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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신의 평민문학

노신의 '평민문학론'을 고찰할 필요가 있다. 「혁명 시대의 문학」(1927년 6월 12일 광주 황포군관학교에서 출판한 《黄埔生活》周刊第四期)에서 일단 몇 대목을 발췌번역해둔다.

 

건설을 찬미하는 것은 혁명이 진행된 이후의 영향이고, 그 이후에 어떻게 될 지에 대해서는 아직 알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미루어 짐작하건대, 아마도 평민문학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평민의 세계가 곧 혁명의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중국에는 당연히 평민문학이 없습니다. 세계에도 아직 평민문학은 없습니다. 모든 문학은 노래, 시 등대체적으로 상류사람들 보라고 만든 것입니다. 

 

재료를 목적으로 소설을 짓고 시를 짓는데, 우리는 그것을 평민문학으로 부르지만, 사실 역시나 평민문학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평민은 입을 열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는 별개의 사람이 옆에서 본 평민의 생활입니다. 평민의 입술을 허위로 빌려 말한 것입니다. 우리가 가깝게 보고 있는 문인은 일부는 가난하기도 하지만, 어쨌든 노동자 농민보다 조금 부유하기 때문에 책도 읽을 돈이 있는 것이고, 글도 지을 수 있는 것입니다. 겉보기에 평민이 말한 것 같지만 사실 아닙니다. 이는 진정한 평민 소설이 아닙니다. 요즘 평민이 부른 산과 들의 노래를 채록하는 사람이 있어 이를 평민의 목소리라고 합니다. 보통 사람들이 불렀기 때문이랍니다. 그러나 그들 사이에서는 고서의 영향이 아주 큽니다. ......

 

혁명 시대의 문학이라고 할 수 없고, 평민문학이라고는 더욱 부를 수 없습니다. 지금 문학가는 모두 독서인입니다. 노동자 농민이 해방되지 않으면, 노동자 농민의 사상은 곧 독서인의 사상으로 남아 있고, 노동자 농민이 진정으로 해방되기를 반드시 기다려야 진정한 평민문학이 있게 됩니다. "중국에 이미 평민문학이 있다"고 말하는 이들이 있는데, 사실 이는 옳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실제 전쟁을 하는 분들이고, 혁명의 전사입니다. 저는 지금 여러분이 문학을 대단히 여기지 않는게 좋다고 생각합니다. 문학을 배우는 것은 전쟁에 아무런 이익이 되지 않습니다. 잘 해야 그저 전투의 노래를 지을 수 있을 뿐이거나, 아름답게 써진 경우 전쟁 중의 휴식 시간에 즐겁게 볼 정도는 되겠지요. 

 

당연히 어떤 이들은 문학이 혁명에 대단한 힘을 가진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나는 개인적으로 이에 대해 늘 회의적입니다. 문학은 늘 일종의 여유의 산물입니다. 물론 민족문화를 표현한다는 점은 사실입니다.

 

사람은 대개 자신이 현재 하는 일에 만족하지 않습니다. 나는 그동안 몇 편의 글을 지었을 뿐인데, 스스로 실증이 납니다. 그런데 총을 잡은 여러분들이 문학 이야기를 들으려는군요.

 

나는 말이죠. 당연히 대포 소리를 듣고 싶습니다. 대포 소리가 문학의 소리 보다 훨씬 좋은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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