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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과목 시험공부 1차 정리

1차 시험을 본격적으로 준비한 지 한 달 조금 넘게 시간이 지났다. 책을 읽다보면 어느 순간 더이상 못 읽게 되는 경우가 있다. 기존에 읽은 것들이 한번 정리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정리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더 읽어봐야 소용없다. 물론 매일 매일 읽을 때마다 나름 노트를 해두긴 하지만, 어느 시점에 이르면 그 노트들이 붕 떠서 날아다닌다. 그것들을 다시 잡아채서 서로의 관계 속의 위치를 잡아주는 작업이 곧 정리인 셈이다. 나의 사고 수준에서는 대략 한달 정도가 알맞은 시간 단위인 듯 싶다.

 

어제부터 정리를 해보려 했지만, 정리가 잘 안 된다. 생각이 감당할 수 없을만큼 확장되어 버린 감도 있다. 그렇다고 중심축이 없는 것은 아닌데, 그 아래의 각 부분들이 각각의 내부 동력으로 확장하는 추세를 강하게 갖고 있어서 축의 구심력에서 이탈하려는 힘이 느껴진다. 그래서 축 자체를 새단장할 필요성까지도 느끼게 된다.

 

레퍼런스를 생략하고 다소 도식화해서 몇 가지 논점들을 정리해보자.


歷史와 倫理 그리고 思想

 

어디서부터 시작할까. 아마도 삶으로부터 시작해야겠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인간은 어떻게 존재하는가. 그리고 왜 불행한가. 어떻게 행복해질 수 있는가? 통계적 오류를 사상하더라도, 출산율이 가장 낮고 자살율이 가장 높은 우리 사회의 절망적 상황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이는 현대성의 모순의 응축지점이 아닌가? 이 현대성을 뒤집어 볼 필요가 있지 않은가? 단순히 뒤집어보는 정도가 아니라 그 자체를 주체적으로 새로 써내려가야 하지 않는가?

 

우선 인간은 주어진 제한된 지식에 근거하여 주어진 자연/인문적 환경에 실천적 작용을 가함으로써 역사 안에서 주체로서 활동한다는 인간학적 전제를 먼저 설정한다. 그러나 그 지식은 존재론적으로 '불평등'하게 되어 있으며, 그럼으로 인해 '지식계급'의 불가결한 존재의미와 모순이 주어진다. 이 모순은 철저히 사고되어야 하지만, 원리적으로 소멸되지 않는다는 독특성을 갖는다. 그래서 우리는 모순을 안고 살면서 그 모순이 긍정적 작용을 할 수 있는 가치/윤리적 관계의 형상을 사고해야 한다. 이는 표면적으로 '지식의 윤리'로 보여지지만, 사실 본질적으로 인간 관계 일반의 윤리성의 형상이기도 하다. 인간 간의 윤리적 관계는 지식의 모순과 밀접한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지식은 폭력/배제를 둘러싸고 그 정당성의 근거가 되기도 하고, 어떤 경우에는 폭력을 초래하는 체제의 모순을 극복/변혁하는 사상 및 실천의 근거가 되기도 한다. 그래서 지식의 구분이 의미가 있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오면, 우선 하나의 명제를 제시할 수 있을 것 같다. '인간은 세계 안에 있으면서 동시에 사회 안에 있다.' 

 

이를 어떻게 인식할 것인가? 세계와 인간 개체를 직접 대면시키는 방식은 보편주의적 사유가 반영된 것이다. 물론 이 안에는 세계로부터 인간 개체를 파악하는 방향과 인간 내부에 대한 사유를 심화하여 세계를 인식하는 방식도 있다. 특히 후자는 '철학'적 사유로 심화되었는데, 나의 고민과 당장 관련 맺기 어려운 '철학자'들이 영역이다. 암튼 구미의 철학은 기본적으로 이러한 사유 방식을 취하고 있다. 그래서 그러한 철학적 사유는 영원히 다다르지 못하는 유토피아적 인간성을 바탕으로 역사를 재단하고, 현실을 왜곡하기 쉽다. 식민-제국주의는 그 전형적 표현이고, 그 역사가 성찰되지 않은 상태에서 전개된 신식민은 이를 피식민지에까지 '보편화'했다. 우리의 지식 상황은 여실히 이를 증명한다.

 

인간이 세계와 사회에 동시에 존재한다는 이 이중성을 파악할 수 있게 해 주는 두 범주가 역사와 현실이다. 그리고 아마도 이를 파악하지 못하게 하는 지적 사조가 '역사주의'와 '현실주의'일 것인데, 물론 보편주의(=특수주의)를 기반으로 한다. 어느 한 쪽으로 환원되어서는 인간 자체가 파악되지 않는다. 양자는 인간을 파악하지 못하게 한다는 점에서 공모적 관계에 있고, 실제로 결합되어 있기도 하다.

