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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큐

오랜만에 '문화연구'라 포장된 창백한 이론과 지식의 '향연'을 접하면서, 거의 20년 전 시간과 단절 없이 닿아 있는 지식 작업의 왜곡된 양상을 잠시 고민해보았다. 마침 남북 관계가 돌출되어 이를 고민할 또다른 지평을 열어주었던 듯 하다.

 

그 양상을 구성하는 핵심 원리는 익숙하게도 엘리트주의와 포퓰리즘의 동일성이었다. 그러한 지식 작업은 궁극에는 대중을 지식에서 배제하는 효과에 복무하기 때문에 그 모순을 조금은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게다가 우리 세대 '지식인'들에게는 사실상 조금 뼈아픈 것이기도 하다.

 

기본적으로는 '사람'과 '세계'에 대한 이해의 문제에서 비롯된다. 그들이 갖는 '철학'적이고 '보편'적인 인식 안에 존재하는 '사람'은 사실 사람이 아니다. '세계' 또한 세계가 아니다. 이유는 그 안에서 사람은 자유를 갖지 않고, 세계는 멈춰있기 때문이다. 개체와 세계를 맞대면시키는 그들의 논의 속에서 사람은 차이를 갖지 않고, 따라서 자유로울 수 없는 무차별화된 개체이다. 물론 사람을 이러한 개체로 다룰 수 있는 전제가 바로 개체와 세계 사이의 매개를 무화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무화된 개체에 대해서도, 또는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그 비참함을 동정하고자 한다. 차별을 규탄하고 시정하고자 한다. 온갖 '진보'적인 현학과 수사학이 난무한다. 그 내부에 존재할 법한 현실 비판성에 관한 논의는 내파의 계기이기는 하지만 가능성은 매우 낮아보인다.

 

그래서 그들의 눈에는 '조중동'이라 불리는 보수언론, 또는 새누리당과 같은 우익정당, 나아가 그들에의 핵심 지지층으로서의 우익 대중들의 인식이 '기괴'하게만 느껴진다. 그러나 그들은 현실에서 한번도 이겨본 적이 없다. 그렇지만 늘 그들을 무시한다. 이기지 못하면서 무시하는 아큐들, 그 창백한 이론과 지식은 여전히 횡행하고 있다. 

 

남북관계의 위기 속에서 난무하는 수많은 북에 대한 '무시'의 담론들과 이 담론의 주체들을 무시하는 위와 같은 '진보'적 지식 담론은 참으로 닮았다. 그 가상성이 너무 닮았고, 또 자기 확신 또한 그토록 닮았다. 물론 보시다시피, 정세에서 보수 우익의 '무시' 담론은 정세라 칭할 만한 힘의 균형을 거의 정확히 인식하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현실적이다. 그에 반해 '진보'의 무시 담론은 대상이 존재하지 않는 비현실적 담론일 뿐이다. 오히려 '진보'의 무시 담론은 현실성의 차원에서 보면 보수 우익의 '무시' 담론과 일체화되는 경향을 보이기 까지 한다. 그래서 그나마 남아 있는 가능성으로서의 현실적 진보 담론은 가상적 진보 담론에 의해 구축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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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820

민주와 평등의 시도는 분열을 위한 것이 아니다. 그런데 그 시도가 계속해서 분열을 낳고, 조직의 파편화와 왜소화를 초래한다면, 나아가 분열 과정 속에서 소통불가능이 심화된다면, 그 시도는 민주와 평등의 이름을 달고 있지만 사실상 反민주적이고 反평등적이게 된다. 원인은 세계와 개체를 맞대면시키는 개인주의/자유주의적인 세계상世界像에서 진정한 민주와 평등은 실현될 수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그러한 세계상에서 민주라는 주체성의 원리는 실현되지 않고, 평등이라는 관계성의 원리(자유를 가능하게 하는 차이를 존재하게 하는 종축으로서의 역사성)도 불가능해진다. 민주와 평등은 다원적으로 정의된 '민족'적 지휘 체계하에서만 실질적 의미를 가질 수 있다. 그렇지 않은 민주와 평등의 시도들이 그 '동기'의 순수성으로 정당성을 주장한다면 그것은 반윤리적인 실천이 된다. 그 원인은 물론 탈역사성에 있다.

