看到台灣在面對當代藝術、行為藝術的時候,是沒有觀點和方法可循的,因為我們失脈絡,雖然脈絡和藝術史也可以空白化、錯置等,不斷的討論、增加、書寫,但我們能不能從年輕的一代開始嘗試少用歐洲那套理論來解決我們的問題?理論當然還是要懂的,我自己也認為有絕對的必要去了解,可是若不會用還是少用為妙吧!否則書寫都會是非常硬。
 
我們需要多觀察自己本身的歷史,從戒嚴到解嚴的歷史過程到底是發生什麼?不是單指國民黨、蔣介石這些政治事件,是民眾的身體/我們的身體,我的生活/我們的生活,包括我們的慾望、價值、許多想像,是不是有被戒嚴、解嚴這些糾纏不清的東西所框住。
 
到現在還有家長希望不要演蠟筆小新、海綿寶寶的卡通,現在都什麼時代了,為什麼要對卡通要求這些?它本身很好、很熱情、很可愛,不是更重要的嗎?因此我說戒嚴沒有離開,此時此刻還是跟著我們,來看我們現在的美學或審美經驗什麼的,都跟戒嚴沒有戒乾凈有關係的。
 
提問四:我想請問一下王墨林老師,您剛剛有提到八零年代那種身體的動能,到了現在21世紀的第二個十年,因為網路的關係這種動能有沒有被改變或被影響?
 
提問五:我剛剛聽的感覺是,藝術其實有一點反權威的感覺,想要提供給大眾更多重的思維方式,例如以劇場來說,現在台北有很多戲劇節、兒童藝術節,這些特別活動中的劇場表演,在一個正規的空間中演出,或是說,它試圖在一個非正規的空間中,強調這不是一個非正規的表演,某種程度而言,也算是一非常權威的方式。
我想知道藝術要如何透過一個非權威的方式來傳達其可辯論性?如何在我們像要試圖讓普羅大眾知道藝術是什麼的同時,去避免藝術這種型態的霸凌?
 
王:什麼叫做藝術的解放?這個問題問的很奇怪,整個社會的主流價值都在台新藝術獎那兒,拿出150萬來就把整個美學或審美經驗大收編,鼓勵前衛沒錯,但前衛又不是這樣被鼓勵的,又派了一堆寫手寫評,整個就是自己爽。想想台新獎、再觀察你生活周圍捷運、餐廳所到之處都會看到有人在划來划去,當代性的身體動能到底在哪裡?你們都是學藝術或都想學藝術,怎麼不觀察觀察四週「環境」是什麼?
 
藝術需不需要有個「異議」被創造?我們的藝術需不需要對立化?藝術演變至今大家都要搞前衛,可是卻都軟趴趴,給你個150萬就解決問題了,那我們做了三十幾年的什麼獎都沒有,那是怎樣?對!我們很爛、是失敗者!但卻是驕傲的失敗者!
 
●陳:開一下玩笑,台新應頒終身成就獎給你。(一笑)
 
●王:會啦,等我死了之後(大笑)。總之得去想一想,藝術跟這個社會的實際環境與現況有什麼關係。
 
●陳:我覺得剛剛的問題很好,也就是如何避免藝術成為另一種權威姿態,藝術家並不是啟蒙者,而只是試著以感性方式打開多重辯證空間的人。就像行為藝術家,大都具有一種業餘性,關鍵是這種業餘性,是不是能激發觀者的能動力,我的意思是:我們不要把自己只當作觀眾或受眾,而應該視自己就是一個有創造性的能動者。行為藝術的非專業化與業餘性,至少給我們一種具激勵性的態度,也就是當人想去表達他的個人感性時,不一定要擁有專業藝術家的技能才能夠發聲,有時只需一些簡單的方法,同樣可以生產某種另人動容的創作。
 
從當年作行為藝術時,我就不覺得藝術家這個身分有什麼特殊性,反而覺得這是每個人都可以做的事,包括我現在拍片的想像之一,都希望能打破某種專業邏輯,如果我們要談廣義的去殖民現代性,那麼打破某種專業邏輯,顯然是泛行為藝術可以做出貢獻的工作之一。
 
●吳:這兩位在1980、1990年代活躍至今的藝術家,在當時開啟以身體作為藝術表現媒介的一種新想像與可能。那個年代我們在講身體解嚴,其實很重要的開啟了台灣在90年代有關身體政治的議題討論,台灣的女性藝術在那時也開始有了比較多的聲音,同志議題接續其後,可見由行為藝術所開啟對於身體和公共空間的想像,都使藝術的發展更為活潑及多元,例如後來可以看到很多藝術跑到非典型的藝術空間中,我想跟整體的發展是有關的。
 
回到剛剛所談,今天好像解嚴了,但我們的身體是否真的也已解嚴?我想可以留給大家再繼續思考。在剛剛的提問中某種程度似乎又提出:行為藝術在1980、1990年代,其實是去創造公共空間,是一個走在前面的公民運動,可是今天在談行為藝術的時候,變得好像是藝術史中的某種藝術類型,我想這個差異是非常大的,也是剛剛幾個問題試圖去帶出的一些討論,這部分可以留著讓大家繼續思考。

(文字整理│蔡旻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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插隊의 번역

문혁 시기 혁명위원회 건설을 통해 삼결합의 지시가 내려오면서 기존의 대립구도는 강제적으로 정리된다. 그 가운데 학생 조반파 조직들을 처리하는 방편으로 제시되었던 것이 '上山下鄉'이었다. 시골의 생산대로 보내서 현장 체험을 통해 노동자 농민으로부터 배우라는 것이었다.

 

중국어에서는 이를 "插隊"로 표현해왔는데, 말 뜻대로 본래의 노동자 농민 생산대에 외부에서 끼어들듯이 참여한다는 뜻이다. 이 말은 보통 '생산대 참여' 정도로 번역되었던 것 같다. 다소 풀어서 번역한 셈인데, 오늘 문득 이를 '현장행' 또는 '현장 참여' 등으로 번역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우리말의 맥락과는 다소 다르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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