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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현채

전리군 선생은 그 수많은 역경 속에서 늘 노신을 참조점으로 삼아 살아왔다고 했다. 늘 노신으로 돌아가 당면한 과제를 사유할 근거를 찾아 재전유했던 것이다. 나에게는 박현채가 그렇게 되어가고 있다. 사유가 막히는 지점에서 나는 늘 박현채 전집을 뒤적이게 된다. 오늘 '분단'의 문제를 고민하다가 다시 박현채 선생님의 글을 읽어보았다. 아울러 '지식'의 문제에 대한 그의 사유도 다시 참조하게 된다.

 

진정 그는 남한의 모택동이라 할 수 있겠다. 냉전과 분단이라는 남한의 현실에서 모택동을 부여잡고 부단히 사상적 실천을 해온 그였다. 리영희 선생에게 노신이 있었다면 박현채 선생에게는 모택동이 있었던 셈이다.

 

1989년 1월 <사회와사상>에 실린 <변혁시대의 지식인과 역사의식>이라는 글의 일부이다. 첫 단락은 나의 자격고사 2의 제사로 인용하기도 했던 부분이다. '민주화'와 '관념적 지식인'의 형성이 같은 과정의 다른 표현이었음을 지적하고 있다. 박현채 선생은 '민주주의'를 중요한 실천 과제로 설정했으나 그것이 민중적이고 민족적인 관련을 가짐을 전제했던 것이고, 그렇지 않은 '민주화'의 한계를 지적한 바 있다.

 

역사에서 지성의 비극은, 시대적으로 주어지는 모순 관계의 복합은 관념의 독자적 발전법칙과 결합하여 다양한 것으로 되면서 시대적 규정 속에서도 관념화한다는 데 있기 때문이다. 사회적 실천과 같이 있지 않는 지나친 관념화와 주관적 순수성에의 자부는 러시아의 경우에서와 같이 '지성의 비극'으로 된다는 것이다.

 

그간 우리 주변에서는 당면한 주요과제와 상관 없는 고도의 이론전개와 논쟁이 제기되어 왔으며 이것을 쟁점으로 하여 상호분열이 누적화함으로써 당면 문제에 대한 힘의 분열이 가속화되어 온 것이 그간의 상황전개이다.

 

우리의 경우 그간의 상황은 단계론적인 인식 없는 자기 헤게모니를 위한 이론의 관념화를 조장한 것이다. 이와 같은 논의의 관념화는 민주화운동 집단의 민중으로부터의 유리를 기초지우는 것으로 되는 것이고 되고 있다. 그뿐 아니라 이런 것들은 관념적인 지식인의 광범한 존재에 의해 더욱 확산되고 있다. 민주화운동의 확산과 일정한 사회적 지반의 확보는 관념적 지식인들로 하여금 민주화운동에 참여케 하는 것으로 되었다. 그리고 이들의 민주화운동에의 참여는 진정한 의미의 사회적 참여 없는 관념적 논의의 누적적 확대재생산의 과정으로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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竹內好에 대한 단상

한국 내부의 죽내호 선생 수용을 전체적으로 가늠해보려고 국내 논문들을 읽고 있는데, 아직 다 읽지는 못했지만, 대강 하나의 주류적 흐름이 드러난다. 간단히 인상비평을 해보면 이렇다. 굳이 실명을 거론하지는 않는다.

 

아마도 그것을 魯迅-竹內好-孫歌로 이어지는 계보로 정리할 수 있을 것 같다. 중요한 건 아마도 손가 선생을 매개로 죽내호와 노신이 새롭게 해석되는 측면인 것 같다. 흥미로운 것은 손가 선생 또한 한국적 맥락을 통해 굴절되어 매개의 역할을 하는 것 같다는 점이다.

 

그래서 아마도 溝口는 거부되거나 생략되는 듯 하다. 그러나 구구 선생은 죽내 선생의 진정한 비판적 계승자라는 내 견해에서 보면 구구 선생을 생략하는 건 자연스럽게 노신, 죽내호, 손가 모두를 편면적으로만 바라보는 후과를 낳는다. 다소 간략하게 말하자면, 구구 선생은 종축을 중심으로 횡축을 연결하는 사유를 발전시키고 실천했는데, 한국에서의 죽내호 논의에는 이런 발전가능성을 내재한 죽내호의 측면, 특히 종축의 측면은 사상되어 버린다. 그러나 죽내호가 강조했던 '독자성', '회심' 등은 모두 이후 구구 선생의 '기체'로 연결되는 단초였음을 부정할 수는 없다. 조심스럽지만, '한국'적 수용은 노신, 죽내호 모두 내가 본 것들과는 매우 다른 '주관'적인 해석들을 하고 있다. 아마도 '한국'의 비주체성으로 인해 노신, 죽내호 모두 탈맥락화되고 탈역사화된 '지식인 담론'으로 전락하는 듯 싶다. 그것은 '지식인'의 담론이면서 '지식인'에 대한 담론으로, 사실 아무리 좋게 해석해도 별 '내용'이 없다. 그래서 그 다음의 과제가 무엇인지도 알 수 없고, 기대하지 못하게 된다.

