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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공주의 영화

어제 밤 <변호인>이라는 영화를 봤다. 많은 사람들이 본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겠다 싶어서 그게 궁금해서 봤다. 개인적으로 '노무현'이라는 인물에 대한 평가는 아직 좀 이른 측면이 있다 싶은데, 그 역시 80년대를 제대로 성찰함을 전제로 해야 가능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노무현은 비극적 인물임은 분명한데, 그 비극성을 제대로 풀어낸 이야기는 아직 들어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암튼 영화는 전형적인 '반공주의' 영화이다. 그런 의미에서 '민주화' 프레임에서 한 걸음도 더 나아가지 못했다. 그러니 보는 사람은 나름 보고 싶은 것을 보게 되어서 만족스러울 것이고, 보기 싫은 사람도 마찬가지로 보지 않아도 알만 한 그런 내용인 셈이다. 따라서 하나의 예술적 장르로서의 영화의 비판성의 측면에서 보면 극우적인 영화다. 사실 노골적 반공주의보다 이런 영화가 현실에서는 더욱 효과적인 셈이다.

 

작금 현실의 모순은 '민주화'를 '완성'하지 못한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민주화'라는 설정 자체에 있음을 깨닫는 데는 좀 더 시간이 걸릴지도 모른다. 영화는 그런 의미에서 '완성'을 주문하고 있는 것일텐데, 그것이 어떤 포퓰리즘적 정치의 선전물로 기능하는 지는 명약관화다.

 

사실 억압 속에서 '민주화'로 해소되었던 저항적 측면을 되살리는 것이 중요하다. 나는 '빨갱이가 아닌 양민이다'라는 민주화주의적 '반공주의'를 반복할 것이 아니라... '반공주의'라는 이 산을 넘지 않고는 계속 그 원환을 맴돌 수 밖에 없을 듯 싶다. 사족 같지만, 책 속에서 이론 안에서 넘는 게 아니라 역사 안에서 대중과 함께 넘는 것이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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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튜어트 홀

오늘은 매학기 초 지도교수와 지난 한 학기의 진도를 보고하는 모임을 가졌다. 진 교수와 학생들이 짧게 근래 상황을 공유하고, 간단히 진행상황을 체크하는 정도이지만, 짧은 이야기 속에서도 여러 상황의 변화들이 감지된다. 암튼 짧게 진도 보고를 했고, 논문 구상에 대해서도 간단히 이야기했으며, 9월 경에 논문계획서를 제출하라는 언질을 받았다.

진도 보고가 끝나고 나서는 연구소 차원에서 스튜어트 홀의 죽음을 추도하는 작은 활동이 있었다. 나름 30여년 전부터 긴밀한 관계를 유지해 왔던 진 교수로서는 각별한 느낌이었던 것으로 보인다.(진 교수의 스튜어트 홀과의 인터뷰는 Morley, David and Chen, Kuan-Hsing (eds) (1996) Stuart Hall: Critical Dialogues in Cultural Studies, Routledge.에 수록되어 있다)  먼저 The Stuart Hall Project (UK 2013 directed by John Akomfrah,103 min)라는 다큐멘터리를 같이 보았고, 그 전후로 진 교수의 소개와 회고 등이 이어졌다. 다큐는 아주 예쁘게 만들어진 느낌이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Miles Davis의 재즈로 배경 음악을 깔았다.
 
진 교수는 심지어 스튜어트 홀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이 길을 걷지 않았을 것 같다는 소회를 밝히기도 했다. 그러나 진 교수의 강조점은 나에게는 두 지점에 있었던 것으로 느껴졌다. 첫째는 스튜어트 홀이 전적으로 '영국'이라는 지역local적 맥락에 충실한 작업을 진행했으며, 그것이 바탕이 되어 나름의 세계적 영향력을 가질 수 있었다는 점이다. 둘째는 그가 가진 일종의 인격(personality)이 '문화연구'를 비롯해 상당히 광범위한 영역에서 새로운 지식과 사상의 흐름을 창출해냈다는 것이다. 대략 십 여명의 제자의 이름을 칠판에 적으면서 그들이 모두 스튜어트 홀의 영향 하에서 기존의 학문체제와 과감히 단절하여 새로운 분야를 개척했고, 그러한 자장 하에서 우리와 같은 '문화연구'의 타이틀 아래 공부하고 연구하는 학술적 공간도 만들어질 수 있었던 것인데, 스튜어트 홀과 그의 제자들의 관계는 기존의 사제지간과는 많이 달랐다고 한다. 아마도 모종의 특별한 인격 덕분이라고 진 교수는 해석했고, 자기 자신의 개인적인 경험도 들려줬다. 아울러 오래전부터 구상했지만 실행에 옮기지 못한 스튜어트 홀을 주제로 한 수업을 퇴임 이전에 꼭 한번 열겠다는 약속도 했다.
 
박사 초기에 수업 중에 홀 선생의 글을 몇 편 읽어본 적은 있지만, 이미 기억에서 가물가물하고, 그 후로도 나의 고민은 '문화연구'를 넘어서 있었기 때문에, 홀 선생의 죽음이 그다지 각별한 느낌으로 다가오지는 않았다. 그러나 진 교수가 말하듯이 지금 우리가 있는 이 공간 자체를 홀 선생의 문화연구, 나아가 <신좌익평론>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은 확실하다. 당분간 우리 사상 내부에서 이러한 흐름들이 제 자리를 잡을 수 있을 지는 매우 비관적이지만, 그 자리를 비워두는 여유는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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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인의 조건

그렇다. 인간학적으로 일정한 임무를 감당할 수 밖에 없는 지식인이 역사의 내부에서 현실에 내재적이기 위해서는 결국 '민족적인 것'에 대한 해명을 바탕으로 '민중'의 편에 서는 수 밖에 없다. '민족적인 것'이 '민중'의 조건이기 때문이다. 이는 '민족적인 것'을 거부하는 탈역사화된 보편주의적 지식에 대해 비판적 거리를 취한다. 나아가 겉으로는 '민중'에 편에 서서 투쟁하지만 결국 똑같이 탈역사화된 보편주의적 좌익 '이론'으로 무장하여 사실상 '민중'을 추수하는 '운동'론적 지식과도 갈등적일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이는 또한 '민중'의 구체적 삶을 기본적으로 긍정하여, 그 내재적 모순을 '민족적인 것' 안에서 해결하는 방향을 제시한다. 여기에서 어렴풋이 '민중'의 자유자재로운 삶에 대한 긍정과 지식인의 적절한 비판성의 강조가 결합되면서, '민중'과 '지식인'이 동시에 '윤리'적 삶을 구현하는 길이 어렴풋이 열리는 것 같다. 이는 '지식인'과 '민중'의 관계가 폭력적이지 않으면서, 동시에 '민중' 내부에서의 폭력이 제어되는 기제에 대한 사고를 말한다.

 

아마도 이런 이야기들은 '결론'일 듯 싶다. 이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 아주 많은 이야기를 먼저 해야 한다. 아마 그래서 이와 같은 '결론'도 언어와 담론이 되고, '전달'이 되지 않을까 싶다. 진정한 소통을 이끌어낸다는 일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간만에 지도교수를 만나러 가면서 문득 다시 한번 점검해보고 싶어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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