 

역사는 진행형이다. 현실은 그 과정의 한 단계이다. 대중은 그 역사와 현실의 주체이다. 이를 동적으로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게 파악할 경우 역사는 기본적으로 세계사를 구성하는 개별적 민족사라는 인식이 도출된다. 세계사에서 민족사를 아래로 바라봐서는 역사를 만들어가는 대중적 주체가 파악될 수 없다. 여기에서 자연스럽게 '사회'와 다른 '민족' 개념이 등장하였다. '민족'은 바로 개체와 세계를 매개하는 개념이다. 따라서 '사회'는 개별 '민족' 내부의 관계구성을 일반적으로 지칭하는 하위범주로 이동한다. 우리는 세계에서 사회를 내려다보거나, 세계에서 개체를 직접적 주체로 내세우는 방식에 익숙하다. 그것이 '민족'이라는 이름을 차용하고 있다고 해도 말이다. 그래서 이를 엄밀히 구분할 필요도 있다.

 

요컨대 '민족'이라는 개념을 통해서 세계사 속의 구성적 주체로서 민족의 개별성과 그러한 역사적 조건을 바탕으로 하는 '민중'의 현실을 새롭게 바라볼 수 있는 시각이 확보될 수 있다. 그래서 우선적으로 우리의 지식담당자들에게 주어지는 책무가 식민-냉전을 거쳐 일반화된 기존의 보편주의적 사유에 근거한 지식방법을 성찰하고, 민족적 개별성에 근거한 윤리적 지식작업과 사회적 관계성을 형성해나가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를 위해서 우선적으로 사상적 자원의 상대화/다원화라는 방법적 전환이 구상된다. 바로 유럽이라는 단일시좌를 상대화하고, 제3세계 특히 아시아를 주목하는 것이다. 이는 유럽적 지식의 상대화에서 주어지는 방법론적 성찰로 인해 비주체적 지식 수용의 방식으로 전락하지 않으며, 동시에 아시아의 개별적 사상들을 자기성찰적으로 참조함을 통해 주체적 개별성을 인식하는 것이기도 하다.

 

아시아를 方法으로

 

이와 같은 맥락에서 식민-냉전-탈냉전의 역사를 거친 아시아의 사상적 상황에 대한 대략적 검토가 필요한데, 나는 일차적으로 동아시아적 맥락에서 이를 살펴본다. 여기에서 주목되는 것은 어떤 특정 사상이라기 보다는 일정한 문제의식이 집중되는 지역으로서 '사상해방의 공간'의 궤적이다. 동아시아에서 기본적으로 식민시기 사상해방의 공간은 중국이었으며, 냉전 시기에는 일본, 탈냉전 시기는 아직 뚜렷하지 않지만 대만(내지 북조선)으로 설정된다. 

 

아마도 앞서 언급한 방법적 전환은 일본-대만으로 이어지는 사상해방 공간에서 진행된 실천으로 간주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를 바탕으로 사실상 중국으로 육박해가야하는데, 아직 초보적인 단계이다. 우선은 이 작업들에 대한 일정한 이해가 필요할 것이다.

 

탈냉전 시기라는 현실과 관련된 사상해방은 현재진행형이기 때문에 직접적 서술이 어렵다. 그래서 냉전에서 식민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성찰적 사고를 취하게 된다. 이 때 우선적으로 일본의 사상적 자원을 참조하게 된다. 거기에서 대표적으로 일본의 竹內好와 溝口雄三의 계보를 참고하게 되고, 이와 대비되는 선에서 丸山眞男을 참고할 수 있다.

 

여기에서 핵심적으로 추출될 수 있는 주제는 다음과 같다.

1) 현대성에 대한 성찰

2) 魯迅과 毛澤東이라는 자원의 활용

3) 思想에의 사고와 윤리

4) 文學의 위치의 재규정

 

이에 대한 논증적 서술이 필요하다. 개체-자유-문학-정치라는 비윤리적 지식순환계열을 밝혀낸다.

 

參照의 含義: 남한의 상황에 비추어

 

이와 같은 일본에서 진행된 식민-제국시기에 대한 성찰적 사유는 조선-남한의 역사 및 사상에 대한 중요한 참조점이 된다. 그러한 맥락에서 동일하게 개체-자유-문학-정치라는 비윤리적 僞思想과 그 실천에 대한 역사적 검토가 필요하다. 이는 모종의 反의 '사상'이라 할 수 있는데, 그렇기 때문에 사상에 값하는 것은 아니다.