 

나는 손가 선생에 대해서는 다소 유보적인데(아직 명확히 드러나지는 않고 있지만 가능성으로 남아 있는 구구 선생을 계승하는 측면의 성과가 일본 또는 중국과 관련해서 달성되기를 기대한다), 여하튼 한국적 맥락을 통해 굴절된 손가, 그리고 그로부터 계보를 형성하게 된 죽내호, 노신은 모두 '개체'의 자유의 측면에서의 '방법론적 사상가'로 그친다. 결국 나의 구도에서 보면 세계-개체의 범주 안에 갇혀 있는 셈이다. 그래서 반서구중심주의, 반오리엔탈리즘도 여전히 '反'에 머물러 있다. 실질적 내용이 없다. 그걸 가지고 실질적 내용을 갖는 '국민국가'나 '민족주의'를 비판해도 별 효과가 없는 것은 그런 지식인중심적/자기만족적인 '철학'의 사유가 본래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수용방식은 죽내호 선생이 과감히 '근대의 초극'에서 사상을 구하려고 했던 것들에 비하면 죽내호 선생과는 반대 반향은 아니지만 전혀 다른 방향으로 치닫는 사상실천이라 할 수 있을 듯 하다. 이렇게 해서 죽내호 수용도 한번의 유행이 되었는지 모르겠다. 물론 지식인이 자기가 처한 조건을 이해하는 방식에 따라 그것은 유행이 아닌 것으로 해석될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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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신의 평민문학

노신의 '평민문학론'을 고찰할 필요가 있다. 「혁명 시대의 문학」(1927년 6월 12일 광주 황포군관학교에서 출판한 《黄埔生活》周刊第四期)에서 일단 몇 대목을 발췌번역해둔다.

 

건설을 찬미하는 것은 혁명이 진행된 이후의 영향이고, 그 이후에 어떻게 될 지에 대해서는 아직 알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미루어 짐작하건대, 아마도 평민문학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평민의 세계가 곧 혁명의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중국에는 당연히 평민문학이 없습니다. 세계에도 아직 평민문학은 없습니다. 모든 문학은 노래, 시 등대체적으로 상류사람들 보라고 만든 것입니다. 

 

재료를 목적으로 소설을 짓고 시를 짓는데, 우리는 그것을 평민문학으로 부르지만, 사실 역시나 평민문학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평민은 입을 열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는 별개의 사람이 옆에서 본 평민의 생활입니다. 평민의 입술을 허위로 빌려 말한 것입니다. 우리가 가깝게 보고 있는 문인은 일부는 가난하기도 하지만, 어쨌든 노동자 농민보다 조금 부유하기 때문에 책도 읽을 돈이 있는 것이고, 글도 지을 수 있는 것입니다. 겉보기에 평민이 말한 것 같지만 사실 아닙니다. 이는 진정한 평민 소설이 아닙니다. 요즘 평민이 부른 산과 들의 노래를 채록하는 사람이 있어 이를 평민의 목소리라고 합니다. 보통 사람들이 불렀기 때문이랍니다. 그러나 그들 사이에서는 고서의 영향이 아주 큽니다. ......

 

혁명 시대의 문학이라고 할 수 없고, 평민문학이라고는 더욱 부를 수 없습니다. 지금 문학가는 모두 독서인입니다. 노동자 농민이 해방되지 않으면, 노동자 농민의 사상은 곧 독서인의 사상으로 남아 있고, 노동자 농민이 진정으로 해방되기를 반드시 기다려야 진정한 평민문학이 있게 됩니다. "중국에 이미 평민문학이 있다"고 말하는 이들이 있는데, 사실 이는 옳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실제 전쟁을 하는 분들이고, 혁명의 전사입니다. 저는 지금 여러분이 문학을 대단히 여기지 않는게 좋다고 생각합니다. 문학을 배우는 것은 전쟁에 아무런 이익이 되지 않습니다. 잘 해야 그저 전투의 노래를 지을 수 있을 뿐이거나, 아름답게 써진 경우 전쟁 중의 휴식 시간에 즐겁게 볼 정도는 되겠지요. 

 

당연히 어떤 이들은 문학이 혁명에 대단한 힘을 가진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나는 개인적으로 이에 대해 늘 회의적입니다. 문학은 늘 일종의 여유의 산물입니다. 물론 민족문화를 표현한다는 점은 사실입니다.

 

사람은 대개 자신이 현재 하는 일에 만족하지 않습니다. 나는 그동안 몇 편의 글을 지었을 뿐인데, 스스로 실증이 납니다. 그런데 총을 잡은 여러분들이 문학 이야기를 들으려는군요.

 

나는 말이죠. 당연히 대포 소리를 듣고 싶습니다. 대포 소리가 문학의 소리 보다 훨씬 좋은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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