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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과 남한의 상호참조

역사적으로 두 가지 비대칭성이 확인된다.

 

1) 북조선과 중국이라는 맞은 편과의 분단의 차별성. 이는 대만이 내전 이전에 분단되고, 내전의 외부에서 내전이 불완전하게 종료되면서 분단이 고착화되었다는 역사적 사실, 그리고 남한이 내전의 내부에서 그것이 불완전하게 종료되면서 분단으로 고착화되었다는 역사적 사실 사이의 비대칭성과 결합되어 복잡화된다. 이는 남한에서 사상적 단절이 대만에 비해 훨씬 심각했으며, 회복이 더욱 곤란했음을 말해준다. 

 

2) 식민성의 차별성. 이는 대만이 청일 전쟁의 결과로 할양되었다는 점에서 대만 사회의 측면에서 볼 때, 수동적으로 식민지화되었다는 점, 한편 조선이 불평등 조약으로 인해 식민화되었으며, 조선의 역사적 전통이 왜곡을 거쳐 남한으로 일정하게 계승되었다는 점 사이에서 발견되는 차이라 할 수 있다. 특히 조선-남한의 계열은 식민성에 대한 전통적 사회의 저항이 일정하게 계승된다는 점을 보여주고, 특히 조선으로부터 내려오는 '문'의 정치원리가 일정하게 유제로 남한에서도 작동한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남한의 지식계급이 보여주는 제한적인 헌신성은 이와 관련된다.

 

이와 같은 비대칭성을 고려할 때, 진영진이 가진 독특성은 다시 주목된다. 분단 하에서도 2)와 같은 한계에도 불구하고 1)이 갖는 당대적 현실성 및 진영진의 투옥과 옥중에서의 역사적 계승성의 재확인 및 복원 등으로 인해, 진영진은 제한적으로나마 사상적 단절을 극복하게 된다. 그래서 사상가이자 문학가로서의 진영진이 탄생할 수 있었던 것이다. 진영진이 출옥 후에 '문화' 운동을 제창한 것은 그가 당장 변혁 역량이 부재한 상황을 냉철하게 인식했음을 보여주고, 그로 인해서 '주체성'의 회복이 더욱 우선된다는 점을 자각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봤을 때, (아직 매우 가설적이지만) 남한의 경우 분단 하에서의 내전과 북조선과의 대결 및 냉전 반공체제 하에서 사상적 단절이 극복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1)의 제약이 한편으로는 반공주의의 강화 다른 한편으로는 북조선으로부터의 좌익적 이탈을 낳아 사상적으로 표류하는 상황이 지배적이었던 상황으로 전개된다. 

 

따라서 대만에서 민중/민족문학이 진영진에 의해 '향토문학'으로 제창되었고, 남한에서 70년대에 민족문학이 복원되었다고 하더라도, 이를 같은 차원에서 비교하기 어렵다는 문제에 직면한다. 남한의 경우 민족문학은 복원된 적이 없었다고 보이는데, 이는 민족문학이 복원되기 위한 전제로서의 사상적 복원이 이뤄진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 형식적 표현이 바로 사상가와 문학가의 분리라 할 수 있고, 문학의 측면에서 보면 작가와 평론가의 분리라 할 수 있다. 결과적으로 보면 남한의 당대 역사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민족문학' 자체의 성립이 불가능한 조건이지 않았는가 하는 질문을 던질 수 밖에 없다.

 

그런데 매우 역설적인 것은 진영진이 80년대에 스스로 '사상의 결핍'을 자각하면서, '남한'을 방문하고 '남한'의 변혁세력에 대해 커다란 경외감을 가졌다는 점인데, 이는 사실상 모종의 '과대평가'라 할 수 있고, 이와 관련해서 박현채가 늘 민중의 주체적 역량의 관점에서 민중과 유리된 지식계급의 급진화에 대해 경계했던 것과 크게 대조된다는 점은 특기할 만하다. 게다가 진영진은 박현채의 '민족경제론'을 원용하기도 했다. 이는 역설적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박현채는 또한 주목되어야 한다. 7-80년대 남한은 '문학'의 시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물론 지금 시점에서 보면 남한과 대만 모두 '당대'의 냉전 역사를 내재적으로 사상화하는 작업에 실패했다고 보이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만의 경우 진영진의 작업이 문학적으로나 사상적으로 남아 있고, 이를 계승하고자 하는 노력들이 진광흥 선생등에 의해 축적되고 있는 반면, 남한의 경우 그나마 이를 부분적으로나마 인식했던 박현채와 같은 이의 사상작업은 묻혀있는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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