 

가설적으로 동학-3.1운동-4.19-5.18로 이어지는 '저항'의 역사를 바탕으로 한 사상 실천의 문제들을 제기해볼 수 있다. 저항을 진정하게 저항으로 대접해주는 것이 사상의 몫이라면, 저항을 거짓 사상에 환원하는 것이 비윤리적 사상실천이라 할 수 있다. 역사적으로 보면 식민성에 해당하는 거짓 사상은 동학을 하나의 탈역사화의 기점으로 삼는다. 거기에는 '봉건'에 대한 부정이라는 탈역사적 거짓 사상이 전제되어 있고, 그런 맥락에서 동학의 진정한 역사내재적 의미는 지금까지도 제대로 파악되지 않는다. 한편 냉전성에 해당하는 거짓 사상이 광주 5.18을 또다른 탈역사화의 기점으로 삼고 있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앞서 식민성의 거짓 사상이 '반봉건'이었다면, 여기에서는 '반독재'로 주어진다. 그래서 광주는 '민주화'로 탈역사화된다. 거기에서 '계급'을 본다 해도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反이 사상으로 값할 수 없는 구체적 사상실천의 사례이다.

 

아마 이를 '문학'을 매개로 좀더 구체적으로 짚어볼 수 있는 사례가 아마도 민족-민중 문학론일 것이다. 리얼리즘론을 비롯하여 그것이 어떻게 본질에서 현대성의 논리를 따르고 있는지 앞서 제시한 노신의 문학관에 비추어 비판도 가능할 것이다. 또한 그것이 어떻게 정치와 관련맺는지도 파악될 수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민족-민중문학론은 어떻게 분단체제-동아시아론으로 전개되는지 맥락을 충분히 이해하게 될 것이다. 사실 그 내부의 분기처럼 보이는 '민중주의'는 민족민중문학 및 관련한 문학평론 그 전반이 공유하는 것이다. 박현채가 대표하는 민족민중론의 독자성은 여기에서 강하게 제기될 수 있다. 

 

朝鮮의 개별성

 

이러한 성찰이 전제된다는 가정 하에서 다소 실험적 사고를 시작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조선-남한의 역사적 개별성이다. 그것은 일본과 대비되는 '文의 정치'인데, 이를 하나의 '방법'으로 삼아 역사를 재해석해볼 수 있을 것이다. 조선의 유가적 질서는 고려의 귀족적 질서와 이념적으로 차별성을 가지며, 나아가 대중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차별성을 가진다. 이는 사대부의 귀족화를 방지하며 동시에 민중의 주체화가 가능한 장치기이도 하다. 여기에서 명말청초의 중국적 근대(溝口)와의 횡적 참조 상황을 북학/실학과 관련하여 검토할 필요도 있다.

 

그것이 복벽의 가능성 내지 붕괴의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 자체로 내재적 전개의 추세 또한 확인된다. 특히 한글 창제로 주어지는 한자-한글 시스템은 그것이 갖는 이중적 의미, 즉 반엘리트주의-반포퓰리즘의 가능성으로서의 의미를 상징적으로 표현한다. 이러한 내재적 전개는 조선 말기 외부적 개입으로 왜곡된다. 아울러 지식(계급)의 성격 변화도 진행된다. 

 

이는 북조선의 냉전 하에서 역사적 전개와 굴절을 새롭게 해석할 수 있는 시좌이기도 하다. 특히 북조선은 '냉전'의 한 축이면서도 그 주변성으로 인해 일정한 주체성을 확보했고, 그로 인해 식민적 현대성이 전면화되기 보다는 '전통'의 일정한 복원을 예상할 수 있다. 한편 이를 대만과의 상호 참조로 확장하는 시야의 개척이 필요하다. 궁극적으로 대만적인 '현대성'을 사유해볼 수도 있다.

 

 

유토피아적 계기로서 중국의 혁명 이후

 

아울러 우리에게는 개별적 역사에 근거한 미래의 유토피아 구성의 계기로서 중국이라는 참조점이 제시될 수 있는데, 그런 맥락에서 錢理群의 작업은 여전히 참조가치가 크다. 거기에서 그가 여전히 생활인으로서의 직접생산자인 대중의 조건 변화를 사회사적 측면에서 혁명 이후의 역사 전개의 전제로 삼으면서도 지식인으로서 문학을 특권화하지 않으면서 노신의 방식으로 겸허하게 내재화하고 있다는 점에서 사상적 면모를 파악할 수 있다. 노신은 문학을 여유의 산물이라고 했는데, 근래에 주목하고 있는 작가 조정로는 자신을 부업 작가로 규정하고 있다. 그래서 특히 노신의 잡문은 反문학의 문학이라는 역설적 존재이기도 하다. 이는 그가 비판하는 문학이 反의 거짓 사상으로 무장한 것에 대비된다.

 

우선 오늘은 여기까지 일차적으로 정리해둔다. 한달 후 다시 한번 정리를 하고, 전체적으로 레퍼런스를 보충하면 시험을 치를 수 있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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