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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매학기 초 지도교수와 지난 한 학기의 진도를 보고하는 모임을 가졌다. 진 교수와 학생들이 짧게 근래 상황을 공유하고, 간단히 진행상황을 체크하는 정도이지만, 짧은 이야기 속에서도 여러 상황의 변화들이 감지된다. 암튼 짧게 진도 보고를 했고, 논문 구상에 대해서도 간단히 이야기했으며, 9월 경에 논문계획서를 제출하라는 언질을 받았다.
진도 보고가 끝나고 나서는 연구소 차원에서 스튜어트 홀의 죽음을 추도하는 작은 활동이 있었다. 나름 30여년 전부터 긴밀한 관계를 유지해 왔던 진 교수로서는 각별한 느낌이었던 것으로 보인다.(진 교수의 스튜어트 홀과의 인터뷰는 Morley, David and Chen, Kuan-Hsing (eds) (1996) Stuart Hall: Critical Dialogues in Cultural Studies, Routledge.에 수록되어 있다) 먼저 The Stuart Hall Project (UK 2013 directed by John Akomfrah,103 min)라는 다큐멘터리를 같이 보았고, 그 전후로 진 교수의 소개와 회고 등이 이어졌다. 다큐는 아주 예쁘게 만들어진 느낌이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Miles Davis의 재즈로 배경 음악을 깔았다.
진 교수는 심지어 스튜어트 홀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이 길을 걷지 않았을 것 같다는 소회를 밝히기도 했다. 그러나 진 교수의 강조점은 나에게는 두 지점에 있었던 것으로 느껴졌다. 첫째는 스튜어트 홀이 전적으로 '영국'이라는 지역local적 맥락에 충실한 작업을 진행했으며, 그것이 바탕이 되어 나름의 세계적 영향력을 가질 수 있었다는 점이다. 둘째는 그가 가진 일종의 인격(personality)이 '문화연구'를 비롯해 상당히 광범위한 영역에서 새로운 지식과 사상의 흐름을 창출해냈다는 것이다. 대략 십 여명의 제자의 이름을 칠판에 적으면서 그들이 모두 스튜어트 홀의 영향 하에서 기존의 학문체제와 과감히 단절하여 새로운 분야를 개척했고, 그러한 자장 하에서 우리와 같은 '문화연구'의 타이틀 아래 공부하고 연구하는 학술적 공간도 만들어질 수 있었던 것인데, 스튜어트 홀과 그의 제자들의 관계는 기존의 사제지간과는 많이 달랐다고 한다. 아마도 모종의 특별한 인격 덕분이라고 진 교수는 해석했고, 자기 자신의 개인적인 경험도 들려줬다. 아울러 오래전부터 구상했지만 실행에 옮기지 못한 스튜어트 홀을 주제로 한 수업을 퇴임 이전에 꼭 한번 열겠다는 약속도 했다.
박사 초기에 수업 중에 홀 선생의 글을 몇 편 읽어본 적은 있지만, 이미 기억에서 가물가물하고, 그 후로도 나의 고민은 '문화연구'를 넘어서 있었기 때문에, 홀 선생의 죽음이 그다지 각별한 느낌으로 다가오지는 않았다. 그러나 진 교수가 말하듯이 지금 우리가 있는 이 공간 자체를 홀 선생의 문화연구, 나아가 <신좌익평론>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은 확실하다. 당분간 우리 사상 내부에서 이러한 흐름들이 제 자리를 잡을 수 있을 지는 매우 비관적이지만, 그 자리를 비워두는 여유는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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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 포스팅 ‘민족과 민중’을 읽고서 이런저런 생각을 했습니다.먼저 민족과 민중의 번역을 생각해 봤습니다. 주지하다시피 동독 시민은 독일통일 과정에서 처음엔 "Wir sind das Volk!"라고 하다가 나중엔 "Wir sind ein Volk!"라고 외쳤습니다. "Wir sind das Volk!"("우리가 주권을 행사하는 인민이다!")에서의 'Volk'는 민중에 가까운 것 같고, "Wir sind ein Volk!"(우리는 한 민족이다.)의 ‘Volk'는 민족으로 쉽게 번역되는 것 같습니다. 요지는 민족과 민중이 중첩되어 있다는 점인데 왜 한국의 좌파에게는 그게 적대적 관계로까지 - 이게 사실이라면 - 발전했는지 궁금하고요.
만약 한국의 ‘민중’개념이 남미의 해방신학이 이야기하는 ‘민중’에 기대고 있다면 잘못 참조한 게 아닌지 하고요. 해방신학의 ‘민중’은 ‘라틴아메리카’라는 [언어적으로 역사적으로 공유하는 구체적인] 틀이 있는데 한국의 ‘민중’은 그런 틀이 없는 게 아닌지. 만약 그런 참조의 틀이 있다면 그게 뭔지 궁금하고요. 혹시 ‘민중’이 참조하는 틀이 “전세계의 프롤레타리아여, 단결하라!”를 막연하게 읽은 결과로서의 틀이 아닌지.