 

지금과 같은 사상적 구심이 부재한 시대에는 '민족'적 지휘 체계가 분명히 드러난 사상적/운동적 실천을 만나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탈권위와 수평적 민주의 가치만으로 전선을 형성하고 세력을 결집시키는 경우는 흔치 않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보이지 않는 것이 부재를 의미하지는 않을 것이다.

 

사상 부재의 시대는 보이지 않지만 역사적 계승성을 갖는 그 실천을 보아낼 것을 요청한다. 이른바 '면면히' 계승되는 민간의 민중적이고 역사적인 실천에서 다시 사상적 구심을 형성하는 방향성을 찾아야할 것이다.

 

존재하지만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능력은 어디에서 주어지는가? 윤리가 미(학)적 사유와 연결되는 것은 이 질문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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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816

조심스럽다.

내가 뭐라고 아무도 기억하지 않고 넘어가는 오늘을 기어이 기억해내는가.

아니, 기억할 뿐만 아니라 글씨로 남기는가.

기실 적지 않은 사람들 또한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그저 이제 더이상 어찌 기념해야 하는지 막막한 느낌일 것이다.

그러리라 믿고 싶다.

설마 망각의 대상으로 여기지는 않겠지...

 

20년전 오늘은 박현채 선생이 가시기 전 마지막 날이다. 내가 왜 그를 기억하는가.

 

아마 그의 삶과 글이 자아내는 그리움과 회한 때문일 것이다.

그 누구의 말처럼 '창백한 지식인들'이 박현채들을 밀어낸 적이 있었다.

그리하여 사상과 이론의 '과잉' 속 부재의 시대가 도래했었다. 

더이상 우리는 스승을 가질 수 없었다.

아니, 이제야 스승을 가질 수 없었음을 알게 되었다.

 

그 뿐인가?

박현채들이 밀려났을 때, 창백한 지식이 횡행했을 때,

함께 밀려난 이들은 민중이었다.

역사가 없는 지식은 그토록 무책임했던 것이다.

민족적인 것은 그래서 민중적인 것이라고 박현채는 강조했던 것이다.

 

역사가 없는 이야기는 감동이 없다.

거기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관념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관념은 주체를 만들어내지 못한다.

나는 박현채의 글을 통해 내가 역사 없이 현실만으로 세상을 바라봤음을 반성했다.

현실주의였으나, 역사가 없었으니 관념주의였던 것이다.

그렇게 스승을 만난 것이다. 그제서야...

 

앎은 곧 실천이고, 실천은 곧 앎이다.

'민족적인 것이 민중적인 것이고, 민중적인 것이 민족적인 것'이라는 말은 이렇게 번안된다.

따라서 실천의 구체적 힘을 사유하지 않는 앎은 진정한 앎이 아니다.

그러나 그런 허위의 앎은 곧 식민지적 지식체제가 원하는 것일테다.

게다가 역사적 앎을 부정하는 현실주의적 실천은 진정한 실천이 아니다.

그러한 실천은 궁극적으로 민중에게 있어서 자기 파괴적이다.

 

그렇게 투철한 앎과 실천의 변증법적 통일을 사유했지만,

박현채 선생은 이미 망각되었거나, 거의 망각될 위험에 처해 있다.

'창백한' 지성의 비극을 미리 인식하고 예언했지만,

그 자신의 비극은 어떻게 설명되어야 하나?

 

그의 말이 전달되지 않았듯이, 지금 나의 말도 전달되지 않을까?

그의 말은 내게 전달되는가?

그의 이름을 불러 본다.

그의 혼을 불러 본다.

 

막다른 길이었습니까?

 

나는 당신이 그 길에 어떻게 걸어 도달했는지 먼저 조사해보고자 합니다.

당신의 혼과 함께의 역사 속 희생당한 민중의 혼을 불러내어 다 같이 굿판을 벌이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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