한국 좌파 내에서의 ‘민족과 민중’의 [대립]구도가 ‘읽기의 게으름’에 있지 않나 합니다. “공산주의 선언”의 ‘노동자는 조국이 없다.’에 이어서 ‘전세계의 프롤레타리아여, 단결하라!’만을 읽고서 ‘민족’을 버리는데, 이는 실천적인 투쟁과정에서 'Nation/민족'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는 읽지 않은 것 같습니다. 실천적인 투쟁에서의 ‘Nation’의 중요성은 마르크스에 이어 로자 룩셈부르크의 “사민주의의 위기”에서도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민족/Nation'을 껍데기로 버리는 세력은 세계화될 수밖에 없는 자본주의라는 건 마르크스가 파리꼬뮌을 때려잡기 위해서 치열한 전쟁을 치렀던 프로이센과 프랑스가 쉽게 손잡았다는 분석에서 이미 말했습니다.
좌파의 민족경멸이 자본주의 세력의 민족경멸과 묘하게 겹쳐있는 것 같습니다. 전 이걸 게으름이라고 할 수밖에 없고요. 밀폐된 공부방에서 게으름을 피우지 않고 열심히 공부하면 마르크주의자가 될 수 있겠지만, 여기엔 ‘밀폐의 게으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공부방은 열려있어야 합니다. 이 열림은 원천적으로 ‘민족’을 향해 있지 않나 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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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빼고 민족을 운운하는 건 부질없는 짓이고...관리 메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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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이 부분이 생각나 올립니다.“부족”이란 [지식인이 사용하는 표준어로서의] 한 언어(langue)([예컨대] 프랑스어)를 모르는 무지(méconnaissance)에 있지 않고 어디까지나 내재화된(approprié/[수많은 반복을 통해서 애써] 자기 것으로 만든) [엄마와 아빠의 말인] 언어(langage)를 (크레올어권에서 혹은 프랑스어권에서/en créole ou en français) 구사하지 못하는 비숙련(non-maîtrise)에 있다. [표준어로서의] 프랑스어(la langue française)의 권위주의적이고 위세적인 개입은 이런 부족의 발전을 더욱 강화할 뿐이다.
그래서 이런 내재화된 언어(ce langage approprié)를 [다시 돌려달라는 정당한] 반환청구(revendication)는 프랑스어(la langue française)에 대한 비판적인 재심(révision) 통해서 이루어질 것이다.
이 재심은 아마 [일종의] 반(反)인도주의/인문주의(un anti-humanisme)라고 일컬을 수 있는 것에 기댈( participer) 것이다. 프랑스어에 의한 길들이기가 [보편주의적인] “인도주의/인문주의”(l'« humanisme »)라는 기관(機關)을 수단으로 하여 수행되는 만큼 그렇다는 것이다.
(데리다의 “ Le monolinguisme de l'autre ou la prothèse d'origine”에서 인용된 Edouard Glissant, Le discours antillais, Seul (Paris) 1981, 334 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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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과 '민중'이 '번역'을 거친 것인지, 아니면 일정하게 '대응'된 것인지 조사가 필요할 것 같네요. 만약 단순히 엘리트주의적 '번역'이 아니었다면, 그것은 우리의 역사적 사상 내부에서 일차적인 연원을 찾아볼 수 있을 것 같구요. 물론 그 사상의 지평은 조선 뿐만 아니라 중국과 동아시아라는 그물망에 얽혀 있겠지요. 암튼 그 의미는 식민-냉전이라는 현대화의 역사를 거치며 일정하게 궤적을 그리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제가 아직 정확히 파악하고 있지는 못하구요.제가 주로 문제삼는 것은 80년대의 상황입니다. 그 이전까지는 사실상 냉전 하의 이데올로기적 억압 상황으로 인해 '언어' 자체가 굴절될 수 밖에 없었던 측면이 고려되어야 하겠지만, 80년대의 경우 적어도 좌익 내부에서는 기본적으로 그런 억압이 해소되는 상황이었는데, 오히려 그런 상황이었기 때문에, 다시 말해서 장기간의 억압으로 인한 사상적 단절로 인해서 '민족'이라는 종축과 '민중'이라는 횡축의 변증법적 결합이라는 인식 및 실천 모델이 점차 소멸하고, 양자가 분화되어 각축을 벌이는 상황으로 접어들었고, 그 이후의 상황의 전개는 우리가 보아 온 그대로입니다.
사실은 그 양자의 결합의 조건이 무엇이었는지를 우리의 역사적 맥락 내부에서 밝혀보고자 하는 게 제 개인적인 연구의 방향이기도 하고, 그것의 역사적 계보를 복원함을 통해서 역사의 단절 지점을 다시 잇고 나아가 주체적으로 미래의 역사를 열어갈 출발점이자 자양분을 새롭게 구축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합니다. 박현채에 대한 관심도 그런 고민의 일환이라 할 수 있겠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